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6. 그녀는 북에서 왔습니다 (7/69)

Chapter 6. 그녀는 북에서 왔습니다

에단과 로엘은 책장 뒤에 숨어서 숨을 죽였다. 그녀의 작은 몸을 품에 안은 채로, 아론과 루카스가 얼른 볼일을 보고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근두근.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가 고스란히 그에게로 전해졌다.

“저들, 폐하의 측근이잖아요.”

“아마.”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그녀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간질간질한 숨결이 닿고,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함께 그 달콤한 향기도 단번에 코안을 가득 메웠다.

“그런데 폐하는 왜 숨으세요? 어차피 들켜도…….”

“조용히나 해.”

그의 큰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가 숨을 이유 따윈 없다. 그냥 앞에 나서면 그만. 그가 그의 여자와 함께 여기서 무얼 하건 누가 감히 뭐라 할까.

뭐, 아론이야 그녀를 함부로 이곳에 들였다고 한소리 할 수는 있겠지. 루카스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떠들 테고.

하지만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품 안에 있는 그녀를 말없이 내려 보았다. 어디서 이렇게 똑같은 것을 구해 왔는지 관복이 제법 잘 어울렸다.

다만, 남자와 다른 그 작은 어깨와 가녀린 체구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그뿐이랴. 뽀얀 피부와 도톰한 입술,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거기에 바짝 모자를 눌러써도 가려지지 않는 붉은 머리까지.

옷만 관복으로 바뀌었을 뿐, 이는 누가 봐도 ‘새로 오신 아카시스’의 모습이었다.

그런 남장 차림의 아카시스라.

에단은 높게 올린 머리 때문에 훤히 드러난 그녀의 가는 목선을 빤히 보았다.

흘러내린 붉은 머리칼에 대비되어 뽀얀 피부는 더 하얗게 보였다.

그래서 더 갈증이 일었다. 당장이라도 그 하얗고 가는 목을 물어, 잔뜩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자라면 얼마든지 그런 상상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 그녀의 모습이 그러하게 만들었다.

“오. 멈췄어요……!”

문제는 그 사실을 이 겁 없는 여자는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로엘은 그의 손을 억지로 치워 버리고, 기어코 말을 했다. 루카스와 아론이 오던 걸음을 멈추어 서자, 그녀는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에단은 한숨을 쉬었다.

속이 타는 건 항상 에단, 그뿐이었다.

“두 사람이 찾고 싶은 걸 찾았…… 읍!”

그래서 결국 그녀의 입을 입으로 막았다.

조잘조잘 잘도 속삭이는 그 도톰한 입술을 망설이지 않고 탐했다.

“으. 응…….”

갑작스런 그의 키스에 놀란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가 싶더니, 이내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를 받아들였다.

아론과 루카스의 목소리가 멀어지면서도, 그들의 움직임이 느껴질 때마다 심장이 쿵쿵 요동쳤다. 그런데 그 아슬아슬함이 몸을 더 달아오르게 하는 것 같았다

“하아. 여, 여기서 이러면 안 되잖아요……!”

“알 게 뭐야.”

그는 제대로 그녀를 돌려 앉히고선 본격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책장과 그 사이에 그녀를 가두고, 그녀의 가는 목을 한 손으로 잡아당기며, 마음껏 그녀 안을 헤집었다.

“응…….”

그렇게 몰아치는 그에게 그녀도 키스를 돌려 주었다.

뜨거운 혀가 맞닿기만 해도 도망가던 처음과는 다르게, 이제는 스스로 입을 열고 그를 수줍게 찾았다. 그 조심스러운 반응이 사랑스러워, 그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더’를 요구했다.

“야. 다 찾은 거 아냐?”

“먼저 가시라고요. 옆에서 괜히 알짱대지 말고.”

“같이 왔는데, 같이 나가야지!”

멀리서 들려오던 그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성큼성큼 가까워지자 로엘은 번뜩 눈을 떴다. 그러곤 다급하게 그의 가슴을 밀었지만, 그는 오히려 더 바짝 그녀를 당겼다.

“이러다 진짜 들키겠……!”

감히 그와의 키스 중에서 한눈을 팔다니.

누구 마음대로.

“아……!”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한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녀가 바로 반응을 보였다. 그를 밀던 손에서 힘이 빠지더니, 단번에 온몸이 긴장했다.

“으응…….”

그런 그녀와 다르게 그는 여유로운 미소로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달콤한 키스를 선사했다.

능숙하게 관복 단추를 톡톡 풀더니, 그의 차가운 손이 그녀의 맨살에 닿았다.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로, 봉긋 솟은 가슴을 아래서부터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감촉이 기분 좋아 그는 좀처럼 그녀를 놔줄 수 없었다. 단단해진 정점을 빙글빙글 돌리며 장난치는, 그 짜릿한 자극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새어 나오는 새된 소리를 손으로 막았다.

재빠르기도 한 반응에 그가 옅게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더 소리 내면 진짜 들킬지도.”

“진짜, 세상에서 제일 못됐어! 그거 알아요?!”

“네가 지금 반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알 게 뭐야!”

열기에 흐려진 눈으로 째려 봤자, 그에겐 귀엽기만 보였다. 그는 혹여나 들킬까 숨죽여 화를 내는 그녀의 입술에 쪽 소리 나게 가볍게 키스를 했다.

“더했다간 한 대 칠 기센데.”

“정말 그럴지도 몰라요.”

그녀가 뭐라 하든 그는 또 한 번 가볍게 키스하고 그만 흐트러진 그녀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실컷 그녀를 놀릴 때는 언제고, 또 이렇게 멋대로 다정하다.

그녀는 그녀보다도 더 꽁꽁 싸매는 그를 빤히 보았다.

“자. 멋지네.”

“……예쁜 거겠죠.”

여전히 멀리서 아론과 루카스의 티격태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엘은 한숨을 쉬었다. 제멋대로인 그에게 너무 휘둘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그의 행동에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사실.

“난 뭘 입어도 예뻐요.”

그녀가 그의 옷깃을 당겨, 열기에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속삭이자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건 분명 ‘사랑 놀음’이다.

***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넓고도 넓은 카이로스의 서고 안에 그와 그녀, 단둘만이 남았다.

“그만 보십시오. 닳겠습니다.”

“그 옷은 어디서 구한 거야?”

“헤더가 만들어 줬어요. 진짜 똑같지 않아요? 제가 부탁했지만, 진짜 헤더는 천재인 거 같아요.”

이 와중에도 자기 사람 칭찬에 눈을 반짝이는 로엘이었다. 에단은 자신을 따라 서슴없이 바닥에 앉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일어나.”

“괜찮습니다. 어차피 바지인데요, 뭘.”

“내가 안 괜찮아.”

그는 기어코 그녀의 손목을 당겨 그녀를 일으키더니 망설임 없이 제 어깨에 걸친 황제의 도포를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자기는 다시 맨바닥에 앉았다.

그 모습에 이번엔 그녀가 빤히 그를 보았다.

또다시, 예고도 없이 나오는 다정함이다.

“뭐 해. 안 앉고.”

“……감사합니다.”

로엘은 작게 인사를 하며, 살며시 그가 깔아 준 도포 위에 앉았다. 휘황찬란한 그 붉은 비단은 앉는 것조차 황송스러웠다.

“카이로스 황제의 도포를 깔고 앉다니. 제가 정말 목숨이 여러 개인가 봅니다.”

“보통은 그래야 하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녀는 진심이었다. 누군가라도 알게 되는 날이라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 거다.

그녀는 살며시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

“이쪽으로 오세요. 어떻게 저 혼자 여기 앉습니까. 폐하께서 바닥에 앉아 계시는데.”

그녀가 조금 힘을 주어 당겨 보았자, 에단은 꿈쩍하지도 않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뚝 부러져 버릴 거 같은 가는 팔목에서 나온 안쓰러운 힘이, 근육으로 단단한 그를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에단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그녀에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떨어져 줬더니만.”

“네?”

“네가 멍청하단 소리를 하는 거다.”

그는 결국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자연히 서로의 어깨가 맞닿았다. 그녀는 살짝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긴장을 풀고 편히 책장에 기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멋진 곳이네요.”

앉아서 올려다보니 책장이 더욱더 높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러한 책장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렇게 넓은 카이로스의 서고에 카이로스의 황제와 단둘이 있다니.

참 현실성 없게 느껴졌다.

“신기해요. 내가 이곳에,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는 사실이.”

그녀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나, 그녀는 종종 그에게 ‘당신’이란 호칭을 썼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그 단어가, 에단은 유난히 낯설고 간질거렸다.

분명 다른 이들이 들었다면 불경이라며 그녀에게 한소리 할 테지.

하지만 그는 그 호칭이 마음에 들었다. 계속, 그녀가 그렇게 불러 주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보통은 신기가 아니라 황송이겠지.”

“그것도 하고 있어요. 말하지 않아도.”

아무튼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그는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그녀를 어깨를 안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외부 소리마저 모두 차단되는, 적막한 이곳에 두 사람의 숨소리가 기분 좋게 전해졌다.

“여기엔 왜 그렇게 들어오고 싶었던 거야.”

“음.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정말로 호기심. 세상의 진리가 있다는데 당연히 들어가 보고 싶죠. 전 책 읽는 것도 너무 좋아하고요.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상상 그 이상이네요. 이곳에 모든 지식이 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어요.”

그 많은 금은보화를 줬을 때는 눈길도 안 주더만, 이 종이 더미들에게는 눈을 반짝였다.

보석이 어울릴 줄 알았더니, 책이 어울리는 여자였다.

에단은 그런 그녀가 싫지 않다. 아니. 훨씬 더 좋았다.

“또 하나는, 찾고 싶은 자료가 있어요.”

“카이로스 기밀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요. 토르티아 기밀이요.”

그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하는 그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토르티아의 공주가 토르티아의 기밀을 카이로스에서 찾는다?

누가 들어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토르티아에서 삭제된 기록이죠. 대장군 제이드 네아레스의 기록.”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제대로 그와 마주 보며 앉았다.

에단은 그 붉은 눈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처음 만났던 날, 그에게 토르티아를 바치겠다던 그때의 그 눈이다.

“내 숙부이자 지금의 토르티아의 황제, 조지 네아레스는 즉위하자마자 내 아버지의 모든 기록을 불태웠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아주 사소한 것까지 전부 다.”

그 누구든 제이드 네아레스를 언급하면 목이 날아갔다.

뿐만이랴. 토르티아의 기록서는 물론, 일개 병사의 일기장까지 전부 다 불태워졌다.

갑작스럽고도 어이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아버지의 펜 하나까지 전부 다 가져가 버리는 그들을 보며, 로엘은 정말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그런 악마를 숙부라고 여기며 잠시라도 믿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그것도 동생이라고, 아니 황제라고 충성했던 아버지의 안일함을 너무도 원망했다.

그렇게 제이드 네아레스는 토르티아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아버지는 장자였지만, 서자였기에 애초에 황위에 오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처음부터 황위에는 관심도 없었지요.”

그건 아버지 자리가 아니었고, 아버지는 내 것이 아닌 것을 욕심내는 분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정작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봐요. 그게 절대 아버지를 위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토르티아의 황족 법은 다른 제국과 좀 다르다.

초대 황제는 형제의 우애를 강조하며, 황제의 형제에게는 왕의 지위를 보장해 주라 명했다. 이것이 토르티아 황족 법의 시초였다.

다만, 왕족의 수가 너무 늘어날 것을 우려해 황제의 형제인 왕과 그 직계 후손인 왕자, 공주에게까지, 단 두 세대만 왕족의 지위를 보장했다.

그러나 이 법은 황제가 되지 못한 형제에겐 황위 찬탈의 기회가 되기도 하는 법.

조지 네아레스는 왕재가 아니었다.

배움은 더뎠고, 시야는 좁았으며, 통솔력은 포악함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오로지 적자라는 그 사실 하나로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그에 비해 형제인 제이드의 특출 났다.

토르티아에서 고작 열세 살의 나이로 검술 대회에 우승했고, 열다섯 살의 나이에 선봉에 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무인으로서의 그의 능력은 신이라 불릴 만하였으며, 침략이 끊이지 않는 북방에서 장군으로서의 전적 역시 전무후무했다.

말 그대로 전설 같은 사람.

그런 제이드에 대해 조지는 평생을 걸쳐 열등감을 가졌다.

“아버지는 조지 황제의 열등감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선황께서 서거하신 이후, 스스로 궁에서 어머니와 저를 데리고 나왔지요. 국경이 차라리 궁보다 안전하다는 판단하신 거죠.”

그녀는 그렇게 전장에서 컸다. 장군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뛰어놀며, 목검을 가지고 놀았다.

패망국일지라도 엄연히 공주였던 어머니는 그에 대해 단 한 번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별 없이 아버지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며 지냈다.

“저는 그렇게 컸어요. 부모님의 사랑을 매일매일 받으며.”

로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루하루, 즐겁지 않은 날이 없었다. 눈을 뜨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해 주었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인사를 하다 보면 하루가 지났다.

자신을 ‘공주’라 부르기에 그냥 의례적인 호칭이라 생각했을 뿐, 한 번도 공주의 권위 의식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 문제 없이, 행복하게 살던 그들을 숙부라는 자가 하루아침에 부숴 버린 거다.

그 알량한 자존심과 초라한 열등감 때문에.

로엘은 주먹을 쥐었다.

“알고 싶어요. 내가 철없이 국경에서 뛰어놀 동안 내 아버지가 무얼 하셨는지. 얼마나 대단했고, 얼마나 위대했는지.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비겁했고, 얼마나 야비했는지. 그걸 저는 알아야겠어요. 그래야 다음도 있을 테니.”

붉은 눈에는 간절함을 넘어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하늘. 그 하늘이 무너진 이유를 그녀를 알고 싶은 거다.

에단은 너무 꼭 쥐어 붉어진, 그녀의 손을 펴 주고 부드럽게 맞잡았다.

그 큰 손이 그녀의 손을 온전히 덮자, 로엘은 순간 울컥했다.

“그래.”

짧은 한 마디. 그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잠시 빤히 바라보다, 그녀 역시 그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그 한 마디면 되었다.

***

“장군께선 훈련 없으십니까? 일 없냐고요.”

아론은 자료를 한가득 안고 나오면서, 계속 따라오는 루카스에게 핀잔했다.

그런데 정작 루카스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언제까지 따라올 거냐고! 루카스 세버!”

“아. 깜짝이야. 놀랐잖아.”

“뭔 생각을 하길래 혼자 실실 쪼개고 있어.”

“그런 게 있다. 이 무지몽매한 자야.”

아론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상에서 제일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 루카스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너무 자존심이 상해 화도 나지 않았다.

한편 아론이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루카스는 혼자 휘적휘적 앞으로 걸으며 미소 지었다.

분명, 폐하였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긴 사람은 붉은 머리칼의 여인.

“흐음. 그렇단 말이지.”

명색이 카이로스의 최연소 대장군이다. 그런데 그런 기척 하나 느끼지 못했을 리가.

아니, 애초에 폐하도 이미 아셨을지 모른다. 자신이 이미 두 사람의 존재를 인식했단 사실을.

“이번엔 진짜 다른가 보네.”

아카시스께서 변복을 한 것도, 다른 곳도 아닌 베리타스에 있던 것도 모두 의문투성이었지만 루카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그분의 눈.

그 얼음 같은 분이 그런 눈을 하게 만드는 여자라면 그것만으로도 합격이다.

다른 건 필요 없다.

“나도 뵙고 싶은데 말이지.”

“누굴?”

“있어, 그런 게. 알려고 하지 말라니까.”

무슨 꿍꿍이인지 아까부터 계속 혼자 알고 혼자 실실 웃는 루카스가 아론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투닥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무실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롬이 이미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어떤 바보가 옆에서 계속 보채서요.”

“그럴 사정이 있었다고.”

“그럼 그 사정 해결하러 꺼지라고. 계속 옆에서 알짱대지 말고!!”

“아. 귀청이야. 왜 이리 성질이야.”

제롬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둘의 싸움을 대충 흘려 넘기고, 오늘의 안건 토의를 시작했다. 이래 봬도 엄연히 회의 목적으로 모인 거였다.

“호보체 건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예상대로 소문이 빨리 퍼졌더군요. 각지 영주들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회계 보고 문서도 올리고, 원로들도 안 하던 국정 회의를 하더군요.”

“이래서 말 안 듣는 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이라니까.”

이번만큼은 루카스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같이 너무 티 나게 달라졌으니. 일가가 몰살당했다는 말이 꽤나 무섭긴 했나 보다.

“자 그럼 그 일은 이렇게 일단락되었고, 국경은 어떻습니까?”

“거기야 뭐. 이반 전하께서 가셨으니 문제없겠지.”

루카스는 의자에 앉아 펼쳐진 지도 위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넓디넓은 카이로스 영토, 그 북방의 경계 중앙에 이반을 상징하는 마커가 올려져 있었다.

“네. 북방 국경도 이제 안정기에 접어든 거 같습니다. 우려했던 침략은 이반 전하께서 깔끔하게 소탕하셨고, 북방 자체가 지금 자기들끼리 영토 다툼이 심해서 무리하게 중부까지 넘보지는 않는 분위기입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토르티아가 정말 많이 약해지긴 했어. 확실히 그분이 계실 때보다.”

아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제이드 네아레스가 지키고 있었던 시절, 가히 그 붉은 성벽은 피의 성벽이라 불릴 만했다. 말 그대로 난공불락.

지옥의 숲이라 불리는 타르타니를 넘어 겨우 다다른 거대한 붉은 성은, 지옥 숲 끝에 자리한 또 다른 지옥문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지옥의 수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제이드 네아레스.

그 붉은 머리의 장군 앞에 감히 누가 고개를 들었는가.

그런데 그 아성이 너무도 어이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후폭풍은 빠르게 토르티아를 덮쳤다.

“토르티아는 이미 예전 영토의 약 3분의1을 잃었습니다. 가장 주축이 되던 무인들이 대거 은퇴하였고, 병사들의 사기도 예전만 못합니다. 그나마 워낙 탄탄한 군사 체계가 형성되어 있어 기존의 조직에 의해 간신히 북방의 최강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것도 타협이라는 명목하에 많은 양보를 한 대가이지요.”

“영토를 떼어 주고 백성을 넘겨주는 게 타협이라니. 붉은 민족 토르티아의 명성이 울겠네.”

루카스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타르타니라는 거대한 숲에 막혀 중부의 사람들은 늘 북방에 대한 무언의 두려움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북녘의 야만민족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도 안 되는 낭설도 아마 카이로스의 시골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통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단절되어 살아왔다. 중부와 북방은.

그런 북방과 서서히 교류가 시작될 그쯤, 제이드 네아레스라는 전설적인 장군이 등장했다.

“나 아직도 기억나. 내가 한 일곱 살 때였나? 아버지를 그렇게 졸라서 따라갔는데, 와. 진짜. 말이 안 나오더라.”

루카스가 무얼 말하려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아론과 제롬은 알아들었다.

그건 비단 루카스만의 감상이 아니었으니까.

“……대단하긴 했지. 가히 전설이라 칭해질 만큼.”

아론 역시 잠시 의자에 앉았다. 오래된 추억이 루카스 덕분에 떠올랐다.

오래전, 공식적으로 북방과의 교역이 시작되는 것을 기념으로 무인들이 모여 대회를 연 적이 있었다. 그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각 나라의 고수들이 모였다.

그 모든 이들을 단번에 제압한 이가 바로 제이드 네아레스.

마지막 결승에서 카이로스의 자부심, 칼슨 대장군을 한 번에 쓰러트렸을 때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우레와 같은 함성.

“그 한 사람이 북방에 대한 모든 인식을 바꾸어 놓았죠. 멸시에서 동경으로.”

제이드에 대한 중부 무인들의 동경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만큼 그 순간 제이드의 인상이 너무도 강렬했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던 한여름, 마지막 승리를 거두고 검을 치켜드는 붉은 머리의 사내.

그 모습은 신을 연상케 했다.

“그런 제이드 네아레스가 이젠 없습니다.”

그런 신 같은 존재가, 그런 전설 같은 존재가 저문 거다.

너무도 어이없고, 원통하게.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니 지금이 기회.”

갑작스레 문이 열리더니, 뒤에서부터 에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은 그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리자, 자연히 세 사람이 허리가 그에게 굽혀졌다.

언제부터 듣고 계셨는지, 그는 느릿하게 걸어 들어오며, 손끝으로 지도 위의 광활한 북방의 대지를 쓸었다.

이 넓고 광활한 대지. 미지의 땅 북녘.

붉은 민족 토르티아가 지키고, 그 붉은 민족은 제이드 네아레스가 지킨다.

“그 붉은 신이 없는 지금, 토르티아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이는 곧 북녘의 붕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 그의 결심이 확고하단 의미다.

세 사람은 말 없이 자신의 주군의 결정을 경청했다.

처음부터 예상되었던 수순.

카이로스의 오랜 염원이자, 풀지 못한 숙원.

“카이로스는 북방을 정벌한다.”

역대 가장 위대하다 칭해지는 그가 드디어 그 마지막 목표의 시작을 준비하려 한다.

***

“그럼 토르티아와 테바로스는 처음부터 형제 국가였던 건가?”

“시작은 그렇죠. 두 나라의 초대 황제가 친형제였으니까요. 물론 몇 백 년 전에 일이지만요. 그 이후는 수도 없이 엎치락뒤치락했어요. 어쨌거나 북방의 패권국을 정해야 했으니까.”

“그 승자가 토르티아다?”

“적어도 근 백 년 동안은요.”

벌써 며칠째, 에단은 매일 밤 그녀를 본궁으로 불렀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일주일에 한 번 후궁을 찾으면 다행인 그에게 이건 엄청난 일이었다. 덕분에 후궁 전체에 로엘에 대한 황제의 총애가 하늘을 찌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상은 책에 파묻힌 밤샘 토론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음. 테바로스는 훨씬 북쪽에 치우쳐 있어요. 타르타니와도 거의 닿아 있지 않지요. 그래서 중부에 더더욱 테바로스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거 같아요. 그렇지만 테바로스도 오래된 북방의 패권국. 지금은 비록 예전만 못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막강한 나라입니다.”

로엘은 펼쳐진 북방 지도를 짚어 가며 차근차근 설명했고, 에단은 그런 로엘의 말을 경청했다.

그 어디서도 들어 보지 못했던, 북방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보들.

에단이 정확히 원하던 거다.

“테바로스 역시 토르티아와 같은 군사국으로, 그 수도는 철강의 도시로 유명합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침략당한 적이 없지요. 토르티아는 타르타니 숲이 지킨다면, 테바로스는 타르타니와 이어지는 대 산맥 나시베가 지키고 있습니다. 테바로스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이 높고 험난한 나시베 산맥에 활로를 뚫는 것부터 필요합니다.”

“요는 나시베와 가장 가까운 보울국부터 정복하란 소리군”

“예. 나시베를 넘기 위해선 끊임없이 물자가 필요할 텐데, 그러려면 보울국의 협조가 필수적이에요.”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도, 가볍게 듣지도 않는다.

로엘은 그 사실부터가 놀라웠다.

그녀 앞에 있는 분은 대 카이로스 제국의 황제.

그것도 즉위 후 단 한 번의 패전도 없는,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황제다.

그러함에도 그는 자만하지 않았다. 멀리서 온, 어린 여자의 말을 너무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진심으로 ‘북’을 원하고 있는 거다.

“폐하. 북방은 결코 토르티아가 전부가 아니에요.”

그래서 그녀 역시 돕고 싶었다.

그녀가 그를 위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중부의 수도 없는 북방 정벌이 실패한 이유는 첫째가 타르타니이며, 둘째가 토르티아입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북방의 다른 곳을 보지 못한 채 오직 토르티아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지요.”

찬찬한 그녀의 설명이 다시 시작되었다.

“타르타니를 모르니 타르타니를 넘어서는 데 반 이상의 전력이 낭비되고, 그렇게 넘어 보았자 눈앞에 보이는 건 철옹성 같은 토르티아의 붉은 성벽. 이건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토르티아로의 접근으로는 절대 북방의 어느 땅에도 카이로스의 깃발을 꽂을 수 없을 것입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 확신이 깃든 목소리.

이는 진심 어린 조언이다.

“……계속해.”

그녀는 그 앞에 카이로스의 국경지대 지도를 펼쳐 보았다.

“하지만 만일, 타르타니를 최소한으로 거치고 그 첫 상대가 토르티아가 아니라면요? 이야기는 아주 많이 달라지지요.”

그녀는 펜을 들어 국경지대 양 끝부터 타르타니와 맞닿아 있는 작은 국가들을 표시해 나가기 시작했다.

“최강이라 불리는 카이로스의 군사가 군력 손실 없이 제대로 토르티아에 닿는다면, 분명 이 전쟁은 승산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늘 실패로 돌아갔지요. 폐하. 정면승부만이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 작은 국가들은 정확히 카이로스 북방 교역의 교차점, 물자 교류의 요충지였다.

“북방은 분명 중부와 달라요. 다른 만큼 다른 접근이 필요하지요.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이 세 나라를 먼저 선점하시는 것이야말로 북방 정벌의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붉은 눈이 그를 향하고, 그 역시 황금의 눈에 그녀를 담았다.

그의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그녀는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물었다.

“저는 폐하께 도움이 되고 있나요?”

그는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걸 말이라고.

“아주 많이.”

“그럼 되었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그녀 역시 환한 미소로 화답하였다.

분명 이곳에 올 때가지만 해도, 오로지 토르티아에 대한 복수만을 바랐을 뿐이었는데, 계속 다른 욕심이 든다.

“로엘?”

이 아름다운 분께서 다치지 않으시길. 가시는 모든 길에 축복이 깃들길.

그리고 언제나 영광이 함께하길.

“아니에요. 계속할까요?”

로엘은 그저 마음으로 빌었다.

애써, 그와 함께할 때마다 깊어지는, 이 낯선 감정을 억누르며.

***

“……이건 인정해야 할 것 같군요.”

제롬의 낮은 목소리가 작은 공간에 울렸다.

“완전 인정. 조금 충격받았는데, 나?”

그리고 이어지는 루카스의 높은 목소리.

에단의 지시로 미리 집무실 뒷방에 있었던 제롬, 루카스, 아론은 로엘의 모든 말을 들었다.

“지금까지 이 정도로 북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던 자도, 있다고 한들 이렇게 도움 되었던 자도 없었습니다. 마마의 의견은 분명 새겨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확실히 전장에 오래 있었던 티가 나. 전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짚고 계시잖아? 그리고 외곽 삼국을 먼저 포섭하라는 전략, 확실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어.”

“무엇보다도 로엘 마마는 북방의 정세를 정확히 꿰고 계세요. 타르타니를 헤쳐 나갈 방법도, 우리가 간과했던 테바로스까지도요. ‘프란시아’로 명하시겠다던 폐하의 결정.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오늘 이 세 사람이 이 자리에 있는 바로 그 이유, 다름 아닌 ‘프란시아’ 때문이다.

저녁 회의가 끝나 갈 무렵 갑자기 아카시스 로엘을 북방 정벌 계획에 참여시키겠다는 에단의 말에 다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원로들조차 믿지 못해 오로지 이 세 사람하고만 논의하는 이런 중차대한 일을, 카이로스에 들어온 지 겨우 한 달 남짓 되신 분과 함께하겠다니.

그것도 그냥 데려가는 수준이 아니라, 카이로스 전쟁의 여신 ‘프란시아’로 임명해서 말이다.

이건 절대 그들이 알던 폐하가 하실 만한 결정이 아니었다.

“프란시아라. 참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지.”

루카스는 항상 들고 다니던 단검을 빙빙 돌리며 피식 웃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날 거다.

“아카시스님도 아카시스님이지만, 참……. 폐하도 대단하셔. 결국 우리의 그 득달같은 반대를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 버리셨잖아? 이렇게.”

루카스의 말에 제롬 역시 작은 웃음을 뱉었다.

루카스의 말대로 에단은 그들의 반대에 길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오늘 이 시간 이곳으로 오라는 명을 내렸을 뿐.

결국 직접 보여 줌으로써 단번에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한 거다.

“아. 얼굴 한번 뵙고 싶은데. 목소리부터 절세 미녀이란 말이야. 살짝만 열고 보면 안 되나?”

“절대 안 됩니다.”

루카스의 손이 문에 닿기도 전에 제롬이 먼저 그 앞을 막아섰다.

뻔히 예상되었던 제롬의 반응이라, 그리고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을 알아 루카스는 툴툴대며 옆에 있는 아론을 보았다. 아까부터 지나치게 조용했다.

“그나저나, 우리 보좌관님께서는 왜 아무 말도 없으실까?”

제롬도 루카스와 함께 아론을 보았다.

최연소 서기관에 황제의 보좌관인 그는 자타공인 황제 폐하의 책사이다. 국내 정사 논의는 물론 전략 결정까지 언제나 에단은 아론과 가장 많이 상의했다. 그러므로 이 일에 가장 민감한 것 역시 아론.

에단의 말에 ‘아니오’가 없는 제롬이나, 애초에 전장의 선봉에 서면 그만인 루카스와는 입장부터가 달랐다.

“……이건 성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닙니다. 아카시스님은 명백히 외지인. 카이로스의 사람이 아닌, 토르티아의 사람이에요. 저분의 의중이 어떤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입니다.”

그만큼 그는 매사에 신중하다. 그리고 그 신중함이 로엘을 쉽게 받아들일 리 없다.

루카스는 한숨을 쉬었다.

“얘가 엄청 위험한 말을 하네. 저분은 아카시스라고. 말 그대로 폐하의 여자!”

“그래서 뭐? 폐하의 여자라고 첩자가 아니란 보장이 있나?”

“야.”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거야. 함부로 믿지 말고.”

솔직히 아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그 단호함이 루카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함부로 믿는 게 아니라…….”

“아론 님의 말씀도 맞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논쟁이 감정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제롬이 입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하지만, 폐하께서 아카시스님을 ‘선택’하셨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에단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문고리 권력 중 최측근.

제롬의 에단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다.

“그리고 저는 폐하의 결정에는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

아론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제롬에게 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제롬의 말대로, 그의 주군의 결정에는 항상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그래서 이번도 그럴 거라고, 아론 역시 알고 있다.

“……그러함에도 신중하자는 겁니다.”

다만 이번만큼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뿐이다.

아론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먼저 방을 나섰다. 계속 들려오는 로엘의 목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으나, 이내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질투가 드나 보다.

갑자기 들어온 ‘이방인’이 너무도 빨리, 쉽게 그들의 주군 옆자리를 차지한 거 같아서.

***

로엘과 에단은 어느새 그녀의 궁 세룸니르에 들어와 있었다. 후궁에서는 쉬라는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어코 책을 한아름 싸들고 왔다.

“이 타르타니에 대한 지형도 말이에요. 이거 다 틀렸어요.”

수십 권의 책을 쌓아 두고, 일일이 틀린 부분을 고쳐 가고, 그는 의자에 앉아 그런 그녀를 차를 마시며 지켜보았다.

“타르타니는 이렇게 작지 않다고요. 이거 순 엉텅리네. 절대 직접 가 본 사람이 쓴 책이 아니에요. 애초에 그 거대한 숲을 이딴 얇은 책으로 설명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이 책은 갖다 버리세요.”

황제를 앉혀 두고 얇은 드레스를 입은 채 엎드려 있는 여자라.

무언가 야릇한 상황이 연출되어야 정상이건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런 학구열이 불타는 밤이 벌써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이것도 틀렸어요. 타르타니의 서쪽 끝에는 작은 민족 킨코족이 나라를 이루고 있어요. 베스국은 그다음에 있고요. 그래서……!”

“오늘은 여기까지.”

그래서 결국 그가 강제 집행에 나섰다.

그녀의 손에서 가볍게 책을 뺏어 들고 그녀를 단번에 안아 올려 그대로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그녀를 살며시 내려 두고 그 역시 그녀 위로 올라탔다.

“폐하……?”

갑작스레 그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 놓인 로엘은 놀란 눈으로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나를 도와주겠다는 마음은 익히 알겠으나, 아카시스가 이 밤에 해야 할 본연의 일도 좀 하지. 이래 봬도 며칠째 봐주는 중인데.”

그가 톡톡 상의 단추를 끌렀다. 원래 가벼운 가운만 입고 자는 그라서 이렇게 상의를 벗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묘하게 야릇한 그의 행동에 로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렸다.

“뭐, 뭘 봐주셨을까.”

“아는 거 같은데.”

그의 짓궂은 말에 그녀는 귀까지 단번에 빨개졌다.

반쯤 비치는 얇은 원피스에 고스란히 몸매 선이 드러나고, 깊이 패인 넥 라인은 그녀의 뽀얀 가슴골을 여실히 보여 줬다.

이런 차림으로, 이 밤에, 황제와 단둘이 있음에도 책이나 읽고 있었으면서 뭘 알고나 부끄러워하는 걸까.

“모르겠는……!”

그는 참았던 것을 토해 내듯 깊이 그녀의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저는 폐하께 도움이 되고 있나요?’

이렇게 하루하루 애가 타는데. 이렇게 점점 더 참기가 힘들어지는데.

“……달아.”

달콤한 향기가 퍼지고, 뜨거운 혀가 얽혔다. 서로의 열기가 번지고, 서로의 타액이 섞였다.

이리저리 도망가면서도 그가 주는 감각에 조심스럽게 응하는, 이제는 더 이상 귀엽지 않은 야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그녀가 깊은 숨을 내뱉기 무섭게 그는 다시 그녀를 찾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드레스 끈을 끌어 내렸다.

뽀얀 가슴이 환한 등불 아래에 드러나고, 찬 기운이 맨살에 닿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가렸다.

그는 그녀의 가는 팔목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가려 봤자 다 가려지지도 않아.”

“그래도 부끄럽단 말이에요.”

“그런 반응이 더…….”

미치게 하는 거야.

그는 흉터 하나 없는, 아니 점 하나 없는 그녀의 하얀 살결에 입술을 올렸다. 그리고 붉은 흔적을 천천히 남겨 갔다.

“으응.”

하나, 둘 그의 키스 마크가 그녀의 살결에 남겨질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금세 열기에 흐려진 눈에 물기가 고이고, 그녀의 손이 저절로 그를 찾았다. 그녀가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안자 훅하고 달콤한 그녀 고유의 체취가 그의 코안을 가득 메웠다.

그 역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미 그의 아래는 진즉에 단단해졌다.

“왜 이렇게…….”

달콤한 거야.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너무나 기분 좋았다. 그의 손가락이 봉긋 솟은 언덕의 정점을 꾹 누르자 그녀는 몸을 비틀었다.

“잠시만, 폐하……. 아!”

그를 밀어내는 그녀의 힘없는 저항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그 분홍빛의 정점을 물었다. 혀끝에 느껴지는 그 단단함은 그녀의 열기를 알려 주었고, 그의 손길이 천천히 라인을 따라 내려갈 때마다 움찔거리는 그녀를 놀리듯 그의 자잘한 키스가 이어졌다.

“도움이 된 보상을 해 볼까.”

“이게 무슨 보상이에요!”

“과연?”

그의 미소와 함께, 예고도 없이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드레스 아래에 숨겨진 얇은 천 조작을 헤쳐, 막 차오르기 시작한 그녀의 샘에 낯선 침입이 찾아왔다. 그녀는 허리를 휘며,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아!”

다리를 오므리는 그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정말 물러서기 싫었다.

그는 뒤로 도망가는 그녀의 허리를 다시금 단단히 잡아 세워, 굵은 손가락을 하나 더 그녀 좁은 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파……!”

언제부터 여자의 길이 이리 좁고 뻑뻑했던가. 아니 원래 이렇게 뜨거웠던가.

그는 그녀의 고통 어린 신음에도 좀처럼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진짜 아프단 말이에요……!”

조금씩 길이 열리고 샘이 차오를수록 그녀의 허리도 느리지만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그녀는 분명 본능적으로 적응해 가고 있었다. 여자로서 남자가 주는 쾌감에.

“아. 으응…….”

굵은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열기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흐릿하게 그를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은 그를 너무도 충동질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밤새 울리고 또 울리고 싶었다.

“로엘.”

그는 한 번 더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 역시 거부하지 않고 그를 찾았다.

새된 소리가 입을 막고, 그가 만들어 내는 젖은 소리가 귓속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그녀는 처음으로 ‘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몸이 저릿하고, 눈앞이 아득해지는 느낌.

이게 글로만 읽고 귀로만 들었던, 성적 쾌감이었다.

“나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리고 뒤늦게 몰려오는 부끄러움.

로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바로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가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보지도 말고.”

귀엽기도 하여라.

그의 아래는 여전히 성나 있고, 조금도 만족하지 못하였건만 오늘도 그만 물러서야만 했다. 더했다가는 진짜 다시는 이 여자를 못 볼 거 같았다.

“시작도 안 했는데 이렇게 부끄러워하면 다음은 어쩌려고.”

“몰라, 몰라!”

그는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 행동이 너무 다정해 그녀는 조금 고개만 들어 그를 보았다.

“……내가 잘못된 걸까요?”

“응?”

“그니까, 진짜 아팠단 말이에요. 「손가라도 이런데 어떻게 그게…….」”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기겁하는 것이 얼굴에 다 드러나 그는 겨우겨우 웃음을 참았다. 그 와중에도 그에게 숨기려고 모국어로 말하는 것조차 귀여웠다.

아. 언제 키워서 잡아먹나.

「다시 해 보면 가능한지 알 수 있을 텐데?」

「오늘은 더 이상 못 해요! 더했다가 진짜 이상해질 거라고요!」

“그럼 내일은 되고?”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당황함에 다시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는 결국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귀여워도 너무 귀여웠다. 그는 이불 속으로 도망가 버린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나의 비를 안아 보나.”

“……미숙하다고 놀리시는 거예요?”

“한탄하는 거다.”

그는 조금 뾰로통해진 그녀의 입술에 한 번 더 키스했다.

고작 손가락 몇 개에 이리 아파하다니. 그는 새삼 이제까지 처음인 여자들을 어떻게 안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한 번도 그녀들의 반응을 고려해 본 적이 없어서, 애초에 알지도 못했다.

“아카시스. 많이 드셔서 얼른 크시게.”

“……그만 놀려요.”

에단의 미소가 가시지 않는, 그녀의 빨간 볼이 가라앉지 않는 그런 달콤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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