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가까워지는 시간
호보체 일만 가볍게 해결하면 된다는 아론의 꾐에 넘어가 무려 수도권 모든 지역을 둘러보고야 말았다. 호보체 사건만이라면 나흘이면 끝날 일을 꼬박 2주를 둘러보고 나서야 에단은 겨우 환궁할 수 있었다.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긴 여정 고생 많으셨습니다, 폐하.”
이미 성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수많은 대소신료들에게 수십 번은 들은 소리가 또다시 후궁에서 반복되었다.
그가 늦은 시간 카이로스 황궁에 도착한다기에 원정에서 돌아오면 으레 그러했듯 본궁으로 들어가 홀로 휴식을 취할 거란 생각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바로 후궁으로 온다는 소식이 온 후궁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신관이 정해 준 의무 날짜가 아니면 거의 후궁 출입을 하지 않는 분이라 원체 뵙기가 어려운데 이리 친히 납시어 주신다니 뭇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도 했다.
누가 안단 말인가? 오늘 운 좋게 그분 눈에 예쁘게 보여 함께 밤을 보낼지.
“폐하께서 하루빨리 돌아오시길, 매일같이 빌었습니다.”
“저는 혹여 폐하가 먼 길 나가셨다 다치실까,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폐하 저는…….”
에단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러지 않아도 피곤한데, 그가 들어오자마자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자기 하고 싶은 말들만 내뱉는 그녀들은 그를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지금 그가 원하는 건, 이 밤에 이리 과한 드레스와 보석에 둘러싸인 여자들이 아니다.
“폐하. 제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제가 피로 회복에 좋은 차를…….”
“물러서.”
곱게 화장한 아리스가 먼저 그의 한쪽 팔을 잡았으나, 그는 바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두 번 말을 못 붙이게 만드는 그 정색한 얼굴에 바로 아리스를 비롯한 모든 여인들의 입이 다물렸다.
“세룸니르로 간다.”
이어지는 차디찬 한마디.
참 야속한 남자다. 뻔히 그녀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는지 알면서, 그는 그 마음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간절한 마음들을 후벼 팠다.
“이쪽입니다. 폐하.”
고민 없이 이 자리에 없는 ‘그녀’를 찾아 떠나 버리는 에단의 뒷모습을 여인들은 허무하게 쳐다보았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아리스.
그녀 눈치가 보여 그녀보다 반걸음 물러나 있던 다른 이들은 잔뜩 얼굴이 붉어진 아리스의 모습에 뒤에서 애써 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만, 그에게 선택받지 못한 처량한 모습은 그녀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아가씨. 돌아가요.”
애나는 그런 아리스 곁에 다가가 다독였다. 아리스의 작은 어깨가 덜덜 떨려 왔다.
“다음엔 아가씨를 찾으실 거예요.”
그리고 결국 참다 못해 떨어지는 눈물.
“……절대 용서 안 해.”
이러니저러니 해도 애나에게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아가씨다.
평생 받아 본 적 없는 박대에 눈물을 흘리는 그녀가 애나는 그저 안쓰러웠다.
***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한걸음에 달려간 세룸니르는 이미 그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
곱게 차려 입은 그녀를 보며, 에단은 속으로 웃었다.
자기 직전의 차림으로, 언제 오셨냐며 대수롭지 않게 말할 줄 알았더만 의외의 환대였다.
“너무 기다린 티가 나는데.”
“당연하죠. 오매불망 기다리신 분인데.”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녀들의 사람들을 물렸다. 직접 그의 겉옷을 받아 주려 곁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그는 망설이지 않고 품에 안았다. 가는 허리가 그의 한 팔에 가볍게 들어오고, 따뜻한 체온이 바로 그에게 전해져 왔다.
“이러면 옷을 못 받잖아요.”
“상관없어.”
무엇보다도 이 향기. 코를 찌르는 향수 향이 아닌 이 달달한 체취가 그리웠다.
그는 그녀의 투덜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간지러운데.”
“그뿐만이 아닐 텐데.”
시큰둥한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는 가볍게 그녀의 목덜미를 물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자국이 남도록 입술을 올리자, 그녀는 작게 신음했다.
“자, 잠시만……. 아!”
뒤로 몸을 빼려는 그녀를 단단히 안은 채로,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벽 쪽으로 몰았다. 어느새 그에게 완전히 갇혀 버린 그녀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2주 만에 보는 황금 눈동자. 그의 눈에 그녀가 오롯이 비쳤다.
“오매불망 기다린 사람치곤 반응이 시원찮은데.”
“이런 거 때문에 기다린 건 아니에요!”
“이런 게 뭔데?”
“그니까! 이런……. 이런 거…….”
막 대들려던 목소리가 수그러들더니, 로엘은 이내 그의 눈을 피해 버렸다. 귀까지 빨개진 모습이 귀여워서 에단은 피식 웃고 말았다.
뭘 했다고 이리 부끄러워하는지.
뭘 더 하면 어쩌려고.
“말해. 이런 게 뭔데.”
“……몰라요.”
뻔히 알면서 묻는 그의 짓궂음에 그녀가 그를 흘겼다. 가만 보면 그녀 놀리는 데에 취미가 들린 거 같다. 묘하게 애 취급 하는 그에게 그녀는 입이 나왔다.
물론 토끼의 토라짐이 호랑이 입장에선 그저 귀여울 뿐이지만.
“애 취급 하지 말아요. 나도 알 건 다 알아요.”
“넌 하나도 몰라.”
“모르는 게 아니라 아는데도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요. 내가 나이가 몇 개인데.”
“내가 말했지. 그게 문제라고.”
그는 한숨이 나왔다. 이런 천연 원석은 그도 처음이라 솔직히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늘 준비된, 농익은 과실만 땄지 막 꽃봉오리가 올라온,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상대한 적은 없었다.
“내가 폐하를 기다린 건, 그니까 당신이 없으면 열쇠를 쓰지 못하니까 그래서……!”
“이런 거?”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제 입술을 올렸다. 그리고 거침없이 그녀의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뜨거운 혀와 혀가 얽히고 타액이 오갔다. 도망가는 그녀를 붙잡고, 가지런한 치열을 쓸자 그녀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몸을 밀착할수록 잔뜩 긴장했던 몸에서 서서히 힘이 풀리더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하아.”
“다행히 잊어버리지 않았네. 숨 쉬는 법.”
“자, 잠시만요. 뭐 하는 거예요……!”
“옷 벗기는 중인데?”
“아니,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
그녀가 뭐라 하든 그는 툭툭, 그녀의 드레스 버튼을 풀더니 순식간에 드레스가 툭하고 그녀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그는 버둥거리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니, 그니까. 폐, 폐하!”
“그만 좀 불러.”
그는 성큼성큼 걸어 그녀를 침대 위에 살포시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벗겼어야 할 자신의 옷을 스스로 단번에 벗어 버렸다.
훤히 드러나는 상반신에 또다시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침대 끝으로 도망간 그녀 위로 그는 느릿하게 올라섰다.
“잠깐만요! 지금 폐하 너무 성급해요! 너무 빠르다고요!”
“속 터지게 천천히 하고 있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이 방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키스를 퍼붓고 지금쯤이면 그녀의 온몸에 그의 흔적을 남겼을 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녀의 안으로 밀고 들어갔겠지.
그녀가 뭐라 하든 말이다.
자신이 이렇게 참을성 많은 사람인 줄, 에단은 새삼 깨닫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고 성급? 진짜 성급한 게 뭔지 몸소 보여 주고 싶다.
“아니, 그니까……!”
그는 그녀 몸 위의 페티코트부터 끌어 내렸다. 솔직히 이렇게 손수 옷을 벗기는 것도 그는 처음이었다. 늘 알아서 알몸이 되어 있거나, 그의 벗으라는 말 한 마디에 알아서들 벗었으니까.
그래서 겹겹이 싸여 있는 여성의 속옷에 살짝 짜증이 올랐다.
“뭐 이리 복잡하고 많아.”
“그니까 제가 한다고요. 제가.”
“싫어.”
맨살이 드러나 계속 어찌할 줄 몰랐던 그녀가 결국 그의 서툰 솜씨에 웃고 말았다. 거친 황소처럼 밀고 들어올 땐 언제고 갑자기 어리숙한 양이라니.
그녀는 귀엽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끈으로 여러 번 얽혀 매듭지어진 코르셋 푸는 것을 도왔다.
그렇게 그녀의 도움을 받고 겨우 그녀를 감싼 모든 것을 벗긴 그는 진심으로 투덜거렸다.
“앞으로 입지 마. 안 입어도 충분히 말랐어.”
“나 말고 헤더한테 말해 줄래요? 다른 재봉사들한테도.”
“이거 안 해도 충분히 가늘고, 커.”
“아닌 거 같은데…….”
그의 손에 의해 마지막 코르셋이 벗겨지자, 그녀는 얼른 시트를 끌어 올려 가슴을 가렸다.
말을 또박또박 받아치면서도, 엄청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는 게 눈에 고스란히 보였다. 급하게 침대 옆에 준비된 옷을 잡으려는 손을 에단이 먼저 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깍지를 꼈다.
그 손길이 뭐랄까. 너무 부드러워, 그녀는 순간 순순히 그가 이끄는 대로 반쯤 일으킨 몸을 다시 침대에 뉘였다.
“충분히 가늘고.”
“읏!”
그녀의 몸 위에 그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의 손길이 살며시 그녀의 가는 허리를 쓸었다.
그리고 자연히 위로, 위로 올라가 그녀가 애써 끌어 올린 시트를 내렸다.
“충분히 커.”
“아!”
그 곧게 뻗은 큰 손이 그녀의 뽀얀 가슴을 움켜쥐자 그녀가 바로 허리를 튕겼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맨살에 닿는, 남자의 뜨거운 손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며 희롱할 때마다 짜릿한 무언가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아. 응!”
“게다가 충분히 예쁘지.”
달콤한 말이 귓가에 울리고, 그는 다시금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정신을 쏙 빼놓는, 농후한 키스가 이어지고 그의 손에 의해 이미 단단히 솟은 정점을 그는 망설임 없이 머금었다.
“……충분히 예뻐.”
여자 가슴이 언제부터 이리 예뻤나. 아니, 여자 몸이 언제부터 이리 기분 좋은 것이었나.
그는 이미 달아오른 자신의 아랫도리에 최대한 힘을 주었다. 뭘 했다고 벌써 이 상태인지, 그는 그녀의 몸이 주는 달콤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으응……!”
정신이 아득해져 와, 이 짜릿함에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원 없이, 그녀의 새하얀 피부 곳곳에 그의 흔적을 남겼다.
2주 동안 그녀를 못 만나면서 그는 두고두고 후회했다.
이 몸에 이렇게 잔뜩 흔적이라도 남기고 올걸, 하고.
이 황궁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그의 여자에게 그 누구도 감히 손댈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괜한 불안감이 들었다.
혹여라도 그가 없는 동안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볼까 봐, 그녀를 보면서 괜한 흑심을 품을까 봐.
“아. 안 돼요. 폐하. 거긴 안……!‘
그녀의 저항에도 그는 마지막 남은 천에 손가락을 걸었다. 얇고 얇은, 이 천 하나. 그는 당장에라도 끌어 내려 이미 성날 대로 성난 그를 그녀의 안 깊숙이 집어넣고 싶었다.
“약속하셨잖아요.”
그런데, 그의 손을 잡는 그녀의 안쓰러운 악력이,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 붉은 눈이 진심이었다. 그래서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싫어요. 폐하.”
그녀가 이미 차오른 걸 안다. 이미 달아오른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안다.
그러함에도, 그녀의 눈은 진심이었다.
“……나도 싫어.”
그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 그가 밀어붙이면 충분히 그는 욕망을 채울 수 있다.
이 밤 내내,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몇 번이라도 그러할 수 있다.
‘당신의 여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그는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제게 시간을 더 주세요. 제 마음이, 제 결심이 바뀔 시간.”
그의 뺨을 손으로 감싸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녀는 달콤한 유혹의 말을 속삭였다.
처음에는 절대 안 된다더니만 이제는 시간을 달라니.
너무도 약은 여우다.
이 얼굴과 이 몸과 이 눈동자로, 그런 말을 쏟아 내는데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가.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첫날밤, 그녀 맘대로 하라던 그 변덕이 두고두고 후회된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이내 그녀 위에서 내려왔다.
황제를 이겨 먹는 아카시스는 세상에 이 여자 하나일 거다.
“……감사합니다.”
그는 투덜거렸지만, 눈에 띄게 안도하는 그녀를 보자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본의 아니게 그녀를 겁먹게 한 거 같아 마음이 쓰였다.
“아무 짓도 안 해. 긴장 풀어.”
그래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여전히 맨살이 닿는 느낌은 그에게 무한한 인내를 요구했지만, 그보다는 아직 너무도 어린 그녀를 안정시키고 싶었다.
“……화나셨습니까?”
“아니.”
“……다음엔 좀 더 잘할게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말이 이리 무서운 거다.
그는 자신의 품 안에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그녀의 머리를 아예 품으로 안아 버렸다.
하는 말마다 남자를 유혹하는데 그냥 조용히 재우는 게 상책인 거 같다.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른 채, 그녀는 기어코 그의 품에서 꼬물거리며 얼굴을 들었다.
“가신 일은 잘 해결되었나요?”
“나름.”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네요. 바로 오실 줄 알았는데…….”
“기다렸단 소리로 들리는데.”
“기다렸다고 했잖아요. 열쇠 때문에.”
“진짜 그것뿐만인가?”
그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자신이 2주 동안 무슨 마음으로 그녀를 그리워했는데, 고작 서고를 들어가기 위해서만 그를 기다렸다고 하면 좀 많이 서운할 거 같았다.
“……그것뿐이겠습니까.”
그런데 다행히 그건 아닌가 보다. 이럴 땐 또 솔직해져, 그의 마음을 단번에 풀었다.
그는 그녀를 좀 더 바짝 품에 안았다.
“그런데 어째서 나오지 않은 거야.”
이제 와 말하지만, 그는 솔직히 후궁에 들어섰을 때 수많은 여인 사이에 그녀가 없어서 내심 실망했다. 버선발로 뛰어오길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그들 중에는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녀의 후궁으로 오면서도 내심 기대를 많이 내려놨던 거다.
그런데 또 이리 곱게 차려입고 그를 환대하니 그녀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얌전히 기다리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 답은 너무도 간단했다.
“돌아오실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고 하시어서 그리하였습니다.”
싱긋 웃으며 그의 허리를 안는 그녀에게 그는 결국 웃어 버렸다.
“그리고, 꽃이 벌을 찾아갈 순 없잖아요.”
꼬리 천 개 달린 여우 같으니라고.
‘요망’하다는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다음엔 제가 벌을 하겠습니다. 그때는 폐하께서 꽃이 되어 주세요. 그럼 제가,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그는 사랑스러운 말만 하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꽃은 언제나 너야. 찾아오는 건 내가 할 테니, 너는 이 자리에만 있어.”
“저도 싫습니다. 꽃으로만 사는 건.”
그의 말에 이렇게 대놓고 싫다고 하는 사람 역시 그녀가 유일할 거다.
그가 살짝 눈썹을 찌푸린 걸 뻔히 보았으면서도, 그녀는 오히려 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그의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제가 벌을 찾아가는 꽃이 되는 수밖에.”
한 수 위. 아무리 봐도 그녀가 한 수 위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이 작고 사랑스러운 공주에게 이번에도 또 져 줄 수밖에 없었다.
***
“마마. 케인 님께서 드셨…….”
“오라버니!”
애나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리스가 먼저 문으로 달려나가 그녀의 오라비를 맞았다.
이미 반쯤 울상인 그녀를 다 이해한다는 듯, 케인 역시 문이 열리자마자 자신의 품으로 뛰어든 여동생을 토닥거렸다.
“마마.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데요.”
케인 몰브.
몰브 공작의 장자로, 가문의 배경 아래 젊은 나이임에도 이미 재무부 차관직을 맡고 있다.
아리스와 쌍둥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외모를 쏙 빼닮은 남매는 성격마저도 쏙 빼닮아 사교계에서는 악명이 높았다.
혹여 아리스 눈에 잘못 드는 날에는 케인에게 톡톡히 그 값을 치러야 했으니까.
그래서 아리스는 궁에 들어온 후에도 종종 케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럼 케인은 궁 밖에서 알아서 그녀의 신경에 거슬리는 모든 걸 처리해 주었다.
“새로 들어온 아카시스 하나가 마마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말도 마세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북방의 나라에서 와서는 천지 분간 못 하고……!”
아리스는 생각만 해도 분해 주먹을 꼭 쥔 손을 떨었다.
케인은 처음 보는 그런 아리스의 모습이 꽤 낯설었다. 동시에 호기심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여자가 들어왔길래 천하의 아리스 몰브를 이리 화나게 한 것일까.
“천지 분간 못 하면 하게 해야죠. 이곳이 어디고, 마마가 누구인지 알게 하면 될 일입니다.”
케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간단한 한마디에 아리스는 케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녀가 듣고 싶던 말들이었다.
“오라버니……!”
“그러니 괜한 신경 쓰지 마세요, 마마. 황후가 되실 분이 그리 작은 일에 마음을 쓰셔서 되겠습니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역시 처음부터 케인을 부를 걸 그랬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왜 여태 고민만 하였을까.
“최근 폐하와의 시간도 많이 못 가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또한 제가 아버지께 말씀드려 따로 자리 한번 만들겠습니다. 일단 자주 뵈어야 없던 마음도 생길 거 아닙니까.”
“오라버니밖에 없습니다. 오라버니, 정말 고마워요.”
아리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최근에 이래저래 서러웠던 데다 폐하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는 것 같아 불안감에 잠을 못 이루었는데, 케인이 그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었다.
케인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러곤, 몸을 숙여 좀 더 바짝 아리스에게 다가가 눈을 맞추었다.
“아리스. 누가 들어오든, 누가 나가든. 네가 이 나라의 황후가 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너는 몰브가의 영애야. 누구도 네 자리를 넘볼 수 없어.”
“응……!”
케인은 자신의 아름다운 동생을 한 번 더 안아 토닥였다.
이리 아름다운데도 그깟 황제의 마음 하나 얻지 못하다니.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그래도 어찌할까. 그게 자신의 동생인 것을.
“조만간 연락하겠습니다, 마마.”
“네. 살펴 가세요, 오라버니.”
케인은 평소답지 않게 문 앞까지 배웅하는 아리스를 보며 그녀가 지금 궁지에 몰리긴 몰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후궁을 나서며 케인은 작게 중얼거렸다.
“토르티아의 공주라고 했던가. 그 북방의 절세미인.”
케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북방은, 꽤 멀다.
“천하의 에단 아폴리우스를, 이틀이나 잡아 두었단 말이지.”
꽤 멀어서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재밌네. 그 여자.”
케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동생을 위해, 조금 못된 짓을 해 볼까 싶다.
***
“잠시만요. 제가 지금 무얼 들은 걸까요?”
“황실 서고를 출입할 수 있는, 사서들 관복!”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헤더는 어처구니없는 로엘의 요청에 빽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모시는 분이 남다른 건 알았지만, 이건 좀 심했다.
“설마, 진짜 설마 해서 여쭙는데요, 베리타스에 들어가시려는 건 아니죠?”
“바로 그거야!”
“아카시스님!”
이번에는 딜리아가 소리쳤다. 이분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다.
그곳은 웬만한 고위직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인데, 거기에 몰래 들어가시겠다니. 걸리면 쫓겨나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거다.
“절대 안 돼요.”
“하지만 허락받았는걸. 쨔잔!”
로엘은 자신스럽게 목에 걸고 있던, 에단이 건네준 서고 열쇠를 보여 주었다.
황제의 문장이 떡하니 박혀 있는 그 열쇠를 보자 순간, 딜리아도 헤더도 할 말을 잃었다.
“설마…… 폐하께서 주신 거예요?”
“응. 내가 달라고 했어.”
“그럼 출입 허가는요?”
“음. 그건 반 정도?”
그녀의 아리송한 말에 딜리아와 헤더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니까 열쇠도 받았고, 들어가라고 허락도 받긴 했는데…….”
“했는데요?”
“능력껏 하라고 하셨어. 능력껏 들어갔다가, 능력껏 걸리지 말고 나오라고.”
“그건 허락하신 게 아니잖아요!”
딜리아와 헤더의 목소리가 똑같이 겹쳤다. 빽 소리 지르는 그녀들의 목소리가 밖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로엘은 이 정도의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좀 더 본격적으로 그녀들을 설득했다.
“나는 누가 와서 말려도, 베리타스에 꼭 들어가고 말 거야.”
“아카시스님!”
“그런데 너희들이 안 도와주면, 아마 걸릴 확률이 훨씬 커지겠지? 그럴 바엔 나 좀 도와줘. 너희는 내 편이잖아. 응?”
딜리아와 헤더의 손을 꼭 붙잡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부탁하는 그녀에게 어차피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헤더와 딜리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진짜 괴짜 공주님을 주인님으로 만난 듯하다.
“하아.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고요.”
“자자. 들어 봐. 일단 이 황제 직속 열쇠는 일반 사서관들이 들어가는 문과 다르게, 황제 궁에서 직접 연결된, 오로지 황제 폐하만이 오갈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단 말이지. 그러니 나는 그 뒷길을 이용해서 아무도 모르게 샥 다녀오는 거지!”
“하아 .마마. 그곳 경비가 얼마나 삼엄한지 알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딜리아가 교대 시간을 알아 와야 하는 중대 임무를 수행할 거란 말씀!”
너무도 당연하게 딜리아가 알아 올 것을 전제한 로엘의 계획에 정작 당사자인 딜리아는 순간 너무 당황했다.
“예?! 제가요?”
“응!”
로엘은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절대 응해서는 안 되는 부탁이었지만, 딜리아는 그녀가 해내리라고 너무도 확신하는 로엘의 믿음에 차마 못 하겠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중대한 일을 그녀에게 맡긴 사람이 있기는 했던가.
“마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아무리 딜리아가 정보원이 많다고는 하지만…….”
“할게요!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느새 딜리아의 눈동자도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늘 다른 이에게 뒤처져 허드렛일만 해 왔는데, 자신의 주인이 자신을 믿고 가장 중요한 일을 맡겼다. 이 기회를, 이 믿음을 딜리아는 저버릴 수 없다.
“잠깐만, 딜리아. 이건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
“저희 사촌 오빠가 베리타스 경비를 맡고 있어요. 제가 한번 부탁해 볼게요!”
“그럼 너무 고맙지!!”
헤더의 만류에도, 딜리아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게다가 딜리아 사촌이 경비라는 이야기에 로엘은 눈이 더욱더 반짝였다.
모든 게 착착 진행되고 있다.
“그럼, 이제 시에라가 망만 봐주면 되겠지?”
“예. 명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여지껏 묵묵히 그녀의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에라는 당연히 그녀의 말 한마디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이 또한 너무 당연한 반응이라 로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주 완벽해! 이제 헤더가 옷을 만들고, 딜리아가 시간만 알아 오면 바로 작전 개시다!”
“작전 개시!”
“개시!”
“네? 뭘 개시해요?”
뒤늦게 장부 정리를 하고 온 페니는 갑작스런 단결 모드에 당황했다. 그런 페니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세 사람은 이미 똘똘 뭉쳐 눈이 빛났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런 게 있어. 걸리면 죽는 엄청난 비밀 대작전!”
“응?”
자세한 설명은 안 해 준 채 웃기만 하는 딜리아에게 페니는 궁금증만 더 커졌다.
확실한 건, 로엘이 아주 신났다는 것.
페니는 뭔지 몰라도 그거면 됐다 싶었다.
“그 작전이 뭔지 모르지만, 마마. 꼭 성공하시길 바랄게요.”
“응!”
당차게도 말하는 로엘을 보며, 페니는 피식 웃었다.
역시나 이분과 함께라면 많은 일들이 일어날 거 같다. 그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적어도 심심하진 않을 듯하니, 그럼 된 거다.
저렇게 신나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장부는 나중에 보고드려야 할 거 같다.
***
“헐. 뭐야. 이 서류 더미는.”
루카스는 정무실 가득 쌓인 서류 산을 보며 기함했다.
딱 그가 자리를 비운 2주치만큼 쌓인 거 같았다.
“와……. 이걸 어떻게 다 보냐.”
그 서류 더미에 에단과 아론이 둘러싸여 벌써 몇 시간째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바쁘고 정신 없어. 쓸데없는 용건이면 나중에 해.”
“짜식. 까칠하긴. 나도 중요한 보고라고.”
루카스는 서류 더미를 건너 건너 겨우 에단 앞으로 올 수 있었다. 그는 아론이 추리고 제롬이 거들어 넘어오는 서류들을 기계적으로 결재하고 있었다.
딱 보아도 이미 그는 머리 끝까지 짜증이 올라와 있었다.
“저, 폐하?”
“쓸데없는 거면 닥쳐.”
역시나 살벌하기 그지없는 대답이 날아왔다.
“다음에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바로 루카스는 꼬리를 내렸다. 아무래도 지금 보고했다간 정말 그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겠다.
“좀 쉬엄쉬엄하세요, 폐하. 돌아와서 하루도 안 쉬시고, 다들 너무하다, 진짜.”
“이 분위기에 그딴 말 지껄이는 네가 제일 너무하니까 제발 꺼져.”
“야. 나도 말 좀 하자. 난 안타까워서 그러지, 안타까워서.”
실컷 운동하고 와서 기분이 상쾌한 루카스는 지나치게 기운이 좋았다.
이 눈치 없는 개는 아무리 눈치를 줘도 결국 자기가 있고 싶은 만큼 있다 갈 걸 알아서, 아론과 제롬은 루카스를 그냥 냅두기로 했다. 워낙 익숙한 상황이라 괜한 데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았다.
“이따위로 아무 일도 안 할 거면 다 때려치우라 그래.”
에단의 짜증 가득한 말에 제롬과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에단이 저런 말을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이라는 게 그가 자리를 비운 2주 동안 일을 쌓아 놓은 채 기다리기만 하고 한 건도 처리하지 않을 수 있는지, 정말 무능하고 게으르기 짝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죄다 갈아엎고 싶건만, 그놈의 작위가 무엇인지 골머리가 딱딱 아팠다.
“진짜 양심 없는 거지. 그렇게 나랏돈을 매달 받아 처먹으면서. 쯧쯧. 우리 폐하. 새로 오신 아카시스님 뵈러 가야 하는데, 늙은이들이 눈치가 없네. 눈치가 없어.”
그러지 않아도 벌써 사흘째 지척에 두고도 보지 못해 잔뜩 짜증나 있는 상태였는데, 루카스가 그 점을 정확히 꼬집자 자연히 눈썹이 꿈틀거렸다.
돌아오면서, 적어도 한 달은 품에 끼고 있어야 2주 동안의 이 부족함을 메울 거라 생각했는데 한 달은커녕 딱 하룻밤 본 게 전부였다.
그것도 아주 건전한 하룻밤.
“아니. 우리 폐하께서 돌아오자마자, 콕 집어서 로엘 마마께 간 게 황궁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는데, 진짜 너무 눈치 없는 거 아냐? 딱 보아도 지금 눈만 맞아도 불 붙는 신혼 모드인데 말이야.”
“흠흠. 대장군. 이제 그만 가셔야 할 거 같습니다.”
제롬이 눈치껏 중간에 끊었다. 루카스가 지금부터 한 마디만 더 한다면 진짜 맞을 수 있겠다 생각했으니까.
“실컷 떠들었으면, 이젠 진짜 좀 꺼져 주시죠. 장군.”
“예예. 이렇게 절 환대해 주셨으니 이만 갑니다요, 가. 폐하. 다시 오겠습니다!”
에단은 인사하는 루카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딱 보아도, 보고를 명분으로 로엘 얘기를 하러 온 거였다.
그가 로엘을 찾아갔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질 것은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그 눈치 없는 여자야 자신이 그녀를 찾아간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를 테지만, 이미 후궁에서는 그녀의 지위가 달라졌을 거다.
비단 후궁뿐이겠는가.
후궁에 여식을 넣은 귀족 사회 모두를 흔들고 있을 거다.
새롭게 등장한 그녀의 존재가.
“그 바보야 태평하게 책이나 읽고 있겠지.”
에단은 자신과 한 침대에 누워서, 황궁 서고 얘기만 주야장천 하는 그녀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라 말대로, 그녀는 뭘 몰라도 너무 몰랐다.
“폐하. 잠시 눈을 좀 붙이셔도 됩니다.”
“……다음 거 가져와.”
제롬은 그답지 않은 한숨에 휴식을 권했지만 에단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쉰다고 서류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만큼 증식하는 걸 아니 하루라도 빨리 끝내는 게 맞았다.
그래야, 그 말 안 듣는 여자를 보러 갈 수 있을 테니.
그래야, 그 어렵기도 한 여자를 이 품에 안을 수 있을 테니까.
***
“마마. 켈트 공작부인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그래.”
테라스에 홀로 앉아 차를 마시던 수아가 시녀의 말에 힘없이 답했다.
매일매일이 똑같은 나날. 수아는 날이 갈수록 생기를 잃어 갔다.
수아를 어렸을 때부터 키워 온, 유모 같은 베티는 그런 자신의 아가씨가 그저 안타까워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무기력한 수아에게 그나마 세상 이야기를 전해 주는 건, 역시 수아와 함께 자란 시녀 쥰의 몫이었다.
또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오늘도 쥰은 수아의 찻잔을 다시 채워 주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마마. 어제 납품을 받으러 잠시 궁내부에 들렀다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
“네. 그 새로 오신 아카시스님은 제가 말씀드렸었죠? 그 북방의…… 어디더라?”
“토르티아.”
“네, 토르티아! 토르티아에서 온 공주님이시라고. 근데 그 공주님이 실은 사연이 있는데…….”
“전설 같은 아버지는 의문사에 어머니는 살해당하고 겨우 숙부 밑에서 살아남아, 마치 포로처럼 이곳에 왔다고. 네가 다 얘기했어.”
“역시. 기억력이 좋으시다니까. 근데 그 아카시스님께서 아주 파란을 일으키고 있대요!”
쥰은 아주 신이 나서 이야기했지만, 수아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수아에게 황궁 일은 그다지 관심사가 아니었다. 누가 들어와 무얼 하든 그건 그녀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글쎄 폐하께서 첫날부터 그 새로 오신 아카시스님, 그니까 로엘 마마 궁에서 주무신 것으로도 모자라 그다음 날에도 친히 가서 주무시고, 2주간 영지 순찰에서 돌아오신 날에도 바로 그 아카시스님을 찾아가셨대요! 이건 진짜 엄청난 일이잖아요!”
그런 수아에게도 로엘의 이야기는 조금 흥미가 생겼다.
확실히 쥰의 격한 반응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일이긴 하였다.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분이 먼저 찾아갔다, 라. 그것도 벌써 연속으로 며칠 밤이나.
이건 확실히 모두가 놀랄 일이다.
“그래서 다들, 드디어 폐하의 마음에 든 마마가 들어온 게 아니냐며 후궁 전체가 시끌시끌하대요. 특히 아리스 마마. 아주 부들부들 떨고 있답니다. 분해서. 아이, 고소해라. 그렇게 우리 아가씨 무시하더만 쌤통이다.”
“쥰. 말조심.”
“예예.”
베티의 핀잔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쥰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랜만에 그녀의 마마께서 작은 관심이라도 보이시는 거 같아, 괜히 쥰이 더 흥분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그분이 아리스 마마와 붙어서 벌써 두 번이나 이겼대요! 처음 아리스 마마가 먼저 기선제압하러 로엘 마마 궁전에 갔다가 아주 호되게 당하고 오고, 티타임에서도 다른 귀인들 앞에서 로엘 마마가 또 한 번 아리스 마마 코를 납작하게 해 줬다는데요!”
쥰은 탁 하고 테이블 위에 양손을 내려쳤다. 오늘 들은 가장 따끈따끈한 이 소식을 알리고자 이리 길게 말한 거다.
“화룡점정은 역시 폐하가 순찰에서 돌아오신 날! 한껏 차려입은 아리스를 대놓고 마다하시고 한걸음에 로엘 마마에게로 간 거! 아주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답니다.”
이 이야기엔 수아뿐 아니라 베티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아리스가 어떤 인물인지는, 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있던 두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아리스가 이렇게까지 당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베티도 이제는 제법 궁금해졌다. 그 새로 오신 아카시스님이.
“대체 어떤 분이 오신 걸까요.”
“그러게. 잘 모르지만 그래도 대단한 분인가 보구나.”
그 얼음 같은 남자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그 불같은 아리스에게 맞설 수 있는 것도 전부 다.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분이시겠지만.”
수아는 씁쓸히 미소 지으며 말을 끝맺었다. 쥰이 새로 채워 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금 창밖만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베티와 쥰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잠시 가졌던 흥미도 얼마 가지 못했나 보다.
“쉬세요, 마마.”
이미 오래전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신 분.
베티와 쥰은 생기 있었던, 후궁에 들어오기 전의 수아가 생각나 그저 마음이 아플 따름이다.
***
“딜리아. 도대체 중요하게 할 말이라는 게 뭔데? 너 지금 여기도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된……!”
“쉿! 오빠 그게 아니라 이분은…….”
딜리아의 사촌 오빠, 딘은 관직 모자를 슬쩍 들어 올려 보인 붉은 눈동자에 바로 무릎을 꿇었다.
지금 황궁을 떠들썩하게 만든 소문의 주인공, 로엘인 것을 딜리아가 말하지 않아도 단번에 알아보았다.
“아,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자동으로 나오는 그 칼같은 대응에 로엘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웃었다. 딜리아의 사촌이라더만 딜리아와 닮은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반가워요. 나는 아카시스 로엘입니다.”
“황실 특수 경비 제1군 소속, 딘 마테. 마마를 뵈어 영광입니다!”
군인 아니랄까 봐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인사였다. 로엘은 오랜만에 받아 보는 군대식 인사에 살짝 미소 지으며, 바로 용건을 말했다.
“딘. 초면에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하명하십시오. 받들겠습니다.”
“우선 이거.”
그녀는 목에 건 열쇠를 딘에게 보여 주었다. 황제 폐하께서 가지고 계셔야 할 바로 그 열쇠인 걸 단번에 알아본 딘은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이건 폐하의…….”
“맞아요. 감히 제가 하사받았지요. 그런데 출입은 반만 허가받았어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쉽게 말해, 내가 몰래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딘은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이 문은 황제 폐하 외에는 그 누구도 지날 수 없는, 말 그대로 황제 전용 문이다.
그리고 그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오로지 폐하만이 가지고 계신, 지금은 로엘의 손에 든 바로 저 열쇠다.
로엘이 저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고, 그 열쇠를 가지고 자신에게 문을 열어 달라는 것은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몰래라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 서고에 들어갈 수 있는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아야 된다는 말 같아요. 내가 알아듣기론.”
“예?”
갈수록 더 가관이었다.
지금 이곳에, 로엘 마마가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이상한데 그분께서 폐하의 열쇠를 가지고 들어가겠다는 건 더 이상한 일이다.
딘은 어찌해야 할지를 정말 몰랐다.
“그냥 들여보내 주기만 하면 내가 안 들키게 알아서 잘 할게요.”
“아니,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적어도 폐하한테는 허락받았어요. 이건 거짓말 아니니까, 그런 된 거 맞죠?”
“그야…….”
“부탁해요. 곧 있으면 교대 시간도 바뀐다고 들었어요. 딜리아의 사촌 오빠라고 들어서, 믿고 온 거예요, 딘.”
뒤에 있던 딜리아는 씩 웃었다. 로엘 마마의 특기다. 절대 아니요를 할 수 없게 만드는 저 눈.
딘은 깊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앞으로 40분 있으면 교대원이 옵니다. 그 전에 꼭 나오셔야 합니다.”
“고마워요!”
결국 딘은 길을 열었고, 로엘은 굳게 닫힌 황금의 문 앞에 섰다. 떨리는 마음으로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었고, 당연히 열쇠는 딱 들어맞아 문이 열렸다.
“마마, 얼른 들어가세요. 시간이 없어요!”
출입 허락을 받은 건 로엘뿐이기에 베리타스에는 로엘 혼자서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카이로스의 보물, 베리타스.
카이로스에 오면서 이곳에 들어오겠노라고 몇 번을 다짐했던가.
로엘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한 걸음씩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서고 가득 들어찬 책장들.
돔 천장을 통해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끝없이 펼쳐지는 책들의 향연은 장관이었다.
로엘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아 저절로 나오는 탄성을 참았다.
가히 카이로스의 보물이자 카이로스의 두뇌라 불릴 만하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기록을 이곳에 모아 둔 듯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카이로스의 역사가 통째로 여기 있잖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당연히 카이로스의 역사서.
건국부터 에단의 즉위 이후까지, 꼼꼼히 기록한 그 모든 자료들이 끝나지 않을 듯한 수백 개의 책장에 꽂혀 있었다.
단지 눈으로만 훑어도 끝이 없는 기록들을 보며, 카이로스의 부강함은 이곳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럴 때가 아냐……!”
홀린 듯 구경하던 로엘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료들 사이에서, 그녀가 원하는 ‘그 기록’을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서둘러야 했다. 로엘은 대충 눈으로 훑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일단 선왕 시대 쪽으로 되는데……. 찾았다!”
꽤나 깊숙이 들어가서야, 드디어 그녀가 원하던 카이로스 선왕 시대의 북방 지역의 자료가 나타났다. 중부와 분철해 놓은 색깔부터 달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는데 로엘은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멈칫했다.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다른 곳과는 다르게 유독 그곳만 뒤죽박죽 전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타르타니의 지형. 변화. 토르티아의 통일. 왕조…….”
전부 북의 자료.
“왜 이것만…….”
이건 일부러 정리를 하지 않은 거다.
누군가가 건들지 말라고 지시하였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사람, 단 한 사람뿐 아닌가.
로엘은 ‘첫날밤의 그’를 떠올렸다.
토르티아를 바치겠다던, 북방 정복을 돕겠다던 그녀의 말을 그는 분명 경청했다.
아무 표정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북방’에 반응했다.
그는 북을 보고 있는 거다.
“……그곳을 염원하고 있었구나.”
로엘은 연구한 흔적이 역력한 자료들을 손으로 쓸었다.
광활한 대지, 중부 전체를 제패한 그다. 이미 어린 나이에 업적은 이룰 만큼 이룬 셈이다.
그러함에도 그는 더 먼 곳을,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을 해내는 사람이라.’
“……정말 그 이상이네.”
새삼, 그가 카이로스의 황제라는 사실이 와닿았다.
태양의 신이 내렸다는, 이 황금의 제국에 더할 나위 없는 황금기를 가져올 거라는,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내가 정말 뭣도 모르고 덤벼들었구나.”
그녀가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사람.
그녀가 감히 그 크기를 가늠할 수도 없는 사람.
‘토르티아의 멸망이라. 나에겐 너무도 쉬운 일이지. 너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녀는 새삼스럽게 그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아니, 가까웠던 적이 있긴 했던가.
“……바보 같네.”
로엘은 괜스레 울적해졌다.
이곳에 복수하기 위해 온 것도, 황제의 여인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전부 그녀 자신.
로엘은 그와의 관계에서 그 어떠한 것도 서운해해서도, 슬퍼해서도 안 된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없다.
“그러면서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어째서 그와의 거리감이 이리도 서운할까.
로엘은 그만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이대로 건들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야, 야! 같이 좀 가자!”
그렇게 막 되돌아가려는 순간, 멀리서 갑작스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소리치지 말라고, 멍청아.”
뒤이어 또 다른, 짜증스러운 목소리도 들려왔다.
로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아무래도 서기관들이 드나드는 반대쪽 문으로 다른 사람이 들어왔나 보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그 옛날에 뭔 글을 이리 많이 썼나 싶어. 골 아프게.”
“시답잖은 소리나 할 거면서 왜 따라 들어와. 네놈이 함부로 들어올 그런 곳이 아니라고.”
“말하는 싸가지하곤. 야. 나도 정식으로 허가받은 몸이거든. 이 나라 대장군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그럼 닥치고 따라와. 괜히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워낙 고용한 곳이라 두 사람의 목소리는 더더욱 또렷히 들렸다.
저 멀리서부터 들려온, 두 사람의 대화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로엘은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그렇게 자신 있게 그에게 말해 놓고서는 이거 첫 날부터 걸리게 생겼다.
“이, 일단 뒤로 가서……. 읍!”
그렇게 그녀가 책장 뒤에 몸을 숨기며 그들을 살피는데, 순간 거대한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는 팔.
“……!”
당황한 그녀가 반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히 그런 그녀를 안을 뿐이었다. 그는 놀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설마설마했지만 진짜 올 줄이야.”
차가운 손. 탄탄한 가슴. 단단한 팔.
그리고 익숙해져 버린, 이 ‘카이로스’의 향기.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
“나의 아카시스께서 지나치게 겁이 없군.”
황금의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사람.
높고도 높은 이 황금의 나라의 제왕.
“로엘.”
그녀는 자신을 단단히 안은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아. 그는 너무 치사하다.
‘로엘’이라니.
이제는 그녀마저 낯선, 그녀의 이름을 이렇게 예고도 없이, 멋대로 부르다니.
그녀는 그의 품에 기대 눈을 꼭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