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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상대를 잘못 고르셨습니다 (10/69)

Chapter 9. 상대를 잘못 고르셨습니다

“대장군. 아무래도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루카스의 심복 안스는 에단과 함께 있는 루카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에단과 경쟁이 붙었던 루카스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안스를 돌아봤다.

“뭔데? 한창 재미 보는 중이라고.”

“아카시스 로엘 님의 키로스, 시에라가 대장군을 뵙고자 합니다.”

“나를?”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지난번 로엘과의 만남 때 로엘의 옆에서 자신을 경계하던 그녀를 떠올렸다.

얼핏 보아도 검을 쥔 자세며, 경계하는 태세가 꽤나 잘 교육받은 무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최고 상관인 그를 만나길 원한다는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소리였다.

루카스는 잠시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데려와. 이곳으로.”

“이곳으로요?”

“어.”

루카스는 활을 내려 두었다. 그리고 다시 에단에게로 다가갔다. 쏘는 족족 명중인 에단은 잔챙이뿐인 이곳에 이미 싫증 난 거 같았다.

“폐하. 잠시 만나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누굴.”

“로엘 님의 키로스요.”

루카스는 안스와 함께 걸어오는 시에라를 눈빛으로 가리켰다.

뜻밖의 인물의 등장에 에단도 잠시 활을 내렸다. 가까이 다가온 시에라는 바로 에단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하늘 같으신 폐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지체 없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폐하. 마마께서 벌써 1시간 넘도록 행방불명 중이십니다.”

그 한마디에 에단의 표정이 바뀌었다. 순식간에 서슬 퍼런 노기가 눈빛에 서렸다.

루카스는 바로 검을 빼들어 시에라의 목에 가까이 댔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그녀의 목에 닿았지만 시에라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키로스. 똑바로 보고해.”

“로엘 마마께서 폐하의 서신을 가져온 황군을 홀로 따라가셨습니다. 저한테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 지시하셨는데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계십니다.”

“황군이라니 뭔 소리야. 오늘 폐하 호위군은 황군이 아니라 우리 프래카뿐이야. 황군은 의식 행사 직후 궁으로 돌아갔다고.”

“그렇다면 역시……!”

시에라만큼 루카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

“폐하. 아무래도 군을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보다 에단의 표정이 더 굳어 있었다.

수도에서 가까운 숲이라고는 하나 이 숲은 가로지르는 데에만 반나절 이상 걸릴 정도로 거대하고 울창했다.

그가 즉위하기 전까지는 산적들의 약탈과 강간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던 무법지대였기에 그런 곳에서 사람 하나 죽어 나가는 건 순식간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암살하기엔 그 어떤 곳보다도 제격인 곳.

“프래카.”

역시. 그냥 궁에 두고 왔어야 했나 보다.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습니다.”

에단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아카시스를 찾아.”

“예! 폐하!”

수십 명의 프래카는 에단의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루카스 역시 심각한 얼굴로 말의 고삐를 잡았다.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가셨지?”

“기원식장으로부터 20분 정도 쭉 걸어 들어왔고, 북동쪽을 향해 가셨습니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에단을 바라보자 에단도 같은 생각인지 동쪽으로 말의 고삐를 틀었다.

“폐하. 일단 제가 먼저…….”

루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단의 말이 출발했다. 기다리시란 말을 해 볼까 했던 루카스는 너무 예상대로인 그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었다.

“키로스. 너도 따라와.”

시에라에게 짧은 명령을 던지고선 루카스도 서둘러 에단을 쫓았고, 시에라 역시 그런 루카스를 뒤따랐다.

역시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애초에 폐하께서 그렇게 눈에 띄는 행동으로 로엘 님을 부를 리 만무하였고, 설사 그런다고 한들 그 사항을 전속 친위대인 프래카가 아닌 황군을 시킬 리 없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다니.

시에라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부디 로엘 님이 무사하시길 간절히 바랐다.

***

“이거 뭔가 이상한데요?”

앞서가던 이반이 갑자기 멈춰 서자, 콜린 역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딱 보아도 프래카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냥하는 거 같진 않고, 뭔가 일이 터진 거 같은데……. 설마 폐하 암살 시도라도 있었던 걸까요?”

“그랬다면 단번에 목이 날아갔겠지. 폐하에 의해서든 루카스에 의해서든.”

“하긴. 그야 그렇겠네요.”

콜린은 바로 수긍했다.

“그럼 무슨 일일까요?”

“알아봐야지.”

이반은 망설임 없이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 하나를 던졌다. 그러자 정확히 달리던 프래카 한 명의 머리 바로 앞 나무에 명중했다.

“……!”

훈련되어 있는 프래카는 능숙하게 그 단검을 피하면서 말을 멈췄고, 자연히 검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반 전하!”

역시나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에단만큼이나 유명하고, 에단만큼이나 칭송받는 황자가 바로 ‘이반’.

그의 무예 실력과 전쟁에서의 화려한 전적은 기사들 사이에서 동경의 대상이다. 루카스마저 존경을 표한다는 그 이반이 몇 년 만에 카이로스 수도로 돌아왔다고 한들, 프래카 일원이 못 알아 볼 리 만무했다.

“이반 전하를 뵙습니다.”

프래카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래.”

이반 역시 그런 프래카의 인사를 가볍게 받았다.

장군 급인 콜린에게도 예를 갖추려는 프래카에게 콜린은 대충 손사래를 치곤, 얼른 본론부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프래카가 이렇게 난리인 것이냐? 폐하께서도 나와 계실 텐데 이렇게 흩어져서 말이야.”

“새로 오신 아카시스님께서 갑자기 행방불명 되셔서 수색령이 떨어졌습니다.”

프래카의 답변은 아주 명료했다. 다만 그 내용이 명료한 만큼 가볍지 않아서 문제지.

콜린은 꽤 심각한 표정으로 이반을 돌아보았다.

“이 대낮에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행방불명이라니, 예감이 좋지 않은데요. 이건 누가 봐도 암살 아니면 납치인데…….”

“어느 쪽이야.”

“동쪽인 것 같습니다.”

또 이반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출발해 버렸다. 아까부터 계속 그답지 않은 성급함이다. 콜린은 그런 이반이 낯설었다.

왠지 그와 ‘아카시스 로엘’이 연관 있는 것만 같았다.

“아. 이것도 별로 안 좋은 예감인데.”

콜린은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이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겨우 마음 잡고 황궁으로 돌아가시나 했더니, 오시자마자 파란을 일으키실 것만 같다.

***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설마…….”

그렇게 작은 숨소리 하나, 조용한 움직임 하나가 없었다.

“에이. 설마…….”

그 정도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믿기지 않았다.

피가 사방에 낭자해 그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로 진동했고, 십수 명에 달하는 시체는 흉측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들 한가운데 서 있는 한 사람.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얼이 빠진 루카스의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입을 다물지 못하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뒤늦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웅성거림이 모여 소란스러워지자, 그제야 그녀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그녀를 중심으로 에단과 루카스의 프래카, 다른 귀족 자제들, 그리고 이반과 콜린까지 모두가 모여 있었다.

멀리까지 퍼져 나간 이 피 냄새 덕분에 쉽게 그녀를 찾은 거다.

물론, 그녀를 찾았을 때 이 풍경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아. 폐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불렀다. 그 평온한 한 마디가 너무도 이질적이어 사람들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시체 더미 중심에, 피를 뒤집어쓴 채 홀로 서 있는 여자라니.

도무지 이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그런 반응이 아니었다.

“오신 줄도 몰랐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검 끝에 남은 마지막 목숨을 망설임 없이 거두어 들였다. 심장 깊숙이 찔렀던 검을 빼자 사방으로 피가 튀어 웅덩이에 고였다.

보는 이들은 저절로 표정이 일그러지는데 정작 그녀는 눈썹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자신의 피 묻은 검을 무심하게 두어 번 털어 냈다.

너무 소름 돋는 모습이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평온하네요, 저분. 지금 혼자서 십수 명을 죽여 놓고.”

“……닮았어.”

이반은 작게 읊조렸다. 콜린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콜린뿐일까. 루카스도, 그리고 아마 아론과 제롬이 있었다면 그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거다.

그만큼 그들에겐 꽤나 익숙한 눈이다.

지금 로엘의 눈이.

“……정말 닮았네.”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그녀에게 이반이 다가서려는데, 그보다도 먼저 ‘그’가 움직였다.

지금의 그녀만큼이나 이러한 피바다가 잘 어울리는 사람.

“검은 누구한테 배웠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혼자 여유롭고 혼자 빛나는 그들의 황제, 에단.

그는 터벅터벅 피로 물든 풀밭 위를 걸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렇게 언제나처럼, 그는 가볍게 그녀의 허리를 당겨 그 붉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러자 그녀 역시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 황금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음. 남자?”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겠군.”

살짝 얼굴을 찌푸리는, 그 시답잖은 질투에 그녀가 웃고 말았다.

이리도 평소와 같은 시큰둥한 표정이라니.

그녀는 순간 울컥했다. 그래서 속마음을 말할 뻔했다.

당신을 본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고,

혹시나 당신도 저들과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볼까 두려웠다고,

“누구 마음대로 다른 남자에게 다리를 보이는 거야.”

그는 훤히 드러난 그녀의 맨다리에 얼굴을 찌푸리더니, 그의 어깨에 걸친 망토를 벗어 그녀를 덮었다. 그보다 한참은 작은 그녀는 그의 망토에 폭 싸여 얼굴만 내밀고 그런 그를 올려다보았다.

“움직이기 불편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목숨이 위태로운데 예쁘기만 할 순 없잖아.”

문제는 이래도 예쁘다는 거다.

그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지 깃까지 세워 목 끝까지 그녀를 꽁꽁 싸맸다. 그리고 살며시 그녀의 손에서 검을 받아 들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 전체가 붉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를 보자마자 잠시 잊었던 분노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설마 했는데 진짜 암살 계획이라니. 머리가 뜨끈해졌다.

순식간에 그의 눈동자에 살기가 서렸다.

“뒤처리는 내가 해.”

“아니. 제가 할게요.”

그런 그의 손을 그녀 역시 마주 잡았다. 그는 당장에라도 몰브가에 쳐들어가 케인의 목을 날릴 것 같았다.

하지만 로엘은 그런 걸 전혀 원하지 않았다.

예전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는 그 어떠한 분란도 만들고 싶지 않다.

그녀로 인해, 그의 길에 어떠한 장애도 되고 싶지 않다.

“제 일이에요. 제가 해결하게 해 주세요.”

“네 일이 내 일이야.”

“알아요. 그래도 이번은 제가 할게요. 어차피,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그는 싱긋 웃는 그녀에게 더 화가 났다. 처음 볼 때도 그러했지만, 그녀는 너무도 자신의 목숨을 쉽게 생각했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그 태도가 그는 계속 거슬렸다.

에단은 그녀를 안은 팔이 힘을 주었다.

“내가 안 괜찮아.”

그는 정색하며 말했다. 그녀를 걱정하는 진심이 전해져, 로엘의 미소가 진해졌다.

누군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것. 너무 오랜만이다.

그녀는 손을 올려 그의 양 볼을 감쌌다.

“그래도 이번은 양보해 주세요. 저도 무언가 경고를 해야 앞으로가 평안하지 않겠어요? 저도 나름 화가 났답니다. 폐하.”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은 그러지 아니하였다. 그녀도 꽤나 화났단 거다.

에단은 피식 웃었다.

아무리 품에 싸고돌아도, 결국 이 여자는 꽃으로만은 못 사나 보다.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주위에 사람이 수십이었는데도 그는 아랑곳 않고 그녀를 안고 성큼성큼 그의 말로 걸어갔다. 자연히 사람들은 길을 텄고, 로엘은 귀 끝까지 붉어졌다.

“그 발로 걸을 거야, 그럼.”

그는 여기저기 상처 난 그녀의 맨발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당연히 구두부터 벗어 버린지라 생각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좀 쓰라린 거 같기도 했다.

“하, 하지만 지금 보는 눈이 몇 개인데요……!”

“내가 내 비를 안고 가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아니, 그게 아니라…….”

루카스는 그렇다 쳐도, 여기에는 귀족 자제들도 수십이다.

그럼 이 소식이 보나마나 엄청 과장되어 파다하게 사교계로 퍼질 테고, 조만간 황궁 전체에 퍼질 거다.

안 그래도 출신 때문에 구설수가 많은데, 거기에 이런 소문까지 보태어지는 건 정말 사양이다.

그녀는 최대한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럼 좀 빨리 가요. 얼굴이 터질 거 같다구요.”

진짜 부끄러운지 얼굴 전체가 홍당무가 되었다. 그는 그 모습마저 귀여울 따름이다. 일부러 느긋하게 걸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이 모습을 더 보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좀……!”

“키스해?”

“아니요. 갑시다.”

단호하기도 하여라. 그는 웃고 말았다.

그녀에겐 낯설지 않는 그 웃음이, 보고 있는 이들에겐 방금 일어난 암살 미수 사건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언제부터 저분이 저런 미소를 지었던가. 얼음 같기로 유명한, 그래서 피도 눈물도 없을 거라던 그들의 황제 폐하가 맞긴 한지 진심으로 의심스러웠다.

“이래저래, 놀라운 분이네요.”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는 콜린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콜린의 반응에도 여전히 이반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웠다.

“등장부터 사람 경악시키더니, 지금 저 모습도 경악스럽네요. 도대체 저분, 정체가 뭐랍니까?”

카이로스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암살의 표적이 되질 않나, 그 암살범을 혼자의 몸으로 다 죽여 버리질 않나, 이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에단 폐하의 품에 안겨 있다니.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하지 않은 게 없다.

“로엘.”

“네?

“저 여자. 로엘 네아레스라고.”

새로 오신 아카시스 이름쯤이야 당연히 안다고 콜린은 대답하려다 말았다.

카이로스에 당도한 다음부터, 아니 저 로엘 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 달라진 이반이 콜린은 그저 불안했다.

‘황자님은 왜 그렇게 북을 좋아하시는 거예요?’

‘자유롭잖아, 저곳은.’

‘황자님은 지금도 충분히 자유롭게 사시는 거예요. 세상에 황자님처럼 자유로운 황족이 어디 있답니까.’

‘하하. 그건 인정. 그래서 내 형제가 많이 힘들었지. 내 몫까지 해내느라.’

‘그니까, 진짜 이유를 말씀해 보세요. 매일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오셔서 북을 바라보는 그 진짜 이유.’

콜린의 한숨이 깊어졌다.

‘설마, 사랑하던 여성분이라도 두고 오신 겁니까?’

‘글쎄. 그보다는 그리운 사람이라고 해야겠지? 아니면, 보고 싶은 사람?’

‘헐! 진짜 여자였어요?!’

“……황자님. 제발, 아니어야 합니다.”

정말, 안 좋은 예감이 마구 들었다.

***

“세상에……. 마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에단이 데려다주겠다는 걸 끝끝내 사양하고, 그녀는 기어코 혼자 성으로 돌아왔다.

딜리아를 비롯한 그녀의 시녀들은 그런 로엘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레스 밑단은 죄다 뜯어져 있고, 높이 올린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으며, 비싼 구두는 어디에 버렸는지 상처투성인 맨발에, 누구 것인지 모를 피가 드레스에 온통 튀어 있었다.

“응. 좀 일이 있었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의 반응에도,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래서 그 일, 마무리 좀 하려고.”

그리고 터벅터벅 대리석 바닥에 핏자국을 남기며 걸음을 계속하였다.

그것도 그녀의 처소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마마, 도대체 어디로 가시려는 거예요?!”

“일단은 좀 씻으시고…….”

“지금 다들 모여 있지?”

“네?”

“아리스 처소려나? 지금쯤 아주 기분이 좋으실 텐데.”

영문을 모르는 딜리아들은 일단 그녀를 뒤따랐다. 지금 그녀는 그녀들이 말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뭐라 다른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로엘 마마를 처소로 모시고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씻기고, 혹여나 다치시진 않았을까 확인부터 하고 싶었다.

그리고 되도록 이 모습을 다른 궁인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마, 우선 처소부터 가서…….”

말 많고 탈 많은 이곳에서, 괜한 소문이 돌까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그런 그녀들의 마음을 전혀 몰라주고, 로엘의 발걸음은 정확히 ‘아리스’의 처소를 향했다.

“정말 한 치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네.”

로엘은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작은 조소를 뱉었다. 태양 아래에 있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비 마마들께서는 로엘이 사라진 후 진작 궁으로 돌아와 있었다.

버젓이 몇 시간 전에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을 암살하라 명령해 놓고 이리 뻔뻔하게 웃고 떠들다니.

로엘은 그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경고 정도만 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것 같다.

“아, 아카시스님……!”

“열어.”

문 앞에 대기 중이었던 아리스의 시녀 애나는 로엘을 보자 사색이 되었다. 일단 그녀를 막고 보는 애나에게 그녀는 짧게 명령했다. 그 붉은 눈에 서린 한기에 애나는 저절로 말이 떨렸다.

딱 보아도, 지금 이분이 굉장히 화나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 마마. 일단 진정을 하시고…….”

“시에라.”

로엘은 두 번 이야기하지 않았다.

시에라의 검이 애나의 목에 닿자, 애나의 입이 바로 다물어졌다.

결국 문이 열리자 한창 즐겁게 티타임을 갖는 그녀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로엘은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제가 큐티 공께 소개를……. 힉!”

“아, 아카시스님……!”

그러곤 그대로 아리스의 머리를 잡아 티 테이블에 내리 눌렀다.

“꺄악!!”

“마마!!”

비싼 그릇들이 깨지고, 순식간에 티파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확히 아리스의 목 바로 옆에 검을 꽂아, 아리스를 가둔 로엘은 아리스를 내려 보며 싱긋 웃었다.

진한 피 냄새를 풍기는 그녀의 그 섬뜩한 미소에 아리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 아카시스……. 일단 저와 대화를…….”

“대화요? 저런. 아카시스께서는 저와 대화하시고 암살을 계획하셨나요?”

“그, 그런 게 아니라……. 꺄악!”

로엘의 또 다른 단검이 테이블에 꽂혔다. 저절로 감겨 버린 아리스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그 모습을 다른 비들은 물론 다른 궁인들까지 모두 사색이 되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카시스.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는 그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엄밀히는 빌 수밖에 없었다.

“한 번만 살려 주세요. 한 번만……. 흑.”

로엘의 얼굴에서 그나마 짓고 있었던 미소마저 사라졌다. 이리 바로 비굴하게 나오는 아리스를 보니 더 화가 올랐다.

고작 검 하나 갖다 댔다고 바로 목숨을 구걸하다니.

이럴 배짱으로 감히 누굴 건드린단 말인가.

로엘은 몸을 숙여 떨고 있는 아리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카시스. 입버릇처럼 저를 야만국 출신이라고 떠드시더니 속으로 그리 생각 안 하셨나 봅니다. 저를 그리 쉽게 죽이려 드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제가…… 흑. 제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흑. 오라버니가…….”

아리스는 우느라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다. 바로 자신의 짓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그 배후에 케인 몰브가 있는 것도 술술 불어 버리는 아리스를 보며 로엘은 맥이 빠졌다.

공작가에 태어나서 금지옥엽으로 남들이 떠받들어 주는 삶을 살다, 곱게 황제께 시집 와 황후를 꿈꾸는 철없는 아가씨에게 무슨 말을 할까 싶다.

로엘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카시스. 잘 들으세요. 내가 자란 토르티아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가 검을 쥐여 주고, 그 아이가 여덟 살이 되면 말을 선물 받습니다. 아카시스가 찻잔을 들고 테이블 매너를 배울 때 나는 검을 쥐었고, 아카시스가 왈츠를 출 때 나는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웠어요. 그런 내가 당신의 얄팍한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사병 따위에 쉽게 죽임을 당할 것 같습니까?”

뚝뚝 쉼 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리스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에 비해 로엘의 눈동자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만큼 지금의 로엘은 너무도 덤덤했다.

어떠한 분노도, 증오도, 그리고 빌고 있는 아리스에 대한 작은 연민도 없었다.

“아카시스. 날 죽이고 싶으면 직접 검을 들고 와 내 심장을 찌르세요. 그러지 못할 거면, 같잖은 권력과 부로 나의 화를 돋우지 마세요. 한 번만 더, 이런 부질없는 짓을 하신다면 그때는 내 검이 당신의 심장을 찌를 겁니다. 아시겠어요?”

일말의 감정도 깃들지 않은 차디찬 눈.

아리스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녀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그래서 이 얼굴과 이 표정으로,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그럼, 하시던 티타임 계속들 하세요.”

그리고 그건 비단 아리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색이 되어 있는 비들을 둘러보는 로엘의 눈길에 비들은 자동적으로 고개가 숙여졌다.

저 날카로운 검은 언제든 그녀들의 목을 벨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로엘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그녀들을 뒤로하고 이만 아리스의 방을 나섰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향수 향이 가득한, 이 가식적인 방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가자.”

“네, 마마.”

그저 얼른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 이 피곤을 풀고 싶을 뿐이다.

“얼른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런 로엘의 마음을 눈치챈 딜리아는 전후 사정을 묻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배려가 고마워 로엘 역시 말없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얼른 가자.”

고단하기만 했던 그녀의 사냥 대회가, 그렇게 겨우 끝이 났다.

***

“진짜 그냥 넘어가실 거예요? 로엘 님을 암살하려 했다고요!”

“증거가 없잖아, 증거가.”

아론은 흥분한 루카스의 반응에도 덤덤히 답했다. 직접 사냥에 나서지 않았던 아론 역시 로엘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런데 와서 보니 가관이었다.

쌓여 있는 시체들을 수습하기 바빴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말을 전해 나르기 바빴으며, 프래카는 그런 그들을 통제하기 바빴다.

이 와중에 루카스는 잔뜩 흥분해 있고, 에단은 말 한 마디 붙이기 어려울 만큼 살기가 등등하니, 아론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또 그분이 문제였다.

“증거가 왜 없어? 저 죽은 사병들, 뒷조사하면 빤한데. 애초에 감히 누가 아카시스를 암살하려 들어? 그럴 만한 자라면 이 카이로스에 딱 하나뿐이잖아!!”

루카스의 눈은 정확히 케인 몰브를 향했다. 그 난리가 휘몰아쳤는데도, 그는 버젓이 귀족들 중심에 서서 웃고 있었다.

굽신거리는 귀족 자제들을 당연하다는 듯 하대하는 케인의 거만함에 루카스와 아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황제께서 계신 줄 모른다 하여도, 저런 오만방자함이라니.

몰브가의 기세가 올라도 너무 올랐다.

“……일단 아카시스님께서도 이번 일을 덮고자 하셨습니다. 정확한 증거 없이 몰브가를 공격했다간 괜한 귀족 원로 탄압으로 역공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얼마 전에 계약한 수로 사업 건도 걸려 있어서, 몰브가와 대립각을 세우게 되면 막대한 차질을 빚을 수 있습니다.”

“젠장. 그놈의 돈, 원로, 귀족. 저 새끼가 기세등등한 게 바로 그거 아냐.”

“그러니 폐하. 이번 일은 로엘 마마 말씀대로 그냥 덮으시는 편이 괜한 분란을 만들지 않…….”

“알 게 뭐야.”

아론의 말을 끊어 버리는, 그의 한마디는 짧았다. 그리고 그 짧은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에단이 던진 창이 웃고 있는 케인의 머리 바로 옆 나무에 박혔다.

“……!”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폐, 폐하.”

그래서 누구도 비명 한 번 지를 수 없었다.

옆에 있는 프래카의 창을 뺏어 정확히 케인 옆의 나무에 던지기까지 3초는 걸렸을까.

바로 옆에 있던 루카스와 아론마저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놀랐으니, 당사자인 케인과 그 주변의 귀족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그들은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소란스러웠던 장소에 정적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듯한 그 황금 눈동자를 마주하고 오금이 저리지 않을 이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까. 곱게 서책만 펴는 샌님들 천지인 귀족 자제들에겐 더더욱 그들의 황제는 사신과 같은 공포의 대상이다.

“입 닫아.”

그의 짧은 명은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그들의 머리가 숙여졌다.

또각또각, 그의 백마가 그들 사이로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런 그의 말이 멈춘 곳은 정확히 케인의 옆.

그는 나무에 박혀 버린 창을 빼들어 깊이 숙인 케인의 앞머리를 창끝으로 쓸었다.

조금만 삐끗하면 베일 수 있는, 그 아슬아슬한 칼날에 케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정도껏 해. 내게 두 번은 없어.”

심장을 쿵 떨어트리는, 섬뜩한 경고.

케인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금 그 눈을 잘못 마주하였다간 진짜로 세상을 하직할 수 있었으므로.

“……몰브가의 케인.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케인은 바로 땅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두 주먹을 세게 쥐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귀족들 앞에서 왕 행세를 하였는데, 그런 그를 비웃듯 에단은 보란 듯이 케인의 얼굴을 바닥에 떨구게 했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따로 없다.

“폐하의 말씀, 전부 명심하겠습니다.”

이 치욕은 전부 그 붉은 머리의 여자 탓.

계획이 실패하리라 생각지 못했기에 계획이 들킬 것 역시 생각하지도 않았다.

건방진 그 계집 하나 죽이고 깔끔히 치고 빠지면,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으니 문제 될 것이 없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그 어린 여자에게 역공을 당하다니.

분해도 이리 분할 수가 없다.

미세하게 떨고 있는 케인을 뒤로하고, 에단은 이만 그곳을 떴다. 여전히 풀지 못한 화가 가득이었지만, 로엘과 아론의 말대로 이번 일은 이대로 덮어 두는 것이 옳았다.

로엘이 무사한 이상, 이 일만으로는 몰브가를 날릴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 그는 참을 수밖에 없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잘하셨습니다, 폐하.”

아론의 말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녀 앞에 고개를 조아리게 한 후 베어 버리고 싶었다.

‘폐하. 저는 괜찮아요. 암살 시도 한두 번 당해 본 것도 아니고 이 정도로 저, 죽지 않아요. 그러니 보다 멀리 생각하세요.’

그렇게 해서 모든 이에게 감히 그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고, 건드리는 순간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그는 충분히 그리할 수 있다.

‘당신은 카이로스의 황제시고, 이 황금의 나라는 보는 눈이 많지요. 저는 저로 인해 폐하가 폭군처럼 비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몰브가를 치시려거든, 보다 확실한 기회를 기다리세요. 그리고 그 기회는 절대 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못 하게 만들어 버렸다.

고작 총애하는 비 따위가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되는 그녀의 말. 구구절절 너무 옳다.

그래서 화가 났다.

그저 다른 여인들처럼 품에 안겨 보호만 받으면 좋으련만, 그러기엔 그녀는 너무 똑똑했다.

너무 똑똑해서 그를 걱정시켰다.

“……가자.”

당장에라도 달려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그는 걸음을 계속하였다.

***

“딜리아. 가운 좀 갖다 줘.”

지독한 피 냄새를 씻겠다고 근 1시간은 넘게 물에 담그고 있었더니 온몸이 빨갛게 익었다.

슬슬 나가려는데, 아까부터 가운을 가지러 나간 딜리아가 함흥차사였다.

“딜리아?”

로엘은 하는 수 없이 손에 잡히는 수건으로 대충 몸을 가리고 밖을 나섰다. 오랜만에 한 긴 목욕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젖은 머리를 대충 올리며 안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큰 인영이 그녀의 시야를 덮쳤다.

“꺄악!”

목청이 좋기도 하여라.

궁이 떠나가라 울리는 그녀의 비명 소리에 에단은 눈썹을 찌푸렸다.

언제 왔는지 그는 그녀의 침대 위에 걸터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로엘은 황급히 수건을 여몄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는데?”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앞으로 할 예정이지만.”

에단은 로엘의 가는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로엘은 언제나처럼 가벼이 그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에단은 로엘의 허리를 안았다.

맨몸에 수건 하나 걸친 상태라, 로엘은 이리 가까이 그와 마주하는 게 그저 부끄러웠다.

“일단 옷부터 입을게요. 이러시면 폐하가 다 젖는다고요.”

“상관없이. 옷은 벗는 편이 더 좋고.”

“저는 전혀 좋지 않습니다.”

짓궂은 그의 농에 그녀는 그를 흘겼다.

보아하니 사냥 대회를 마무리 짓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그 이유는 묻지 않아도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만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그녀가 걱정되어 그런 거겠지.

아무렇지 않게, 평소와 다름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를 안아 주었지만 그녀도 알고 있다.

그 역시 충분히 놀랐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리 평소보다도 더 강하게 그녀를 안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놔줄 기미가 없어 보이는 에단에 결국 그녀가 포기하고 몸에서 힘을 뺐다.

“마무리는 잘 하셨나요?”

“뭐, 나름.”

“우승은?”

“나.”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농으로 들었을지 모르지만, 에단은 나름 진심이었다.

비록 시상자인지라 수상자가 될 순 없지만, 그가 제일 많이, 제일 좋은 사냥감만 잡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풀지 못한 분을 사냥으로 풀었더니, 쓸데없이 지나치게 많이 잡아 버렸다. 본의 아니게 루카스와 경쟁까지 붙어서 열을 올려 나중에는 아론이 말리기까지 했다.

“어디 다치시진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그의 얼굴을 살며시 감싸 올리며 말했다. 눈을 맞추며 말하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내가 해야 할 말인 거 같은데.”

그녀를 안던 손이 등 뒤에 여며 있는 매듭을 잡아당기자 스르륵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리던 수건이 흘러내렸다.

“폐, 폐하!”

물론, 지나치게 순발력이 좋은 그녀는 황급히 수건을 잡아 겨우 가슴을 가렸다.

에단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 거슬리는 수건 쪼가리를 뺏어 버리고, 마음껏 그녀의 온몸에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가진 인내를 최대로 끌어 올려, 그저 한껏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손목을 당겨 그의 무릎 위에 앉혔다.

“보여 줘. 네가 괜찮은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진지한 눈. 부드러운 목소리. 따뜻한 손길.

로엘은 그 무엇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빨개진 얼굴로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두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여전히 작은 수건만큼은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중요한 부분만 겨우겨우 가렸다.

그는 그대로 그녀 위로 올라가 찬찬히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여기, 멍 들었어.”

“아……. 그건 살짝 부딪혀서…….”

“여긴 쓸렸고.”

“그건 흙바닥을 잘못 짚어서, 읏.”

쓸린 손을 올려 그는 살며시 입 맞췄다. 살살 혀로 핥는 그의 행동은 소독이라기보단 애무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녀의 입에서 멋대로 새된 소리가 흘렀다.

“여기도.”

“거긴 아니……. 아.”

한쪽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려 무릎 근처에 에단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거긴 상처가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점점 안쪽으로 올라오는 뜨거운 입술에 로엘은 그저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힘 빼. 아무 짓도 안 해.”

거짓말.

그녀의 위에서 얄밉게 미소 짓는 그를 흘겼지만, 열기에 흐트러진 눈은 금세 물기가 찼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에 그저 수건 하나 얹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의식되었다. 그래서 온몸 구석구석 그가 흔적을 남길 때마다 오히려 더 몸을 웅크렸다.

“아니면, 다른 걸 기대하고 있는 거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키고는, 나머지 한 손으로 수건을 끌어 내렸다.

그녀가 채 반항하기도 전에 훤히 드러난 가슴을 그는 망설임 없이 입에 머금었다.

“으응.”

그리고 혀끝으로 이미 단단하게 솟은 정점을 입 안에서 굴렸다. 이미 여러 번 맛본, 이 감질나는 쾌감에 그 역시 진즉에 몸이 달아올랐다.

그는 손안 가득히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몸에 상처 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야.”

민감해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튕기자, 그녀의 허리가 들렸다. 몸을 비틀다 못해 엎드린 그녀는 그에게서 도망가고자 했지만 그는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훤히 드러난 엉덩이를 아래서부터 움켜쥐며, 그녀의 허리에 입을 맞추었다.

“다시는, 다른 이로 하여금 이 몸에 상처 나게 하지 마.”

그의 목소리는 진지하고, 그의 말을 진심이었다. 척추를 따라 올라가는 그의 입술은 붉은 꽃을 피웠고 그때마다 그녀는 온몸으로 깨달았다.

이미 자신은 이 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로엘은 시트를 움켜쥔 채로 고개만 돌려, 그녀 위에 있는 그를 보았다. 눈물이 그렁한 채로 얼굴을 붉히는 그 시선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그는 순간 숨을 들이쉬었다.

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남자를 유혹하는 얼굴이 남자를 미치게 만든다.

“하아. 정말 너는…….”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얼굴을 당겨 진한 키스를 했다. 입술이 닿자마자 파고드는, 폭풍 같은 키스에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서로의 타액이 섞여 길게 늘어지고, 밀착한 그녀의 등과 그의 가슴으로부터 서로의 빠른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그녀에게 무게를 싣지 않으려고 양팔에 힘을 줘 핏대가 선 그의 근육 진 팔뚝을 보며 그녀는 살며시 몸을 돌렸다.

허벅지에 느껴지는, 그 뜨거움과 단단함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그녀는 어린애가 아니다.

“네가 선택해.”

허스키한 목소리가 뜨거운 숨결과 함께 그녀에게 닿았다.

그녀를 단숨에 삼켜 버릴 것만 같은, 욕망이 가득한 눈.

그는 그녀를 원하고 있다.

“여기서 그만해, 아니면 계속해.”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에서도 이 남자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려나 보다.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려나 보다.

로엘은 완전히 엎드렸던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보았다. 손을 올려 그의 뺨을 감싸며, 그의 입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계속해요.”

그가 그토록 원하는 ‘허락’의 한 마디를.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유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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