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아카시스 로엘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정오, 눈이 부신 햇빛 아래 에단은 산책 중이었다.
결코 반갑지 않은 사람들과.
“그럼 니케 지역 수로 공사 건은 그렇게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현 카이로스 원로원의 수장이자, 몰브가의 가주인 피어 몰브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가문이 폐하께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몰브가의 장남, 케인 몰브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폐하. 아버지와 오라버니께서 일심양면으로 도우실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막내딸, 영애 아리스 몰브까지.
이 여름날에도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온 그녀는 보는 것만으로도 더워 보였다.
그들보다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루카스는 시종일관 에단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리스를 보며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외모만 따지면 확실히 카이로스 제일인데 말이지. 어떻게 저 외모를 가지고도 남자 마음 하나 사로잡지 못하지?”
“그 남자가 보통 남자가 아니니까 그렇지. 폐하가 너같이 단순한 줄 알어.”
아론은 이 와중에도 시답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루카스가 더 한심했다.
그보다는 걸으면서도 몰브가 가져온 예산서를 훑어보기 바빴다.
“들어가서 찬찬히 해. 뭐가 급하다고.”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야. 폐하께서 괜히 저 아첨 가득한 말을 듣고 있는 게 아니라고.”
아론은 꽤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큼, 이번 몰브가가 가져온 건은 꽤나 컸다.
천하의 에단조차도 쉽게 무시하지 못할 만큼.
“폐하께서는 북방 정벌을 염두에 두고 계셔. 그 사실은 원로원 모두가 알지. 그럴 때, 이렇게 국책 사업 하나를 맡아서 지원하겠다는 건, 솔직히 황실 입장에서 큰 도움이 돼. 그래서 폐하도 수락하신 거고.”
“그럼 문제 될 거 없잖아? 뭐가 문제인데?”
“멍청아.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게다가 상대는 능구렁이 피어 몰브라고. 저 늙은이는 절대 손해 보는 장사 안 해.”
그러니 카이로스 같은 절대 황권국에서도 십수 년간 권력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큰 국책 사업을 한 가문이 전담하게 되면 그만큼 그 가문의 영향력도 커진다.
그러지 않아도 말 안 듣는 원로들이 몰브 중심으로 결집해서 머리 아픈 와중에 몰브의 영향력이 더 커진다면, 원로원들의 통제는 더 힘들어질 게 뻔하다.
심지어 북방 정벌에 나서면 한동안 궁을 비우셔야 하는데, 그동안 몰브가가 얼마나 정국을 장악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그러니 에단 입장에서도 이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수락하는 데에 고민과 짜증이 일 수밖에.
아론은 이미 짜증이 한가득 차 있는 에단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폐하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듯했다.
“저 늙은이가 원하는 거야 뻔하지 뭐.”
“……뻔하긴 하지.”
생각에 빠져 있는 아론의 시선이 루카스를 따라 아리스에게로 향했다.
상기된 얼굴로 오매불망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에단을 바라보는 아리스는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런 아리스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피어와 케인.
몰브가가 원하는 건 루카스 말대로 단 한 가지다.
바로 카이로스의 황후 자리.
그리하여 그들의 핏줄이 황위에 오르는 것.
“앗!”
에단만을 바라보느라, 진짜로 발이 꼬여 버린 아리스가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찰나, 에단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 주었다. 아론과 루카스 눈에는 에단의 지나치게 좋은 운동신경의 무의식적 반응에 불과했으나, 아리스 입장에서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다정함이었나 보다.
무심한 그의 표정에도 아리스는 금세 붉어진 얼굴로 에단에게 감동 어린 감사를 전했다.
“폐하……. 감사합니다.”
물론 에단은 그 인사를 제대로 받기도 전에 걸음을 다시 옮겼지만.
루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래선 황후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아야 할 판인데.”
“저러니 수로라도 건설하겠다는 거 아니야. 가문 도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니까.”
한편 에단은 그만 이 의미 없는 산책을 그만하고 싶었다.
이들과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산책까지 하는 것으로 충분히 그는 인내할 만큼 인내한 셈이다. 결국에는 자신들의 계산기를 두드려 투자하는 것임에도 마치 그를 위해 큰 희생을 한다는 양 구는 몰브가의 태도가 심히 거슬렸다.
게다가 이 기회를 얻어 황후 자리에 아리스를 밀어 넣으려는 그 뻔한 속셈도 꼴불견이다.
그는 그의 옆자리를 결코 이리 잇속 챙기기 바쁜, 권력욕에 찌든 몰브에게 줄 마음이 없다.
“폐하. 제가 최근에 북방의 교역상으로부터 귀한 술을 얻었습니다. 여식 편으로 보냈사오니 오늘 한번 시음해 보소서.”
“예, 폐하. 오늘 밤 제 후궁에서 대접하겠…….”
“로엘.”
두 부녀의 말을 싹둑 자르는 에단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들 갑작스런 그 두 음절에 순간 당황했다. 애초에 ‘로엘’이 누군지 단번에 와닿지 않았다.
몇 초 후 그의 시선 끝에 엉거주춤 서 있는 그 붉은 머리 여인을 보고서야 알아챘다.
소문이 무성한, 여명의 공주.
토르티아의 로엘 네아레스.
“아카시스는 황제를 보고도 인사를 안 하는가.”
여지껏 황제와 그의 시종장 제롬 이외의 남자에게는 얼굴을 보인 적 없는 바로 그 붉은 머리의 공주다.
뜨거운 태양 아래, 차양 하나 쓰지 않고 햇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던 그녀는 멀리서도 그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하늘 같으신 폐하를 뵙습니다.”
데리고 있는 시녀는 고작 둘. 소박하기도 한 무리였다.
아리스와 비교하면 얌전해도 너무 얌전한 드레스 차림이어서 그나마 목에 걸린 루비 목걸이 하나가 그녀의 신분을 나타내 주었다.
에단만이 저 루비의 의미를 알아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은근히 말을 잘 듣는 구석이 있다.
“그럼 저는 이만…….”
“로엘.”
그가 한 번 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모두의 시선이 이번에는 에단에게로 쏠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그’가 ‘이름’을 부르다니.
이는 지켜보는 모두에게 너무도 낯설었다. 아니, 이름뿐이랴, 아리스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로 옅은 미소마저 보이는 그에게 몰브가뿐 아니라 아론과 루카스마저 충격받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그 황제 폐하가 맞는가 싶다.
“아카시스 로엘.”
딱 보아도 베리타스에 갔다가 돌아가려는 길에 그들과 우연히 마주친 모양이었다. 그녀 딴에는 몰래 빠져나가려 했으나 운 안 좋게 에단의 눈에 띄어 버린 거다.
기어코 그녀를 가까이로 부르는 그에게 로엘은 한껏 불만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그는 뻔히 그녀의 속을 알면서 괜히 짓궂은 장난을 하고 있는 거다. 로엘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가만있자, 저 붉으락푸르락하는 아리스의 표정만에서 어떤 상황인지 각이 나왔다.
그렇다면 상황에 맞는 인사를 해야겠지.
“토르티아 제1공주, 아카시스 로엘입니다.”
에단의 명령에 의해 마지못해 걸어왔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로,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고개 한 번을 숙이지 않고 우아하게 피어 몰브 앞에 손등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몰브 공작.”
존대를 하였으나, 분명 그녀의 시선과 태도는 명백한 ‘하대’.
허공에 떠 있는 그 하얀 손이 소리 없이 피어에게 명령한 셈이다.
네 신분에 따라 어서 고개를 숙여 이 손등에 경의를 표하라고.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결국 피어의 허리가 먼저 굽혀지고 말았다. 그 모습에 케인과 아리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앞으로 종종 뵙지요, 몰브 공작.”
천하의 피어 몰브를 초면에 하대하는 여자라.
에단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역시나, 영리한 여자다.
그러니 저 늙은이가 속으로 얼마나 참고 있겠는가. 낯빛이 달라진, 그 정색한 얼굴은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못했다.
에단은 일부러 보란 듯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아카시스는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산책 중이었습니다.”
“여기로 안 다니는 걸로 아는데.”
“이쪽 길로도 다닙니다.”
그녀는 딜리아 손에 있는 책이 괜히 걸릴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한데, 에단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얄미워서 그녀는 애써 웃으며 또박또박 힘주어 그의 말에 답했다.
물론 눈으로는 얼른 보내 달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면서.
“그럼, 그 산책 나도 같이 하지.”
“아니, 안 그러셔도 되는…….”
“그럼 잘 가시게. 몰브 공작.”
그는 두 번 말하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어깨를 안고 걸음을 돌렸다.
붙잡을 틈도 없이,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에단과 로엘을 몰브가들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 박자 늦게 호위하던 루카스와 아론 역시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렇게 덩그러니 몰브가 사람들만 남았다.
“……저 계집이라고?”
“예, 아버지.”
이는 철저히 무시한 셈이다. 어린 황제와 그보다 더 어린 이국의 공주가, 감히 카이로스의 대 공신 몰브가의 수장을 말이다.
“야만국에서 팔려 온 주제에 감히 어디서……!”
피어는 분에 못 이겨 손이 다 떨려 왔다.
그러지 않아도 새파랗게 어린 황제에게 매번 고개를 숙이는 것도 속에서 울화가 치미는데 이제 하다못해 그런 어린 계집에게까지 고개를 숙여야 한다니.
황제야 그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굴러들어온 계집은 말이 다르다.
“아버지, 저도 여러 번 당했습니다. 어디 분수도 모르는 년이 들어와서 이렇게 몰브가에 모욕을 주는데 제가…….”
“뭘 잘했다고 말을 꺼내! 저깟 계집 하나 어쩌지 못해서 가문에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결국 불호령이 아리스를 향했다.
원래부터 아버지를 워낙 무서워했던지라 아리스는 피어의 호통에 금세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러니 케인이 감쌀 수밖에.
“이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어차피 카이로스에 연줄 하나 없는 계집. 잠깐일 뿐인 황제의 총애를 받아 보았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손쓸 수 있으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꽤나 위험한 말을 케인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담담한 반응에 오히려 피어가 할 말을 잃었다. 케인이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하고야 만다는 걸 알아 피어는 잠시 숨을 골랐다.
케인의 말이 맞다. 그깟 혈현단신으로 온 비 하나에 그가 이렇게 열을 낼 이유가 없다.
“……그럼 이건 케인이 맡아서 해라. 아리스, 넌 경거망동하지 말고 후궁 단속이나 잘하고.”
“예, 아버지…….”
“쯧쯧. 그렇게 뒷돈을 써서 자리를 만들어 줬건만 남자 마음 하나 잡지 못해서.”
피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리스를 핀잔 주며, 잘 있으라는 흔한 인사 한 마디 없이 등을 돌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이었는데도 오늘따라 유달리 서러워 아리스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케인은 그런 여동생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줬다.
“이게 다 로엘 그 계집 때문이야. 여지껏 잘해 왔는데…….”
“너도 마음 쓸 거 없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그냥 그 자리에만 있으면 돼. 그러다 보면 저절로 황후가 되어 있을 테니.”
믿음직스러운 케인의 말이, 아니 ‘황후’라는 두 단어에 아리스의 얼굴은 바로 화색이 돌았다.
“진짜지? 진짜 내가 황후가 될 수 있는 거 맞지?”
“그래. 넌 태어나는 순간부터 황후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어. 몰브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널 황후 자리에 앉힐 테니 괜한 걱정 말아.”
분명 며칠 전에도 똑같은 말을 해 주었건만, 어리광쟁이 동생은 뭐가 이리 불안한지 계속 확인받고 싶어 했다.
늘 당당했던 그녀의 동생이 어쩌다 이리되었나 의문이었는데, 오늘 에단과 로엘을 직접 보니 아리스의 마음도 조금 이해되었다.
그녀는 확실히 다른 여인들과는 달랐다.
“토르티아의 로엘이라…….”
케인은 붉은 눈동자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처음 보는 눈이었다. 여러모로.
“……내가 알아서 하마.”
케인은 로엘이 사라진 쪽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특유의 비열한 미소가 입가에 번지고 있었다.
***
“언제까지 따라오실 거예요. 이미 충분히 이용하신 듯한데.”
“이용이라니. 말이 좀 심한데.”
로엘이 먼저 걸음을 멈추고 에단을 마주했다.
이미 몰브가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충분히 걸어왔다. 눈치껏 딜리아와 시에라, 그리고 아론과 루카스는 거리를 두고 뒤따랐고.
조금 심통인 난 그녀에게 그는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지나치게 잘생긴 그의 얼굴에도 그녀는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 자리, 그만하고 싶으셨잖아요. 제가 아주 적절한 명분을 드렸고.”
“명분이 없어도 내가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는 거야. 그러니 그걸로는 약하지.”
“아니죠. 저로 인해 확실히 못 박으신 거잖아요. 황후 자리, 아직 너네 가문 것이 아니라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순간 에단의 표정이 굳었다.
그저 장난 정도로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그녀는 생각보다 깊게 그의 속을 꿰뚫었다.
갑자기 정색하는 그에게 이번엔 그녀가 허리를 조금 굽혀 그와 마주했다.
“그리고 그 얄미운 늙은이, 성질도 좀 긁고?”
그런 그에게도 아랑곳 않고 환히 웃는, 밝기도 한 그 미소에 에단은 따라 웃고 말았다.
아무튼, 심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 영민한 여자는.
에단은 다가온 그녀의 허리를 안아 당겼다.
“몰브 공작이 아무래도 나의 아카시스께 미움을 산 모양이군.”
“네. 사람을 초면에 내려 보는 거, 그 집안 내력인가 봐요.”
그녀는 작게 투덜거렸다. 그는 그 작은 투정마저도 귀여웠다.
다른 여인이었다면 피어 몰브를 보는 순간 고개부터 숙였을 테다. 그만큼 몰브가의 권세는 대단했으니.
그녀가 카이로스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이 눈치 빠른 여자가 아리스의 부친의 영향력을 가늠하지 못할 리 없다.
그러함에도 이리 나온다는 것은 꽤나 그 배포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속적인 욕심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
일개 권세에 자신을 낮추지 않는 현명함이다.
그가 바라던 ‘황후’상이다.
“그 황후 자리. 우리 아카시스께서도 관심이 있는 건가.”
“아니요.”
그녀의 대답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너무 단호해서, 오히려 에단의 마음이 상했다.
에단은 그녀를 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주었다.
“다른 이가 내 반려가 되어도 전혀 상관없다는 얼굴이군.”
‘반려’라는 단어에 로엘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황후’라는 단어와는 확연히 억양이 달랐다. 그래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이 아름다운 남자의 옆에 다른 여자가 선다는 상상만으로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니, 울컥 무언가 올라올 거 같았다.
“……몰브 영애가 되는 건 싫어요.”
“그건 나도 싫어.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잖아.”
에단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 황금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보며 로엘은 이 남자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황후 자리를 욕심낸다면 멀어질 그런 사람이면서,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아카시스 로엘. 난 너에게 내 옆자리를 다른 이에게 주어도 되냐고 묻고 있는 거야. 카이로스의 황후가 되는 것. 그래서 평생을 나의 반려로 사는 것. 정말로 마음이 없는 건가?”
어차피 그녀에게 대답은 하나뿐인데.
“예.”
그녀의 허리를 감쌌던 그의 팔이 풀렸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대로 그녀에게 등을 돌려 가는 그를 로엘은 잡지 못했다.
“……화나게 해 버렸네.”
그저 멀어져 가는 그가 안 보일 때까지 지켜볼 뿐이었다.
***
“몰브 공작이 많이 무례했습니까?”
“몰브가 원인이 아닙니다.”
제롬은 엄청나게 저기압으로 돌아온 황제의 눈치를 보며 아론에게 물었다. 아론은 서류 더미를 한아름 내려 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심기가 안 좋을 때 하는 일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일. 또 하나는 검술 훈련.
오늘은 전자인 듯싶다.
“몰브가 아니라 로엘 마마가 원인입니다.”
제롬은 고개를 갸웃했다. 몰브와의 오찬에 다녀오셨는데 거기서 로엘 마마가 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찬 후 산책 중에 로엘 마마를 만나 뵈었습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로엘 마마와 함께 돌아오시는 길에…….”
“몰브가 사람들을 두고 로엘 마마와 돌아오셨다고요?”
“예. 아마 그 때문에 몰브 공작도 여간 화난 게 아닐 겁니다.”
로엘의 행동은 뒤에서 지켜보던 아론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루카스야 작게 휘파람까지 불며 그 당돌함을 응원했지만, 아론은 살얼음을 걷는 듯했다.
도대체 그분은 어쩜 그렇게 겁이 없으신지, 하는 모든 행동이 위태로웠다.
“아론.”
집무실 안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론은 다시 서류 더미를 안았다.
“아무튼, 로엘 마마께서 폐하를 화나게 하신 건 확실합니다.”
아론은 제롬과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집무실에 서류를 가지고 갔다. 말 한 마디 건네기 어려운 살벌한 분위기라 눈치껏 그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집무실에는 그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렸다.
‘황제의 여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계속, 첫날밤에 그녀가 한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후회할 텐데?’
‘그 또한 제 몫입니다.’
그때는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당돌한 이국의 공주 하나가 들어왔다고만 생각했다.
시답잖은 감정으로 그를 귀찮게 하는 일을 없겠구나,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어쩌면 하룻밤을 채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는 그 붉은 눈동자에 금새 빠져들었으니까.
“……제길.”
그래서 이렇게 화가 나는 거다. 그날 밤과 전혀 변함이 없는 그녀에 대해서.
그 넓은 카이로스의 중앙 정원에서 작은 발소리 하나로 알아챘다.
그의 토끼가 몰래 들어왔구나 하고.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낸, 매일 보아도 신기한 붉은 머리의 그녀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에게 다가왔을 때, 순간 품에 안을 뻔했다.
그렇게 갈수록 더 사랑스러웠고, 갈수록 더 탐이 났다.
그래서 더욱더 참기가 힘들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좀처럼 그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잡으려 할수록, 빠져나갔다.
“……아론.”
그는 다시 한 번 더 아론을 불렀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일이나 해야겠다.
그래야 바람 같고 물 같은, 그 붉은 여자를 조금이라도 덜 생각할 것 같다.
***
터덜터덜. 로엘은 느린 걸음으로 세룸니르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그가 그렇게 정색하는 건 처음이었다.
“……화가 많이 나셨을까.”
혼자 중얼거리는 그녀는 풀이 많이 죽어 있었다.
딜리아와 시에라는 두 분의 대화를 듣지 못해 잘은 모르나, 로엘이 실수를 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들도 이렇게 시무룩한 그녀는 처음 보는지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뒤에서 눈치를 보여 따라가는데, 순간 시에라가 로엘의 앞을 막아섰다.
“마마.”
로엘 역시 기척을 느꼈는지, 바로 눈빛이 바뀌었다.
경계 태세로 소리 난 곳을 응시하자, 뒤늦게 낯익은 사람이 등장했다. 불과 2시간 전 만났던, 수려한 외모의 주인공.
몰브가의 장남, 케인이었다.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이렇게 다시 뵙습니다, 로엘 마마.”
큰 키, 진한 이목구비에 소년 같은 미소까지. 아리스만큼이나 눈에 확 띄는 외모다. 사교계에서 여럿 여성들의 마음을 울렸다더니, 충분히 그럴 만하였다.
로엘은 그런 케인을 표정 없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몰브가의 외모 유전자 하나는 인정할 만하다.
다만 저 외모에도 가려지지 않는, 검은 속내가 불쾌할 뿐.
“아카시스 로엘이라고 합니다.”
먼저 내민 그의 손 위에 그녀는 살며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우아한 동작으로 그는 기꺼이 허리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예를 표했다.
“마마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싱긋. 또 한 번 그는 로엘을 향해 웃었다.
로엘은 찡그려지려는 표정을 다잡느라 애썼다. 헤픈 저 미소에 다른 여인들이 넘어갔을지 모르겠으나, 로엘에게는 지극히 계산적이고 가식적인 미소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로엘은 서둘러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거뒀다.
“길을 잃어 당황했는데, 마마를 뵙게 되다니 제가 운이 좋습니다.”
케인의 뻔한 거짓말에 로엘은 저절로 나오는 비웃음을 겨우 속으로 삼켰다.
몰브가의 장남이라면 뻔질나게 황궁을 드나들었을 텐데, 길을 잃었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이 길은 후궁으로만 연결되는데, 단단히 헤매셨나 봅니다. 길을 잃고자 작정한 사람인 양.”
“마마를 뵐 인연이었나 보지요. 어떻게 발전될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인연.”
또 한 번 싱긋. 이번만큼은 로엘도 표정이 굳는 걸 숨기지 못했다. 시에라와 딜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너무 대놓고 하는 희롱이다.
엄연히 황제의 여자이건만, 이리 뻔뻔하게 그녀를 대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그녀를 무시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는 한 걸음 더 로엘에게 다가섰다. 역시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은 채, 똑바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찮은 우연이겠지요. 케인 경.”
케인은 제법 화가 난 로엘의 붉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보았다.
이리 가까이서 보니, 더 아름다웠다. 마치 보석 같은, 그런 눈동자다.
그리고 옅게 느껴지는 이 달콤한 향. 묘하게 남자를 자극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랍니다. 야만국의 쫓겨난 공주가 대 카이로스 황제의 비가 될지 몰랐던 거처럼.”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드레스임에도 어린아이 같은 얼굴과 대비되는 성숙한 몸의 라인이 눈길을 끌었다.
처음 건너 듣기로는 애 같아서 여자로서 매력이 별로 없다고 들었는데,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된 정보다.
“제 어여쁜 동생이 마마께 신세를 지고 있다지요.”
남자는 오히려 이렇게 길들여지지 않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법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의 소녀가 자신에 의해 여자로서 길들여지는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케인은 좀 더 몸을 숙여 그녀에게 속삭였다.
“어차피 정해진 수순은 변하지 않으니, 마마. 부디 순리대로 계세요.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숨죽인 채로 말입니다.”
그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닿았고, 그의 코끝에 진한 그녀의 향기가 맴돌았다.
케인은 그 가까운 거리에서 찬찬히 그녀를 살폈다. 올림머리를 한 탓에 다 드러난, 그녀의 하얀 목이 가늘기도 하다. 케인은 자연스럽게 손을 올렸다.
참 탐나는 몸이다.
“그러지 않으면 다치십니다.”
그렇게 케인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려는 순간, ‘탁’ 하고 그녀의 부채가 그의 손을 막았다. 그리고 붉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케인의 눈을 직시했다.
“케인 경. 순리를 운운하기 전에 서열부터 지키세요. 나는 황제의 여자인 아카시스이고 당신은 아직 작위도 이어받지 못한, 일개 공작가의 자제에 불과합니다.”
로엘은 부채로 그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똑똑히 말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죽고 싶지 않으면 말과 행동을 조심하세요.”
싱긋. 이번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정말 죽습니다.”
순간, 연신 미소 짓던 케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인에게 이런 대접은, 아니 그 누구에게도 이런 대접은 받아 본 적 없다.
금지옥엽으로 자란, 몰브가의 장남에게 감히 누가 이런 말을 할까.
“이런 건방진……!”
그를 지나쳐 가려는 그녀에게 케인이 바로 손을 뻗었으나, 순간 징 하는 소리와 함께 목 끝에 차가운 쇠붙이가 닿았다.
“거기까지.”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검의 주인. 다른 누구도 아닌 루카스였다.
“……루카스 세버.”
수백 명의 피를 묻혔을, 그 검이 자신을 향하자 케인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예고 없는 루카스의 등장에 로엘도 제법 놀란 눈치였으나, 정작 당사자는 언제나처럼 태평했다.
“이거 큰일 내실 분이네. 황제 폐하의 아카시스께 손을 대다니. 손모가지가 열 개는 되나 봐?”
장난스러운 말투에 가벼운 웃음은 여전했으나, 케인을 보는 루카스의 눈은 결코 장난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케인은 로엘에게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저 미친놈은 자신을 충분히 벨 수 있는 사람인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대장군이 나설 일이 아닙니다.”
“공작가 자제분이 할 짓도 아니지.”
일부러 존대를 해 주어도 여전히 반말. 그러지 않아도 험악해진 케인의 표정이 더 굳었다.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 하는 건 여전하군.”
“천지분간 못 하는 것도 여전하시고.”
대장군 루카스 역시 공작가의 자제로 케인과 동갑내기였다. 말을 섞을수록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재주가 있다는 걸 잘 알아, 늘 케인은 루카스를 피하고 말았다. 루카스 세버와 엮여서 좋게 끝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케인은 루카스를 무시하고 다시 로엘에게 눈을 돌렸다.
“조만간 또 뵙지요. 오늘 일, 잊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케인 경. 또 볼 일 없길 바랍니다.”
끝까지 건방진 그녀의 태도에 케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만 물러섰다.
그제야, 로엘은 제대로 루카스와 마주했다. 케인을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평소의 온화한 그녀였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대장군 루카스 경.”
“당연한 일을 한 걸요. 저 개자식을 또 마주치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그때는 제대로 날려 주겠습니다.”
언뜻 대장군 루카스 세버는 큰 ‘개’ 같다던 에단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와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처음임에도 전혀 거리낌 없는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을 좋아하는 개가 꼬리를 흔드는 거 같아 로엘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왠지 그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아! 루카스 세버. 정식으로 아카시스님께 인사드립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루카스는 능숙하게 검을 빼들어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무인으로서 완벽하게 각이 서 있는 자세에 로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카이로스에 와서 처음으로 받는 정식 기사의 인사였다.
“저도 반갑습니다. 저는 로엘 네아레스라고 합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제가 아까도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워낙 아론이 눈치를 주는 바람에 못 했지 뭐예요.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 왔습니다. 마마께서 들어가시기 전에요! 그런데 완전 잘 온 거네요? 하하!”
호탕하게도 웃는 그의 모습에 딜리아와 시에라도 살짝 웃음을 삼켰다.
꽤나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루카스 세버 장군에게는 전혀 그 심각성이 전해지지 않았나 보다.
그 무사태평한 웃음소리가 오히려 로엘을 웃게 만들었다.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카이로스의 유명한 대장군님과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앞으로, 자주 봐요.”
“예, 마마. 제가 예상하건대, 마마. 엄청 자주 저를 보시게 될 겁니다. 저는 폐하의 검이고 폐하는 항상 검이 필요하시거든요.”
이 역시 가볍지 않은 말들. 그러나 루카스에게는 여전히 매일 하는 아침인사인 양 가벼웠다.
‘밥 주면 좋아하고, 건들면 무는 수준이 개랑 같아.’
‘너무하다, 진짜. 그래도 카이로스의 대장군인데.’
‘그래서 그 자리에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믿으니까. 루카스 세버는 절대 주인을 물지 않아.’
로엘은 에단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에도, 그리고 지금 루카스에게 또다시 듣는 이때에도 단 한 사람만이 생각났다.
‘검은 주인을 베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아파 왔다.
로엘은 한 걸음 더 루카스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먼저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대장군. 부디 언제 어디서든 그분을 지켜 주세요.”
이 나라 최고 실세 케인 몰브에게는 그리 꼿꼿했던 허리가 루카스에게는 너무도 쉽게 굽혀졌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루카스는 잠시 당황했으나 그녀의 진심이 느껴져, 그도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분이다.
루카스는 평소의 장난기를 빼고 제대로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장군 루카스 세버. 아카시스 로엘 마마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 목숨을 바쳐 하늘 같으신 나의 주군, 에단 아폴리우스 폐하와 아카시스 로엘 마마를 지키겠나이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답하는 법.
로엘 역시 자신의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는, 이 위대한 장군에게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해요. 루카스.”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의 오른팔이자, 검은 지옥문의 개 루카스 세버는 자타공인 현 최강이라 불리는 무인이다. 그러니 루카스의 충성 맹세는 아주 많은 의미가 있었다.
아카시스 로엘. 카이로스에서 가장 귀한 아군을 얻은 셈이다.
***
벌써 일주일째. 후궁이 조용했다.
그렇게 매일같이 로엘을 찾을 때는 언제고, 그는 집무실에 박혀 나오질 않았다.
“……쫌생이.”
그래서 이제는 로엘이 심통 났다. 일부러 베리타스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있었는데도, 그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황제가 뭔 일이 그렇게 많은지, 웬만한 관료보다 더 바쁜 거 같았다.
“바보, 멍청이.”
애초에 황제의 본궁은 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출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니 그가 그 안에 있는 한 그녀는 그를 만날 도리가 없었다.
새삼 로엘은 그가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는 한 그를 볼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항상 꽃은 그녀라는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저도 싫습니다. 꽃으로만 사는 건.’
터벅터벅 걷던 그녀의 걸음 딱 멈췄다.
‘제가 벌을 찾아가는 꽃이 되는 수밖에.’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그와의 대화.
“잠깐. 그럼 내가 가면 되잖아?”
로엘은 씩 미소 지었다.
“딜리아! 어서 돌아가자!”
“어휴 놀라라. 마마. 무슨 일 있으세요?”
그녀의 뒤에서 걸어오던 딜리아는 갑자기 로엘이 부르는 통에 깜짝 놀라 가슴을 쓸었다. 2시간째 힘없이 걷던 사람이 어느새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딜리아는 이제 직감적으로 불안했다.
“내가 엄청난 생각을 해 냈어. 일단 얼른 들어가자! 헤더가 필요해!”
“헤, 헤더요?”
“응.”
그리고 그 직감이 아무래도 적중한 것 같았다. 이리 급하게 헤더를 찾으시는 걸 보면.
쉼 없이 걸은 것이 힘들 만도 한데 그녀는 신이 나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자, 잠깐만요. 마마. 그니까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려는 거예요!”
“일단 시간이 없으니까 돌아가서 말…….”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해 로엘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 달리 많이 걸어 너무 깊게 들어왔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른 이를 만나고야 말았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초면임에도 누군지 로엘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한 떨기 꽃처럼 청초한 외모에 단정히 기른 머리가 앞으로 가지런히 내려지고, 로엘보다도 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멀뚱히 바라만 보는 이 여자.
또 한 명의 아카시스 수아다.
“그러지 않아도 찾아뵈려 했는데 이렇게 만나 뵙네요. 토르티아 제1공주, 로엘 네아레스라고 합니다.”
쭈뼛쭈뼛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수아 대신 로엘이 먼저 다가갔다. 옅은 미소와 함께 먼저 인사를 건네자, 수아는 곁에 있는 시녀 쥰을 한 번 보더니 이내 로엘에게 똑같이 예를 갖추었다.
“켈트가의 수아. 아카시스 로엘 님께 인사드립니다.”
한 손은 가슴을 가리고 한 손은 드레스 한 끝을 잡는 예절의 정석과도 같은 인사. 로엘이 카이로스에서 받은 가장 예의 바른 인사였다.
“저는 그럼 이만…….”
“차 한잔해요!!”
얼른 자리를 피하려는 수아에게 로엘은 거의 윽박지름에 가까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수아와 그녀의 시녀들은 너무 놀라 말도 잇지 못했지만, 딜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로엘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저기, 그니까 차 한 잔만 주시면 안 될까 싶어서…….”
처음과는 달리 민망한 듯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을 수아는 말없이 그저 바라만 보았다.
뭐랄까, 아리스를 두 번이나 물 먹였다는 소문과는 사뭇 다른 이미지였다.
굉장히 기 센 분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귀여운 소녀 같았다.
“보아하니 수아 님 궁과 가까운 거 같기도 하고…….”
엄밀히 말하자면 새 친구를 사귀고 싶은 서툰 소녀랄까.
수아는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동년배였다.
“오늘 안 되시면 다음번에라도…….”
“그럼 지금 가시겠어요? 오늘 마침 좋은 차가 들어왔어요.”
부드러운 수아의 목소리에 놀란 건 로엘뿐만이 아니었다. 수아의 시녀 쥰 역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아가씨를 보았다.
이 감옥 같은 황궁에 들어와서, 첫날의 황제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수아가 다른 이를 초대한 거였다.
“쥰. 바로 가능할까?”
“그, 그럼요. 마마!”
쥰은 순간 울컥할 뻔했다. 산송장처럼 지내시던 아가씨께서 근 3년 만에 생기를 띄고 있는데 그까짓 찻상, 수백 인분이라도 준비할 수 있다.
“이리로 오시면 됩니다. 로엘 마마!”
로엘은 그런 쥰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딜리아에게 들은 수아의 이야기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쥰의 반응만 보더라도 지금까지 수아가 어떤 생활을 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첫날, 황제의 눈 밖에 난 이 가녀린 여인을 아무도 찾지 않았겠지.
그렇게 홀로, 외로이 허송세월을 보냈겠지.
마치 토르티아 궁전에서의 자신처럼.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로엘은 수아 옆에 서 보폭을 맞추었다.
그녀와 눈을 맞추며 미소 짓자, 수아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오랜만에 갖는 티타임이 꽤 좋을 것 같다.
***
이미 자정이 넘은 깊은 밤, 에단의 집무실은 오늘도 불이 환했다. 살벌했던 정무회의 덕분에 이제껏 보류되었던 결재 건들이 한꺼번에 올라와, 그의 연이은 밤샘에도 오히려 일은 더 늘었다.
“제롬.”
달그락.
그는 빈 찻잔을 보며 제롬을 불렀다. 안 가겠다던 아론을 1시간 전 억지로 보냈으니, 아마 제롬만이 남아 있을 터였다.
“제롬.”
그는 한 번 더 제롬을 불렀다. 그러곤 펜을 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근 몇 시간 만에 편히 앉는 거였다. 일주일째 1, 2시간만 자고 책상 업무를 하니 그도 지칠 만큼 지쳤다. 차가 새로 나올 때까지 잠시 눈을 붙일 요량으로 눈을 감으려는데, 작은 발걸음 소리가 그의 신경을 도로 깨웠다.
에단은 순식간에 단검을 빼들어 접근한 자의 목을 겨냥했다.
“폐……!”
한 음절을 제대로 말하기 전에, 가까이 다가간 로엘의 멱살이 붙잡히더니 바로 목에 단검이 닿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너무 놀라 그녀의 눈이 토키 눈처럼 커졌다.
그런데 그 역시 너무도 익숙한, 예상치 못한 그 붉은 눈에 그녀만큼이나 놀랐다.
“로엘?”
물론 그녀는 언제나처럼 이내 다시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와……. 놀라라. 저, 진짜 죽을 뻔했네요.”
근 일주일 만에, 그것도 이 밤에 이런 시녀 차림으로, 그의 방에 몰래 숨어들어 한 말이 고작 놀랐다니. 그녀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너무도 태평했다.
“벌을 찾아 꽃이 왔답니다.”
그래서 결국 웃고 말았다. 피곤 같은 거 그녀는 단번에 날려 버렸다.
그것도 단 한마디 말이라는 이리 쉬운 방법으로.
그는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고, 그녀의 허리를 안아 당겼다.
“기특한 꽃일세.”
그녀를 보러 가지 않기 위해 무단히 애쓴 그의 일주일을 이리 허무하게 만들다니.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 앙큼한 여우에게 자신이 질 것이라고.
그래서, 그때의 그 서운함 역시 어영부영 넘어가겠지. 바로 지금처럼.
“정말 기특한 꽃이야.”
그런데 그럼 어떤가. 지금 이 순간 이 사랑스러운 여인이 품에 있으면 그만인 것을.
그는 오랜만에 본 그녀에게 입맞춤을 했다. 이제까지의 그리움을 보상받듯 길고 진하게.
그의 마음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