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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그녀의 사람들 (3/69)

Chapter 2. 그녀의 사람들

“평안한 밤 되셨나이까, 마마.”

“네. 덕분에요.”

사라는 깍듯이 아침 문안 인사를 올렸다. 아침부터 시녀들이 들러붙어 그녀의 몸치장을 도왔다.

로엘은 마음 같아서는 전부 물리고 싶었지만, 하나하나 천천히 바꾸어 가자는 마음으로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그가 아침까지 먹고 나가는 바람에 충분히 바깥은 소란스러웠던 것 같으니까.

“오늘 일정을 알려 주시겠어요?”

“예. 아카시스로 임명된 이상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미 국혼 전 교육으로 어느 정도 카이로스 황실에 대해 공부하셨다면, 이제는 카이로스의 역사와 문화, 전통, 궁정 예법 등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교육이 시작됩니다. 교육은 전담 관원이 배치될 것이며, 그 속도와 일정에 대해서는 마마님에 따라 개별적으로 조정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수준에 따라 조정한다는 거군요.”

사라가 둘러말한 것을 로엘은 거르지 않고 직역했다.

거울을 보던 눈길이 사라를 향하는 순간, 사라는 순간 긴장했다.

로엘이 화를 낸다거나 기분이 상했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무 감정을 담지 않은 그 또렷한 붉은 눈동자가 괜히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그 전에 내 사람을 뽑고 싶군요. 지금 이 인원, 저에겐 너무 과합니다.”

“마마. 아카시스의 궁에 배정될 시녀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혹시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교체할 수는 있으나, 규모를 줄이는 건 고려하심이…….”

“난 내가 기거하는 내 집에 내 사람만 들입니다. 그러니 내 사람인지, 남의 사람인지 모르는 이 수십 명에 달하는 감시의 눈은 필요 없어요. 물리세요. 이건 내가 당신에게 내리는 첫 번째 명령입니다.”

‘명령’.

그 명확한 두 단어에 사라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대답 따위, 있을 리 없다.

그녀는 치장을 해 주던 시녀를 잠시 물리고 정면으로 사라를 마주하였다.

지금 그녀는 사라의 군기를 잡고 있는 거다. 그것도 철저히 예의를 차리며, 우아하고 고고하게.

꼬박꼬박 사라에게 존대를 하는 그녀는 온갖 하대의 말을 내던지는 아리스보다 훨씬 더 무서운 상전의 모습이었다.

그러니 사라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고마워요.”

로엘은 작게 미소 지었다. 역시나 사라는 눈치가 있는 사람이다. 괜히 이 카이로스의 거대한 후궁을 총괄하는 게 아니다.

로엘은 그런 사라가 싫지 않았다. 교과서 같은 예법이 몸에 배어 있어 상전을 깍듯이 모시지만,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는 것을 톡톡히 드러냈다.

그래서 새로 온 그녀에게, 아니 새로이 이곳에 들어오는 수많은 황제의 여인들에게 이곳의 실세가 누구인지, 그들이 잘 보여야 할 상대가 누군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언제 식을지 모르는 황제의 총애 따위와 다르게, 은퇴할 때까지 이곳 살림을 담당하는 사라야말로 진정한 실세인 셈이다.

그 역할을, 카이로스의 내궁에 잔뼈가 굵은 사라는 아주 잘하고 있었다.

“그럼 일단 배정된 시녀들을 모두 집합시키겠습니다. 그중에서 직접 고르시겠습니까?”

“아니요. 배정된 시녀 말고, 각 부서에 가서 직접 보고 결정하고 싶어요. 그 정도 부탁은 해도 되겠지요?”

온화한 미소와 함께 내려진 명령에 그녀의 심중을 알 것 같아 사라는 속으로 작은 웃음을 삼켰다. 애초에 다른 이가 손쓸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거다.

역시나 눈치가 빠른 분이다. 새로 오신, 이 이국의 공주님은.

“예. 마마. 오전 중으로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부탁’과 ‘감사’라는 단어.

사라는 그 오랜 세월 궁전에서 상전을 모셔 왔지만 왠지 처음 듣는 말 같았다.

사라가 잠시 뒤의 시녀들을 보며 고갯짓을 하자 단번에 모든 시녀들이 그녀의 처소에서 나섰다.

몇 십 초 간의 소란스러움 후에, 둘만 남은 처소에 짧은 정적이 감돌았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군요.”

“외람되지만 그렇습니다.”

“하세요.”

사라는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그녀와 마주하였다. 역시나 앳된 얼굴에 선한 눈동자가 아무런 적의 없이 순진하게 그녀를 마주하였다.

참 이곳과는 안 어울리는 분이다.

“마마. 저를 비롯한 다른 시녀장들과 궁인들에게 존칭을 쓰시면 안 됩니다. 저희를 존중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나, 이는 내궁의 서열을 어지럽힙니다. 상전께서는 하대를, 저희들은 존칭을 씀으로서 마마의 위치를 궁인들에게 계속해서 인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마마처럼 어리시고, 이곳의 연고가 없는 이방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로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가 무얼 걱정하는지, 그녀는 바로 알아들었다.

‘뒷배 없는 나이 어린 이방인’이라. 확실히 누구나 무시하기 쉬운 존재다.

“마마께서는 총명하시어, 이미 이곳에 많은 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눈들이 단지 마마를 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그 눈들은 마마의 작은 실수도 놓치지 않을 것이며, 마마의 작은 웃음도 곱게 놔두질 않을 것입니다.”

사라의 말이 낮게 그녀의 방에 울렸다.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또렷히 말하는 사라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그녀를 위한 직언이었다.

어찌 들으면 가르치려 드는 방자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은, 아니 오히려 기분 좋은 걱정의 말들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안위 따위를 걱정해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인물이 그녀를 생각해 주고 있었다.

“마마. 자신을 낮추시면 안 됩니다. 자신을 가벼이 보이시면 안 됩니다. 그럴수록 이용당하고, 그럴수록 멸시당합니다. 마마께서는 이곳 후궁 전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분입니다. 장차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여인이 되실 수도 있는 분이지요. 그러니 부디 스스로를 지키소서.”

다시금 그녀에게 고개를 숙인 사라를 보며, 로엘은 미소 지었다.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었는데, 보면 볼수록 마음이 가는 사람이다.

겉보긴 차갑고 냉정하지만, 속을 알수록 진중하고 따뜻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새겨듣겠습니다.”

기껏 말했더니 또 존칭. 사라는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마저도 알아챈 그녀는 작은 웃음을 뱉었다.

“걱정 말아요. 어린 궁인들에게는 하대를 할 테니까.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시녀장들에게까지 하대하라고 하진 마세요. 그건 내가 자란 내 나라에서는 예의가 아닙니다. 아무리 황실의 일원일지라도.”

“하지만, 마마.”

“그 정도는 내 존중이라 이해해 줘요. 필요한 순간에는 알아서 바꿀 겁니다.”

싱긋 웃는 그녀에게 사라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착해 빠진 거 같으면서도 의외의 고집이 있는 분이다. 그래서 말도 잘 안 듣고, 전혀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그럼, 분부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니 결국 져 줄 수밖에.

솔직히 그녀가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서 잘 해낼 분이라는 걸 사라도 알고 있다.

첫날부터 황제를 잡아 둔 것도, 이렇게 아침부터 시녀들을 정비하는 것도 그녀가 결코 만만한 공주님이 아니라는 방증이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불안했다.

“잘 부탁합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 아름다운 이방의 공주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홀로 덩그러니 떨어진 진 것 같아서.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서 작은 말 한마디라도 보탬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덜 다치길 바랐으니까.

***

“폐하. 루카스 장군이 오셨……. 장군!”

시종장 제롬이 채 보고하기도 전에 루카스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아론이 내미는 서류를 아침부터 결재하고 있던 에단은 그가 들어오든 말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폐하. 폐하. 어제 새로 오신 아카시스님 궁전에서 주무셨다면서요? 지금 성내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넌 그 입 좀!”

“제 말 맞죠? 여신 같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 여신이라니. 그 말 안 듣는 애를 데리고 여신은 무슨.

그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뱉었다. 그답지 않게 너무 대놓고 비웃은지라 이번엔 아론도 의아하단 눈으로 그를 보았다.

“에이, 뭐야. 소문은 소문인가 보네요. 폐하 반응을 보아하니.”

“넌 좀 빠지고. 폐하. 혹시 아카시스님께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저희 쪽에서…….”

“아니. 그런 거 없어.”

애 같아서 그렇지 예쁜 것도 사실이고.

그는 어젯밤 그를 직시하던 당돌한 붉은 눈이 생각났다. 그리고 오늘 아침 햇빛을 받으며 그를 깨우던, 그 미소 역시 떠올랐다.

여명의 공주라.

별명 하나는 제대로 붙였다.

“여신도 아니라면서 그럼 왜 거기서 주무신 겁니까? 한 번도 이런 적 없으셨잖아요?”

“장군. 무례가 지나치십니다. 이건 폐하와 아카시스님의 사생활입니다.”

“아. 알아요, 알아. 나도 웬만하면 이러겠냐고. 오늘 출근했다가 도저히 궁금해서 훈련 도중에 박차고 달려온 거라니까요? 폐하. 이번 한 번만 알려 주세요. 저 이러면 궁금해서 아무 일도 못 해요!”

제롬이 나서서 말려도, 아론의 핀잔이 날아와도 루카스에겐 소용없었다. 이미 눈이 초롱초롱해져서는 밥을 기다리는 개처럼 에단의 답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 커 온지라 에단은 루카스가 이렇게 나온 이상 기어코 답을 들어야 끝난다는 걸 잘 알았다. 결국 그는 펜대를 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건 그도 한번 생각을 해 봐야 하는 일이다.

“여신은 아니었다면서요?”

“절대 아니었지.”

“그럼 아카시스님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던 겁니까? 예를 들어 토르티아 미녀들만의 비법이라든지.”

“전혀.”

“그럼 도대체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신 일을 왜 하신 겁니까?!”

“음……. 그냥 잠이 와서?”

아론과 제롬 역시 그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틀 밤을 새워도 멀쩡하실 만큼 불면증이 일상화되신 분이, 지금 처음 보는 여자와 첫날밤에 잠을 주무셨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 잠이 와서 그랬어. 나도 모르게 자 버려서, 눈떠 보니 아침이었으니까.”

에단은 이제야 수긍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정말 별일 아니다.

그저 새근새근 잠든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잠이 왔고,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자 버렸으며, 눈을 떠 보니 아침이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마치 어제의 밤이, 그에겐 한낱 많고 많았던 밤들 중 하나였던 것처럼.

“……아카시스님께 정말 비법이 있나 봅니다.”

“그러게.”

제롬과 아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여신이어서 묵었다는 답변이 덜 충격일 것 같다.

여자와 사랑을 나누어도 절대 한 침대에서 자지 않는 분이 자기도 모르게 자 버린다니.

단지 그것만으로도 폐하가 아카시스님을 찾아갈 이유는 충분했다.

“심지어 폐하께서 직접 하사품까지…….”

“폐하. 최고시녀장이 부름을 받고 뵙기를 청한다 하옵니다.”

제롬의 말을 끊고 대뜸 시종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각해진 세 사람의 정신을 깨우는 손님이었다.

그들 모두와 안면이 있는, 후궁전의 진정한 실세. 늘 후궁전에만 있는 사라가 오랜만에 본궁으로 발걸음을 하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롬이 들이란 명을 내렸고 사라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며 에단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영광을 비옵니다. 최고시녀장, 사라.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보고를 하러 왔나이다.”

이 생소한 발걸음도 놀라웠지만, ‘명’이라는 단어에도 세 사람은 살짝 의아했다. 폐하께서 직접 최고시녀장에게 명을 내리다니.

그는 절대 일개 후궁의 일 따위에 관여하는 사람이 아니다. 국정 일도 귀찮아하는 분인데 직접 하사품을 챙기고 후궁전의 최고시녀장에게 명까지 내리다니 이건 놀람의 연속이다.

“그럼 아카시스 로엘 님에 대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이래저래 생소한 일들에 세 사람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라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이국에서 오신 붉은 머리의 공주님. 시작부터 범상치가 않다.

***

“그럼 제대로 인사를 해 볼까요? 나는 토르티아의 공주, 로엘 네아레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여전히 존칭인 그녀의 말에 다섯 명의 시녀들이 허리를 숙였다. 로엘은 미소를 지으며 찬찬히 그들을 보았다. 처음 그녀 궁에 배정되었던 이들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계속 안절부절못하는 시녀가 있는가 하면, 보기 드문 통통한 체형의 시녀도 있었고, 상전에게 꼿꼿한 시녀도 있었다.

로엘은 그들 모두가 마음에 들었다.

누가 봐도 그들은 이곳 후궁전에서의 비주류들이었으니까.

“아,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저는 후궁전 궁내부 소속 딜리아라고 합니다. 자, 잘하는 건 특별히 없지만, 온갖 잡일은 제가 다 도맡아 할 수 있습니다. 부, 부지런한 것도 자신 있습니다!”

“그거 마음에 드네요. 저도 깨끗한 게 좋거든요.”

겨우 말을 이어 가는 딜리아를 보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녀가 다섯 중 제일 먼저 낙점한 아이다. 가장 어리고, 가장 작은 아이.

딱 보아도 아직 힘든 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티가 많이 났지만, 그러함에도 제일 뒤에서 제일 부지런히, 그리고 제일 열심히 그녀를 위해 일했다.

로엘은 그 요령 없는 성실함이 마음에 들었다.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저는 요리부 소속 안나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먹는 걸 아주 좋아해서 좀 뚱뚱하지만……. 그래도 요리에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습니다!”

“세상에 먹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죠. 저도 먹는 거 아주 좋아해요. 앞으로 맛있는 거, 안나가 하고 싶은 요리, 맘껏 해 주세요.”

“네, 마마! 저를 믿어만 주시면, 제가 최상의 요리로 매일매일 마마를 기쁘게 해 드리겠습니다!”

안나는 얼굴까지 붉히며 좋아했다. 카이로스 시녀치고 좀 많이 통통한 체격을 보아하니 그동안 먹는 것 가지고 꽤나 괄시를 받은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로엘은 주방 구석진 곳에서 보는 순간 바로 선택했다.

고작 식전 스프 한 그릇을 위해 골라낸 식재료만 무려 두 바구니. 이건 정말 요리를 좋아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열정이었다.

그런 정성이 들어간 요리가 맛없을 리가.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저는 황실부 소속 후궁 재정 담당 페니라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가 상인 출신이셔서 다른 건 몰라도 돈 계산은 확실히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궁의 재무를 완벽하게 관리해 드리겠습니다.”

그다음 차례는 깡마른 몸에 안경을 쓴 페니. 조금 날카로워 보일 수 있는 외모였지만, 똑 부러지는 눈매가 로엘의 마음에 들었다.

페니는 로엘이 선택하기도 전에 먼저 손을 들고 자원하여 그녀의 밑으로 들어왔다.

당당히 그녀의 장부를 내밀면서 맡겨 달라는 반짝이는 눈에 로엘은 웃고 말았다.

순순하게 ‘돈’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내가 가져온 것이 거의 없어 솔직히 관리할 게 별로 없겠지만, 그럴수록 더 잘 부탁해요.”

다음번 차례인, 네 번째 시녀도 똑같이 로엘에게 허리를 굽혔다.

혼인식 준비 내내 그녀의 머리 치장을 담당했던 헤더였다.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저는 궁내부 의복 담당 부서에 소속되어 있는 헤더입니니다. 다른 특기가 있는 건 아니고, 종종 손재주와 눈썰미가 좋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제가 최선을 다해 아카시스님께서 생활하시는 데에 부족함 없이 치장해 드리겠습니다!”

“반가워요. 내가 그런 쪽으로 재주가 전혀 없는데, 아주 잘됐군요. 헤더도 앞으로 잘 부탁해요.”

카이로스 사람들에게는 많이 낯선 그녀의 붉은 머리를 헤더는 옷에 맞추어 아주 멋들어지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의 머리를 만질 때마다 만면에 드러나는 즐거움은 로엘도 웃게 만들었다.

헤더까지 밝은 분위기로 인사를 마치자,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다.

앞선 다른 시녀들과 복장부터가 다른 그녀는 이곳 후궁전을 호위하는 무장시녀, 키로스.

“키로스 3군 소속, 시에라.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시에라는 인사하는 법부터 달랐다. 깊게 허리를 굽히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한쪽 무릎을 굽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확히 기사의 예법이었다.

로엘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시에라를 보는 순간 알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아이가 얼마나 실력자인지.

“스스로 마마를 선택한 이상, 목숨을 걸고 아카시스님을 지키겠습니다.”

긴 팔과 긴 다리의 타고난 신체적 조건에, 단련까지 하여 근육이 붙은 몸.

그녀가 부대에 들어선 순간부터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그녀의 걸음걸음마다 경계하는 시에라의 자세는 하루 이틀의 수련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시에라가 3군 제일 끝에 서 있었음에도 처음부터 눈이 갔다. 그래서 직접, 그 앞까지 가 손을 내밀었다.

“목숨을 거는 건 나를 위한 게 아니에요. 시에라 목숨이 살아 있어야 나도 살 테니까. 같이 오래오래 살아 봅시다.”

“아카시스님을 받들겠습니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시에라는 이내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부드러운 손등과는 달리 거친 로엘의 손바닥에 시에라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녀는 싱긋 웃을 뿐이었다.

“자. 그럼. 이제 서로 인사는 다 한 거 같고. 앞으로 차근차근 서로를 알아 가 봅시다. 우리에겐 함께할 시간이 많으니까.”

고작 다섯. 아카시스의 전속 시녀로 배당하기엔 지나치게 적은 숫자다.

“예. 마마. 마음을 다하겠나이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그 다섯의 목소리는 그녀의 궁전을 가득 메웠다.

마음을 담은 충성 맹세와 형식뿐인 겉치레 인사는 본질부터가 달랐으니까.

“그럼 잘 부탁합니다. 우리 잘 지내봐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로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카이로스에 ‘그녀의 사람들’이 생겼다.

***

“고작 다섯? 너무 적은 거 아냐?”

“그 다섯은, 여느 50명보다 낫습니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더니만 이야기는 가면 갈수록 흥미진진했다. 어느새 아론과 제롬까지 가세해 사라가 들려주는 로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첫날부터 황제를 잡아 두질 않나, 그 이튿날은 배정된 시녀들을 물리고 다시 뽑는다고 하니 이건 여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 아카시스님의 궁전에 남은 그 다섯은 분명 후궁전에서도 골칫거리들이지만, 그건 그 아이들의 진가를 몰라볼 때의 이야기이지요.”

아론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루카스는 얼굴 가득히 호기심과 흥미를 드러내며 신이 났지만, 그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애초에 후궁은 있는 듯 없는 듯 유령처럼 사는 게 폐하께 가장 도움이 되는 거다.

그런데 시작부터 이 난리라니. 올 때부터 사연 많고 구설수 많던 공주님이라 신경이 쓰였는데, 그녀는 사람 자체가 이야기를 몰고 다녔다.

그러니 앞으로가 저절로 걱정되었다.

“우선 딜리아 마테. 대대손손 황궁에 봉사하는 마테 가문의 막내입니다. 그녀의 열두 남매가 황궁의 도처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 사촌까지 헤아리면 황궁에 봉사하는 이만 서른 명이 넘습니다. 덕분에 마테 가문은 이곳 카이로스 황궁 정보의 보고. 딜리아 자체는 특별한 재주 없는 메이드에 불과할지 몰라도. 그 정보력은 후궁전의 누구보다도 뛰어납니다.”

“오호. 소문이 생명인 황실에서 아주 귀한 능력자를 얻은 셈이네요. 좋아요. 좋아. 그다음은?”

“그다음은 안나 토스치. 후궁전에서 가장 뚱뚱하고 가장 둔한 아이죠. 거기에 식탐까지 있어서 요리부에서도 두 번씩이나 좌천을 당해 식자재를 담당하던 아이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요리 실력을 타고났습니다. 웬만한 수석 주방장들에 버금갈 만큼.”

남자로 태어났으면, 황실 수석 주방장 자리도 넘볼 만한 실력자다. 단지 눈치가 없고 자제력이 없어 요리부에서 따돌림을 당했을 뿐, 실력으로 그녀를 비난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입이 짧기로 유명한 황제가 음식을 비운 그릇들은 모두 안나의 손을 거친 것들이다. 이 사실을 황실 주방에서 아는 이들은 다 알 테니 더더욱 안나는 견제받을 수밖에.

로엘이야 이를 염두에 두고 안나를 뽑은 것은 아니나 결과적으로는 그녀는 아카시스로서 제일 중요한 인물을 얻은 셈이다.

인간의 ‘식욕’이라는 것은 아주 근본적인 욕망이라, 음식으로 만족한다면 한 번이라도 발걸음을 더 할 수밖에 없다.

그런 황제의 입맛을 사로잡은 자를 전속 시녀로 두었으니 이처럼 든든한 아군이 또 어디 있으랴. 이래저래 그녀의 선택은 아주 옳았다.

“세 번째는 페니 독스.”

“독스? 독스 상사의 그 독스?”

“맞습니다.”

이번엔 루카스보다 아론이 먼저 반응했다. 아니, 아론뿐 아니라 루카스와 제롬도 바로 그 흔치 않은 성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아론이 쓰고 있는 만년필도, 루카스가 입고 있는 갑옷도, 제롬이 쓰는 시계까지 전부 독스 상사를 거친 물건들이다.

그만큼 독스 상사는 카이로스 전역을 아우르는 최대 상단이니 모르려야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카이로스 2대 상인, 독스 상사의 장녀입니다. 후궁의 살림을 담당하는 황실 재정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계산이 빠르고 영특하여 눈여겨보던 아이입니다. 다만, 그 아이는 출세 욕심이 전혀 없어 자신의 맡은 일 이상을 하지 않는단 단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뺀질거린다는 말이군.”

“정확합니다.”

이해가 간다는 듯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 독스가 다웠다.

아론은 안경을 올려 썼고, 사라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독스 가문은 3년 전 자작의 작위를 얻었습니다. 돈으로 작위를 샀다는 비난이 많았지만 독스가가 카이로스 경제에 끼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적절한 처사였습니다. 물론, 폐하께서 직접 인가하신 일입니다.”

“알고 있어.”

에단은 짧게 말했다. 그도 기억하는 자였다. 고작 자작 지위 하나에 목숨이라도 걸 듯한 눈이었다. 작위에 대한 열망으로 똘똘 뭉친 졸부의 전형. 그 자리에 있었던 수많은 귀족들의 싸늘한 눈초리에도 기죽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오히려 그의 마음에 들었다.

“아. 그 서민 출신 대부호! 나도 알지, 독스 상인!”

“그래. 바로 그 독스의 딸이야. 페니 독스는. 뭐 이제는 자작의 영애지.”

귀족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그를 경멸스럽게 보는 무능한 귀족들보다 카이로스의 경제 규모를 두세 배는 성장시킨 독스가 에단의 입장에선 훨씬 더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자작 후보로 올랐을 때 고민하지 않고 인가를 내렸다. 어디 듣도 보도 못한 공작의 먼 조카 따위보다 백 배, 천 배 나았으니까.

게다가 에단은 귀족들 앞에서 독스에게 작위를 내리는 상황 자체가 그저 웃겼다.

그들이 잘난 듯이 뽐내던 작위가 알고 보니 장사치도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그들을 아주 제대로 조롱한 셈이다.

“독스는 작위만으론 만족하지 않았는지, 바로 자기 딸을 황궁 시녀로 들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3년 만에 페니 독스는 황궁에 들어왔지요. 물론 목표는 폐하의 여자가 되는 것으로요.”

“그 아비는 그럴지 몰라도 적어도 페니는 아닙니다.”

잠시 잠자코 있던 사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페니는 황궁 사람이 되는 것에 마음이 있는 아이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고 싶었겠지요. 그러니 이곳에 들어와서도 궁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겁니다.”

똑같은 봉급을 받아도 페니는 그 돈을 아주 신기하게 굴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몇 달만 지나고 보면 페니는 동기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은 이자만으로도 한 달치 봉급이 되었고, 그 돈으로 물건을 사서 각 부서에 팔았다.

황궁 감사에서 페니에게 한두 번 경고를 준 것이 아님에도, 페니는 그 감사를 요리조리 피해 보란 듯이 시녀들을 상대로 대부업과 밀수업으로 돈을 벌었다.

그런 페니가 안정적인 본점으로 택한 곳이 바로 새로 오신 아카시스, 로엘의 처소인 셈이다.

“아카시스께서는 다른 비마마들에 비해 지참금이 압도적으로 적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적지요. 그런 와중 페니 독스가 아카시스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뒷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아비의 성향상 물심양면으로 아카시스님을 뒷받침할 테니까요.”

에단의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제롬은 살짝 에단의 표정을 살폈다.

언제나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으나, 묘하게 그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제롬은 그것만으로도 새 아카시스님의 이야기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이 무엇이 되었든, 그분은 이미 황제의 마음에 들었다.

“이거 갈수록 흥미진진하잖아? 그다음은? 빨리빨리 좀 말해 봐요!”

“그다음은 헤더 폴리탄. 헤더 역시 남작 가문 여식으로, 그 어머니가 사교계에서 유명한 파티 마담입니다. 집에서 보고 배운 만큼 손재주가 좋아, 꾸미는 것을 잘하지요. 그래서 주변 시녀들에게 화장법과 머리 손질하는 법을 가르치곤 했습니다. 당연히 옷을 고르고 만드는 재주도 뛰어납니다. 겉보기와 다르게 그런 쪽으로 그다지 관심이 없는 마마께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아론은 이야기를 들을수록 하나, 하나 그녀의 부족함이 채워져 간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론은 그녀의 곁에 사람이 모인다는 것.

그것도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시에라 칼슨.”

“칼슨? 내가 아는 그 칼슨?”

“네. 대장군께서 아시는 그 칼슨 맞습니다.”

카이로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개국공신 무인 가문 ‘칼슨’.

대장군만 넷을 배출하였고, 전장에서 공을 세운 기사장도 한둘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기사를 길러 내는 가문인 만큼 매년 열리는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놓친 해가 손에 꼽히고, 장군 승급 시험에서도 언제나 수석을 독차지했다.

그만큼 칼슨가 스스로도 자부심이 강한데, 바로 그 가문의 딸이 로엘을 택했다.

“칼슨가에 딸이 있었어?”

“워낙 남성 중심적 집안이라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당연히 딸도 있습니다. 대개 조용히 데릴사위를 들이지요. 이렇게 시녀로서 궁에 들어오는 케이스는 꽤 드뭅니다.”

사라가 처음 시에라를 만난 것은 징계 심판 때문이었다.

키로스는 대체로 그들만의 조직 체계가 따로 있어서 사라도 되도록 관여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시에라 혼자 키로스 신입 전부를 쓰러트린 사건이 발생하니 안 나서려야 안 나설 수가 없었다.

그때 시에라를 처음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 아이는 이곳에서 오래 못 버티겠구나.’라고.

“칼슨가의 이름이 아깝지 않을 실력자입니다. 다만 성격이 그다지 유연하지 못하여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시에라는 키로스로 들어온 후부터 지금까지 그 어떤 상전도 받들지 않습니다.”

“응? 그게 뭔 소리야? 받들지 않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자신의 주인은 자신이 선택한다는 가문의 신념하에, 후궁전의 비마마들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직접 발언하여 아리스 님께서 크게 노하셨습니다. 그래서 3군으로 좌천되어 지금까지 2년을 허송세월 보냈지요.”

“그런데 새 아카시스님을 택했다?”

“예.”

그것도 고민도 안 하고 단번에.

아마 시작은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라는 점에 흥미를 가졌을 거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시에라가 로엘을 택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로엘을 보는 순간부터 눈을 반짝였다.

마치 자신의 주군은 단번에 알아본다는 칼슨가의 전통답게.

무엇보다도, 그 많은 키로스들 중에서 제일 뒤에 서 있는 그녀에게 바로 다가가 손을 내밀던 로엘의 그 행동.

내 사람이 되어 달라던 그 부드러운 미소에 마음을 굳혔겠지.

바로 ‘이분’이다, 하고.

“후궁전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간 여인이 한둘이 아니지요. 그래서 더더욱 스스로를 스스로가 지켜야 하는 곳입니다. 어떠한 분이시시든, 폐하의 총애만으로 날아오는 칼을 막을 수 없으니까요.”

“시녀장. 무례하오.”

“송구합니다, 폐하. 시정하겠습니다.”

조금 과했던 사라의 말을 바로 제롬이 제재했다. 물론 사라 역시 바로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하늘 같은 황제 폐하시여. 폐하의 명을 받고 아카시스 로엘 네아레스 님에 대한 정리 보고를 드립니다. 감히 미천한 제가 본 아카시스님은 영특하시어 사리분별 빠르시고, 상황을 파악하여 습득하시는 능력이 뛰어나십니다. 온화한 성격으로 아랫사람을 존중해 주시다가도, 필요할 때는 웃전으로서 위엄을 보이실 줄 아시어 그 누구도 쉬이 마마를 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라의 목소리는 잔잔히 그의 집무실을 울렸다. 에단은 그런 사라의 말을 그저 듣기만 했다.

“허나 폐하, 그분은 카이로스의 후궁을 너무 모르십니다.”

사라는 로엘을 생각했다. 자신에게 존대를 하시는 어린 공주님.

온화한 미소에 마음을 뺏기다가도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어쩌다 저리 여리고 고운 분이 이런 곳에 떨어졌을까 싶어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줄 아는 그분은 도리어 그 사람들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속고 속이고, 배신하고 배신당하고, 죽이고 죽어 가는 곳이 카이로스의 후궁입니다. 아무리 그분이 강인하고 영특하다 한들 폐하. 그분은 그 위험 속에 홀로 계십니다.”

사라가 이리 말하여도, 절대 황제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건 황제의 수많은 여인 중 한 사람으로서 그곳에 있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라는 더더욱, 황제께서 처음 관심을 보이시는 그분이 그곳에 얼마나 위험히 계시는지 알리고 싶었다.

황제께서 그분을 지켜 주는 데 한계가 있다 해도,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써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부디 그 사실을 잊지 마소서.”

사라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건 사라의 진심이다.

“그대답지 않군.”

나지막이 그가 말했다. 사라가 들어온 이후 처음 나온 황제의 목소리였다.

얼음장 같기로 유명한, 카이로스 황실의 최고시녀장 사라. 그녀는 그 어떠한 황제의 여인도 달리 대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우했다. 아무리 뇌물을 바치어도, 아무리 살갑게 대해도 절대 곁을 내주지 않는 그녀는 그 누구의 편도 들어 본 적 없다.

그런데 그런 사라가 고작 아카시스가 된 지 이틀이 되신 분을 이렇게 대놓고 두둔하다니.

“아카시스가 가장 중요한 사람의 마음을 얻었군.”

그는 피식 웃었다. 엷게 미소가 번지는 그의 얼굴을 살짝 보며 사라는 생각했다.

에단의 말대로 그분은 가장 중요한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이 나라에서, 이 황궁에서 가장 얻기 힘든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아카시스 로엘 마마를 성심을 다해 모시겠나이다.”

그러니 사라는 더더욱 그분을 지켜 드리고 싶었다.

저 태양 같은 분을 웃게 만들 수 있는 분이, 드디어 긴 시간을 지나, 멀고 먼 곳으로부터 오셨으니 말이다.

***

“뭐야. 엄청 작네, 여기.”

애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다짜고짜 세룸니르에 들어가는 아리스의 뒤를 따랐다. 기별을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애나의 말을 듣지 않고 기어코 아리스는 로엘을 보러 세룸니르에 친히 행차를 하셨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무례한 손님에 로엘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딱 보는 순간 견적이 나왔다.

“뭐 해? 인사 안 해?”

첫 대면부터 하대하는 말투에 사람을 아래위로 훑는 무례한 시선. 거기에 마치 자신이 웃전이라는 듯 구는 태도까지. 참 누구를 연상케 했다.

로엘은 싱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토르티아의 제1공주 로엘 네아레스라고 합니다.”

조금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녀는 정확히 아리스의 눈을 마주하며 입으로만 인사했다. 그 당당하기도 한 직시에 순간 아리스와 애나는 당황했다.

아리스를 보면 일단 숙이고 보는 후궁전의 다른 비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비단 이곳 후궁전뿐 아니라 어디를 가든, 일단 몰브가의 외동딸이란 것 하나로 굽히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카이로스에 온 지 이제 겨우 이틀 된 이방인이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이건 결코 아리스가 예상했던 그림이 아니다.

“먼저 통성명을 했으니 이번엔 그쪽 차례군요.”

“그, 그쪽?! 야!”

“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녀는 당황하는 아리스에게 좀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얼굴이 붉어지다니, 어리기도 하여라. 이 정도로 그녀의 군기를 잡으려 한 아리스의 같잖은 마음이 우스웠다.

그녀를 지독히도 괴롭혔던 사촌 에리카에 비해선 이건 귀여운 수준이다.

“마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이분은 대 카이로스의 개국공신 몰브가…….”

“어디 시녀가 아카시스의 말을 끊는 것인가. 시녀는 예를 갖추라.”

애나가 나서려는 말을 로엘은 단번에 끊어 버렸다. 순식간에 정색하는 그녀의 표정과 낮게 깔린 목소리에 순간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뒤에 있었던 그녀의 시녀들도 놀랐다. 처음으로 들어 본 그녀의 하대였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것만으로 이분이 엄연히 일국의 공주 출신이라는 것이 번뜩 상기되었다.

온화한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카리스마에 애나는 바로 긴장했다.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깊게 허리를 숙이는 애나를 보며 아리스는 순간 울컥했다. 애나가 숙이는 모습이 마치 자신이 숙이는 것과 같아 보여 아리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제대로 인사할 마음이 생기신 겁니까?”

“아니? 내가 왜 너 따위에게? 너 나 몰라?”

“저를 모르셔서 인사를 받으러 오셨나요?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또 한 번 싱긋. 예쁘게도 웃는 로엘을 보며, 뒤에 있던 그녀의 시녀들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시녀들 사이에서도 가장 악질이라 불리는 아리스 몰브였다. 작은 꼬투리에도 세상이 뒤집어진 것처럼 짜증을 내는 통에 다들 웬만해선 그녀의 시중을 들려 하지 않았다.

모든 시녀들이 나름 작위 있는 집안의 여식으로서, 엄격한 심사 끝에 궁에 들어온 자부심 있는 황궁의 일원임에도 항상 아리스는 그들을 몰브가의 하녀 부리듯 대했다. 그러니 평판이 좋을 리 없지.

그런 아리스를 이렇게 대놓고 면박을 주고 있으니 그녀들뿐 아니라 그 밑의 시종들 역시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주인 허락도 없이 밀고 들어오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말을 놓고, 심지어 제대로 된 통성명도 안 할 거라면 그만 나가 주세요. 내 궁에서.”

“너……!”

툭하면 시녀들을 내려치는 버릇대로 아리스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분을 이기지 못해 붉어진 얼굴로 다짜고짜 그녀를 치려던 손은 시에라에 의해 막혔다. 큰 키로 아리스의 손목을 낚아채자 바로 매서운 눈이 시에라를 향했다.

“고정하십시오.”

“막아? 감히 ‘종’ 따위가?”

망설임 없이 아리스는 반대쪽 손으로 시에라의 뺨을 내리쳤다.

로엘을 막아서는 것이 아닌 한 시에라는 그 손찌검은 막을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맞고만 있었다.

시에라의 양 볼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물론 시에라는 그럼에도 ‘아’ 소리 한 번을 내지 않았다.

“종 주제에게 어디 감히!!”

그 태도도 마음에 안 들었는지 또다시 아리스의 손이 올라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엘이 그 손목을 잡아챘다.

“종 따위는 아니니, 막아서도 되겠지요?”

그녀의 입가에서도 형식적인 미소가 사라졌다.

아니, 대놓고 화났다는 것을 드러내듯 차갑게 식은 붉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놔! 못 놔!”

가녀린 팔에 비해 그녀의 악력은 아리스를 훨씬 뛰어넘어, 아리스는 아무리 힘을 주어도 좀처럼 로엘의 손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버둥거리는 모습이 꽤나 안쓰러웠다.

“놓으라고!”

원체 아리스가 앞뒤 안 가리고 들어온지라 문이 활짝 열린 덕분에 이미 후궁의 구경꾼이란 구경꾼은 실컷 모여 들었다.

아리스가 새로 오신 아카시스님 처소에 갔다는 것 자체가 빅 뉴스였는데 바로 이런 드라마가 펼쳐질 줄이야.

첫날, 첫 대면부터 아주 흥미진진했다.

“네가 천지분간을 못 하고 아주 날뛰는구나! 어디 미개한 나라에서 팔려 온 공주 주제에 감히 나에게 맞서려 들어? 네 주제를 알아!”

“내 주제가 다른가? 아카시스.”

결국엔 로엘의 입에서도 존대가 사라졌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모든 이들은 경악했다.

천하의 아리스 몰브에게 반말이라니! ‘아카시스님’이 아닌 ‘아카시스’라니!

“아카시스 아리스. 그대의 출신이 어떠하건, 그리고 내 출신이 어떠하건 결론은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아카시스라는 겁니다. 그러니 다시는 내게 이런 무례를 저지르지 마세요. 내 나라 토르티아였으면, 진작 그 아름다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겁니다. 당신 말대로, 북방의 민족은 미개할 정도로 자비가 없으니까.”

살짝 한 걸음 다가가 아리스의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리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안 그래도 낯선 붉은 머리인데, 그 붉은 눈동자마저 그녀를 직시하니 저절로 소름이 돋았다.

“한 번만 더 내 사람을 건들거나, 내 영역에 허락 없이 침범한다면 그때는 이렇게 곱게 말로 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북방의 토르티아 민족답게 대우해 드리지요. 그러니 조심하세요. 아카시스.”

덜덜덜.

불끈 쥔 아리스의 주먹이 떨렸다. 이제는 눈꼬리에 눈물마저 걸렸다.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대우에 너무 분하고 화나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더더욱 화나는 것은 그런 아리스에 비해 로엘은 너무도 여유롭다는 사실이다.

“로엘 마마. 황제 폐하로부터 하사품이 내려왔습니다.”

거기에, 하나 더. 아리스의 분에 정점을 찍는 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부디 황제의 친서를 받드소서.”

황제의 최측근, 시종관 제롬. 그가 직접 황제의 칙명 아래 로엘의 세룸니르를 방문했다.

그것도 수도 없이 많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로엘은 한숨을 삼켰다. 이거 일이 갈수록 커져 가고 있었다.

“세상에! 마마. 이거 장난 아닌데요?!”

“지금 줄이 끝이 안 보여요?”

아. 신고식 한번 거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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