Chapter 10. 별이 빛나는 밤에
언제부터 이리 별이 많았나.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그녀에게로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아름다워요.”
그런 별밤을 등지고, 그가 하나둘 옷을 벗었다. 그의 넓은 어깨 너머 보이는 밤하늘에 시선을 빼앗길 새 없이 그녀는 그의 나신에 숨을 삼켰다.
“내가?”
“지금 모든 것이.”
그는 부끄러움과 열기에 촉촉해진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아름답다는 말은 지금의 그녀를 두고 해야 할 말이다.
달빛 아래 하얀 침대 시트 위로 붉은 머리가 흐드러지고, 아름다운 곡선의 뽀얀 피부가 달콤한 향기를 품었다.
“맞는 말이야. 모든 것이 아름다워.”
그는 그녀의 가는 손목을 들어 올려 짧은 키스를 남겼다.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 느껴지는 따뜻한 눈길. 그녀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거대한 산과도 같고 넓은 바다와도 같은 이 남자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아.”
그에 의해 길들여진 그녀의 가슴은 그의 손안에 쏙 들어갔다. 언제나 차디찬 그의 손이 그녀의 뜨거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움찔거렸지만, 그 반응은 비단 온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정하고 덤벼든, 그의 능숙한 애무에 그녀는 금세 함락당해 갔다.
“아. 응…….”
그래서 처음 들어 보는 야한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진한 키스를 느낄 새도 없이, 더 큰 자극이 계속 몰려왔다.
그의 손이 부드러운 그녀의 가슴을 가지고 멋대로 장난을 칠 때도, 예고도 없이 단단해진 정점을 비틀 때도, 그리고 점점 내려가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 때도 그의 키스는 쉬지 않았다. 집요하리만치 길고 깊게 그녀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하아.”
“안 돼. 벌써 쉬는 건.”
“읏!”
반사적으로 오므리려는 그녀의 다리를 그는 능숙하게 열었다. 이미 정성들인 그의 애무로 촉촉이 물이 올라 그의 손가락이 입구를 파고드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아무리 그의 손이 처음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그녀의 길은 빡빡했고, 그녀의 반응은 격했다. 바로 허리를 들어, 뒤로 몸을 빼려는 그녀를 그는 놔주지 않았다.
“도망가는 것도 안 돼.”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고, 그의 손가락은 더 깊숙이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좁고 뜨거운, 그렇지만 그를 반기듯 미끄러지는 그곳은 이미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끝났다. 그래서 그의 손가락이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야릇한 물소리가 울렸다.
“아!”
높은 교성과 함께 짜릿한 무언가가 순간 지나가고, 그녀의 몸에서 완전히 힘이 풀려 버렸다.
적응되지 않는, 이 부끄러움에 로엘은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정작 로엘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그런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눈물 맺힌 눈가에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예쁘네.”
“……억울해.”
“뭐가?”
“나만 너무 여유 없잖아요.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지는 싸움을 하는 기분이야.”
전혀 예상치 못한 토라짐에 그는 웃고 말았다. 그와 한 침대에 누워 그의 밑에 있으면서, 애무라곤 모르는 그에게 온갖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와중에 지는 기분이라니. 한껏 오른 분위기를 식혀 주는 그녀의 투정에 그는 잠시 상체를 들었다.
“누가 누구한테 진다는 건지.”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안아 들어 앉히고는 마주 보게 만들었다.
누워 있을 때랑 새삼스럽게 뭐가 다른지, 그녀는 급하게 손에 잡히는 시트를 끌어올려 가슴을 가렸다. 그 모든 모습이 어리고, 순수했다. 그래서 뭔가 죄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이 여자를 안는 것이.
그는 그녀를 안은 허리를 좀 더 당겼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경험 없다고 놀리는 거예요?”
“있었다면 피바람이 불었겠지. 너의 손끝 하나라도 건든 모든 남자에게.”
절대 농이 아닌, 진심 가득한 말이라 로엘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독점욕 하나는 세상 제일인 남자다.
그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자신을 빤히 보는 그녀에게 한숨을 삼키며, 그녀의 손을 올려 그의 왼쪽 가슴에 얹었다.
“아…….”
쿵쿵쿵.
그녀만큼이나 쉴 새 없이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박동이 그녀의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언제나처럼 여유롭던, 그녀를 만질 때마다 짓는 이 짓궂은 표정은 그대로인데 그의 심장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나도 여유롭지 않아.”
그녀의 시선에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너로 인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한 번도 여유로운 적 없어.”
늘 애가 탔다고. 언제나 미친 듯이 참고 또 참았다고.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그만큼이나 내가 너를 원한다고.
“로엘. 내가 계속해도 될까?”
누가 그랬나. 이 남자가 피도 눈물도 없는, 얼음 같은 사람이라고.
로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로엘은 손을 뻗어 그의 양 볼을 감쌌다. 그리고 가볍게 쉴 새 없이 입 맞추던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언제나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이 눈에 붉은 그녀가 가득 찼다.
“토르티아에서는 이성이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연인임을 의미해요. 그래서 당신께서 제 이름을 처음 부르실 때 저는 제법 놀랐습니다. 당신이 부르는 제 이름이 너무도 낯설지 않아서.”
사근사근 말하는 기분 좋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가 보여 준 진심만큼, 그녀 역시 그에게 꽁꽁 숨겨 왔던 그녀의 진심을 보였다.
알아채기까지, 그리고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렸던 바로 그 마음.
“너무 좋아서. 너무 설레서. 너무너무 기뻐서. 그렇게 느끼는 제 자신이 신기해서, 그래서 놀랐어요.”
로엘은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서로의 숨결이 닿는 그 거리에서 로엘은 그에게 속삭였다.
“나의 폐하. 나의 황제. 나의 에단.”
그에게도 너무 낯설었던 그의 이름. 그런데 이리도 낯설지 않다니.
에단의 입가에도 진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말한 그 기분이 무언인지 알 것만 같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미 저의 모든 것은 당신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사랑해 주세요.”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리도 사랑스러운 것을.
에단은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며 진한 키스를 남겼다. 단 한 숨도 내어 주지 않겠다는 듯, 깊고 진하게 그녀를 탐했다.
살며시 그녀를 다시 눕히고,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한쪽 발목을 잡아, 가는 다리를 열었다.
“날 봐.”
몰려오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자연히 고개가 돌아갔다. 그런 그녀의 턱을 잡아 다시 돌리며, 그는 똑바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를 향해 지어 주는, 이 잘생긴 남자의 애정 어린 시선만으로도 로엘은 안정이 되었다.
“살살 해야 해요.”
“최선을 다 할 테지만, 무리야.”
“그게 무슨……!”
그녀는 바로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불구덩이같이 열이 오른 그녀의 중심에 그녀만큼이나 뜨거운 그가 닿았다. 일부러 시선을 피했던, 그곳에 저절로 눈이 가자 그 크기와 굵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그녀가 예상했던 그 범위를 훨씬 초과했다.
“아니, 잠깐. 잠깐만요. 이거야말로 절대, 절대로 무리……!”
“로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 손길에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치사한 사람. 이 순간에 또 이리 부드럽게 이름을 부르다니.
“로엘. 괜찮아.”
이렇게 몇 번이나, 그녀를 기다려 주는 그가 그녀야말로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처음은 두렵지만, 그래도 마음속에서 계속 이 남자라면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는 듯, 양손을 들어 그의 어깨에 올렸다.
그러자 그는 망설임 없이 단번에 그녀의 안으로 치고 들어갔다.
“악!”
쾌감이란 1도 없는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그의 크기를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이 고통 역시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너무 아파 비명마저 나오지 않았다. 아래턱이 덜덜 떨리고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파. 너무 아파……!”
“힘을 빼.”
아직 반도 들어가지 못했는데도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 역시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 아니 어쩌면 이런 반응을 신경 쓴 적이 처음이라 내심 당황했다. 너무 아파하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아프게 해서까지 그의 욕망을 채워야 하나 싶기도 했다.
“로엘. 나를 봐.”
“진짜 아파. 너무 아파.”
“알아. 알겠으니까, 나를 봐.”
그는 그녀를 달랬다. 그녀만큼이나 그 또한 참는 것이 고통스러웠지만, 울고 있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그만 일방적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움직임을 멈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제야 로엘은 다시 눈을 떠 그를 보았다.
그의 머리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녀에게 최대한 무게를 싣지 않으려 상체를 세운, 그의 팔뚝 역시 힘줄이 도드라졌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바라보는 그 눈이 너무도 자상해 로엘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한껏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모든 것이 말해 주었다.
“……괜찮아요.”
고통에 일그러졌던, 눈물 맺힌 눈이 다시 예쁘게 휘었다. 그리고 한 번 더 그의 목을 당겨 안았다. 가슴과 가슴이 닿고, 그녀의 진한 향기가 그의 코 안 가득히 퍼졌다.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그에게 그녀의 유혹은 참기 힘들었다.
“정말 괜찮아?”
“응. 당신이라면 다 괜찮아.”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깊게 그녀의 숨을 삼키며, 그는 또 한 번의 힘으로 완전히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그를 안은 그녀의 손이 손톱을 세워 그의 등에 생채기를 냈다. 그러함에도 이번에는 그녀 역시 물러서지 않은 채 끝까지 그에게 매달렸다.
“아. 응……!”
작은 몸이 흔들리고, 규칙적인 움직임에 맞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랫배에 온 신경이 쏠려, 그와의 이어짐이 생생히 느껴지고, 그 생소한 가득 참이 그녀의 고통을 점차 쾌감으로 바꿔 갔다.
“아. 아. 에단……!”
“로엘.”
제정신이라면 감히 부르지 못할 그 이름이 저절로 나왔다.
그는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여자를 안아 보는 것이 마치 처음인 양 자신이 조절되지 않았다. 처음이라 아파하는 그녀에게 자신이 버거울 것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이 멋대로 거칠게 움직였다.
작은 그녀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울부짖으며 흔들릴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함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아. 응……!”
여자 목소리가 이렇게 야하게 들리는 것도, 여자의 몸이 이렇게 기분 좋은 것도 처음.
본능처럼 흔들리는 그녀의 가슴을 세게 움켜쥐고, 그는 힘으로 그녀를 밀어붙였다. 조금이라도 더 깊숙이, 그를 미치게 만드는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좋은 걸까.
무엇으로 만들어졌길래 이리도 기분 좋은지, 그는 성난 자신을 밀어내면서도 놔주지 않는 그녀의 뜨거운 길에 정신이 아득했다. 그래서 살살해 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조금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멋대로 허리가 움직이고, 그 속도가 갈수록 빨라졌다.
“아. 아. 앗!”
그의 속도에 따라오지 못하는 그녀가 버겁게 숨을 헐떡였다. 그는 그런 그녀를 내리누르며 오히려 더 깊게 밀어붙였다. 한시라도 빨리, 극도로 예민해진 자신을 그녀 안에서 터뜨리고 싶었다.
“아아!”
결국 그녀의 입에서 긴 교성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 역시 너무도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쾌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자잘한 진동이 여운처럼 이어지고, 그녀는 그제야 완전히 탈진한 듯 늘어졌다.
그녀는 드디어 처음으로 ‘여자’가 된 거다.
그는 숨을 몰아쉬는 그녀 허리를 안아 짧은 키스를 남겼다.
“아카시스. 밤은 이제부터야.”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아직 그는 만족하지 못했음을.
“그게 무슨……. 자, 잠시만, 으응!”
잠시만 따위가 통할 리가.
채 식지 않은 그녀의 열기에 그는 단번에 다시 불을 지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린 밤이거늘, 이리 ‘한 번’에 끝낼 리 없다.
처음 아닌 처음인 두 사람의 뜨거운 밤은 그렇게 그녀가 그의 품 안에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셨다. 한창 검술 훈련을 받을 때도 이보다는 덜 아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밤새 사람을 놔주지 않더니 기어코 언제 쓰러졌는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문제는 그러고 나서 새벽에 깬 그는 또다시 한동안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는 거다.
“도대체 그 체력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그녀는 쑤시는 허리를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따뜻한 차를 따라 주던 헤더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었다.
“마마. 안마해 드릴까요? 오늘 내내 앉아 계시기도 힘드실 거 같은데. 폐하께서 마마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하고 가셨다고요.”
“아, 아니야. 괜찮아.”
로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그러지 않아도 어제 오후부터 오늘 아침까지 내내 그의 품에 있었다는 사실이 남 보기 부끄러울 정돈데 그는 별소리를 다 하고 갔다.
애써 그 화제를 피하며 차를 들이켜려는데, 갑자기 딜리아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사라 님이 오셨어요!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꽃을 들고요!”
“어머! 폐하께서 보내셨나 봐요!”
하루 종일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던 로엘은, 갑자기 들이닥친 엄청난 양의 장미에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열댓 명의 시종이 들고 온 붉은 장미가 그녀의 방을 금세 가득 메웠다.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그 장미를 배달한 사람은 다른 아닌 최고시녀장 사라였다.
언제나처럼 사라는 로엘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폐하께서 마마께 드리는 하사품입니다.”
“네. 전해 줘서 고마워요, 사라.”
예상대로 에단의 작품이었다. 로엘은 장미 한 다발을 품에 안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 대한 선물로서, 보석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사라. 오랜만에 보는데 차 한 잔 하고 가지 않을래요?”
사라는 여전히 변함없는 그녀의 호의에 속으로 작은 한숨을 삼켰다.
다른 사람을 경계하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이분은 변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눈치껏 다른 이들이 밖으로 나가서 어느새 두 사람만이 방에 남았다. 금세 헤더가 새로이 차를 우려 왔다. 따끈한 찻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감축드립니다, 마마.”
“네?”
“어제 처음 폐하와 밤을 보내신 것 말입니다.”
“푸흡.”
아무 생각 없이 듣던 로엘은 사라의 정곡을 찌르는 갑작스런 말에 마시던 차를 뿜었다. 품위를 지키시라는 사라의 잔소리가 말이 아닌 눈빛으로 느껴졌지만, 로엘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 어떻게 그걸…….”
“마마께서 그동안 폐하와 어떤 밤을 지내셨는지 모를 만큼, 저는 어리석지 않습니다, 마마.”
“아하하……. 그러셨구나.”
로엘은 뜨거워지는 얼굴에 손 부채질을 했다. 다른 비였다면 폐하와의 밤을 자랑하기 바쁠 텐데 이 마마님은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사라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참, 어리기도 했다.
“폐하와 마마의 건전한 밤이 그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이, 이 세룸니르 밖으로 나갔다면, 큰 논란이 되었을 겁니다. 폐하를 모시는 건, 아카시스님의 가장 기본 의무니까요.”
그녀가 바뀌지 않은 만큼 사라 역시 바뀔 리 없다. 콕콕, 그녀의 아픈 곳을 찌르는 잔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는 사라는 확실히 그녀에겐 시어머니나 다름없었다.
“그러함에도, 그 사실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제가 제 사람을 아주 잘 골랐다는 거겠지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 정도도 모를 만큼 그녀는 눈치 없지 않다.
솔직히 로엘은 그와 밤을 보내면서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시녀들이 모를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카이로스에서의 첫날, 손바닥 피로 꽤나 잘 속였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 첫날의 속임수는 이미 사라에게 들켰고, 이후의 일들은 그녀의 시녀들이 알아서 숨긴 거였다.
새삼 고맙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고맙단 인사를 해야겠네요.”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뿌듯함이 로엘의 얼굴에 고스란히 번졌다.
사라 역시 속으로 로엘과 같은 생각을 했다. 그녀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골랐다고.
그들은 능력만이 아니라, 그 충성심 또한 남달랐다. 여느 시녀들과는 달리 그녀들은 밖에서 자신이 모시는 분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흘리지 않았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그녀에 대해 많은 이들이 물을 텐데도 그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라는 그 어떤 것보다도 그 점을 칭찬해 주고 싶었다.
“자. 그럼. 사라. 이제 본론을 말씀하세요. 사라가 이렇게 직접 온 건 분명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걸 테니까요.”
로엘은 찻잔을 그만 내려놓고, 다시금 사라를 직시하였다. 사라 역시 그런 로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역시나 영민한 분이다.
“로엘 마마. 저는 마마께 두 가지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녀가 단순히 장미 배달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님을 로엘은 바로 간파하였다.
비록 이 카이로스 황궁에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사람일지라도, 이분의 영민함 또한 변함없는 사실. 그래서 이분이 무서운 거다.
“마마. 마마께서는 이 카이로스 황궁에 오신 순간부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으셨습니다. 몇 년 만의 새로운 아카시스이신 것도, 저희에겐 낯선 북방의 공주님이시라는 것도, 마마의 그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까지 모든 것이 이목을 끌었지요. 그런 마마께서 아무도 얻지 못한 황제 폐하의 마음까지 얻으셨습니다.”
사라는 찬찬히 말을 이었고, 로엘은 그런 사라의 말을 경청했다.
공과 사가 확실하고, 쉽게 감정을 보이지 않는 사람.
그녀의 말투는 딱딱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질 수 있지만 로엘에게는 언제나 애정 어린 조언들이었다.
그래서 그녀 역시 저절로 마음을 열어 버리고 말았다. 이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시녀장에게.
“그러니,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어제와 같은 위험에 처하신 겁니다.”
역시나 사라는 어제의 일을 짚었다.
암살이 새삼스러운 곳은 아니다. 이 카이로스 황궁 역사에 그런 암살로 허망하게 떠난 목숨이 어디 한둘일까. 그러함에도 로엘에 대한 암살 시도는 지나치게 성급했다.
그만큼 로엘의 존재가 많은 이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의미였다. 사라는 그걸 경고하고 싶었다.
“마마. 스스로를 지키셔야 합니다. 그 누구도 마마를 대신 지켜 줄 수 없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폐하 역시 마찬가지십니다.”
꽤 위험천만한 이야기를 사라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 단호함에 로엘은 속으로 그를 떠올렸다.
아마 이 말을 에단이 들었다면 분명 화냈겠지. 그는 그가 그녀를 어떠한 위험으로부터도 지키려 드는 사람이니까.
“사라. 그건 좀 위험한 발언이네요. 그런데 너무도 맞는 말이지요.”
로엘은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여느 사람이라면 감히 카이로스의 황제가 지키지 못할 것이 무어냐 따지려 들겠지만, 로엘은 사라의 말이 너무도 와닿았다.
그건 토르티아 왕족으로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낀 그녀의 ‘현실’이었으니까.
아무리 아버지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인이어도, 아무리 자신이 한 나라의 공주여도 암살 시도는 그녀의 일상이었다.
“저는 단순히 마마께 호신술을 단련하시라거나, 사병을 따로 기르시라는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단편적인 것들은 일시적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할 뿐, 계속되는 위험 속에서 마마를 지켜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니 아예 그 누구도 감히 마마께 해를 끼치지 못할, 그런 힘이 필요합니다.”
토르티아에서 자라 온 그녀는 카이로스에 대해 모르고, 사라는 그런 카이로스 황궁의 모든 것을 보고 들었다. 그래서 로엘은 다른 누구의 말도 아닌 사라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사라가 걱정하는 그 ‘생존’을 위해서.
로엘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저에겐 아직 그런 ‘권력’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정확하십니다.”
그녀에겐 카이로스 내에서의 통하는 권력이 없다. 아카시스라는 지위는 그저 형식적인 신분에 불과하지 그녀에게 그녀를 해하지 못하게 할 권력을 주진 못했다. 그러니 어제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거다.
사라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마마는 지금부터 두 가지를 갖추셔야 합니다. 첫 째는 카이로스에서 마마의 편이 되어 줄 강력한 ‘가문’.”
예상 못 했던 답이었지만, 로엘은 듣는 순간 수긍이 갔다. 사라가 무얼 말하려는 건지 바로 이해되었다.
“아리스 마마의 힘은 ‘몰브’입니다. 몰브는 아리스 마마를 정치적으로 지켜 주지요. 그리고 더 많은 기회가 아리스 마마께 주어지도록 합니다. 그게 몰브의 힘이고 그게 아리스 마마의 힘이며, 그것은 결국 아리스 마마를 황후의 자리, 즉 칼라리엔의 자리까지 인도할 것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마마께는 그 힘이 없습니다.”
또다시 나온 그 단어, ‘황후’.
에단의 즉위 이후 쭉 공석인 그 자리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리도 집착하는지 로엘은 몰랐다. 아니,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황후가 될 마음이 없습니다.”
“그건 마마께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십니다.”
사라는 단호했다. 어쩌면 에단보다도 더.
그래서 로엘은 쉽사리 아니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저는 마마께서 왜 이곳에 오셨는지, 아니면 어쩌다 억지로 오시게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마마께서 칼라리엔까지 오르지 못하신다면 결국 그 끝이 죽음이란 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라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말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참 힘든 진실이자, 끝까지 외면하고 싶은 로엘의 현실이었다.
“그러니 로엘 마마. 마마님의 편을 만드세요. 국정에서 마마께 힘이 되어 줄, 마마의 후원 가문을 가지소서.”
말이야 쉽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몰브가 서슬 퍼렇게 원로를 장악하고 있는데,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북방의 공주에게 가문의 운명을 걸 수장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두 가지’라고 말한 거다.
“그런데, 이 ‘첫 번째’는 ‘두 번째’가 충족되면 자연히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뭔가요, 그 두 번째.”
“‘황손’입니다.”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확실한 방안.
황제의 후손을 낳는 일.
“아카로이가 되세요, 마마.”
황손의 모후, 아카로이.
칼라리엔의 필수 요소이자, 칼라리엔과 가장 가까운 지위다. 에단은 세 명의 아카시스와 수많은 귀인을 두었지만, 아카로이조차 아직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즉위 후 통치 기간의 반 이상은 원정에 나가 있었고, 궁에 있는 시간조차 그는 늘 바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라는 칭호가 절대 공으로 얻어진 것이 아님을, 그분이 그 누구보다도 열심이라는 것을 그의 측근은 모두가 아는 일.
당연히 그에게 자손이 생길 틈이 없었다. 애초에 여색을 탐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아카로이가 되시는 순간, 마마의 세상은 달라질 겁니다. 수많은 귀족 가문의 수장이 마마께 고개를 조아리고, 수많은 비들이 마마의 눈에 들고자 안달하겠지요. 당연합니다. 아카로이, 나아가 칼라리엔이 되신다면 마마의 말 한마디는 곧 천명. 그들의 목숨 따위 얼마든지 좌지우지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걸 바라지 않습니다.”
“마마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렇게 되셔야 마마 스스로를 지키실 수 있다는 거지요.”
“시녀장. 나는…….”
“나아가 마마께서 언젠가 갖게 되실, 마마의 자손 역시 지켜질 수 있습니다. 황자라도 낳으신다면 그 황자가 황태자가 되지 않는 한 그 끝은 죽음입니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자식의 죽음에 가슴이 철렁했다.
자식이라니.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만일 그를 닮은 그의 아이를 낳는다면 분명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거다. 그리고 이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온 힘을 다해 지키겠지.
마치, 그녀의 아버지가, 그리고 어머니가 그랬듯.
그러니, 황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사라의 말은 꽤나 로엘의 마음을 흔들었다.
로엘은 또 한 모금, 차를 들이켰다.
“시녀장.”
“예. 마마.”
그러고는 사라를 보았다.
“어째서 내게 이런 호의를 베푸나요?”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
시녀장이 그녀를 잘 모르듯 로엘 역시 사라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사라의 호의가 아주 예외적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로엘은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라는 분명 처음부터 저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엄격했고, 차가웠지만 분명 그랬어요.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필요한가요.”
“네. 설명되지 않는 호의는 대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전 사라에 대해 그 다른 의미를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라를 직시하는 로엘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맑고 깊은 붉은 눈동자. 사라는 그런 로엘의 눈을 한동안 응시했다.
그분을 똑 닮은, 그래서 그분을 생각나게 하는 눈이다.
‘귀족을 돌로 내리찧을 용기라면, 충분히 살 수 있어. 어디서든, 어떻게든.’
그리고 또 다른 그분과 참 많이 닮은 목소리.
‘보아하니, 귀족 출신인 거 같은데, 나라면 궁으로 도망치겠어요. 적어도 그곳은 저런 인간들이 함부로 쫓아올 수 없는 곳일 테니.’
사라는 오랜만에 옛 기억에 잠겼다. 그녀의 인생을 바꿔 버린 바로 그 인연.
그녀의 말이 맞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란 없다.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지난날, 마마께서는 모르는 곳에서 저는 마마께 빚을 졌습니다.”
“……우리가 만난 적 있나요?”
“있다고 할 수도 있지요.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로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사라는 더 이상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저의 호의가 마마께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진 않습니다. 그러나 호의라고 할 것 없는 이러한 한낱 조언도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이 이상으로 마마를 도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다음은, 마마께서 하실 일이지요.”
사라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 로엘 역시 일어났다.
사라는 아랫사람이 나갈 때는 그리 배웅해 주실 필요가 없다고 한마디 하려다 말았다. 그러기엔 로엘의 얼굴엔 고마움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다음에 또 차 한잔해요.”
“강녕하십시오. 로엘 마마.”
그 천진난만하기도 한 로엘을 뒤로하고 사라는 그만 그녀의 궁에서 나왔다.
여기에 오기까지 꽤 많은 고민을 해야 했지만 역시나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이 노력이 헛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
“폐하. 오늘따라 엄청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요? 로엘 님 처소에서 늦게 오셔서 그런가…….”
“장군.”
루카스의 빤한 놀림에 제롬은 헛기침을 했다. 황제의 사생활은 워낙 금기라 함부로 말할 수 없어 주의를 주었지만, 제롬의 눈에도 오늘따라 에단의 기분이 유난히 좋아 보였다.
새벽 기상이 당연하신 분이 로엘 님의 처소에서 정오가 되어 나오신 것을 보면 그 이유는 너무 빤했다.
“어제 로엘 님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어째 오늘 더 피곤하실 것 같은데…….”
“그만해. 그만.”
보고 문서를 준비하던 아론이 결국 루카스의 뒤통수를 쳤다.
루카스에게 핀잔을 주긴 했지만, 아론도 오늘따라 에단이 유난히 기분이 좋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카시스님께서 거하게 한탕 벌여 놓으셔서 밤새 그 뒤처리하느라 그는 골머리를 앓았는데, 두 분은 아주 금실이 좋으셨나 보다.
“이게 다야?”
“네.”
물론 에단이야 루카스가 뭐라 하든, 아론이 툴툴대든 전혀 상관없이 그저 기분이 좋았다.
그로서는 간만에 아주 만족스러운 밤을 보냈다. 아니, 간만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 애초에 여자와의 밤이 이렇게 만족스러웠던 적이 있긴 했던가 자문할 정도였으니.
다만, 처음인 그녀를 너무 괴롭힌 게 마음에 걸렸다.
짐승처럼 자제 못 하고 달려든 것도 미안한데, 사과는 하지 못할 망정 눈을 뜨자마자 또 짐승이 되었으니 볼 낯이 없었다.
“뭔가 문제 있으십니까?”
“아니.”
아론은 자신이 준 서류에 문제가 있나 싶어 되물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잠들어 있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나오는 길에 제롬을 시켜 장미를 전했지만 장미로는 부족했다. 마음 같아서는 어디 성 하나라도 쥐여 주고 싶었지만, 그런 것들이 그녀를 만족시킬 리 없었다.
그러니 좀 더 고민해야만 했다. 그 까다롭고 특별한 아카시스를 기쁘게 해 드리려면.
“이반은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어제 황궁에 들어오신 건 확실한데 어디에 가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 진짜. 이반 황자님 또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가 보네. 보나마나 또 단골…….”
“이거 사람 없다고 너무 막말하네. 오랜만에 온 사람 서운하게.”
루카스의 말을 끊은, 갑자기 들려온 그 반가운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자연히 문을 향했다. 그러자 닫혀 있는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목소리보다 더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제1황자 이반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완수하고 환궁하였습니다.”
카이로스 황족임을 상징하는 금발에, 에단을 닮은 하얀 피부와 수려한 외모. 단정한 인상. 그리고 무인임을 알게 하는 단단한 체격.
몇 년 만에 보아도 눈이 가는 잘생김은 어딜 가지 않았다.
정중하게 에단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그에게 에단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반 역시 그런 에단에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보아도 변하지 않는 건 이 두 형제의 유난스런 우애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에단은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반과 포옹했다.
“얼굴 보기가 나보다 힘든 것 같다.”
“자주 보면 이리 안 반겨 주실 테니 비싸게 굴어야지요.”
에단의 눈치에도 능청스럽게 넘기는 것이 딱 이반이었다.
여전한 그를 반기는 사람은 에단뿐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자님.”
“황자님을 뵙습니다.”
“아, 진짜 너무 안 오시더라. 이번에도 안 오셨으면 제가 진짜 포승줄 들고 찾아갈 뻔했다고요.”
“하하. 폐하라면 충분히 그리하실 분이지. 다들 오랜만이야.”
유년기부터 동고동락한 건 이 셋도 마찬가지.
루카스는 신이 나 바로 이반 곁에 섰다.
“이반 황자님. 북방 국경을 아주 그냥 쓸어버리셨다면서요. 명성이 아주 자자한데요.”
“덕분에 쓸데없는 국력 손실이 많이 줄었습니다. 한동안 신경을 안 써도 될 것 같고요.”
“내가 너무 빨리 끝냈지? 아님 더 있을 수 있었는데 말이지.”
“충분히 오래 끌었어.”
에단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그는 이반이 크고 작은 북의 침략들을 1년 만에 다 정리한 걸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반은 안정화를 명목으로 오랜 시간 황궁을 떠나 있었다.
그건 일종의 배려였을 터.
자신의 형제가 황권을 굳건히 하는 데 쓸데없는 잡음을 넣지 않기 위해, 또 다른 계승권자로서 황위에서 멀리 떨어 있던 거다. 에단은 바로 그 점이 싫은 거였고.
그런 이반의 마음을 에단이 알고, 그런 에단의 마음을 이반이 아니 참 애틋한 우애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그가 이번에 진지하게 이반을 불렀다.
“와서 좀 쉬려고 했는데, 이거 내 뒷담화를 하는 거 보니 안 되겠네. 바로, 할 일을 하는 수밖에.”
그 이유를 이반이 모를 리 없다. 그가 그리 끔찍이 여기던 형제를 북방으로 보낸 이유이자 이반이 몇 년간 그 머나먼 국경에 머물러야 했던 이유.
남들은 황자인 그가 위협되지 않도록 보낸 거라 생각했겠지만, 그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반에게 특명을 내린 거였다.
이반의 손짓 하나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콜린이 문서를 한아름을 들고 왔다. 차곡차곡 쌓여 가는 문서들을 보며, 이반은 그중 가장 큰 북방의 지도를 펼쳤다.
“지금부터 북방 지역 현황에 대해 보고하겠습니다. 폐하.”
에단의 ‘대의’이자, 카이로스의 오랜 염원인 ‘북방 정벌’.
이반은 에단이 가장 먼저 둔 그 초석이다.
***
“마마. 괜찮으시겠어요? 오늘은 그냥 쉬시는 게 어때요.”
“하루 종일 누워 있었더니 허리가 더 아픈 거 같아. 답답하기도 하고, 잠깐이라도 걷고 싶어.”
하늘이 붉은빛으로 물들 즈음, 그녀는 시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산책을 나왔다. 후궁 후원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적어도 후궁 담장 밖으로 나가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라 딜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홀로 걷다가 몰브 무리도 만나고, 지난번 케인의 그 무례도 당한 거였다.
“노을 지기 시작한다.”
그녀가 유독 좋아하는, 가장 탁 트인 곳에 서서 로엘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카이로스 황궁은 기본적으로 언덕배기에 있는지라 온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데, 로엘은 그런 황궁에서도 그녀가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을 찾았다. 다른 마마님들께서는 구두와 드레스가 거추장스러워 기피하는 곳인 점도 로엘의 마음에 쏙 들었다.
“성 밖에 한번 나가 보고 싶은데, 안 되겠지?”
“당연히 안 되죠.”
“흠. 많이 아쉽네…….”
로엘은 저녁 시간이라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장을 보며 말했다. 카이로스에 들어올 때는 수많은 병사들에 둘러싸여, 마차 창문을 통해서 보이는 것이라곤 군사들의 투구뿐이었다.
카이로스 사람들에게 북방의 그녀가 신기하듯, 북방의 그녀에게도 카이로스가 신기한 법인거늘. 마음 같아서는 당장 성 밖으로 나가 마을 이곳저곳을 누비고 싶었다.
그에게 요구했던 ‘자유’.
좀 더 통 크게 쓸 걸 그랬다.
“가고 싶으면 가면 되지요.”
그런데, 갑작스레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이리 가까운데 못 갈 이유가 없지요.”
아니, 낯설지 않은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로엘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막 해가 떨어지는 찰나, 노을을 한 몸에 받아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로엘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안다.
그녀 역시 꽤나 그리웠던 목소리였으므로.
“아카시스 로엘 마마. 카이로스 제1황자, 이반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마마께 인사드립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이 흩날리고, 이반은 로엘에게 기꺼이 무릎을 굽혔다.
단, 그 눈만큼은 오로지 그녀를 향했다.
이게 얼마 만인가. 저 붉은 눈동자를 보는 것이.
그녀의 머릿속에 수천 가지 생각이 지나가는 것이 훤히 보였다.
하얀 피부에는 노을이 물들어 가고, 높이 묶은 붉은 머리칼은 바람에 흩날려 그녀의 은은한 향기를 날랐다. 마치 잠시 시간이 멈춘 듯이,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만을 응시했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그 적막을 깨는 것은 그녀.
잠시 흔들리던 눈동자가 다시 또렷이 이반을 직시할 때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미소 한 자락 없는 무표정으로 무릎 꿇은 그 앞에 자신의 손등을 내밀었다.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고고하게.
참 그녀다운 재회다.
“로엘 마마를 뵙습니다.”
그래서 이반 역시 기꺼이 그 하얀 손등 위에 키스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늘 그랬듯,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닌가 보다.
“여전하십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연히 그녀의 시선도 올라갔다. 하필 산책 나온다고 제일 낮은 신발을 골라 신었더니 그와의 시선 차이가 더 많이 나는 것 같다. 한참을 올려다보는 것이 괜히 자존심이 상할 판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그의 미소는 오히려 더 진해졌다.
“오랜만에 너무하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이반 전하.”
그런 그에 비해 로엘의 응대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로엘이 누구인지 알고 있던 이반은 어떨지 몰라도, 이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로엘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반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그렇게 멋대로 사라질 땐 언제고, 이런 식으로 나타나다니.
이건 그녀를 기만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로엘.”
“함부로 부르지 마.”
‘로엘.’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네아레스는 너무 길잖아.’
‘몰라! 아무튼 로엘은 안 돼!’
잊혀지지 않는 기억. 야속하리만치 생생한 모든 일들.
로엘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토르티아에서는 이성이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연인임을 의미해요. 그래서 당신께서 제 이름을 처음 불러 주셨을 때 저는 제법 놀랐습니다. 당신이 부르는 제 이름이 너무도 낯설지 않아서.’
‘로엘.’
지난밤의 그가 생각나서.
“네아.”
지난 시간 속의 이 남자가 생각나서.
로엘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못하다간 눈물마저 맺힐 것 같았다.
“이반 전하. 저는 폐하의 아카시스이고, 이반 전하께는 형수가 됩니다. 이 이상 제 길을 막는 무례를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그만 비키세요.”
‘형수’라는 두 단어가 유난히 아프게 들렸다. 이반 역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얄궂기도 한 운명이다. 하필, 많고 많은 사람 중 에단의 여자가 되다니.
이 풀지 못할 억울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네아. 잠시…….”
“이반 전하.”
그런 그의 앞을 이번엔 딜리아가 막아섰다. 갑작스러운 이반의 등장도 당황스러운데 이반과 로엘의 분위기는 더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어쩌하지 못한 채 물러서 있었는데, 더 이상 놔둘 수 없었다.
그러기엔 그녀의 주인이 평소와는 너무 달랐다.
“아무리 이반 전하라 하셔도 아카시스님의 길을 막을 순 없습니다. 부디 비켜 주소서.”
절대 나서지 않는 소심쟁이 딜리아에게 언제부터 이런 용기가 생겼나.
딜리아는 로엘 앞에 막아서서 이반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손가락 하나라도 뻗었다간 목숨이라도 걸 분위기라 이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로스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또 언제 이렇게 자기 사람을 만들었나 싶다. 결국 이반은 순순히 길을 텄다.
“또 뵙겠습니다. 아카시스님.”
그런 이반에게 로엘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야속하리만치 한 번을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이반은 끝까지 바라보았다.
“……진짜 너무하네.”
이렇게 만나도, 그는 이리 반가운데.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앞뒤 가리지 않고 찾아 나섰는데.
‘네아. 내가 같이 가 달라면, 같이 가 줄 거야?’
‘어딜 가는데?’
‘어디든.’
‘글쎄. 하는 거 봐서?’
여전히 그의 마음은 이리 마음이 뒤숭숭한데.
‘뭐야. 그렇게 말하면 기대하게 되잖아. 제가 정말 따라와 줄 것 같아서.’
어린 소녀는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멋대로 떠나 버린 그에게 복수하듯, 멋대로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 버렸다.
그것도 너무 아름다운, 그래서 욕심이 나는 그런 여자로.
“또 보자, 네아.”
그녀가 떠난 쪽을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언제나처럼 그의 말은 허공에 흩어졌지만, 그러함에도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북방 국경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넘지 못할 성벽 너머 북을 바라보며 말했던 것처럼.
보고 싶다고.
꼭 다시 보자고.
내가 보러 가겠노라고.
적어도 이젠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는 거리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자며, 이반은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눌러 담았다. 혹여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