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카이로스 황궁에서 살아가는 법
“오늘도 날씨가 좋네요. 마마.”
“그러게. 이럴 때 말 타고 달리면 정말 좋은데. 시에라, 언제 나랑 같이…….”
“어휴, 절대 안 됩니다!”
“저는 좋아요, 마마.”
점심을 먹고, 한 바퀴 돌아보자는 딜리아의 제안에 로엘은 시에라, 딜리아와 함께 산책 겸 밖으로 나왔다. 생각해 보면 이곳에 와서 제대로 카이로스 성을 돌아본 적이 없었다.
카이로스 본성은 하나의 도시 같다고 칭할 만큼 거대하고 화려하기로 유명했다. 수도 성벽 안의 또 하나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수십 개의 작은 성으로 구성되었다.
황제의 본궁과 후궁전뿐 아니라, 각 부서별 집무실에서부터 기사들의 훈련 시설, 황실 살림을 전담하는 시녀들의 업무실 등 성은 각자 그 용도와 크기가 다양했다.
거기에 시녀와 시종들의 숙소까지 있었으니 다 둘러보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렸다.
“지도라도 그려야겠다. 이거 헷갈려서 어디 다니겠니?”
“저도 처음 부임받았을 때 위치 찾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워낙 익히는 게 늦어서, 선임들께서 일도 잘 안 주셨고……”
“서운했겠네, 우리 딜리아.”
“제가 부족해서 그렇죠, 뭐…….”
풀이 죽은 그녀의 머리를 로엘은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배우는 데에 조금 느린 면이 없지 않지만, 누구도 딜리아의 성실함을 따를 자는 없었다. 언제나 제일 먼저 일어나고, 제일 늦게 들어가는 이 아이의 노력을 로엘은 안다.
그래서일까. 로엘은 이렇게 열심히 사는 아이가 늘 자신감이 없어서 괜히 더 마음이 갔다.
“시에라는 왠지 단번에 외웠을 거 같은데, 그지?”
“위치 파악은 키로스에게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만일 무슨 일이 있을 때 가장 안전한 장소로 마마를 모셔야 하니까요.”
“그건 그렇지. 우리 아버지도 전장에 들어가기 전에 제일 먼저 지도를 봐야 한다고 늘 그러셨어.”
잠깐 나온 아버지의 이야기에 시에라는 슬쩍 로엘 쪽을 돌아보았다. 바로 보이는 관심에 로엘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아버지, 제이드 네아레스가 유명하긴 유명한가 보다. 이 무뚝뚝한 시에라가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음. 우리 아버지는 길 외우는 데에는 진짜 타고나셨거든? 그래서 어디든 한 번만 다녀오시면 길을 전부 외우셨지. 그게 전장에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하셨고. 길을 안다는 건 상대가 어디로 올지를 알 수 있다는 거니까.”
특히 토르티아 같은 북방의 도시들은 그 진입로가 굽이굽이 미로 같기로 유명하니, 더더욱 그런 아버지의 능력은 큰 도움이 되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목마를 타고 국경을 걸었던 기억이 나서 로엘의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졌다.
“대단하신 분이네요, 제이드 님은.”
“응. 우리 아버지는 진짜 대단해. 내 자랑이자 자부심이야.”
토르티아의 자랑이자, 자부심이기도 하였고.
그러함에도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셨지만.
로엘은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자. 그럼 다음으로 가 볼까? 얼마 전에 헤더가 그러던데 후궁전 가운데에 가장 큰 연회장이…….”
밀려오는 생각들을 접고 다시 산책을 하려던 그녀는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멈췄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절대로 반갑지 않는 하이톤의 목소리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음…….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거 같은데.”
그녀가 후회를 막 하려던 차에, 안타깝게도 그 많은 여인들의 눈 중 하나가 그녀를 보고야 말았다.
“어?!”
그리고 더 안타깝게도 그 목소리가 너무 컸다. 순간 하하, 호호 웃던 여인들의 눈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저분이 바로 그 새로 오신 아카시스님…….”
“토르티아의 공주님이라지.”
“그런데 포로나 다름없다던데?”
당연히 수군거림이 많아졌다. 숙덕숙덕 자기들끼리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속삭이는 모습이 썩 기분 좋지 않았다.
옆에 있는 딜리아와 시에라가 기분이 나빠질 만큼 대놓고 그녀를 품평하는 모습에 로엘은 속으로 한숨을 깊게 삼켰다.
제대로 잘못 온 거 같다.
“아카시스 로엘. 뭐 해요? 와서 앉지 않고.”
그리고 보란 듯, 그녀를 제일 반기는 한 사람.
얼마 전 그녀에게 두고 보라고 이를 갈던 바로 그분이시다.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 가식적인 미소가 기가 차서 한마디 하려다, 이내 로엘은 그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짧지 않은 궁 생활을 돌이켜 보건대, 이는 피하면 피할수록 더 크게 돌아오는 법이다.
그녀가 천천히 그녀만 빠진 티타임을 즐기는 여인들 사이로 가자 자연히 그녀보다 직위가 낮은 귀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들의 행동을 딱 멈추는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다들 뭐 하시는 겁니까?”
한껏 낮아진, 아리스의 목소리였다.
“내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감히 나보다 먼저 자리를 뜨겠다?”
“아니, 저희는 그런 게 아니라…….”
“앉아요, 당장. 내가 경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서슬 퍼런 눈초리에 귀인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새로 오신 이 아카시스께서는 황제 폐하를 연속 이틀이나 잡아 두신, 새로운 실세가 되실 분.
그래서 이렇게 처음 뵙는 자리에서 좀 잘 보이려 했는데 애석하게도 그 꼴을 아리스가 두고 보지 않았다.
“이래서 출신이 중요한 겁니다. 이렇게 예법을 몰라서야.”
“제가 다 죄송합니다, 아카시스.”
“그러게 말이에요. 참 이래서…….”
그리고 어느 곳에나 그렇듯 아리스 같은 유형의 사람 옆에는 간신 같은 약자들이 붙어 있다. 소위 말해 남작, 자작과 같은 낮은 신분 집안의 출신이 아닌 적어도 백작 이상의 작위를 받은 고위 귀족의 자제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카이로스의 고위 귀족으로서 무한한 자부심을 가진 그녀들 눈에, 야만국이라 소문이 무성한 토르티아의 공주 따위를 인정할 리 만무했다.
“저희가 새로 오신 분을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오늘이 후궁 정기 모임 날인데 말이죠.”
“워낙 존재감이 없으셔서……. 저는 오셨다는 사실조차도 까먹었지 뭐에요.”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온 뒤로부터 그녀 이야기만 했을 것이 뻔하디뻔한데 이런 같잖은 내숭이라니.
로엘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참 귀엽게들 논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녀는 싱긋 웃었다. 그 아무렇지도 않은 미소에 아리스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첫 만남에서 보였던 저 미소.
대놓고 그녀를 괴롭히려 드는 그들을 비웃는, 저 건방진 미소.
아리스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이미 자리가 다 차서요. 새로 오신 아카시스께 내드릴 자리가 없네요?”
“저기, 저. 말석 의자가 하나 남긴 했는데. 뭐 어떻게 저거라도 내드려야 하나?”
“아니면, 땅바닥에라도 앉으셔야 하나? 야만족인 토르티아 출신이면 어색하진 않을 거 같은데…….”
“어머. 유니 님. 농담도 참. 호호.”
역시나 굳이 아리스가 나서지 않아도 그녀의 오른팔들이 알아서 제 역할을 해 주었다.
그녀를, 그리고 그녀의 나라를 대놓고 무시하는 언사들은 로엘의 자존심을 충분히 상하게 할 만큼 무례했다. 그것도 모든 후궁전의 모인 곳에서의 면박이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아리스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좀 제대로 돌아가는 거 같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다만, 예상을 뒤엎고 로엘이 오히려 더 환한 미소를 지을 뿐.
“아카시스께 초대를 받았으니, 가 버릴 수도 없고. 빈자리에 앉아야지요.”
이렇게 대놓고 싸움을 걸어오는데, 상대를 해 줄 수밖에.
로엘은 느릿하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내 자리는 여기겠군요.”
그녀들이 둘러앉아 있는 원형의 티 테이블엔 확연한 서열이 존재했다. 가장 상석에는 당연히 아리스가 앉았고, 그 옆으로 아리스와 같은 고위 귀족 귀인들이 자리를 차지하였다.
아리스가 앉은 가장 상석은 다른 이들과 의자의 모양부터 달랐고, 당연히 아리스의 옆을 지키는 귀인들도 그 뒤로 자리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일반 귀인들과 다른 의자를 사용하였다.
아주 유치한, 뻔히 보이는 그런 서열 ‘짓’이였다.
그리고 그중 남은 한 자리는 끄트머리에 놓인 가장 초라한 일반 의자.
로엘은 천천히 거닐며, 귀인들의 의자를 손으로 쓸었다.
“흐음, 이렇게 의자부터 다르게 배치되는군요. 이곳에서는. 재밌네요, 아주.”
그녀가 그렇게 뒤를 걸어갈 때마다, 그녀들은 등골이 다 서늘했다.
‘아카시스’는 그녀들에게 엄연한 ‘상전’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엄청난 무례를 저지르다니. 가시방석도 이런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그럼. 계속하시죠? 티타임.”
결국 로엘이 그 말석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안절부절못하는 딜리아와 잔뜩 정색을 한 시에라가 그 뒤에 자연히 섰다.
잠시간의 긴장감이 돌았지만, 결국 그 자리에 앉는 로엘을 보며 아리스는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 비웃음에 맞춰 그녀의 간신들이 적절한 한마디씩을 이었다.
“뭐야, 저 덜떨어진 시녀들은.”
“다섯만 곁에 뒀다잖아요. 그중에 둘을 데려왔나 보지.”
“어휴. 다섯이라도 다 데리고 다니지 저게 뭐야? 모양 빠지게.”
다 들리게 떠들어 대는 조롱이 그녀의 귀에, 아니 모든 이들의 귀에 들어갔다.
확실히 그들 눈에는 로엘의 모습이 말도 안 되게 초라해 보였다.
반대로 로엘의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말도 안 되게 화려했다.
무슨 특별한 자리도 아닌데, 다들 한껏 힘을 주었다. 드레스는 물론이거니와 함께 한 보석도 화려하였고, 그에 맞는 머리 치장과 화장도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거기에 향수 향까지 사람 수대로 제각각 섞여서 진동하니 로엘은 머리가 아팠다.
이렇게 독한데 차 향을 제대로 음미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아카시스. 내가 옷이라도 한 벌 선물해 줘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닌데……. 같은 폐하의 여인으로서 내가 다 부끄럽네요.”
그런 그녀들에 비해 로엘은 너무도 수수했다.
산책을 한다는 소리에 드레스가 아닌 가벼운 원피스 차림이었으며, 에단이 직접 걸어 준 루비 목걸이 외엔 어떠한 장식도 걸치지 않았다. 흩날리는 머리가 귀찮아 헤더가 곱게 땋아 올려 준 머리에는 흔한 보석핀 하나도 없었다.
“마마. 같은 폐하의 여인은 아니지요.”
“그럼요. 사람이 뿌리라는 게 엄연히 있는 법인데.”
“아무래도 마마께서 좀 본을 보여 주셔야 겠어요. 로엘 마마. 사양 마시고 받으세요. 아리스 마마는 진심이랍니다.”
때리는 사람보다 말리는 사람이 더 얄밉다더니.
로엘은 우선 저들의 버릇부터 좀 고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저대로 놔두면, 두고두고 그녀를 귀찮게 할 그런 이들이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얼마 전에 본의 아니게 지나치게 많은 드레스를 하사받아서요. 그 많은 것들을 다 입기도 벅찹니다.”
일단 치사한 수부터 두기 시작했다.
저들이 먼저 유치하게 나오니, 그녀도 유치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으니까.
온 후궁, 아니 온 황궁이 다 아는 그 유명한 하사품을 운운하자 바로 아리스를 비롯한 모든 귀인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그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그런 사람들이니.
“그리고 이 원피스도 그분께서 하사하신 것인데, 아시려나 모르겠네요. 이게 그렇게 부끄러울 정도의 옷인 줄 저는 이제 알았습니다.”
싱긋.
또다시 짓는 그녀의 미소에 바로 모든 여인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특히 직접 옷을 면박한 아리스가 가장 창백해졌다. 속으로 그 말을 그분께 전할까 하는 두려움이 어쩔 수 없이 제일 먼저 들었다.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그래요. 아카시스. 저희는 단지 아카시스께서 카이로스의 의복이 아직 익숙지 않으신 거 같아서…….”
그 마음은 비단 아리스만 갖는 게 아닌가 보다. 그녀를 대놓고 깔보던 시선은 금세 낮아졌고, 태도 역시 바로 공손해졌다.
참 비굴하기도 한 그 모습이 로엘은 그저 우스웠다.
이런 꼴이 되기 싫어서, 황제의 여인이 되지 않는다 했던 거다.
이들을 이렇게 나약하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그 ‘한 남자’ 때문이었으니까.
“그럼요. 제가 그 진심을 모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해 같은 것은 안 합니다.”
너무도 빨리 주도권이 로엘에게로 넘어갔다. 공교롭게도 그 말석은 바로 아리스의 정면이었다.
그녀가 앉자마자 바로 한 방을 먹은 아리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로엘을 노려보았다.
다른 이들도 아닌 후궁의 귀인들 앞에서 만큼은 기죽고 싶지 앉았다.
지금 이 상황은 이 후궁 서열이 어떻게 재정비되느냐가 걸린 아주 중요한 자리.
절대 밀려서는 안 된다.
“그럼요. 이런 사소한 말 한마디로 오해하고 그럴 분이 아니지요. 아카시스는.”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그 팽팽한 기 싸움 속에서 죽어 가는 건 그들보다 아랫사람들. 두 명의 아카시스께서 대립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어느 쪽이든 줄을 서야 한다.
그리고 그 줄이 그녀들의 남은 궁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니, 지금 그녀들의 머릿속도 아주 복잡했다.
지금까지 보아 온 폐하의 성향으로 보건대, 절대 총애하는 비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아리스가 무난히 황자를 잉태하여 황후가 되리라 믿었는데, 이건 난데없는 복병이 등장한 셈이다.
첫날밤 폐하께서 머무셨다는 이야기만으로도 충격이었는데, 그다음 날까지 찾아가셨다는 소식에 그녀들은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만일 황제께서 총애하는 비가 생긴다면, 그건 몰브가의 영애조차도 꺾을 수 있다는 말.
“아카시스 아리스. 제가 아직 공부가 미진하여 카이로스의 황실 예법을 다 익히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나 물어도 될까요?”
“……그러세요, 그럼.”
아리스는 잔뜩 경계를 했다.
이 여자는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질문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든 완벽하게 되받아쳐서 기세를 잡으리라 마음먹었다.
“제가 알기로는 카이로스 예법상 아랫사람은 웃전보다 눈높이를 낮춰야 하는데, 그것이 따로 예외가 있습니까?”
“그런 기본적인 것을 뭘 물으십니까? 당연히 예외 따위 없지요. 어디 감히 웃전보다 높은 눈높이를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당장에라도 경을 쳐야 합니다.”
정답을 알고 있는 아이처럼 신이 나 아리스는 술술 말하였다. 혹시나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나올까 봐 긴장했는데 정말 당연한 것을 묻고 있었다.
아리스는 한껏 그녀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며 말을 계속했다.
“똑똑히 기억하세요. 이건 아카시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같은 직급의 나까지 모욕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아랫사람에겐 확실하게 웃전으로서의 위엄을 보이셔야 합니다.”
로엘은 그 대답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렇군요.”
그녀가 정확히 원하던 바로 그 대답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많은 이들의 눈이 저보다 위에 있는 것입니까?”
순간 흐르는 적막.
또 한마디를 하려던 아리스의 말문은 막히고, 남은 귀인들은 정신이 멍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모두 그녀가 무얼 노리는지 깨달았다.
로엘은 느릿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살짝 상체를 숙여 턱을 괴며, 그녀들을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아직도 안 내려가십니까?”
그 미소에 순간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바로 모든 귀인들이 일제히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로엘 마마!”
잔디밭 위로 비싼 드레스들이 펼쳐졌다.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채 차마 들지도 못 하는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이렇게 바로 굴복할 거면서 그리 잘난 듯 사람을 무시하다니.
그녀가 그나마 아카시스였기에 망정이지 그녀들보다 훨씬 낮은 지위였다면, 이들이 어떻게 대할지 눈에 훤하였다. 인간으로서 줄 수 있는 모욕이란 모욕은 모조리 주었을 거다.
“자. 그럼 다시 인사를 받아 볼까요. 나는 새롭게 아카시스로 임명된, 토르티아 제1공주 로엘 네아레스입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후궁전의 모든 귀인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였다. 그녀의 아래에 고개를 조아리는 그 모습을 보며 아리스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정확히 로엘의 눈은 아리스를 향하였으니.
아리스는 알고 있다. 지금 그녀가 굴복시키는 것은 한낱 귀인들이 아닌, 이곳의 최고 실세인 아리스 몰브임을.
또다시 아리스는 처절한 패배를 맛보았다.
황제의 여인들이 처음으로 한 곳에 모인 날.
승자는 새로운 아카시스, 로엘이다.
***
“황제 폐하. 부디 평안한 밤 보내소서.”
벌써 여섯 번째 영주의 밤 인사를 받았다. 에단은 슬슬 짜증이 났다. 잠시 다녀오면 된다던 아론의 말에 넘어가, 벌써 열흘째 암행 중이었다. 이왕 나온 김에 한 바퀴 돌면서 민생을 점검하자는 거절하기 힘든 명분에 잡힌 셈이다.
“전부 나가.”
당연하듯 들어온 여자들을 그는 짜증스럽게 내보냈다. 영주들이 심혈을 기울인, 그 지방 최고의 미녀들임에도 그는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자신의 공간이 다른 이가 들어오는 것을 원체 싫어하는지라, 그가 이런 접대를 받지 않는다는 건 유명한 사실인데, 애석하게도 어린 영주가 몰랐나 보다.
감히 올려다보지 못할 그분을 모실 수 있단 기대로 들어온 그녀들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단번에 그 마음을 접었다.
신분 상승은커녕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으니 신속하게 방을 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그제야 그는 침대에 몸을 누웠다.
열흘 새 여섯 곳이라니. 아무리 그라도 피곤이 제법 누적되었다.
“……향수 냄새.”
그는 잠깐 들어온 여자들이 남기고 간 진한 향수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인위적인 향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들 뿌려 대는지 그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태양의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은은한 향이 일단 마음에 들었다.
사람을 안정시키는, 온화한 향기였다.
“그리고 달지.”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의 여자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건방져.”
그를 똑바로 쳐다보던 그 붉은 눈이 생각났다.
아니, 그 얼굴, 그 미소, 그 체취. 전부 다 눈에 아른거렸다.
그래서 당장에라도 달려가 품에 안고 싶었다.
“……진심으로 미쳤나 보군.”
그는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고작 이틀 밤을 함께했을 뿐인데,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로 남자를 미치게 하는,
‘그래서, 죽이기라도 하시게요? 안 그러실 거 같은데.’
열흘 만에 가더라도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반갑게 어서 오라 말해 줄 거 같은,
‘무사히 다녀오시길, 하시는 일이 폐하의 생각대로 잘 되길 마음으로 기원하겠습니다.’
그 말 안 듣는 여자가 정말 보고 싶었다.
“……미치겠군.”
칠흑같이 어두운 밤.
그는 멀리 있는 로엘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저 하루빨리 환궁하여, 홀로 있을 그 작은 여자를 품에 안고 싶다.
***
“마마. 안 주무십니까?”
“자야지, 이제.”
창틀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던 로엘은 잠자리를 봐주러 온 딜리아의 말에 뒤돌아 보았다. 아까 전부터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잘 준비를 끝냈는데, 그녀는 계속 창가에서 하늘만 바라보았다.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아니, 그냥 잠이 안 와서.”
“야식 만들어 드릴까요, 마마?”
“아냐. 괜찮아.”
안나다운 제안에 로엘은 웃고 말았다. 괜히 그녀들의 걱정을 산 거 같아 그녀는 그만 창틀에서 내려와 침대로 갔다. 꽤 오래 있었는지 몸이 제법 차가워졌다.
그녀는 두꺼운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오늘따라 넓게 느껴지는 자신의 옆자리를 보았다.
‘폐하 손, 너무 차요.’
‘네 체온이 지나치게 높은 거야.’
‘손뿐만이 아니에요. 폐하 몸에 전반적으로 한기가 돈다니까요?’
‘사람 자체가 차가운가 보지.’
‘그냥 안 따뜻하게 하고 다니시는 거예요.’
지난밤, 이불 속에서 주고받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손은 물론, 그 단단한 몸도 대체로 한기가 돌았다.
그래서 그가 그녀를 안을 때마다 로엘은 저도 모르게 그를 꼭 안아 주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그녀의 온기를 전하고 싶었다.
‘주무실 때도 이렇게 아무것도 안 걸치고 주무시잖아요. 그러다…….’
‘잔소리.’
‘그러다 감기 걸리신다고요!’
물론, 그녀를 안으며 놀릴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불처럼 뜨거워졌지만.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데워 주면 돼.’
‘네?’
‘피차 뜨거워지는 법. 알려 줄 테니까.’
순간 짓궂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열망 가득한 눈이 생각나 열이 확 올랐다.
저도 모르게 그때 그가 목덜미에 만들어 놓은, 이제는 희미해진 키스마크에 손이 갔다.
“마마. 폐하 생각하시나 보다.”
“아, 아니야!”
“에이. 아닌 게 아닌데요, 뭘. 마마 지금 완전 새빨개요.”
헤더까지 가세하자 로엘의 얼굴은 더 빨개졌다.
이제 신혼인데 그게 뭐가 대수라고 이리 부끄러워하시는지.
물론, 그 상대가 에단 폐하라는 게 아주 많이 놀라울 일이지만 그래도 지극히 정상적인 새신부의 반응에 시녀들은 그저 어린 마마가 귀여울 따름이었다.
오늘 그 많은 귀인들을 발밑에 굴복시킨 그분이 맞는가 헷갈릴 정도다.
“그나저나, 오늘 낮에 진짜 마마 너무 멋졌어요. 두고두고 생각해도 막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멋지셨다니까요!”
“아. 그 자리에 저도 있었어야 하는데. 하필 그때 식재료가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따라갔는데 너무 아쉬워요. 제가 그 명장면을 놓치다니!”
“어? 낮의 얘기 하는 거야?! 맞아요. 마마! 저도 따라가지 않은 걸 엄청 후회했다니까요!”
밤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온 페니와 시에라마저 전부 그녀의 방으로 몰렸다. 굳이 이럴 필요 없다고 말했는데도 이들은 꼬박꼬박 이렇게 그녀가 자기 전 인사를 하러 왔다.
덕분에 매일 밤마다, 이리 시끌벅적하다.
“어휴. 그 잘나신 아리스 마마의 표정이 어땠을까 생각만 하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니까요?”
“맞아요. 그분, 정말 시녀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아요. 어떤 애는 뜨거운 주전자를 그대로 맞아서 허벅지 전체가 화상을 입었다고요.”
“진짜 손찌검이 습관이신 분이세요. 저는 혹여나 마마께도 그러실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어요.”
“그건 걱정 마. 내가 맞고만 있을 위인은 아니니까.”
로엘은 웃으며 말했다. 시녀들은 그녀가 그냥 하는 말이라 생각하겠지만, 로엘은 진심이었다. 평생 귀족 아가씨로만 살아오신 분이 감히 누굴 때린단 말인가.
이래 봬도 그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인의 외동딸이다. 평생의 반 이상을 전장에서 뛰어놀았는데, 찻잔이나 들어 올리던 그 가는 손이 그녀를 때릴 수 있을 리가.
“게다가, 나에겐 시에라도 있고?”
로엘은 시에라를 보며 웃었다. 시에라는 그저 작은 미소와 함께 긍정의 끄덕임을 하였다.
“맞다. 나 아까 물어보려다 잊어버렸는데, 왜 아카시스 한 분은 보이질 않는 거야?”
“아……. 그분은 원래 거의 나오지 않으세요.”
로엘은 자신이 세 번째 아카시스라고 들어, 나머지 한 분이 있을 거라 당연히 생각했다. 아리스야 자기가 알아서 그녀에게 찾아와 떵떵거렸는데, 나머지 한 분은 머리카락 한 올 볼 수도, 소식 한 마디를 들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낮의 모임에도 그분만 자리하지 않아 속으로 궁금하였다.
뭔가 사연이 있는 분인 건 확실했다.
“음. 그분은 원래 아리스 마마와 함께 궁으로 들어오신 분이세요. 원래 폐하께서는 즉위하신 이후 정권을 정비하시느라 한동안 후궁에 여인을 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 황권이 자리 잡고 급하던 국경 전쟁도 마무리되자 기다렸던 귀족들이 자기 딸들을 천거해 올렸어요. 복속국의 공주들도 오고 그랬죠. 그래서 십수 명이 우르르 후궁으로 입성하였습니다.”
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체 카이로스 황실은 자손이 귀한 만큼 여인이 끊이지 않기로 유명했다. 다만 대다수 여인들이 그저 황제의 하룻밤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으로, 평생 황실에 갇혀 소리 소문 없이 살다 죽을 뿐.
그 때문에도 그녀의 사촌 에리카가 그리 목숨 걸고 카이로스에 오지 않으려 한 거다.
뭐, 그 이유가 아니어도 에리카 대신 그녀가 여기 와야 할 이유는 수백 가지였지만.
“원래 카이로스 황실 예법에 따르면 황후 이외의 모든 황제의 여인의 신분은 동등합니다. 그래서 원론적으로는 ‘아카시스’ 역시 황제 폐하의 여인 중 하나인 귀인 중 한 사람이지요. 다만 그 출신이 워낙 높다 보니, 구분 지으려고 만든 새로운 신분입니다.”
이건 사라에게 교육받을 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황제의 승은을 입은 여자는 일개 하녀부터 공작 딸까지 다양하니, 잘나신 귀족 영애들은 그들과 같은 대접을 참지 못해 그들이 만든 직위가 바로 ‘아카시스’.
황후는 되지 못해도 귀인들보다는 높은 대우를 받고 싶다는 거였다.
로엘은 처음 설명을 들을 때부터 진짜 웃기지도 않은 권위의식이라 생각했다.
하는 짓은 그 이하이면서, 그깟 신분이 뭐라고.
“그래서 유일하게 딱 두 분만 아카시스로 정식 황제 폐하의 부인이 되셨지요. 아리스 님의 부친, 피어 몰브 공작은 현 원로원의 수장입니다. 그런 몰브가에 비해, 또 다른 아카시스 수아 님께서는 몰브가와의 정쟁에서 밀린 켈트 공작가의 영애십니다. 심지어 혼외자라는 소문이 자자하여 애초에 아카시스로 들어오는 것부터 말들이 많았지요. 그분은 사교계에서도 다른 백작가나 후작가의 영애님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한 분이시니까요.”
역시 정보 하면 딜리아였다. 언니, 오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아무 생각 없이 들었었는데 그런 것들이 이리 도움이 될 줄이야.
딜리아는 로엘에게 도움이 된다는 기쁨에 좀 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와서도 적응을 못 하시다가, 처음으로 폐하를 모시게 되었는데 하필 그때도 무언가 실수를 하셨는지 그 이후, 폐하는 단 한 번도 수아 님을 찾지 않으셨어요.”
“단 한 번도?”
“예. 단 한 번도요.”
로엘은 조금 놀랐다. 처음 사라에게 듣기로 에단은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신전이 정해 준 날짜에 맞추어 제롬이 안내한 곳으로 갈 뿐이라 했는데, 이리 대놓고 피하다니.
로엘은 더더욱,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의 사정이 있으리라 예감했다.
“그래서, 지금 수아 님은 수아 님 후궁에 계시니?”
“네. 계시기야 한데 절대 궁 밖으로 나오시질 않으세요. 거기 시녀들도 전부 켈트가에서 데려오신 분들이라 저희랑 안면도 없고요. 그래서 여기서는 잊혀진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로엘은 조용히 끄덕였다. 사연이 무엇이건, 적어도 이곳에서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는 외로운 사람이란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한번 찾아뵙고 싶어졌다.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그 비참함이 무엇인지 그녀는 너무도 잘 알았으니까.
“……그분께 인사는 나중에 가도록 하자.”
“인사를 가시게요?!”
“응. 가야지. 갈 거야.”
딜리아는 그건 폐하께서 좋아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를 하려다가 말았다. 그러기엔 이미 그녀는 마음을 굳힌 눈이었다. 딜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내일 다시 이야기해요, 마마.”
“네. 일단은 주무세요. 벌써 밤이 깊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시녀들의 마음도 같았다.
이 카이로스 궁전에는 조금이라도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거라고. 꼬투리가 잡힐 일도, 해가 될 일도 해선 안 되며, 양보와 동정 같은 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고.
그러니 이미 폐하의 눈 밖에 난 수아 님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그 당연한 소리를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이분은 이미 모두 다 꺼리는 그들을 전부 받아 준, 그런 분이셨으니까.
“안녕히 주무세요, 마마.”
그러니 더더욱 지켜 드려야지.
“내일 뵐게요.”
인사를 마지막으로, 이내 모든 이들이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한꺼번에 사람이 빠져나가자 적막이 유독 크게 느껴졌다. 로엘은 며칠째 전혀 잠이 오지 않은 그 넓은 방에 혼자 누워, 일부러 커튼을 치지 않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카이로스의 밤하늘에는 별이 많았다.
“별…… 많네.”
그리고 한 사람만을 생각했다.
“별…… 많아.”
그 사람도 이 별을 보고 있을까?
“보고 있으면 좋을 텐데.”
여기에 온 이유, 분명 단 하나뿐이었는데.
‘글쎄. 변덕 정도로 해 두지.’
다른 욕심이 자꾸 생긴다.
로엘은 똑바로 누운 몸을 옆으로 누이며, 아무도 없는 그녀의 옆자리를 쓸었다.
“……열쇠만 줘 버리면 다인가.”
‘내가 지켜 줄 수 없잖아.’
“가지도 못하게 했으면서.”
귓가에 울리는 그 목소리와, 그 말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가 너무도 선명히 생각났다. 로엘은 손을 뻗어 의례적으로 놓인, 그가 베던 베개를 품에 안았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일찍 올 것처럼 말했으면서.”
그리고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절대 그에게 닿지 않을 투정을 중얼거렸다.
“얼른 돌아와요.”
‘기다리고 있어요.’
라는 마지막 말은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한 채로.
그렇게 좀처럼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는 그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며,
그녀는 여전히 낯설기만 한 카이로스의 밤을 오늘도 겨우 지새웠다.
***
“전하. 폐하의 서신입니다.”
부사관 콜린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이반은 느릿하게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 높은 곳까지 올라오느라 힘들었는지 콜린은 작게 숨을 골랐다. 콜린의 손에 들린 칙서에 잠시 시선을 두다, 그는 이내 다시 국경 너머의 북녘 땅을 응시했다.
“보나마나 당장 들어오란 말씀이겠지.”
“이걸로 벌써 세 번째입니다. 전하만 아니셨으면 진즉에 항명으로 사형 명령이 왔을 거라고요.”
“다행이네. 내가 폐하의 형제라.”
콜린의 질책 어린 말에도 이반은 대충 농담으로 웃어넘겼다.
보나마나 수도 카이로스로 돌아오란 명령.
이 드넓은 자유의 땅을 보고 있는데도 뛰쳐나가고 싶어서 숨이 막히는데, 이보다 더 숨 막힌 그곳으로 오라니.
참 너무도 하신다.
“전하도 전하시지만, 폐하도 폐하십니다. 아니, 다른 황제들은 남자 형제들을 멀리 못 보내서 안 달인데 폐하는 어찌 되신 게 전하를 곁에 못 둬서 안달이신 거 같아요.”
“하하. 우리 폐하께서 이리 저를 아끼십니다.”
“아니면 그만큼 황권에 자신이 있는 거죠.”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지?”
이반은 싱긋 웃었다. 에단 같은 황금빛 머리를 흩날리며, 황금빛 눈동자로 북녘 저 먼 곳을 응시한 채로.
“진짜 이번에도 안 가실 거예요?”
“어째 네가 가고 싶은 거 같다?”
“가고 싶죠! 저도 가족이 보고 싶다고요!”
“다녀오래도.”
“제가 어떻게 전하를 두고 갑니까!”
콜린은 빽 소리를 질렀다.
콜린은 세상 태평한 자신의 주군, 이반이 그저 답답했다. 이렇게 북방 변경에만 있다가는 금세 잊혀질 거다. 그러면 그만큼 세력도 약해지는 걸 이 사람은 알면서도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서자만 아니었어도 충분히 황제가 되셨을 분이 이렇게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이 콜린은 그저 안타까웠다.
“흐음. 그럼 슬슬 가 볼까? 여기도 이 정도면 안정된 거 같고.”
“예예. 그러시겠……. 네?! 가신다고요?!”
“새로 들어오신 형수도 뵈어야 할 거 같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이반의 말을 들을수록 콜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런 콜린의 놀라 하는 모습을 보고 이반은 그저 피식 웃었다.
“진짜로, 진짜로 가신다고요? 카이로스에?!”
“왜? 싫어?”
“그럴 리가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콜린은 성루가 떠나가라 대답하고선 뛰듯이 내려갔다. 너무 좋아하는 그 모습을 보아하니 그가 너무 오래 고집을 부렸나 보다.
잠깐 시끄러운 것만 처리하고 오라던 황제의 명에 국경 지역으로 올라온 지 벌써 3년.
지겨울 만도 했다.
아니 그는 지겹기는커녕, 여전히 이리 ‘그리울’ 뿐인데.
“……이렇게 가까운데.”
너무도 멀다.
이반은 성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언제나처럼 해가 질 때까지 북녘의 땅을, 토르티아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