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친애하는 나의 황제 폐하,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4/69)

Chapter 3. 친애하는 나의 황제 폐하,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아카시스 로엘. 하늘 같은 폐하의 크나큰 은혜를 황공한 마음으로 받들겠습니다.”

로엘은 제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에단이 내린 친서를 직접 받아 들었다. 완벽한 예법으로 자신 앞에 고개를 숙인 그녀를 내려 보며 제롬은 속으로 제법이란 생각을 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양의 하사품을 보고도, 그녀는 조금의 당황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카시스님. 저는 폐하의 곁에서 폐하의 업무를 돕는 궁내부 수장, 시종관 제롬이라 합니다. 마마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칙서를 받고 일어난 그녀에게 그는 바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 역시 작은 미소로 답하였다.

“토르티아의 제1공주, 로엘 네아레스입니다. 앞으로 자주 뵙게 될 분이군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황제의 칙서를 받을 때는 무미건조하던 그녀가 도리어 제롬에게는 온화했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이렇게 눈을 맞추며 잘 부탁한다고 말해 주는 한마디에 사람은 마음이 가는 법이다.

아랫사람의 마음을 얻을 줄 아는 분이라던 사라의 말이 새삼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제롬. 나는 안 보이는가?”

“아카시스 아리스 님을 뵙습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그녀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로 그를 노려보는 아리스가 너무 어려 보였다.

세룸니르 입구에 들어선 순간 아리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그곳까지 들려왔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롬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시스라는 분이 교양도, 예의도, 기품도 없었다.

저리 앞뒤 안 가리고 날뛰니 폐하의 눈에 안 차는 거다.

“이걸 전부 폐하께서 보내셨다고? 이 많은 걸?”

“예.”

짧은 제롬의 대답에 아리스는 헛웃음이 나왔다.

아까부터 시작한 금은보화를 나르는 행렬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행렬이 어찌나 긴지 아예 제롬은 본궁 사단을 이끌고 호위까지 하며 왔다.

“이게 전부 로엘 마마께 내리는 하사품인 거야? 이건 거의 한 나라의 조공품 수준인데?”

“폐하께서는 어느 여인이든 늘 똑같이 보석 한 상자만 주시는 거 아니었어?”

“그건 폐하가 아닌 제롬 님이 의례적으로 챙기는 거지. 근데 이건 딱 보아도……. 첫날밤에 폐하를 잡아 뒀다더니, 정말 보통이 아닌가 봐, 저 공주님.”

“아까 나도 손들고 들어갈 걸! 이건 누가 봐도 총애를 한 몸에 얻고 있는 거잖아?”

어마어마한 양의 하사품 소식은 당연히 삽시간에 후궁 전체에 퍼졌다. 덕분에 후궁에 있는 시녀, 하녀 할 거 없이 죄다 세룸니르를 기웃거렸다.

웅성거리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많아질수록 아리스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새삼 자신의 첫날밤 이후 내려졌던 하사품이 생각나 울컥 올라왔다.

“정말 폐하께서 보내신 게 맞아?! 폐하께서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카시스님. 하사품을 하사하시는 건 카이로스 황가의 관례입니다. 그리고 그 정도를 결정하시는 건 황제 폐하시지요. 폐하께서 이 정도가 적당하다 생각하신 것이라면 이 정도인 겁니다. 그러니 ‘왜’ 라고 저에게 하문하셔 봤자, 저는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제롬은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아리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녀는 그 첫날밤에 그에게 모든 마음을 빼앗겼는데, 하사품이라고 내려온 건 여느 여인이 폐하께 받은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아름답다는 찬사만을 받아 왔던 그녀에게는 솔직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의 서운함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포로같이 딸려 온 이국의 공주에게 이런 분에 넘치는 하례라니.

아리스는 손이 저절로 떨려 왔다.

“마마. 지금은 일단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그런 게 나랑 무슨 상관이……!”

“제롬 님이 계십니다, 마마.”

속삭이는 애나의 말에 언성을 높이려던 아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제롬은 빤한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폐하와 가장 오랜 시간을 같이 있는, 폐하의 최측근 중 최측근. 제롬의 한마디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아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마 아리스도 제롬에게만큼은 여느 아랫사람에게 하듯 그렇게 막 대할 수 없었다.

아리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늘 일, 절대 잊지 않겠어.”

스쳐 지나가는 눈초리가 매섭기도 했지만, 로엘은 그 모습이 더 가련하게 보였다.

정말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가씨였다.

어쨌거나, 시끄러웠던 불청객이 사라지니 로엘은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여전히 들어오고 있는 물품들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저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아무것도 못 받을 거라 했으면서…….”

오늘 아침, 짓궂게 말하던 그게 생각나 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일단 페니와 다른 이들에게 물품을 정리할 수 있는 곳에 정리하라 명을 내리고 제롬에게 다가섰다.

“정말 폐하께서 이걸 다 내리신 건가요?”

“예.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한 나라의 ‘공주’답게 대우하라 하셨습니다.”

“흠. 내가 워낙 공주답지 않았나 보네요. 그분 눈에는.”

그녀가 반진심으로 한 말에 제롬은 속으로 조금 수긍을 하였다.

확실히 일국의 공주라고 하기에 지나치게 수수했다. 방금 분에 못 이겨서 씩씩거리며 나간 아리스에 비해 본다면 더더욱 이분의 옷차림은 초라해 보였다.

말 그대로 ‘최소한’만을 갖춘 꼴이다. 그 흔한 귀걸이와 목걸이마저도 걸치지 않은 모습은 과장하자면 일개 시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왜 폐하께서 직접, 좀 공주답게 만들라 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폐하께서 하나하나 지시하셔서 일일이 챙긴 것들입니다, 마마.”

“그렇군요. 일단은 감사히 받았다 전해 주십시오.”

‘일단은’이라니. 제롬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꽤나 감동적인 말이었는데도 그녀는 지나치게 심드렁했다.

작은 나라의 1년 예산은 족히 될 만한 양의 금은보화를 그녀는 그저 정리해야 할 짐짝 정도로만 보는 것 같았다.

사라의 말처럼 확실히 흥미로운 공주님이시다.

왜 폐하의 눈에 단번에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혹시 이거 말고 따로 전해 주신 건 없나요?”

“특별히 말씀하신 것은 없습니다. 혹시 따로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롬이 의아해하자 로엘은 바로 아니라고 답했다.

정작 달라는 건 안 왔나 보다.

살짝 실망감을 감추는 모습이 드러나, 제롬은 고개를 갸웃했다. 금은보화는 거들떠 보지도 않으시더니만 따로 찾는 게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물질적인 것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혹시 폐하께 따로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마음 써 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제롬의 배려에 작게 미소 지었다. 냉담한 그의 곁에 이런 세심한 시종관이 붙어 있는 게 조금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제롬이 아주 일을 잘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까 아리스를 다루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그럼, 아카시스님.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카이로스 황실 궁내부 일원을 대표하여, 마마를 모시게 된 것은 크나큰 영광입니다. 부디 이곳을 고향과 같이 편히 생각하여 주소서. 카이로스의 오신 것을 환영하옵니다.”

제롬이 깊게 허리를 숙이자 그 뒤로 수십 명의 시종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허리를 숙였다.

의례적으로 하는 말일 수 있지만, 그 속의 진심이 느껴져 로엘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카이로스의 환대였다.

***

“어? 또 오셨네요?”

황제가 왔다는 소리에 이리 반응하는 비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다.

에단은 신선하기도 한 그녀의 반응에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싫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아니……. 그건 아니지만, 오늘도 오실 줄은 몰랐죠. 그러지 않아도 오늘 여기 번잡스러운데. 폐하 덕분에.”

말은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시녀들이 도우려는 것을 자연스럽게 물리고는 직접 그의 옷을 받는 모습이 조금 예뻐 보였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싫다는 소리군.”

“싫은 건 아니지만 과하셨단 소리입니다.”

여전히 그녀는 또렷이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지 않을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라 에단은 조금 서운해지려 했다.

그래도 명색이 처음 주는 선물인데, 너무 애물단지 취급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기 보이세요? 추려서 골라 온 보석만 이만큼이에요. 근데 이거의 열 배는 왔다니까요? 평생을 써도 다 못 쓰고 죽을 거 같습니다.”

“다 쓰라고 준 거 아니야. 맘에 안 들면 버려도 돼.”

“세상에 어느 여자가 남편이 준 선물을 버립니까? 심지어 그분이 황제 폐하신데.”

그런데 그 서운함을 그녀는 너무도 손쉽게 날려 버렸다.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 그에게는 너무 낯선 ‘남편’이란 단어에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 단어가 이리 간질간질했던가.

그녀의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긴. 지난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아카시스에게 주기엔 과해도 너무 과하지.”

“그거 죄송하게 됐네요.”

“그런데도 받았으니, 앞으로 그만큼 하면 되겠네.”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이내 짓궂은 그를 흘겼다.

“저는 분명히 폐하의 여인이 될 마음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내가 허락한 적도 없지.”

“저의 선택이라면서요?!”

“그게 내 선택이라고 했던가?”

“아니, 무슨!”

그녀가 밀어 봤자 그가 꿈쩍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버둥거리는 그녀를 좀 더 바짝 당겨 안아,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아.”

정말 그가 올 줄 몰랐는지, 그녀는 이미 잠자리에 들 채비가 다 되어 있었다.

얇은 실크 원피스만 입고 속이 비치는 하얀 가운을 걸친 그녀의 모습은 들어올 때부터 그의 시선을 잡았다.

그 사실을, 이 붉은 머리의 소녀는 절대 모르겠지.

“읏!”

그는 가볍게 그녀를 들어 그녀를 보석이 한가득 펼쳐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샹들리에 아래 빛을 받으며, 보석 사이에서 보석보다도 반짝이는 그녀가 그를 보았다. 양손을 짚어 작은 그녀를 가두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글쎄.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그러신 거 맞아요. 좋은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니. 귀찮은 일만 가득했지.”

“저는 바빴습니다. 폐하께서 예상도 못 한 것을 너무 많이 주셔서.”

살짝 입술을 삐죽거리는 그 모습이 귀여워,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나가 그녀의 입술에 쪽 소리 나는 키스를 남겼다.

깜짝 놀랐는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원래 이러십니까? 아니, 다른 남자들도 다 이래요?”

“여기서 다른 남자가 왜 나와.”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별말 아닌 거 알고, 그저 몰라서 묻는 걸 알아도 그냥 그 입에서 남자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그는 좀 더 바짝 다가섰다.

“황제의 여인은 평생 동안 오직 황제만 바라본다.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주는 순간 오로지 죽음뿐이야.”

“꼭 그런 건 아닐걸요?”

그의 눈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사람도 얼릴 거 같은 차디찬 냉기를 품은 눈빛에 로엘은 순간 긴장했지만, 이내 피식 웃었다.

이분,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

“제게 아들이 생기면, 전 폐하보다는 아들이 우선일 것 같은데.”

그의 목에 팔을 걸며, 이번엔 그녀가 정색하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꼬리 천 개 달린 여우 같으니라고.

그녀의 그 한마디에, 그의 화는 눈 녹듯 사그라 들었다.

“물론 제 아들은 없을 테지만요.”

“그 역시 아무도 모를 일이지.”

또다시 사람을 흔들어 놓고 자기만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이번엔 놔주지 않았다.

그대로 깊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아침에 이 방을 나오는 순간부터 계속 생각났던, 달콤한 향기가 가득한 그녀의 안을 그는 원껏 헤집었다.

“으응.”

하루 만에 그녀는 언제 눈을 감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수줍게 입을 열고 그의 혀를 반기는 법을 알아 가고 있었다.

여린 꽃봉오리가 꽃이 되어 가는 과정.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새롭고 사랑스럽다.

세상 어느 여장부보다도 당찬 눈을 보이는가 싶더니만, 지금은 그가 조금만 건드려도 금세 품 안의 여자가 되어 버린다.

그 간극이 그를 더 애태웠다.

“네가 먼저 나에게 안아 달라고 매달릴 수도 있을 테니.”

“……역시 폐하는 짓궂습니다. 아주 많이.”

“너만 할까.”

그는 그녀의 쇄골을 엄지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체온이 높은 그녀의 맨살에 그의 차가운 손이 닿자 그녀는 움찔거렸다.

“적어도 하나 정도는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준 사람의 성의가 있는 법인데.”

“……서운하셨습니까?”

“조금?”

의외로 그는 쉽게 인정하였다. 그녀는 그 말에 아주 옅게 미소 지었다.

역시나 귀여운 구석이 있는 분이다.

다른 여자에게도 이랬을까 싶었지만, 그 말은 묻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질투 어린 호기심이었으니까.

“보석을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굳이 확인해 주지 않아도 딱 보아도 그래 보였다. 그녀는 정말 최소한의 장신구마저 걸치지 않았으니.

그래서 그는 더더욱 이리 요란스럽게 준비시켰다.

이 사치품들은 비싸기만 한 게 아닌 꽤 많은 의미를 지녔으니까.

“그런데도 여기 있는 것들은 제가 마음에 들어서 직접 골라 온 거예요. 폐하를 뵐 때 하나씩 하고 가려고.”

그녀의 눈을 보면 빈말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의 눈을 슬쩍 피했다.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오늘 오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것도 이 밤에.”

“난 원래 밤에 와.”

“그래도 이렇게 예고도 없이 오시면 곤란해요. 그럼 제가 늘 대기 상태여야 하잖아요.”

“그 말은 나를 기다린다는 말이군.”

그가 또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목소리도, 그녀를 만지는 손길도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덕분에 그녀의 심장이 더욱 빨라졌다.

가끔 나오는 이 다정함이 위험했다. 괜히, 이유 없이 사람을 설레게 만든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래서 싫어?”

그는 그녀의 목에 목걸이 하나를 걸어 주며 물었다. 목 근처에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났다.

그녀의 하얀 피부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닮은 붉은 루비였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황금의 눈에 그녀가 비치고, 그녀를 보며 미소 짓는 그가 있었다.

“……아니요.”

“그럼 됐어.”

싫어도 어차피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서.

그녀는 다시금 키스하려 다가오는 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리며, 눈을 감았다.

“읏.”

얇은 실크 원피스 위로 그의 큰 손이 올라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가슴이 그의 손 안에 가득 차면서, 새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슴 끝으로 확 열이 쏠리고, 짜릿한 전기가 흘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도망가는 건 안 돼.”

감질나게 하던 그녀의 얇은 잠옷을 끌어내리고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뽀얀 가슴을 입에 머금었다. 그의 손길에 단단해진 정점을 혀끝으로 굴리자 그녀는 바로 허리를 휘었다.

“으응.”

그녀의 야릇한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그는 다른 쪽 가슴도 부드럽게 애무하며 그는 그녀의 높게 묶은 머리를 풀어 버렸다. 그러자 그녀의 하얀 가슴 위로 붉은 머리가 아름답게 흘러내렸다.

붉게 물든 양 볼에 붉은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었고, 그녀의 하얀 살결 위로 그가 선물한 루비가 반짝였다.

그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다워 그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자, 잠깐……!”

망설임 없이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갑작스럽게 붕 뜬 몸에 균형을 잃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떨어질 텐데, 그러다.”

“잠시만요. 잠시만!”

그녀는 그가 침대에 내려 주자마자 일단 드러난 가슴부터 대충 여미며, 침대 끝으로 달아났다.

얼굴을 잔뜩 붉히는 그녀를 보며 그는 웃고 말았다. 하는 짓 하나하나가 그를 자극하는 걸 전혀 모르나 보다.

“실컷 불을 지폈으면 책임을 져.”

“내가 언제 불을 지폈어요!”

“아까? 그리고 지금.”

그는 느릿하게 긴 상의의 단추를 풀어 갔다. 불빛 아래서, 그의 근육 진 상체가 서서히 드러나자, 로엘은 그 모습이 너무 야하게 느껴져 순간 눈을 돌렸다.

잔뜩 빨개진 그 모습이 귀여워 에단은 저절로 웃음이 났다.

역시나 아직 애다.

남자를 전혀 모르는, 막 여자가 되어 가는 그런 소녀.

“채, 책임은 폐하가 지셔야 해요. 분명 제 의견을 존중해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누가 뭐래? 아니면, 내가 지금 뭐 한다고 했나?”

그녀 위로 서서히 올라타는 그가 너무 얄미워서 그녀는 저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짓궂다 못해 진짜 못됐다.

이 남자, 기어코 그녀의 입에서 ‘안아 달라’는 소리를 들을 작정인가 보다.

“뭔가를 기대했나 보군.”

“아니거든요?”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읏!”

그의 손이 느릿하게 그녀의 옆선을 타고 올라갔다. 애를 태우듯 그녀의 실크 원피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그녀의 가슴 주위에서 원을 그렸다.

그 간질간질하고 짜릿한 자극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로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고 돌렸다.

“눈을 돌리는 건 안 돼.”

“……부끄러워서 죽을 거 같다고요.”

“그래 보여. 그래서 난 아주 재밌지.”

「진짜 못됐어.」

「나도 알아.」

일부러 토르티아어로 중얼거린 말에 똑같은 언어로 답변이 돌아왔다. 화들짝 놀라 토끼 눈이 된 그녀에게 그는 씩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알아요?”

“소문도 못 들었나? 카이로스의 황제는 태양의 신이 내린 신 같은 존재라고.”

“그렇다고 토르티아 언어까지 아는 거예요?”

“네가 무얼 상상하든 나는 그 이상을 해내는 사람이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게 더 재수 없었다.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그의 여유가 더 분했다.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잘났어, 진짜.」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고 있으니 조심 좀 하지?」

“황제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다간 목이 날아가.”

“그래서, 죽이기라도 하시게요? 안 그러실 거 같은데.”

그녀 역시 당당히도 말했다. 또 혼자 평소로 돌아온 그녀는 그의 아래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순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분위기가 좀 잡히나 싶었는데, 또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 모드로 돌아간 그녀라 그는 이번에도 쓴웃음을 삼켰다.

여전히 그는 그대로 밀어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애석하게도 상대는 아닌 거 같았다. 그는 그만 그녀를 놀리기로 하고 그녀 위에서 내려왔다.

속도를 맞추고자 마음을 먹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오늘도 여기서 주무실 겁니까?”

“오늘도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건가?”

“아닙니다.”

옆에 누운 에단 곁으로 로엘이 몸을 돌려 엎드렸다. 그렇게 엎드리면 그 가슴골이 다 보이는 걸, 이 생각 없는 여자는 전혀 모르나 보다.

자연히 그의 시선이 그쪽으로 가는 것도 모른 채 그녀는 턱을 괴었다.

“목걸이. 잘 어울리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살짝 긴 목걸이라 하얀 그녀의 가슴골 바로 위에 루비가 빛났다.

그러다 그의 시선을 뒤늦게 의식한 그녀는 애써 가운을 끌어모아 가슴을 가렸다.

그 모습에 괜히 오기가 들어 그는 검지손가락으로 일부러 그녀의 잠옷을 끌어 내렸다. 아슬아슬하게 가슴 끝에 걸릴 쯤, 그녀가 그의 손을 딱 잡았다.

“오늘 장난은 아까 끝났어요.”

“장난인 적 없는데.”

“장난 맞아요. 진심이면, 그걸로 안 끝내실 거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진심이었다면, 진작 그녀는 그 밑에서 울고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장난이라면, 상관없잖아? 계속해도.”

“상관있거든요?”

“상이 있는데도? 예를 들어, 이런 거라든지.”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 순간 그녀의 눈앞에 딸랑, 소리를 내는 기나긴 금빛 목걸이가 떨어졌다.

그 끝에 달린, 카이로스 황실 장식이 선명한 열쇠 하나.

로엘은 벌떡 일어났다.

“폐하!”

“장난 끝.”

바로 나온, 그 예상된 반응에 그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손을 뻗기 전에, 그가 먼저 열쇠 목걸이를 들어 올리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얼른 달라 재촉했다.

“정말 가지고 오셨네요! 저는 오전에 아무것도 없어서, 역시나 무리인가 했는데!”

“가지고는 왔지만 준다고는 안 했지.”

그가 안 준다고 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그녀는 바로 그의 위에 올라서 손부터 뻗었다. 당연히 그보다 훨씬 체구가 작은지라 그가 팔만 위로 뻗어도 그녀는 그의 손에 닿을 수 없었다.

“정말! 그만 주세요!”

“내가 왜?”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안달이 난 그녀는 그의 허리 위까지 올라와 상체를 밀착시키며 그의 손에서 열쇠를 뺏으려고 버둥거렸다.

“좀……!”

그가 안 주려고 하면 할수록 그녀는 그에게 붙어 더 애를 썼다. 덕분에 장난을 치던 그가 오히려 열이 올랐다.

맨살에 고스란히 닿는 부드러운 가슴과 허리 부근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허벅지에 그의 아랫도리에 바로 힘이 들어갔지만, 이 순진한 여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를 놀리는 게 너무 재밌어서, 이 반응이 너무 귀여워 계속하고 싶어도 이러다 장난이 그녀가 말하는 ‘진심’이 되어 버릴 거 같아 그는 그만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제지했다.

“그래, 알았어. 어차피 줄 거니까, 그만해.”

“그럴 거면서 괜히!”

그녀는 자신이 어떤 자세인지 자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여전히 내려올 생각은 안 하고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신경은 오직 그의 손에 있는 열쇠에만 가 있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 순진한 소녀를 언제 여자로 만들까 싶다.

그는 그만 그녀에게 열쇠를 건넸다.

“아카시스 로엘. 나의 결혼 선물이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폐하.”

‘결혼 선물’이라는 단어가 살짝 그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하사품’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정말 훨씬 더 듣기 좋았다.

그녀는 볼에 살짝 홍조를 드리우며 두 손으로 얼른 그의 열쇠를 받았다.

“이 열쇠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는 거죠?”

“네가 근위병들 눈을 잘 피한다면?”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러다 걸려도 안 도와줄 거야.”

“안 걸리면 됩니다.”

“흐음. 아카시스께선 무슨 자신감이 이리 충만하실까. 이곳이 어떤 곳인 줄 알고.”

그가 침대 헤드에 기댔던 상체를 단번에 세우자 그의 얼굴이 바로 그녀 얼굴 앞까지 가까워졌다. 갑자기 좁혀진 거리에 로엘의 홍조가 더 짙어졌다.

그가 시선을 피하려는 그녀의 뒷목을 잡고 조금 힘을 주자, 다시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그의 눈과 마주쳤다.

“네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이 카이로스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저도 그리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황제 폐하.”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의 이마와 맞닿았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를 마주했다.

붉은 바다 같은 깊은 눈에, 예쁘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저절로 미소 짓는 그가 비치고 있었다.

이 붉은 눈에 매료되어 이리 마음이 가는 것일까.

“내일 오시면, 제 멋진 성공담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내가 내일 올지 안 올지 어떻게 알고.”

순간 로엘의 말문이 막혔다.

너무 당연한 듯 내일도 그가 올 거라 생각한 자신에게 그녀 스스로도 놀란 거 같았다.

“아……. 그러네요.”

거기에 숨겨지지 않은 서운한 마음.

그 생각과 그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 에단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리 천상 여자면서 황제의 여자가 되지 않겠다?

그는 조금 느슨해진 그의 팔에 힘을 주어, 그녀의 허리를 좀 더 가까이 당겼다.

“내일은 안 돼.”

“……네.”

“내일은 안 올 거야.”

“네, 알았어요. 한 번만 말씀하셔도 알아듣…….”

“내가 궁에 없을 테니까.”

대놓고 서운한 티를 내는 그녀의 말을 끊고, 그가 진짜 이유를 말하자 그녀는 말문이 또 막혔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빤히 그를 바라만 보는 그녀를 보며 그는 미소 지었다.

“방금, 질투한 거 같은데.”

“……아닙니다.”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고 있으면서 자존심 하곤. 그는 콩 하고 그녀의 머리에 가볍게 자신의 머리를 박고는, 진짜 이유를 알려 주었다.

“호보체의 영주가 문제를 일으켜서, 잠시 가 보아야 할 거 같다.”

“……위험한 일이십니까?”

“전혀.”

조금 귀찮은 일일 뿐.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그의 대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되었습니다. 무사히 다녀오시길, 하시는 일이 폐하의 생각대로 잘 되길 마음으로 기원하겠습니다.”

그녀는 미소로 그에게 말했다. 에단은 그녀의 이 배웅도 마음에 들었다.

으레 다른 여인들처럼 일찍 오라든지, 빨리 오라는 쓸데없는 말보다 훨씬 더 듣기 좋았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어쨌거나 외곽으로 나가시는 것 아닙니까? 황제께서는 황궁을 나가시는 순간부터 어디든 위험한 법입니다. 그러니…….”

“잔소리.”

그러니, 이런 잔소리마저도 좋게 들리는 거겠지.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당겨 입술에 가볍게 제 입술을 맞추었다.

“이 열쇠를 사용하는 것도 내일은 안 돼.”

“네? 왜……!”

“내가 지켜 줄 수 없잖아.”

바로 따지려는 그녀의 말을 그는 또 막히게 했다.

그녀와 이마를 맞댄 채로, 그녀와 눈을 마주한 채로,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궁에 없는 한, 아무것도 해선 안 된다. 누구를 만나서도, 어딘가에 가서도, 무언가를 도모해서도 안 돼. 언제 어디서 누가 너를 어떻게 해칠지 모르니 그 어떤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내가 네 곁에 없을 땐 절대 이 후궁을 나서지 마.”

아니, 진지하게 그녀를 걱정했다.

“……걸려도 도와주지 않을 거라 하셨으면서.”

“이 또한 변덕인가 보지.”

“그러니까 저는 그 변덕이!”

싫다는 말을 하려다, 그녀는 이만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살짝 망설이더니만 결국 한숨을 쉬고 그의 목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그를 당겼다.

“그 변덕이…… 오늘은 좋습니다.”

그녀는 그대로 그의 뒷말은 듣지 않은 채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올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수줍기도 한 키스에 그는 잠시 놀랐으나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대기만 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제대로 키스하였다.

오랜만에 나가는 거라 바람도 쐴 겸, 천천히 다녀오려 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한시라도 빨리 일을 끝내고 달려와야겠다.

참 어렵기도 하고 느리기도 한, 이 사랑스러운 붉은 공주님을 위해.

***

“으음.”

잠결에 짚은 옆자리가 차가워, 로엘은 순간 눈이 떠졌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아무도 없는 옆자리를 살폈다.

“……일찍 가셨나 보네.”

나간 지 꽤 오래되었는지 그가 누워 있던 자리가 꽤 차가워져 있었다. 밤새 그가 안고 있어서인지 갑자기 그가 없단 생각이 들자 몸에 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아니, 마음이 허한 건가.

“어? 마마. 일어나셨군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오던 딜리아는 일어나 있는 로엘을 반갑게 인사했다.

“밤새 잘 주무셨나요?”

“응.”

아침부터 해맑은 딜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녀마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내 사람이 되었다 생각되자 생각보다도 쉽게 말이 놓아져 고작 반나절 만에 궁 안의 시녀들과의 대화도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그녀는 차례차례 커튼을 걷는 딜리아를 보며, 그가 풀어 버린 머리를 대충 위로 묶었다.

“폐하께선 일찍 나가셨니?”

“네. 새벽에 나가셨어요. 폐하께서 마마를 깨우지 말라 하셔서 마마께 알려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랬구나.”

제법 잠귀가 밝은 그녀였는데, 그가 나가는 것을 몰랐다. 그만큼 그의 품에서 푹 잤다는 소리였다. 밤새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그 따뜻하고 단단한 품에 그녀는 놀랄 정도로 쉽게 마음을 놓았다. 저절로 그 안에서 안도가 되었다.

“마마. 폐하께서는 곧 돌아오실 거예요.”

“어?”

“너무 서운해하시는 거 같아서요. 보기 좋으십니다.”

딜리아의 말에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저도 모르게 옆자리를 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딜리아는 신난 듯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나가시기 전에 잠든 마마를 보시면서 웃으시는데, 저는 궁에 들어와서 그런 폐하의 모습은 처음 뵈었습니다!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헤더랑 안나도 놀라서 자빠질 뻔했다니까요!”

“그, 그만해.”

“그리고 깨우지 말라고 직접 말씀하셨다니까요?! 저희가 아는 그 폐하가 맞는지 다들 진지하게 고민했잖아요.”

로엘은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이 남자가 시녀들 앞에서 무슨 짓은 한 건지 괜히 민망했다.

딜리아는 오히려 그런 로엘의 반응에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입니다, 마마. 저는 마마께서 혈혈단신 이곳에 오셔서 외로우실까 걱정 많이 했는데, 폐하께서 마마의 곁에 계셔 주신다면 걱정 없습니다.”

딜리아는 진심이었다. 아직 이런 말이 주제넘을 수 있지만, 그래도 전하고 싶었다. 같이한 시간과 별개로 딜리아는 그녀를 진심으로 위하고 있었으니까.

“고마워. 딜리아.”

마치 그녀가 딜리아를 진심으로 대하듯.

로엘은 자신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어 주는 딜리아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그런데 내 곁에는, 너희들도 있잖아? 그러니 외롭지 않아.”

시녀를 옆에 앉히고, 같은 눈높이로 맞추며, 손을 잡아 주는 공주님이라니.

장담컨대 이 황궁에 이런 황족, 이런 귀족은 없다.

수많은 능력 있는 형제들 사이에서 늘 뒤떨어지는 하자 취급을 받던 그녀를 이렇게 필요로 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마음이 갈 수밖에. 그러니 충성할 수밖에.

“마마. 일어나셨어요!”

훈훈한 그들의 대화 사이에 이번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안나였다.

오늘도 힘찬 그녀는 로엘이 일어났단 소리에 바로 웨건에 차부터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갓 우린 차 향이 바로 방 안에 번졌다.

“안나. 좋은 아침이야.”

“네, 마마! 오늘 아침은 오늘 새벽에 들어온 싱싱한 과일을 곁들인 팬케이크입니다!”

이어서 헤더마저 한껏 실크 더미를 안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마마. 안녕히 주무셨어요! 제가 방금 어제 들어온 실크 중에 마마께 어울리는 거 몇 가지 추려 왔습니다. 마마 취향을 좀 알아야, 드레스를 맞추든 입든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뒤이어 페니와 시에라도 들어왔다. 이 아침부터 궁 안의 시녀들이 총출동한 셈이다.

꾸벅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말없이 인사하는 시에라와 다르게 페니는 안경 너머 눈을 반짝이며 로엘에게 다가왔다.

“마마. 좋은 아침입니다! 마마, 마마. 제가 어제 밤새 생각을 해 보았는데 어제 폐하께서 주신 금괴들 말이에요. 그걸 그냥 묵혀 두는 것보다는…….”

“아. 마마. 금괴도 금괴지만 보석들도 따로 관리가 필요해요. 그냥 그렇게 두시면 안 되고 보석마다 관리 방법에 따라…….”

다섯이 모이니 각자 맡은 일에 대해 할 말이 많은지 모두가 한꺼번에 쏟아내는 통에 로엘은 무엇부터 대답해 줘야 할지 몰라 그저 웃음이 났다.

이들이 어째서 낙오자 취급을 당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일들을 잘하는데.

“자! 일단! 우리 식사하고 얘기하자. 다들, 아침은 먹었어?”

로엘은 신나서 말하는 그들의 말을 일단 끊었다. 우선 이들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으니. 그런데 이들은 그런 그녀의 말이 놀랐나 보다.

“우리 같이 아침 먹지 않을래?”

멀뚱멀뚱 그녀의 말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하는 그들을 위해 그녀는 좀 더 환히 웃었다.

고작 밥 한 끼 같이 먹잔 소리에 이리 얼음이 되어서야.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그녀의 말을 아무래도 겉치레로 들었나 보다.

“우리 다 같이 아침 먹자.”

내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

‘그건 부하를 만드는 게 아니야. 가장 강력한 아군이자,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가장 소중한 형제를 만드는 일.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사람 대 사람으로,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일이다.’

머릿속에 언제나 그리운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조금 울컥했지만, 이내 웃었다.

“자. 아침 먹으러 갑시다!”

환하게 들이치는 햇빛을 받으며,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더욱 붉게 빛났다.

그녀의 마음속에 항상 살아 있는, ‘그분’의 머리카락처럼.

***

“직접 오실 것까지 없다니까.”

“너 혼자 가면 피바람만 불고 일만 더 복잡해져.”

“폐하가 가면 더 피바람인 거 몰라? 폐하는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는다고.”

오늘도 여김 없이 루카스와 아론은 투닥거리기 바빴다.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에단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제 갈 길만 갔다.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조용히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어서 그는 물론 아론과 루카스, 그리고 그의 친위대들도 전부 사복을 입고 그를 따랐다.

보통 황제께서 움직이면 상하좌우로 호위를 해야 하나, 답답한 건 딱 질색인 그의 성격 때문에 그의 친위대들은 항상 멀찍이 떨어져서 근방을 호위했다.

그나마 루카스와 아론 정도가 그 옆을 지킬 수 있었다. 솔직히 그 둘이면 충분하기도 했고.

“이야. 여기는 언제 봐도 시끌시끌해. 이방인이 많아서 그런가?”

“그중에서 네가 제일 시끄러우니까 좀 닥치고 있어.”`

“지금은 네가 더 시끄럽거든?”

“둘 다 닥쳐.”

물론, 애초에 이분은 누가 지켜 줄 필요가 없는 분이지만.

에단이 짜증스럽게 한마디 했다.

사람이 많은 것도 딱 질색인데, 정체를 숨기느라 한낮에 변복을 하고도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써야만 했다.

시끄럽고, 덥고, 갑갑하고.

에단이 싫어하는 그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그 심기가 좋을 리 만무하다.

“왠지 오늘은 곱게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어차피 곱게 끝낼 일도 아니었어.”

당연히 그 화살은 그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이곳의 영주 루블에게 향했다.

조용히 소곤거리던 두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폐하의 상태를 보건대 한바탕 피바람이 불게 생겼다.

“도착했습니다, 폐하.”

카이로스 제1의 항구도시 호보체.

중부의 모든 무역은 이곳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이로스의 제2도시에 해당하는 호보체는 상인들의 마을답게 언제나 부가 넘쳐났고, 여러 사람들이 왕래하는 만큼 여러 나라의 소식도 가장 빨리 들어왔다.

또한 지리적으로 어디로든 뻗어 나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라, 호보체는 재정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카이로스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라 할 수 있다.

그러한 호보체의 단 하나의 단점이 있다면, 호보체를 오랫동안 세습하여 다스려 온 루블가家다.

“참나. 왕이 따로 없구만. 왕이 따로 없어.”

“……이건 좀 심하군요.”

도시 중앙에 있는 호보체 성에 당도하자, 루카스와 아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약 1년 전부터 세금이 적게 들어오나 싶더니, 반년 전부터는 도시 내 정비 등의 이유로 아예 군세 납부를 거부하였다.

그러더니 황제의 허가 없이 성을 증축하고, 국기 대신 호보체만의 기를 만들어 호보체 내 각 도시에 달았다.

그 소식을 접한 중앙에서 지속적으로 경고 공문을 보냈지만 그에 대한 답변 대신 사병이 늘어 간다는 보고만 들려올 뿐이었다.

한창 북동쪽으로 영토를 늘려 가던 시기라 호보체 건은 잠시 미뤄 두었는데, 그가 환궁하고 나서도 그 오만방자함이 끝을 몰라 결국 그가 직접 나서게 되었다.

그는 카이로스 국기 대신 걸려 있는 호보체 기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루카스.”

“대장군 루카스.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루카스는 바로 에단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 뒤로 흩어져 그를 호위하던 친위대들이 거짓말처럼 모여 대를 이루고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카이로스 황제 친위대, 프래카.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에단은 그런 루카스와 친위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오롯이 펄럭이는 호보체의 깃발만을 주시할 뿐이다.

“10분.”

이거 듣기만 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눈으로 직접 보니 아주 많이 거슬렸다.

“내 앞에 루블을 데려다 놔.”

“명을 받듭니다!”

그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카스와 친위대는 신속하게 성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일제히 뒤집어썼던 로브를 벗어 버리니 황제 친위대의 상징인 황금 갑옷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 당연히 호보체 성을 지키던 사병들은 화들짝 놀랐다.

“화, 황제의 친위대다!!”

“프래카가 떴어! 프래카다!!”

황제의 직속 친위대 프래카(Praetoriani of Kairos)

카이로스 군부대와 독립된, 황제의 직속군으로서 오로지 황제의 명만을 받는다.

부대장 급의 실력을 가진 이들 중 엄격한 시험을 통해 소수만이 선발되며, 선발된 후 다시 교육이 시작되어 그 교육과정을 통과한 자만이 프래카의 칭호를 얻을 수 있다.

프래카 개개인은 중앙군 부대장의 대우를 받으며, 칭호를 얻는 것 자체가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 출신은 때가 되면 장군 발령이 보장되니, 자연히 군부의 요직에 오르게 된다.

그러니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고, 그만큼 실력자만이 모인 부대가 바로 프래카.

지금 그 프래카가 호보체의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프래카가 왔다는 건 설마…….”

“루, 루카스 세버 장군……!”

“저, 전군 방어 태세!!!”

그런 프래카를 지휘하는, 흑발의 장군 루카스 세버.

“시끄럽네, 거.”

루카스의 거대한 창이 한 번 휘둘러지자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피를 뒤집어쓴 루카스는 씩 하고 미소를 지었다.

“자. 놀아 봅시다.”

에단의 오른팔, 루카스 세버(Cerber).

그가 창을 휘두르는 순간 지옥문이 열린다고 하여, 지옥의 개 케로베로스(Cerberos)라고 불린다.

에단이 그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도 그토록 빨리 중부의 패권을 쥘 수 있는 데에 루카스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언제나 그의 곁에서 피를 묻히는 일에 앞장서는 루카스는 에단 황제의 가장 강력한 검.

“또 시작이네, 저놈.”

에단의 옆에서 아론은 한숨을 삼켰다. 생각 없이 무조건 베고 보는 루카스를 한심한 눈으로 보며, 아론은 근처의 친위대에게 루블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북문을 포위하라 일렀다.

“폐하. 이리로 가시면 됩니다.”

루카스가 터놓은 길을 아론의 안내를 받으며 에단은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루카스가 그의 오른팔이라면, 아론은 그의 명실상부한 왼팔. 그의 꽃길은 모두 그의 뒤에서 그를 서포트 하는 책략가 아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루블이 세금을 빼돌렸다는 정황은 이미 확보해 두었습니다. 예상하셨던 대로 군비 명목으로 걷어들였으나 모조리 사병을 늘리는 데 사용하였고, 사병은 거의 다 외국 용병을 고용하였더라고요. 카이로스 백성들은 기본적으로 직업처를 국가에 통보하여야 해서, 아무래도 부담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외국 용병 값을 대려면 횡령할 수밖에요. 거기에 성도 이따위로 호화롭게 지었으니……. 세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합니다.”

아론 클래버(Aron Clever).

카이로스 역사상 최연소 서기관으로 에단의 최측근 비서관이 되어 에단의 황태자 시절부터 함께했다. 천재라 불리던 에단과 함께 수학할 만큼 남달랐던 그는 에단이 유일하게 정책을 논의할 수 있는 자였다.

“이 지경까지 되도록 뭘 한 거야.”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이 사태를 제대로 보고받은 것은 불과 1주 전이었다.

1년 전부터 세가 안 맞게 들어오는 것을 알면서도 중앙부처에서 계속 눈감아 주었단 소리에 에단은 머리가 뜨끈거렸다.

그와 군사들이 국경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동안, 그저 행정 업무 하나 제대로 유지하라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고 뇌물을 받다니.

원로원들의 타성과 무능에 그는 질려 버렸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한번 일깨워 줄 필요가 있었다.

그가 어떤 황제이고, 그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영토가 넓어지는 만큼 중앙정부의 권력이 줄어든다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특히 호보체처럼 자력으로 도시를 운영할 수 있는 부유한 도시나, 외곽의 자치 행정 영주는 더욱 그렇지요. 앞으로 더 큰 제국을 운영하실 폐하께서는 이번 호보체 일을 계기로 똑똑히 알려 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제국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입니다.”

아론은 속으로 잘되었다는 생각도 하였다.

갈수록 머리만 커지는 영주들을 어떻게 다룰까 골치가 아팠는데, 이렇게 적절히 반기를 들어 주다니. 주군께서 적당히 밟아 주는 것만으로도 그 누구 하나 딴생각을 하지 못할 거다.

이분의 적당히는 다른 이들에겐 적당히가 아닐 테니.

딱 10분 정도 걸릴 느긋한 걸음으로 영주의 대회실에 가니 루카스가 루블을 잡아다 두었다. 대낮에 벌어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루블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루카스 네 이놈!!!”

“무슨 짓이냐니. 엄연히 공무 수행 중입니다만?”

“공무 수행? 도대체 누구 명이냐!! 누가 감히 호보체를……?!”

“닥치고 꿇어.”

루카스가 붙잡혀 있는 루블의 무릎을 툭 치자 루불은 바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는 사색이 되었다.

느릿하게 로브를 벗는, 황금 눈의 그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땅에 박고 목소리가 울렸다.

황제 에단과 그의 사냥개 루카스, 책사 아론, 그리고 친위대 프래카까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뒤늦게 감이 왔다.

황제가 안 거다.

호보체의 반역을.

“폐, 폐하. 우선 제 말을 들어 보시고……!”

그의 검 끝이 루블의 턱을 들어 올렸다. 루블의 몸은 덜덜거리며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래서 더 소름이 끼쳤다. 아무도 없고, 그의 서늘한 눈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반역은 죽음이다.”

“반역이 아닙니다, 폐하! 저는 단지 호보체를 좀 더 부강하게 만들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루블은 억울하단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니, 조금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그에게 변명했다.

아론은 그런 루블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당장 잘못하였다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저자는 아주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그분의 심기를 더욱 건들다니. 곱게 죽고 싶지 않나 보다.

“호보체는 루블가가 일궈 온 루블의 도시입니다! 고작 작은 항구에 불과했던 도시를 정비하고 키우는 데 루블가가 없었다면, 루블가의 선대 영주였던 제 조부와 부친의 희생이 없었다면 가당키나 했겠습니까? 저는 그런 선대 영주의 유지를? 받들었을 뿐입니다! 그게 어찌 반역입니까!!”

말을 하다 보니 용기가 생겼는지 루블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자신의 논리에 빠져,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해 어거지를 쓰는 루블의 말을 그는 묵묵히 둘었다.

하지만 아론과 루카스는 오히려 그 침묵이 더 불안했다. 그의 침묵이 폭풍전야라는 것을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침묵 끝은 언제나 피바람.

“호보체의 것은 호보체만을 위한 것입니다! 어째서 중앙에 호보체의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까? 호보체의 돈이고, 호보체의 부입니다!! 호보체는 처음부터 루블의 것이었고 루블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것을 정당하게 찾으려던 것뿐입니다!! 카이로스가 도대체 이 호보체에 무얼 해 주었단 말입니까!”

그는 피식 웃었다. 오만함을 넘어서 멍청하기까지 했다.

그의 검 끝이 부드럽게 루블의 목을 쓸었다. 그러자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그의 목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폐, 폐하!!”

“어째서 호보체의 것을 카이로스에게 주어야 하는가, 라.”

피 묻은 그의 검은 또다시 루블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정확히 루블과 눈을 맞추며 그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호보체는 누가 지키는가. 이 부유한 도시는 어째서 약탈 한 번을 당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그 많은 해적이 한 번을 침범해 오지 않았는가.”

“그, 그건……!”

그의 검 끝이 목에서 선을 그리며 내려오더니 루블의 심장이 있는 쯤에 멈추었다. 검의 움직임을 따라 루블도 숨을 멈추자 황제가 나직이 말했다.

“네가 호의호식할 수 있도록 이 성을 지은 것은 누구이며.”

멈춰 있던 검 끝이 루블의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어떻게 저항을 하기도 전에, 누가 말리기도 전에, 너무도 쉽게 그 칼날은 루블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너에게 그 같잖은 작위를 주어 백성이 너에게 조아리게 만든 건 누구의 덕인가.”

그러자 또다시 붉은 피가 뚝뚝 그의 칼을 타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크, 크흑!”

“네 자식들이. 네 안사람이 평생을 사치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누구의 덕인가.”

뒤늦게 오는 고통 속에서 루블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황제에게 속수무책으로, 이리 허망하게 죽어 간단 생각에 자존심만큼은 지키고자 했는데 흐려지는 시선 끝에 붙들려 온 처자식이 보였다.

“폐하, 영주님을 살려 주십시오!!”

“아버지!!”

어린 아들딸과 아직 젊은 아내가 울부짖었다. 그제야 루블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였는가 깨달았다. 살려 달라 애원하는 부인과 어린 자식들 앞에서도 눈앞의 황제는, 이 잔혹한 왕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네 만용이 네 가족을 죽였다.”

“폐, 폐하. 살려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늦어도 너무 늦은 후회.

애석하게도 그의 주군은 자비가 없다.

“목숨으로 갚아라.”

평소와 변함없는, 무미건조한 그 한마디와 함께 그의 검은 더 깊숙이 루블의 심장을 찔렀다. 그러자 그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루블은 그렇게 눈을 뜬 채로, 뒤늦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숨을 거두었다.

에단은 그 마지막을 확인하자 망설임 없이 그에게서 검을 거두었다.

“죽여. 한 명도 빠짐없이.”

“네!”

절대 후환을 남기지 않는 그에게 예외란 없다. 이제 열 살이나 된 것 같은 루블의 막내아들도 결국 친위대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황제에게 반역을 꾀한 루블가는 하루아침에 멸문당하였다.

순식간에 가문이 몰살당한 그곳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릿한 피 냄새가 삽시간에 성안을 가득 메웠다.

“……이번 일에 연루된 호보체의 귀족들 역시 처단하겠습니다.”

그 침묵을 가장 먼저 깬 사람은 다름 아닌 아론.

루카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너만 하랴.”

에단이 힘 들이지 않고 단번에 검을 꽂는 모습을 보며, 작게 휘파람을 분 주제에.

아론은 루카스를 비롯한 친위대들이 이 가문의 몰살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걸 보며 이래서 무인들은 상종할 것이 못 된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새로운 호보체의 영주가 임명될 때까지 이곳 업무는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일거리가 미어터지는데 뭐 어쩌겠습니다.”

루카스와 친위대 입장에서는 이 상황에서도 일이 많아졌다고 투덜거리는 아론이 더 소름 끼쳤지만.

“환궁한다.”

물론, 이 모든 일을 일말의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행하는 그들의 주군이 제일 무서웠다.

피 묻은 검을 대충 아무 곳에 닦아 버리고 그는 그만 발걸음을 옮겼다. 귀찮은 일이 해결되었으니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아무튼 무서운 분이라니까.”

“그러니 저 자리에 계시는 거지.”

“그러니 따르는 거고. 같이 가요, 폐하!”

아론과 루카스는 이내 에단의 뒤를 따랐다.

누군가에겐 잔혹한 왕일지라도 그들에겐 꿈이자 미래인, 그들의 주군이었으니까.

“꾸물대지 좀 마.”

“폐하가 너무 빠르신 거라니까요? 호위하기 힘들다고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이분의 뒤를 지키겠노라고. 그 앞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겠노라고.

그리 맹세했으니까.

“폐하. 돌아가시기 전에 한 곳 더 들러야 하는 거 아시죠?”

“안 가.”

“가셔야 한데도요.”

그렇게 두 사람은 오늘도 에단의 곁을 지켰다.

마치 형제처럼, 마치 친구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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