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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사냥감은 뭔가요 (9/69)

Chapter 8. 사냥감은 뭔가요

“황제의 집무실에 멋대로 들어오다니. 내 부인께서 대단하신 건가, 아니면 내 사람들이 무능한 건가.”

“단연코 전자입니다, 폐하.”

그녀는 예쁜 미소와 함께 그의 빈 찻잔을 채웠다.

지난번엔 관복이더니 이번에는 시녀 복장이었다. 머리까지 완벽하게 올려 쪽을 진 것이 어울려도 너무 잘 어울렸다.

예전에 루카스가 메이드 복장이 묘하게 자극적이라는 말을 해서 제롬이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는데, 이제야 루카스의 말이 이해되었다.

입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충분히 야릇한 상상을 가능케 했다.

“옷은 당연히 헤더가 구해다 주었고, 여기 들어오는 건 제롬 경이 도와주었어요. 저는 베리타스에 있다가 폐하의 전용 통로로 몰래 들어오는 거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웬걸 바로 직전에 제롬 경에게 딱 걸렸지 뭐예요. 근데 너무 흔쾌히 안으로 안내해 주었어요.”

“그랬겠지.”

그를 쉬게 하려고 안달인 사람인데, 그런 제롬이 그녀가 그에게 간다는 걸 막을 리 없다.

그는 차를 다 따르고 반대편에 앉으려는 그녀의 손목을 당겨 그의 곁에 앉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겨, 그를 보았다.

“그때는…… 제가 폐하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죄송해요.”

“죄송해도 대답은 같겠지.”

로엘은 차마 답하지 못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 저는…….”

그는 그녀의 뒷말 대신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에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그녀에게 그는 이번에는 제대로 뒷목을 감싸 당기며 깊게 그녀를 찾았다.

일주일 동안, 그의 결론은 하나였다.

시간을 들이자는 것.

그렇게 해서 저 단호한 마음을 바꾸자는 것.

“응…….”

그리하여 그녀 스스로 그를 찾게 하는 것.

그의 결론은 그거다.

“역시 늘었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 주며, 여전히 짓궂게 말하는 그에게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일부러 화제를 돌린다는 것을 모를 만큼 그녀는 눈치 없지 않았으니까.

“……스승님이 계시거든요. 엄청 제멋대로인.”

“그거 훌륭한 스승이네.”

그녀도 알고 있다. 자신을 ‘여자’로 만들고 있는 이 남자가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리란 것을.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이 고귀한 분께 마음을 온전히 열어 사랑을 달라 애원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스승이 너무 훌륭해서 따라가질 못하겠습니다.”

“그럼 네가 분발해야겠네. 스승을 만족시킬 만큼.”

그러다 카이로스의 황후가 될 수도, 아니면 치정에 눈이 멀어 그의 눈 밖에 날 수도 있음을.

그래서 그녀의 선택 역시 ‘시간’이다.

그녀는 두 손을 올려 그의 양 뺨을 감싸더니, 방금 전 그가 그녀에게 했듯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 분발은 여기까지.”

그녀의 마음이 넘쳐나게 되든, 그의 마음이 식게 되든 시간이 지나면 결론이 난다.

언제나 그랬듯, 그녀는 그 운명을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미래에 어떤 결론이 나든, 지금 이 순간 그녀의 곁에 그가 있고, 그의 곁에 그녀가 있으면 그걸로 족했으니까.

욕심은 딱 거기까지.

“그나저나,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하시는 거예요. 일주일 동안 거의 안 주무셨다면서요? 지금 얼굴이 얼마나 상하셨는지 몰라요.”

에단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그에게 잔소리하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이리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을 괜한 자존심에 일주일이나 안 보다니.

그답지 않은 한심한 짓을 했다.

“내 비께서는 정보통이 어찌나 좋은지 내 소식을 다 들으신 거 같네.”

“우리 딜리아가 많이 유능합니다. 황궁의 모든 소식을 제일 먼저 가져다준다니까요.”

“그거 위험인물인 것 같은데.”

“위험이 아니라 유능한 인재인 거죠. 제 사람들이 이리 뛰어나답니다. 후후.”

그건 이미 사라를 통해 전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워낙 자랑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니 모르는 척 들어주고 말았다.

“루카스 경도 뵈었어요. 직접 제게 인사를 하러 오셨더라고요.”

“들었어. 입이 닳도록 예쁘다고 칭찬하더군.”

“하하……. 과장이 심하셨네.”

“아주 심했지.”

“‘아주’는 아니거든요?”

그가 일부로 그녀를 놀리는 것을 아는데도 로엘은 순간 발끈했다. 이래 봬도 어디 가서 안 예쁘단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 몸이다.

진짜 심통이 나 버린 그녀의 볼을 그는 가볍게 잡아 올리며 눈을 맞추고 미소 지었다.

“이렇게 보니까 못생겼는데?”

“이건 폐하가 양 볼을 잡으셔서 그렇죠!”

“물론 내 눈에는 다 예쁘겠지만.”

달콤한 속삭임과 함께 그의 입술이 또다시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입맞춤이 갈수록 쉬워지는 거 같았다. 그녀는 옅게 얼굴을 붉혔다.

“네가 눈이 부시게 예쁜 건 세상천지 다 알아.”

“아니, 그 정도는 정말 아니에요.”

아무튼 중간이 없는 사람. 그녀는 그의 과한 표현을 딱 잘라 거절하고 빈 찻잔이나 채웠다.

정작 예쁘다고 해 주면 도망가는 그녀를 보며 그는 웃음을 삼켰다.

“맞다. 저 수아 님을 뵈었어요.”

“누구?”

“아카시스 수아 님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수아가 그의 눈 밖에 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황궁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라, 혹여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뒤늦게 걱정이 되긴 하였다.

그런데 정작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산책을 하다가, 정말 우연히 만났어요.”

“그래.”

“……혹 폐하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걸까요?”

“우연히 만난 걸 어떻게 허락을 받아.”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더하고 뺄 것도 없는 그의 진심이었다.

애초에 에단은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수아를 만나든 말든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그럼 제가 계속 만나도 되나요?”

“안 된다고 하면 안 만날 건가?”

“조금 서운할 거 같지만, 그래야죠. 폐하의 명령이라면.”

그녀의 붉은 눈이 그의 눈을 보며 답했다. 정확히 정답인 대답이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정말요?”

“그래.”

“감사합니다.”

그녀는 제법 기뻐했다. 아무래도 친구를 만들고 싶었나 보다.

그 상대가 수아 켈트라는 사실이 조금 의외였으나, 한편으론 그녀여서 친구가 되고 싶은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아 켈트 역시 아무런 욕심이 없는 여자였으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수아 님 후궁에 들어가서 차를 마셨는데, 정말 향이 좋더라고요. 무슨 차인지 물었는데 음. 어디더라 남부 어디에서 올라오는 특산물이라던데.”

“세르비.”

“맞아요! 세르비 지방에서 올라오는 귀한 차라고 들었어요. 저는 처음 마셔 보는 건데 정말 좋더라고요. 그런 좋은 차가 널리 유통 안 되는 게 아쉬웠어요.”

그는 당장 내일 제롬을 시켜 그녀에게 세르비 차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부드러운 붉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하는 말을 계속 들어주었다.

아빠에게 하루 일과를 조잘대는 어린 딸처럼 자세히도 말하는 그녀가 그저 귀여웠다.

“수아 님, 진짜 너무 예쁘지 않아요? 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너무 그림 같아서 빤히 쳐다보았어요. 목소리도 너무 예쁘고, 기품이 그냥 흘러나오는 것 같았어요.”

서로의 흠을 잡아 깎아내리기에도 바쁜 다른 비들과는 달리 이리 열을 올리며 다른 여인을 칭찬하는 그녀는 해맑기도 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 한숨이 나왔다. 질투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적어도 칭찬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저는 확실히 아리스 님보다 수아 님이 취향이에요. 솔직히 아리스 님도 놀랄 정도로 미인이긴 한데 저는 그런 화려한 미인은 별로예요. 그것보단 청순한 수아 님 쪽이 훨씬 더…….”

“내 취향은 이쪽인데.”

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제 보니 칭찬에 약한 여자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에서 서서히 내려가 훤히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를 쓸었다. 그러자 그녀는 바로 움찔거렸다.

“확실히 이쪽.”

“읏.”

그의 입술이 훤히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대로 붉은 흔적을 남기자 그녀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꽤나 티 나게 새겨진 자신의 흔적이 마음에 드는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보이는 데 하지 마시라니까. 한동안 가리고 다녀야 한다고요.”

“안 가리면 되지.”

“민망하게 어떻게 그래요!”

“네가 가려 봤자 어차피 다 알아. 내가 네 몸 구석구석 키스했다는 거.”

“어우. 정말!”

그의 짓궂기도 한 말에 그녀는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를 한껏 흘기는 그녀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다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수아 님이랑 즐거운 시간 가졌어요. 다음에는 제 궁으로 오시라 초대했는데, 수아 님이 오실지 모르겠네요. 오시면 좋을 텐데. 앞으로 더 친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래.”

수아 켈트는 켈트가의 유일한 영애다. 그의 입장에서는 몰브가의 독주를 막기 위해 켈트가가 필요했으므로 일부러 아리스 몰브와 동시에 입궁시켰다.

그러나 첫날밤, 그녀는 커다란 실수를 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게 되었지.

그런 수아 켈트가 그녀와 가까이 지낸다고 하는 건 계산을 조금 더 해 봐야 할 일이다.

잘하면, 카이로스에 아무런 연줄 없는 그녀에게 켈트라는 엄청난 뒷배가 생길 수도 있었다.

물론 그녀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만.

“아. 그리고 곧 있으면 사냥 대회가 있을 거란 소식을 들었어요. 저도 참석하는 줄 알고 흥분했는데 비들은 말 타고 마중 정도만 한다면서요.”

로엘은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에단은 그 팔로 무슨 사냥을 하냐고 묻고 싶었으나, 괜히 화만 돋울 것 같아서 말았다.

“원하면 데려가 줄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어휴. 됐습니다. 무슨 소리를 또 들게 하려고. 얌전히 기다릴게요. 저는 오랜만에 말 타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저 말 타는 거, 정말 좋아하거든요.”

사실 그녀는 토르티아에서 가져오고 싶은 말이 있었다. 아버지와 손을 잡고 마시장에 가서 직접 골라온, 그녀의 첫 말이었다.

직접 털을 빗겨 주고 사료를 챙기며 애지중지해 왔는데, 아버지를 잃은 후 그 말도 아버지의 유품이라며 죽여 버렸다.

그날 어찌나 울었던지,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정말 예뻤는데. 이름이 모모였어요. 폐하께 보여 드릴 수 없어서 아쉽네요.”

로엘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추억에 잠겼다. 어린 날의 기억이 나,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에단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폐하?”

“일어나. 갈 데가 있어.”

“갑자기 어딜…….”

다짜고짜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밖으로 나섰다.

몰래 들어온지라 그녀는 마주치는 근위병들 보기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 색깔만 아니어도 모르는 척할 텐데, 지나치게 눈에 띄는 붉은 머리색이 너무도 그녀의 정체를 드러냈다.

“이러다 제가 몰래 들어온 거 소문 다 나겠어요……!”

“내 근위병이 네가 몰래 들어온 건 못 막아도, 입 다무는 건 잘하니 걱정 마.”

그의 일을 함부로 나불거릴 만큼 그의 측근들이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호위병도 물린 채, 그녀와 함께 황궁을 걸어갔다. 영문을 모르는 그녀는 반강제로 그가 이끄는 대로 바삐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도대체 어딜 가시는 거예요? 말씀이라도 해 주시고 가면 좋…….”

“열어.”

그녀가 투덜투덜하고 있는데, 어느새 그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단 두 음절의 명령에 지키던 병사는 두 말 않고 길을 텄다. 그 큰 문이 열리자, 그제야 로엘은 그가 어디에 데려왔는지 바로 알았다.

으리으리한 이곳은 황제 전용 마구간이다.

“골라.”

“네?”

“고르라고. 선물이야.”

너무 갑작스러운 선물에 그녀는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얼굴이 상기될 정도로 기뻐했다.

“정말 주실 거에요?”

“황제가 허언을 할까.”

“감, 감사합니다. 폐하!”

역시나 금은보화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카이로스 최고의 명마만 모아 놓은 곳이다. 단 열 마리였지만, 이 열 마리는 종마 중의 종마. 가히 웬만한 영지의 한 해 예산은 될 만한 가치의 말들이다.

토르티아는 유명한 기마의 국가. 토르티아 백성이라면 무조건 각자의 말이 있을 정도로 기마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 곳의 공주인데 그녀가 종마를 못 알아볼 리 없다.

“그럼, 저는 이 아이로 할게요.”

역시나 그녀의 선택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말들 중, 그녀는 가장 그녀에게 어울리는 것을 골랐다.

수컷의 적토마였다.

“이름이 있었나요?”

그 사나운 적토마도 주인을 알아보듯,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과 눈을 맞추며 미소 짓는 그녀에게 말도 응답하듯 얌전히 있었다.

그는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붉은 대지. ‘레아’라고 불렀다.”

“멋진 이름이네요. 마음에 들어요.”

그녀는 양손으로 레아를 쓰다듬었다.

“잘 부탁해, 레아.”

여명의 공주에게 붉은 대지의 말이라. 꽤나 잘 어울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그를 뒤돌아보며 환하게 미소 짓는 그녀에게 그 역시 미소 지었다.

“그래,”

매년 가을 열리는 뻔한 추수 사냥 대회가 이번에는 기다려질 것 같다.

레아를 탄 그녀가 보고 싶어서.

***

“이번 사냥 대회요?”

“그래.”

아리스는 꽤나 놀란 눈으로 케인을 바라보았다. 거사를 치를 것은 알았지만 그 시기가 이리 빠를 줄은 몰랐다.

“질질 끌 일이 아니다. 더 이상 기어오르기 전에 밟아 버려야지.”

나지막이 말하는 케인의 목소리에는 꽤나 분노가 실려 있었다.

분명 지난번 만남까지만 해도 사사로운 것에 신경 쓸 거 없다던 반응과는 사뭇 달랐다. 그녀의 오라비답지 않은 성급함에 아리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셨어요? 무언가 다른 소식을 들었다든가…….”

“그런 거 없다.”

“아니면 설마 폐하께서 그 계집을 황후로 올린다고 하셨나요!”

“그런 거 아니래도!”

케인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케인의 호통에 아리스는 물론, 그 뒤에서 차 시중을 들던 애나도 깜짝 놀랐다. 종종 신경질 내던 아리스와 달리 늘 여유 넘치던 케인이었는데 오늘은 그답지 않았다.

“오, 오라버니?”

“그렇게 결정했으니 더 이상 토 달지 말고, 넌 시키는 대로만 해. 뒷수습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네.”

험악해진 케인에게 아리스는 더 이상 어떤 말을 할 수 없었다. 섬뜩한 미소를 짓는 케인의 모습에서 순간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 아리스는 등골이 서늘했다.

케인이 말하는 그 계획이라는 것이 어쩌면 로엘이 영영 이 성에서 사라져 버리는 계획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케인 몰브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오라버니만 믿겠습니다.”

그런데도 아리스는 케인을 말리지 않았다. 그러기엔, 계속 로엘과 함께하던 에단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미소. 그 미소가 그녀를 너무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로엘 네아레스만 없애 준다면 그녀는 어떠한 위험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

“다른 비들 문제는 제가 확실히 해결할게요. 걱정 마세요. 그러니, 그 계집. 이 카이로스 황궁에 다시는 발도 못 붙이게 해 줘요.”

이미 결심을 굳힌 눈으로 아리스는 케인을 직시했다. 그런 아리스에게 케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아리스도 몰브가의 핏줄이란 거다.

“다시 연락하마.”

장애물이 있으면 제거하고, 기어오르면 철저히 밟아 준다.

원하는 게 있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독하기로 유명한 몰브가의 남매가 간만에 뭉치려 했다.

감히 그들의 질서에 도전하는, 이방인 공주 로엘을 향해.

***

“그래서 이반은 언제 온다는 거야.”

“이반 전하의 성격상 서두르실 거 같진 않고, 적어도 사나흘 내에는 도착하시지 않을까 합니다.”

“모르지 또. 갑자기 방랑벽이 도지셔서 훌쩍 떠나실지도. 그렇죠, 폐하?”

에단은 루카스의 말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충분히 이반은 그럴 사람이었다.

그만큼, 붙잡기 힘든 바람 같은 인물이다.

“그래도 이번엔 온다고 하셨으니, 오실 겁니다.”

“이번에도 안 들어오면 포승줄로 묶어서라도 데려와.”

“제가 하겠습니다! 그거, 제가 할게요!”

에단은 얼굴을 찌푸리며 진심으로 말하고, 그런 그의 말을 루카스는 좋다고 신나 하고, 아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는 에단이라면, 충분히 이반에 대한 수배령을 내릴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눈치 빠른 황자님께서는 늘 폐하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기 직전에 나타나 주신다는 거다.

“아무튼, 이반 전하께서 오신다면 이번엔 꼭 붙잡아 두셔야 합니다. 북방 계획에 이반 전하는 꼭 필요한 패니까요.”

“그럼요. 이반 전하가 국경에도 오래 계셔서 큰 도움이 되실 거예요. 그 전에도 계속 여행하시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셨구요. 그 성격에 북방도 이미 한 바퀴 돌아보셨을지도 몰라요.”

에단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황태자로 즉위하고 본격적으로 황위 계승 수업에 들어간 후부터, 그는 약속이라도 한 듯 카이로스에서 사라졌다. 아무도 그를 밖으로 내몬 적이 없는데 이반 스스로 에단의 길에 누가 되지 않도록, 괜한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자리를 피해 준 거다.

그 후 몇 년의 기간 동안 그는 황족이 아닌 듯 방랑자처럼 살았다.

에단은 그런 이반을 사랑했다.

“어찌 되었든, 이반이 성문을 넘는 순간 보고하라 그래. 내가 나가서 멱살을 잡고 올 테니.”

“네. 폐하.”

그 사실을 아론과 루카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까칠한 말투에서도 뚝뚝 떨어지는 애정이 숨겨지지 않았으니까.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멀리서 후궁 무리가 보였다.

으레 그러듯, 사냥하러 나가는 남자들의 안위를 기원하는 것은 여자의 몫이었으므로 황제의 여인인 비들과 귀족의 여식들이 무리를 이루어 다가왔다.

남자들의 입장에서야 평소에 제대로 만날 기회가 없는 카이로스의 미녀들을 볼 수 있으니 안 좋아할 리가 없고, 다른 귀족 여식들 역시 괜찮은 귀족 자제들과 황족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니 안 꾸밀 리가 없다.

그래서 남녀 모두 가장 기다리는, 이 짧은 환대 시간이 사냥 대회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이야. 올해도 다들 힘을 빡 주었는데요.”

루카스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기분 탓일지 몰라도, 올해는 유난히 아리스가 더 힘을 준 것 같았다. 저렇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어떻게 말에 올랐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아리스보다도 더 주목을 받는 한 사람.

“오오. 저기 로엘 님, 보인다!”

루카스의 말에 에단 역시 잠시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붉은 머리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멀리 있어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그녀는 한껏 불만스런 표정으로 걸리적거리는 드레스를 정돈했다.

그 모습에 에단은 피식 웃었다.

지금 굉장히 불만일 거다. 자신이 생각했던 ‘사냥’이 아니어서.

“응? 폐하. 로엘 마마가 타고 계신 저 말…….”

“맞아.”

“저거 엄청 귀한 거잖아요! 이제 몇 마리 남지도 않은 토종 적토마! 저거 폐하께서 엄청 아끼셔서 제가 한 번만 타 본다고 해도 안 빌려주셔 놓고는, 저걸 로엘 마마께 주신 거예요?!”

아론도 꽤나 놀란 얼굴로 에단을 보았다.

에단이 직접 산책시키고 직접 빗질까지 해 줄 정도로 유난히 아끼던 말이었다. 물욕이 별로 없는 그가 유일하게 욕심내는 것이 말이었는데, 그중 가장 아끼는 것이 지금 그가 타고 있는 카이로스 황족의 상징 토종 백마 수스페였고, 그다음으로 아끼는 것이 로엘이 타고 있는 저 적토마, 레아였다.

“진짜 너무해요, 폐하. 제가 엄청 탐냈던 말이었는데.”

“내가 준 거 아니야. 자기가 알아서 고른 거지.”

“네?”

에단은 말없이 그저 웃었다. 역시나, 생각대로 그녀가 레아를 타고 있는 모습은 제법 어울렸다.

처음부터 그녀의 말이었던 양 레아 역시 그녀의 말을 잘 들었다.

그렇게 여인들의 무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소란스러워짐에 에단이 살짝 짜증을 내려는데 또다시 루카스의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건 그렇고. 이야. 역시 아름답네요, 로엘 마마. 단숨에 모든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어요.”

에단은 순간 표정이 확 굳었다. 그제야 그녀를 바라보는 수많은 남자들의 시선이 들어왔다.

“확실히 눈에 띄네요. 아리스 님과 비교해서도 절대 밀리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이렇게 아리스 님과 같이 계시니까 그 미모가 더 폭발하는 거 같은데요?”

에단은 더더욱 표정이 굳어 갔다. 저 둔한 공주님께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다른 이들은 하나같이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특히, 그녀가 드레스를 정리하면서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릴 때마다 보이는 매끈한 종아리는 사뭇 그곳에 있는 여럿 사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에단은 이마에 핏줄이 서는데 말이다.

“붉은 머리도 눈에 띄지만, 저 하얀 피부하며, 이목구비도 너무 뚜렷하시고. 무엇보다도 몸…….“

“야! 그만 떠들고 가서 행사나 진행해. 대장군이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에단을 다행히 아론이 제일 먼저 알아차리고, 루카스가 더 실수하기 전에 그의 말을 막아 버렸다.

뒤늦게 에단의 살벌한 눈빛을 본 루카스는 알아서 깨갱 하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 없이 몸매가 좋다는 말까지 했으면, 진짜 폐하의 검에 목이 날아갈 뻔했다.

“자. 그럼 얼른 시작하겠습니다.”

루카스가 도망가듯 자리를 피하고, 아론 역시 몇 걸음 앞서 에단의 앞길을 텄다.

에단은 뒤늦게 그의 시선을 알아채고 몰래 활짝 웃어 주는 그녀에게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정말 주변은 아랑곳도 않는 여자다.

“가자.”

“예. 폐하.”

그냥 궁에 있으라고 할 걸 후회막심이다.

***

“맘에 안 들어.”

로엘은 잔뜩 뚱한 얼굴로 말했다. 지루한 풍년 기원 의식을 기다렸더니만, 돌아오는 건 사냥하러 나가는 남자들을 위한 형식적인 배웅 인사였다.

“기대한 내가 멍청이지.”

그녀는 화려하기만 한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승마에 드레스라니. 이건 처음부터 달릴 마음이 전혀 없단 거였다.

로엘이야 안장에 제대로 앉아 레아를 몰기라도 했지, 나머지 비들은 아예 대놓고 옆으로 걸터앉아 기수가 말을 몰았다.

산책하듯 천천히 움직이며 서로들 이야기하는 모습을 외톨이 로엘은 시에라와 함께 뒤에서 지켜보았다.

“이럴 거면 도대체 왜 비들을 나오라는 거니? 차라리 안에서 쉬게라도 해 주지.”

“마마. 진짜 사냥을 기대하셨나 보군요.”

“사냥 대회라고 하니 당연히 기대했지. 토르티아 같았으면 난리 났어. 세상에 이런 불평등이 어딨어!”

“그러게요. 카이로스가 참, 불평등한 곳이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시에라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오로지 딸이란 이유로 가문에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딜리아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로엘은 살며시 시에라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 시에라가 최고라는 건 모든 이들이 알고 있어.”

그런 그녀에게 시에라 역시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위로가 되었다.

“마마께서 알아봐 주셨으니 괜찮습니다.”

시에라는 진심이었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한 사람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지금까지의 상처가 아물었다. 단번에 자신을 최고라고 알아봐 준, 그래서 곁에 있어 달라고 먼저 손을 내민 그녀를 시에라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한결같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분.

시에라는 이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었다.

“음? 앞에서 멈췄는데?”

앞서가던 아리스의 무리가 일제히 멈췄다. 멀리서 보니 더 앞서 나가던 황제 무리에서 나온 군사가 무언가 서신을 가져온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아카시스님. 아무래도 아카시스님께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걸 아리스가 미소와 함께 로엘에게 전했다.

로엘은 순간 당황했다. 절대 그녀가 아는 아리스라면 황제께서 그녀만 오라고 쓴 친서를 순순히 넘길 위인이 아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아카시스님이 보고 싶으신가 보군요.”

“얼른 가세요, 마마. 폐하를 기다리게 할 순 없지요.”

거기에 다른 비들 역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재촉했다.

그 모든 것들이 너무 어색해, 로엘은 기분이 싸했다.

분명 뭔가가 있는 거였다.

“마마.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시에라도 느꼈는지, 바로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서신을 들고 온 병사가 그런 시에라를 막아 세웠다.

“어디 일개 시녀 따위가 폐하를 알현하는 자리에 따라가겠다고 하는가. 마마는 내가 모시겠다. 물러서라.”

어깨에 달린 황금 견장이 그가 황제를 모시는 황군 소속임을 나타냈다. 즉, 그가 시에라의 상관이라는 거다.

시에라는 몰래 주먹을 쥐었다. 군인인 이상 시에라는 그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시에라. 여기서 기다려. 얼른 다녀올게.”

“하지만 마마…….”

“괜찮아. 설마 감히 황제군을 사칭하겠어? 제정신인 한 그런 짓은 못 해.”

그녀는 싱긋 아리스와 비들을 보며 말했다.

순간 나머지 비들은 뜨끔했다. 아리스가 다짜고짜 불러 무조건 거들라고 하길래, 시키는 대로 했는데 로엘의 말을 듣고 보니 뒤늦게 두려움이 몰려왔다. 일이 틀어지면 그녀들에게까지 책임을 물을지도 모른다.

“그럼요. 감히 누가 황제군을 사칭한단 말입니까? 아카시스. 폐하의 사랑을 괜한 의심으로 폄하하지 마세요. 무례입니다.”

그에 비해 아리스는 당당해도 너무 당당해 오히려 로엘에게 면박을 주고 있었다.

아리스는 로엘의 말 한마디에 바로 쭈뼛거리는 그녀들을 속으로 비웃었다. 그 정도 말에 흔들릴 마음으로 무얼 도모하겠다는 건지 한심스러웠다.

일이 성사된다면 저 잘난 듯 지껄이는 얼굴을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되고, 설사 일이 틀어진들 들키지 않으면 그만.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럼 좀 이따 뵙죠. 앞장서시게.”

그녀는 걱정 가득한 시에라를 뒤로하고, 황제군이라 칭하는 자를 따라나섰다.

“잘 가세요. 아카시스.”

아리스는 그런 로엘의 뒷모습을 보며 조소를 뱉었다.

오라버니가 부디 일을 잘 마무리하시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

“폐하께서 놀라시겠습니다. 마마께서 이리 일찍 오셔서.”

“역시 그렇지? 그럼 딴 데 잠시 들렀다 갈까?”

“아니요!”

이반의 태평한 소리에 콜린은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이번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쭉 달려오다 보니 벌써 카이로스 성문에 다다랐다.

올 때마다 도망 나갔던 이곳에 어김없이 다시 돌아오는 걸 보면, 그에게 이곳이 집이긴 집인 모양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단 생각이 들지.”

“뭐, 저희가 기별을 안 하고 지나치게 빨리 온 것도 그러하고, 오늘이 그 날이기도 하고요.”

“그 날?”

“추수 사냥 대회요.”

“아.”

그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적인 행사인데 당연히 조용할 만했다. 귀족들이란 귀족들은 죄다 참가했을 테고, 일종의 축제이기도 하여 웬만한 평민들도 죄다 구경 갔을 터였다.

한산한 카이로스 도심을 가로지르며 이반은 몇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여전하네.”

“아니요.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요. 에단 폐하 즉위 이후 매년 성장하고 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 내 형제께서 하늘이 내린 왕재라는 건.”

“그건 전하도 마찬가지세요. 그러니까 분발하시라고요.”

“또, 또. 입조심.”

이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들으면 경을 칠 소리였다.

콜린은 그런 이반의 핀잔에도 꿋꿋했다. 이반이 왕이 될 재목이란 생각은 그가 이반을 보필하게 된 이후로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함께할수록 더더욱 커져만 갔다.

“엄연히 이반 전하께서는 황위 계승권 1위이십니다. 후일을 대비해도 이상할 게 없어요. 폐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실지, 누가 안 답니까?”

“콜린. 그만.”

결국 이반의 말이 멈췄다. 정색하는 그의 얼굴에, 콜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과했습니다.”

이반은 한숨을 쉬었다. 그에 대한 충정이 깊은 건 감사하나, 가끔 정말 과했다.

이반은 순수하게 콜린의 저런 태도가 콜린 자신을 위험하게 할까 걱정되었다.

“나는 너랑 오래 함께하고 싶어. 그러니 단숨에 목이 날아갈, 그런 말들 좀 하지 마. 내가 다 간담이 서늘하다.”

“전혀 듣지도 않으시면서.”

다시 두 사람의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속 투덜대는 콜린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화제를 돌려야 할 거 같았다.

“일단 폐하가 계신 곳으로 바로 가자. 간만에 내가 먼저 놀래켜 드리게.”

“네. 사람 많은 데 가서 이반 전하가 오셨다는 걸 대대적으로 알리는 것도 좋죠.”

“그래, 그래. 일단 가자.”

성으로 향하던 말머리를 매년 사냥 대회가 열리는 숲으로 돌렸다.

가는 길에 몇몇 사람들이 이반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고, 그런 백성들의 인사에 그는 언제나처럼 친근하게 답했다.

콜린은 그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속으로 한 번 더 한숨을 삼켰다.

이런 분이 왕이 되셔야 한다. 이런 분이 황제가 되셔야 백성을 굽어 살피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나라가 되는 거다.

“아무리 그래도 평소보다 더 사람이 없는 거 같은데?”

“음. 아마 그분을 보러 간 게 아닐까요? 그 유명한 붉은 머리 아카시스님 말입니다.”

“아. 토르티아에서 온? 하긴. 카이로스 사람들에겐 낯설긴 하겠지.”

“들리는 소문에는 엄청난 총애를 받는다던데요?”

“총애? 폐하로부터?”

“네. 그래서 더 유명해지신 거 같아요. 바로 ‘그 폐하’로부터 받는 총애니까요.”

이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토르티아의 황녀는 절대 폐하 취향이 아니었다.

“되게 의외네. 내가 알기론 그 토르티아의 황녀, 성격이 안 좋기로 유명하던데. 예전부터.”

“아. 전하께서 착각하고 계셨구나. 이번에 오신 분은 황녀가 아니라 제1공주세요. 그 있잖아요. 제이드 네아레스 님의 무남독녀.”

순간 이반은 급하게 말을 세웠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콜린을 보았다.

“누구라고?”

“토르티아 제1공주 로엘 네아레스 님이요.”

이반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콜린의 다음 말이 들리지 않았다.

‘너는 겁쟁이야. 또다시 이렇게 선택의 기로에서 도망치고 있어.’

‘그래서 너는 무얼 하고 싶은 건데? 그래서 너는 무얼 꿈꾸는 거지? 어쩔 수 없다는 건 변명일 뿐이야. 너는 네 마음을 들여다보려고조차 하지 않아.’

‘비겁해.’

벌써 5년도 더 된 일이건만,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모든 것들이 기억났다.

그를 비난하던 그녀의 눈빛. 목소리. 표정. 전부 다 선명했다.

“이반 전하?”

그래서 지금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숨이 가빠질 만큼 심장이 뛰었다.

바로 그 붉은 여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가장 사랑하는 형제의 비가 되었다.

“……가자. 얼른.”

이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영문을 모르는 콜린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이반을 조용히 따랐다.

천천히 걸어가던 그의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쿵쿵.

이반의 심장이 갈수록 더 빨리 뛰었다. 그 이유가 단순히 오래된 인연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인지, 아니면 그 인연이 다른 사람의 인연이 되어 버려서인지 이반은 알 수 없었다.

***

“아직인가요?”

이미 한참을 왔건만 앞서가던 병사는 멈출 줄을 몰랐다. 참다못한 로엘이 결국 먼저 말을 붙였다.

“이렇게 멀리 가셨을 거 같지 않은데…….”

“이제 다 와 갑니다.”

갈수록 인적이 드물었다. 흩어져서 사냥을 한다고 해도 너무 한적했다. 아예 두 사람의 말발굽 소리 외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떠한 소리도 밖으로 나갈 거 같지 않았다.

“잠시만요.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거 같…….”

“아니요. 제대로 왔지요.”

먼저 그 병사의 말이 멈추고, 뒤이어 로엘의 말도 멈추었다.

그리고 약속한 듯 그녀를 둘러싼 의문의 남성들.

로엘은 피식 웃음을 뱉었다. 설마 했더니, 진짜 모략이라니.

로엘은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이야. 놀라지도 않으시네. 야만국에서 오셔서 그런가?”

“아님, 지금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시나?”

“마마님. 지금 되게 위험하세요? 자칫했다간, 우리 모두를 상대해야 할지 모른다구요? 여러 의미로.”

외설적이 농담에 사내들이 소리 내어 낄낄대었다.

그 조소 사이에서도 로엘의 입가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게 레아의 안장에 달려 있던 칼을 빼냈다.

“오오? 마마님. 칼 빼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데?”

“이거 진짜 우리랑 뒹굴어 보실 생각인가? 하하!”

“이거 우리를 너무 무시하시네.”

“인정.”

기껏해야 귀족 자제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정도일까 했는데, 이렇게 대놓고 암살을 계획하다니.

확실히 그녀가 아리스 몰브를 너무 얕보았나 보다.

그녀는 능숙히. 아까부터 거추장스러웠던 드레스 밑단을 과감히 칼로 베어 버렸다. 그러자 그녀의 매끈하고 하얀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여기저기서 휘파람을 불어 댔다.

“아니. 다른 의미로 뒹구시려나?”

“어차피 여기서 골로 가실 거, 그것도 나쁘지 않지.”

“누구 마음대로?”

그녀는 한 번 더 피식 웃음을 뱉었다.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는 그 조소가 너무 진심이어서 웃고 떠들던 사내들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정도로 기분 나쁜 비웃음이었다.

“기껏해야 일개 귀족 가문의 사병 주제에, 감히 토르티아의 공주를 죽이려 하다니. 토르티아란 이름이 울겠다.”

그리고 제이드 네아레스의 이름이 울겠지.

너무 오랜만에 잡아 보는 검의 감촉에 그녀 역시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능숙히 상체를 낮추고 자세를 취했다.

“자. 같이 놀아 볼까요.”

몰브가 시작한 칼부림.

아무래도 그녀의 피바람으로 끝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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