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토르티아의 공주님
에단은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패다.
다른 이도 아닌 토르티아의 공주가 토르티아를 손수 바치겠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는 말문이 막혔다.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 이 당돌한 공주님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거칠게 그녀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그녀는 순순히 그에게 끌려갔다.
가까워진 서로의 거리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태양을 닮은 금빛 눈동자와 노을을 닮은 붉은 눈동자.
흔들림 없는 두 눈에 서로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허언은 곧 죽음이다.”
“저는 허언을 한 적 없습니다.”
“망상에 빠져 지껄이는 말도 허언이야.”
그는 정색했다. 이런 식의 허무맹랑한 농담에 웃어 줄 만큼 그는 너그러운 황제가 아니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목을 꺾을 것 같은 차가운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그녀가 아무리 다짐을 해도, 어쩔 수 없이 저절로 긴장됐다. 온몸이 굳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그녀는 끝까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설 거였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겠지.
“허언 아니에요.”
그녀는 한 번 더 명확히 그의 눈을 보고 말했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을 꽉 잡으며, 그녀는 또렷이 제 진심을 전했다.
에단은 그런 그녀를 잠시 말없이 보았다. 안쓰러울 정도로 미미한 악력에, 뼈만 앙상한 작은 손이 그의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꼭 쥐고 있었다.
감히 겁도 없이 황제의 몸에 손을 대다니.
이 여자는 뭐가 이렇게 쉬운지 모르겠다.
“저를 죽일지 살릴지는 제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결정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작은 손이 주는 온기가 따뜻했다. 그의 손에 반은 될까 싶을 정도의 작은 손이다. 어디 손뿐이랴. 그녀의 체구 자체가 그의 반도 되지 않을 거 같다.
그저 작고, 그저 여렸다. 그런데도 이렇게 그에게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저는 북방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서 검을 배웠고, 어머니를 따라 숲속에서 글을 익혔어요. 마차를 탄 시간보다 발로 걸은 시간이 더 많고, 토르티아 성에 있는 시간보다 국경 지역을 돌아다닌 시간이 더 많습니다.”
그녀는 흥분하지도, 떨지도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그에게 ‘설득’을 했다.
왜 그녀가 그에게 필요한지, 어떻게 그녀가 그를 도울 수 있는지, 그리고 무슨 수로 그녀가 토르티아를 그에게 바칠 수 있는지에 대해.
“토르티아의 정기, 위대한 산맥 타르타니를 너머 북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북방을 아는 북방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왕래가 없는 중부의 사람들은 절대 거친 산맥과 불규칙한 지형, 사나운 날씨의 타르타니를 넘을 수 없어요. 그러니 이 기나긴 역사 동안 중부의 어느 나라도 북방을 정벌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요. 아무리 많은 식량과 군사를 데려간들 산을 넘지도 못하는데 어찌 정벌을 한단 말입니까? 중부는 숲과 산에 둘러싸인 토르티아의 붉은 성벽을 보지도 못한 채 늘 뒤돌아서야 했습니다.”
또박또박. 참 잘도 말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생각했다. 참 겁도 없고 망설임도 없다고.
“위대한 황제시여. 당신은 그 전철을 밟으시려 하십니까?”
그 눈빛. 행동. 말. 모든 것이 하나같이 아슬아슬했다.
심지어 그것이 이곳 카이로스에서,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전혀 모른 채로 말이다.
“토르티아는 카이로스의 북방 정벌의 최대 걸림돌. 그런 토르티아를 정복하는 데에, 카이로스 그 누구도 저보다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제가 보고 들은 북방에 관한 모든 것, 그 어떤 것도 아낌없이 당신께 드리겠나이다. 그러니 폐하. 부디 저를 이용하여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대의를 이루소서. 저 높은 산맥 너머의 천하를 통일하소서.”
그 무모함에 눈이 갔다. 그 위태로움이 신경 쓰였다.
에단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 속에 간절함이 깃들었다.
목숨을 걸었다는 말. 그 또한 허언이 아닌가 보다.
“……그리하여 네가 얻는 것이 뭐지?”
“토르티아의 멸망.”
또다시 망설임 없이 바로 나온 단호한 그 대답에 에단은 피식 웃었다.
“토르티아의 멸망이라.”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가 왜 조국의 멸망을 바라는지 모를 만큼 그는 어리석지 않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를 응시했다.
이 겁 없는 공주님은 인질로 끌려온 게 아니다. 일부러 이곳, 카이로스에 온 거다.
그를 이용해 부모의 복수를 하러 이 머나먼 이국의 땅까지 온 거다.
“나에겐 너무도 쉬운 일이지. 너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녀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그를 올려 보았다. 그러지 않아도 산만 한 큰 키는 더 커 보였고, 바다 같은 어깨는 더 넓어 보였다. 로엘은 그의 그림자로 온전히 가려진 자신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그 무엇인들 이 남자가 할 수 없을까.
한 나라의 멸망을 이리도 가볍게 비웃을 수 있는 사람.
오직 대 제국 카이로스의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만이 가능한 일.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남자이기에 그녀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무모한 도박을 택했다.
“어리석구나. 네 부모가 그곳에서 억울하게 죽었다 한들, 그곳은 어쩔 수 없는 너의 뿌리. 네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닮은, 너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돌아갈 조국이 없다는 것. 그건 그녀의 최후의 수단을 그녀 손으로 버리는 일이다.
아무리 다른 나라에 팔려 오듯 왔다 하더라도 그녀가 토르티아의 공주라는 것은 이곳에서는 힘이요, 배경이 되어 줄 터. 멸망한 나라의 왕족이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지, 이 철없는 공주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도 그 길을 기꺼이 택할 만큼 한이 깊거나.
“내 앞에서 이렇게 지껄일 수 있는 것 자체가 네가 토르티아의 공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토르티아의 멸망을 바란다? 네 백성들은 이렇게 철없는 너라도 여전히 공주라 생각하고 안타까워할 테지. 네 백성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
하. 백성.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와 버렸다.
백성이라니. 이 어찌나 공허한 단어이던가.
“폐하.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당신 같은 타고난 왕재도 아니고 아버지처럼 비범한 인재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지극히 평범하여 오로지 제가 받은 것만을 기억합니다. 저는 받은 게 없어, 그들에게 줄 것도 없나이다.”
정이 뚝뚝 떨어지는 냉정한 말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또 한 번 바뀌었다.
그 공허한 눈에는 아주 작은 감정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돌멩이를 보듯 그녀는 그녀의 나라에도, 그녀의 백성에게도, 심지어 그녀의 안위에도 무관심하였다.
그만큼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바로 ‘복수’.
“폐하. 백성은 바람과도 같습니다. 결코 붙잡히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요. 바람의 방향대로 그저 나부낄 뿐,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매하고, 그래서 어리석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그토록 그들을 지키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
야속하리만치 언제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다.
“그런 그들은 지켜 주려 했던 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그들은 무얼 하고 있었나요? 내 어머니가 피를 토하며 죽어 갈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나요?”
그들이 그녀의 아버지를 얼마나 칭송했던가. 평생을 전장에서 백성을 위해 헌신하던 그야말로 진정한 왕재라고 얼마나 떠받들었던가.
그런 그녀의 아버지가 그리 허무하게 죽었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서서 애도하지도 않았다. 그저 숨을 죽이고 침묵을 지켰다.
그저 또 다른 새로운 왕께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들은 또다시 내일을 살아갔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세상이 무너졌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백성? 개나 물어 가라지.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 그에게 ‘거래’를 제안하던 바로 그 눈. 에단은 이번에도 그 붉은 눈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후자인가 보다.
조국이 없는 설움을. 패망국의 공주라는 비참함을 다 안고서라도 그렇게 이 한을 풀고 싶나 보다.
“폐하. 토르티아를 지도에서 지워 주신다면, 그 붉은 대지의 붉은 성을 피로 물들게 해 주신다면, 나의 황제시여. 저는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나이다.”
이건 좋지 않다.
너무 위태롭고 위험하다.
“부디 저의 손을 잡아 주소서.”
그래서일까. 에단은 그 앞에 내밀어진 그녀의 손을 결국 잡고야 말았다.
이성이 무어라 계산하고 따지기 전에 손이 먼저 나가 그 작고 따뜻한 손을 잡았다.
그런 그의 선택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그녀는 고민 없는 그의 응답에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
“……거래가 성립된 건가요?”
“적어도 오늘은.”
그제야 그녀는 안도하였다는 듯이 작은 숨을 토해 냈다.
지금까지 잔뜩 긴장한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대답은 너무도 쉬웠다. 마치 오늘은 날씨가 좋다는 말처럼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군. 목숨을 걸고 원하는 바를 얻었는데도.”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그런 게 중요한가?”
“아니요.”
그는 옅은 미소 지었다. 이래저래 따지지 않는 그녀의 대답이 좋았다. 한 치의 꾸밈없는 그녀의 올곧은 눈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계속 듣고, 계속 보고 싶었다.
그는 느릿하게 그녀의 손을 들어, 살며시 그녀의 손등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글쎄. 변덕 정도로 해 두지.”
그 작은 행동이 뭐라고 로엘은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녀의 하얀 손등에 입을 맞추며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 빛나는 눈에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금빛 머리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운 이 남자.
‘태양의 황제’라는 이름이 이토록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밑에서 그의 모습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특유의 낮은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카이로스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 미소에 그녀 역시 미소 지었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여름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아무리 이해득실이 잔뜩 개입된 형식적인 결혼이라 하지만, 엄연히 부부의 연을 맺은 첫날밤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거리는 지나치게 멀었다.
에단은 오히려 아까보다 훨씬 더 멀찍이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그럼 무얼 해야 합니까?”
그에게 겁도 없이 맞먹을 때는 언제고 지금은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그는 순간 힘이 빠졌다.
“남녀가 초야에 무얼 하는지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나.”
“그런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열 살짜리 애인 줄 아십니까.”
“그러니 더 심각한 거지.”
영특하다더니 퍽이나. 에단은 괜히 사라의 말이 기억나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그러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녀는 알아서 그의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 능숙하게 그 앞에 앉아, 그의 빈 잔을 채웠다.
걸음걸이부터 포도주 병을 들고 술잔을 채우는 행동까지. 모든 것이 예법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그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기품이 흘러나와, 에단은 속으로 웃었다. 산에서 길러진 야생마인 것 같더니만, 어쨌거나 뿌리는 왕가의 종마라는 거다.
“능숙하군.”
“아버지께서 애주가셨거든요.”
에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면, 능숙하다는 그 말이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다.
가슴이 다 드러난 실크 원피스 하나 겨우 걸치고 술을 따르는 그녀의 모습은 남자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을 가능하게 했으니까.
“토르티아에서는 부부가 하루를 마치며 반주를 나누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도 술을 마실 수 있는 성인이 되면 종종 합석을 하지요. 아버지는 저를 전장에도 데리고 다니실 만큼 아끼셔서 그런 아버지 곁에서 종종 술을 따랐습니다.”
그녀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쭙잖은 아첨도, 위선적인 가식도 없는 그녀의 이야기는 듣기에 편했다. 그리고 마음도 편했다.
투명한 물처럼 맑은 눈동자가 그녀가 지금 아무것도 숨기고 있지 않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늘 가면을 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에게 그보다 더 마음 편한 일은 없다.
“토르티아 사람들이 유독 술이 센 건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몰라요. 매일같이……. 으왓!”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가는 허리가 쉽사리 잡히고, 조금 힘을 주자 그녀는 저항 없이 그의 품으로 떨어졌다. 향유 너머로, 달달한 그녀의 체취가 느껴졌다.
느릿하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도, 그녀는 별달리 놀라지 않은 눈으로 그의 품에서 그를 올려 보았다.
“옷을 벗어야 하는 건가요.”
“입을 다물어야 하는 거다.”
“……!”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그녀가 놀라 눈이 동그랗게 뜨는 것이 느껴졌다.
보통은 눈부터 감는 것이 정상이다만, 이 이상한 여자는 말똥히 눈을 뜨고 그와 끝까지 눈을 맞췄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떠도는 것이 다 보였다. 그는 피식 웃었다.
감히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니.
“응!”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감싸고 좀 더 깊숙이 혀를 밀어 넣자 그녀는 작은 신음을 뱉었다.
뜨거운 혀가 얽히고 낯선 감촉이 목 끝부터 간지럽게 느껴지자 그녀는 그의 옷자락을 꼭 쥐고 눈을 감았다.
“숨 쉬어.”
“쉬게 해 줘야 쉬죠!”
“코로 쉬는 거야.”
“어떻게 하는…… 읍!”
알려 주지도 않을 거면서!
그녀의 뒷말은 채 나오지 못하고 그가 각도를 바꾸어 다시 그녀의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입술이 얼얼하고 열기가 올라, 온몸에 힘이 풀린 그녀는 겨우겨우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버텼다.
“흐응.”
참다 참다 새어 나오는 새된 소리는 꽤 야릇했다. 잠시 숨을 쉴 틈을 줄 때마다 가늘게 뜨는 열기 어린 눈도 색기가 가득했다.
그래서 그 역시 열이 올랐다. 원체 애 같은 느낌이라 조금 골려 주려 한 것인데, 의외로 그녀의 몸은 남자를 유혹할 줄 알았다.
모든 반응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정확히 정답이다.
“읏!”
뿐만이랴. 얇은 천 너머로도 느껴지는 풍만한 가슴, 부드럽다 못해 녹을 것만 같은 뽀얀 피부. 다가설 때마다 느껴지는 달콤한 향기에 아기마냥 뜨거운 체온까지.
그는 제 아래에서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보며, 심박수가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 이거 위험하다.
그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자, 잠시만요.”
“다 안다고 했으니, 불만 없겠지.”
“알아요, 알아. 아니까 불만 있는 거라고요!”
“불만?”
순간 에단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그녀는 대놓고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시작도 전에 까인 기분이라 에단은 순간 자존심이 확 상했다.
그에게 안기지 못해 안달인 여자가 줄을 섰고, 한번 안겼던 여자는 또 안기지 못해 애걸복걸한다는 걸 일일이 설명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감히 거부를 해?
에단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바로 그 위로 올라섰다.
“안겨 보고나 그런 소릴 해.”
에단은 거칠게 상의를 벗어 던졌다. 언뜻 보이던 맨살이 빛 아래에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로엘은 저절로 얼굴을 붉혔다.
확실히 지나치게 잘난 몸이다. 무슨 조각을 빚어 놓은 듯 정갈한 근육에 남성미를 보여 주는 굵은 골격들, 그리고 그녀 못지않은 깨끗하고 하얀 피부까지.
로엘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맨몸을 뚫어지게 보았다.
“엄청 예쁜 몸이네요.”
“지금 나한테 한 소리인가?”
“전 칭찬이었는데…….”
“조금도 기쁘지 않아.”
그녀는 침대에 누워 그에게 갇혀 있는 와중에도 긴장하지 않았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오히려 손을 뻗어 먼저 그의 가슴을 만지려 하자, 그가 대뜸 그녀의 손을 세게 잡았다.
“황제의 몸에 함부로 손대는 것이 아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애초 남자의 몸에 먼저 손대는 게 아니야.”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충분히 다른 사내에게도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댈 게 뻔했다. 공주로만 살아와서 그런지, 이 나이가 되도록 전혀 그 위험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에단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삼켰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갈 길이 막막했다.
“잠깐만요.”
자연스럽게 그녀의 옷 속으로 들어가려던 그의 손이 바로 잡혔다.
에단은 진심으로 짜증이 올라왔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그녀는 분명 그의 애를 태우고 있었다.
“손대지 말라고, 방금 말했던 거 같은데.”
“드릴 말씀이 있어요.”
“충분히 들었어.”
“아니, 아니! 이건 다른 거예요!”
그녀가 뭐라 하든 말든 그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에 걸쳐져 있는 거추장한 숄을 벗겨 냈다. 하얀 어깨가 드러나고 뼈밖에 없는 깊은 쇄골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가 조금만 힘을 써도 이리저리 잘만 움직여지는 그녀는 정말 가벼웠다. 숱한 여자들을 안아 봤지만,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말랐다.
“토르티아는 피죽도 못 먹을 정도로 힘든가? 말라도 너무 말랐잖아.”
“다른 왕족들은 안 그래요. 제가 워낙 천덕꾸러기 취급받아서 그런 거지.”
그녀는 태연히도 말했다. 절대 태연할 수 없는 이야기를.
잠시 말이 없어진 그에게 그녀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는 절대 동정이라든가 연민 같은 감정을 내비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덤덤한 그녀의 대답에 덤덤한 반응을 내비칠 뿐이다.
로엘은 오히려 그의 그런 건조한 반응이 더 좋았다.
“어차피 다 알고 계셨으면서.”
“그렇게 웃지 마.”
유난스러운 대응으로 더욱 그녀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흘러 내려온 그의 머리칼을 쓸었다.
“폐하. 저는 당신께 그러한 천덕꾸러기가 되고 싶지 않아요.”
잔잔히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그래서 당신의 여자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위험 가득한 말이 들렸다. 이번엔 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정색하는 그의 눈동자에도 그녀는 오히려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반응 역시 정답.
이번에도 그저 건조하기만 했다면 조금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수많은 여자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들과 이유 없는 치정으로 제 시간과 신경을 쏟고 싶지 않습니다. 괜한 구설수가 되어 당신의 길에 누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당신께 도움이 되는 한 사람의 충신이 되겠나이다.”
그를 직시하는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건 순수한 그녀의 진심. 그녀는 지금 ‘황제의 여자’가 되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
하. 충신.
그의 입에서 짧은 실소가 나왔다.
황제의 여인들의 추악한 치정들. 그 치정의 끝에는 항상 피바람이 있었다.
그 역시 진절머리 날 정도로 보아 왔고 겪어 왔다. 그래서 그녀가 무얼 걱정하고 무얼 두려워하는지도 잘 안다. 그리고 이해도 된다. 그녀가 그의 여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이.
하지만, 그러함에도 기분이 묘했다. 아니 화가 나려 했다.
“충신이라.”
그는 거칠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상체가 가볍게 들리고, 그녀는 정면으로 그와 마주 앉았다.
그는 꽤나 차가운 눈으로 변해 있었다.
“제가 기분을 상하게 해 드린 건가요.”
“아마도.”
그녀는 잠시 한숨을 삼켰다. 그에게 꽤나 솔깃한 말일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다.
“카이로스의 선대 황제께서는 한 명의 칼라리엔과 세 명의 아카로이. 그리고 아홉 명의 아카시스와 스물여덟 명의 귀인을 두셨지요. 자손이 귀한 카이로스 황실에서 성인이 된 장자는 고작 둘. 하지만 그전에 죽어 나간 황자와 황녀는 몇이었나이까? 그로 인해 당신의 모후께서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으며, 당신은 얼마나 많은 형제의 죽음을 보아야 하셨습니까? 그 상처를 감히 어느 누가 헤아리겠습니까.”
“닥쳐라. 더 이상의 무례는 용서치 않겠다.”
그녀의 팔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는 팔 따위 금방이라도 부러트릴 것 같은 강한 힘에 그녀의 표정이 저절로 일그러졌지만,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라도, 아무 이유 없이 변할 수 있는 그 얄팍한 감정에 저의 목숨을 걸고 싶지 않습니다. 그 허망한 마음에 해서 안 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영원할 거라는 덧없는 기대에 실망하여 아프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단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는 타당한 이유들. 그녀는 더 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당신의 여인이 아닌 신하로서, 평생 곁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이 여자, 아주 영민하다. 그러면서도 순수하다.
그러니 얼마나 영악한 계집인가.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후회할 텐데?”
“그 또한 제 몫입니다.”
그의 품 안에서 이리 몸매를 훤히 드러내며, 따뜻한 체온을 전하고, 달콤한 향기를 내뿜으며, 간질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면서도 안지 말라?
에단은 이 여자가 무얼 노리는지 잘 안다.
힘으로 한다면, 그는 얼마든지 그녀를 안을 수 있다. 여기서 그가 억지로 그녀를 품는다고 한들 그 누가 이 방에 감히 발이라도 들일까. 하지만 그러함에도 그는 이미 그녀를 안을 수 없게 되었다.
이건 일종의 자존심의 문제다. 싫다는 여자를 그는 억지로 안지 않으리라는 속이 뻔한 그녀의 계책이다.
에단은 결국 그녀를 품에서 놓았다.
“좋다. 네 멋대로 해.”
순순히 그녀에게서 물러난 그는 그대로 그녀의 옆에 누웠다. 넓은 침대에 대자로 편히 누운 그를 그녀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기서 주무실 겁니까?”
“네 허락이라도 받으라는 거냐?”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듣기로는 폐하께서는 절대 후궁 처소에서 주무시지 않는다고…….”
“변덕이다.”
그놈의 변덕하고는.
로엘이 그를 살짝 흘겼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역시나 그녀는 힘없이 끌려가 그대로 그의 옆에 누웠다.
애초에 로엘은 그에게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옆에 누워, 눈을 감아 버리는 그를 빤히 보았다.
오똑한 콧날이며 진한 눈썹에, 하나하나 굵은 아름다운 얼굴선까지. 참 빼어나게도 잘생긴 얼굴이다.
“그만 봐. 신경 쓰여.”
“……옆에 있으란 의미가 아니었습니까?”
“옆에서 보라는 게 아니라 자라는 거다.”
그는 결국 품에 그녀를 안았다. 작은 몸이 쏙 들어와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처음 닿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 여자는 지나치게 체온이 높았다. 마치 갓 태어난 신생아처럼 몸 전체가 따끈한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진짜 아기처럼 조심히 다뤄야 할 것만 같았다.
“자.”
“……불편한데요. 남자랑 같이 자 본 적이 없어서.”
“있었으면 너는 물론 네 나라가 멸망할 일이야.”
로엘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안은 그의 손이 좀처럼 풀릴 거 같지 않아, 결국 그녀는 그의 말대로 몸에 힘을 풀었다.
불편하다고 말했지만, 실은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근육으로 다져진 그의 단단한 몸이 마치 아버지의 품인 것만 같아 보호받는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 귓가에서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그의 심장 소리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녀는 이내 눈을 감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 뻔하디뻔한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거짓말처럼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에단은 감았던 눈을 뜨고, 조금 몸을 돌려 그의 팔을 아무렇지도 않게 베고 잠든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말로 잠이 들었다.
불편하다는 말을 하지 말든가.
그는 피식 웃었다. 깰까 봐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베개에 잘 뉘이고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애가 따로 없군.”
애 같단 생각을 했는데 정말 애 취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괴며 세상모르게 잠든 그녀를 빤히 보았다. 이제 보니 고단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하긴. 그 먼 곳에 와서 적응하기도 전에 수많은 것들을 해야 했으니 고단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물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 옆에서 잠드는 것도 정상은 아니겠지만.
“토르티아의 공주라.”
그는 새하얀 피부에 흘러내리는, 붉은빛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중얼거렸다.
“재밌군.”
무료했던 그의 인생에 등장한 예상치 못한 변수. 그는 조용히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달이 밝게 비추는 고요한 밤. 그는 기분 좋은 숨소리를 내는 그녀 옆에서 잠이 들었다.
두 사람의 첫날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하게.
***
“폐하께서 본궁에 돌아가지 않으셨다고?”
“네. 어제 새로 오신 아카시스님의 처소에서 주무셨다고…….”
아리스의 전속 시녀 애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지 않아도 새로운 아카시스의 입성 소식에 기분이 좋지 않은데, 심지어 황제께서 그곳에서 밤을 보내셨단 소식이 들리자 바로 아리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평소 한 성격 하기로 유명한 분이라 애나는 이 소식을 전하기 전부터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이건 화가 꽤 크게, 그것도 길게 갈 사안이었다.
아리스는 짜증스럽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리스 님. 그러시면 손톱이…….”
“닥쳐! 지금 이깟 손톱 따위가 문제야?”
괜한 걱정의 소리를 했다가 더 큰 짜증이 돌아왔다. 애나는 그만 주변 시녀를 물렸다. 후궁 내에서 지금까지 굳건히 지켜 온 서열 1위란 지위가 위협 당하게 생겼으니, 그녀의 상전이 성질을 부릴 만도 했다.
몰브가 저택에서부터 오랫동안 아리스를 모셨던 애나는 언제나 그렇듯 조용히 그녀의 아가씨를 타일렀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새로운 아카시스께서는 거의 팔려 오다시피 한 타국의 공주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가지고 온 지참금도 겨우 구색만 맞췄을 뿐, 황제께 상납하고 나니 남은 사비도 거의 없다고 들었습니다. 폐하의 변덕이 있으셨을 뿐이지, 그닥 아리스 님께서 마음 쓰실 상대가 아닙니다.”
“왜 그 변덕을 하필 그 계집 처소에서 부리시냔 말이야! 내 궁에 들르신 것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이미 그녀를 찾은 지 한 달도 더 되었다. 애초에 그녀 역시 정략으로 온 몸.
카이로스의 개국공신 가문이자 가장 많이 황후를 배출한 가문 몰브의 장녀인 아리스는 로엘과 마찬가지로 황제와 정식 혼약을 맺은 아카시스로 황궁에 들어왔다.
애초에 총애하는 비가 없었던 에단이었기에, 실상 아리스는 후궁의 실세로 군림하였다.
카이로스 최고 명문 가문인 몰브가(家)가 버티고 있는 한 그 누구도 감히 아리스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돈과 권력이 받쳐 주니 주기적으로 신관들이 권유하는 합방 날짜도 아리스에게 가장 많이 돌아갔고, 연회와 연례행사에서도 황제의 가장 가까이에 서는 건 늘 그녀였다.
그렇게 후궁의 서열 1위를 굳건히 지켜왔던 차에 어디 북방에서 건너온 듣도 보도 못한 계집 따위가 오자마자 내궁의 서열을 흔든 셈이다.
“그 계집, 예뻐? 애 같다고 했잖아.”
“외모야 감히 아리스 님과 비할 바가 되겠습니까? 들리는 소식통에 의하면 얼굴은 좀 반반해도 원체 마르고 작아서 볼품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폐하께서 안 하던 짓을 하시냔 말이야!”
“아리스 님, 좀 작게 말씀하셔야…….”
애나는 밖에 있는 이들의 눈치를 보았다. 워낙 말이 잘 새어 나가는 게 궁인지라 애나는 가끔 아리스의 이러한 생각 없는 언행에 심장이 덜컹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피의 군주라 불리는 분이 이곳의 황제시다. 언제 심사가 뒤틀려 그녀의 목을 내리쳐도 이상할 게 없는 잔혹한 분.
그런 자의 여인이 되고자 하면서도 아리스는 조금도 신중치 못했다.
감정을 숨길 줄도 몰랐고 언행을 조심하지도 않았다. 그저 버릇없이 자라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귀족 아가씨일 뿐이다.
그러니 이런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도 제대로 된 눈길 한 번을 받지 못하는 거다.
“당장 오라버니를 들라 해. 무언가 조치를 해야지 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
“예. 몰브가에 기별을 넣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당장 나한테 인사 오라 전해라. 그 면전을 직접 봐야겠다.”
“네.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아리스는 애나의 잔소리에도 또다시 손톱을 물었다. 애나는 한숨을 삼켰다.
이미 궁내에서도 악질이라고 소문이 자자하게 났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애나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모셔 온 그녀의 아가씨였다.
그러니 이렇게 못되게 성질을 내어도, 애나 눈에는 아리스의 근심과 불안이 전부 보였다.
“왜 폐하께선 그런 근본 없는 계집한테……!”
금지옥엽 사랑만 받고 제멋대로 살아온 그녀의 자존심을 처음으로 꺾은 이가 다름 아닌 에단 황제. 웃기게도 그녀는 그런 에단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더 불을 켜고 이렇게 후궁 1위를 지키려 군림했던 거다. 혹여, 그의 눈에 다른 이가 들까 겁이 나서.
“너무 걱정 마세요, 아가씨. 혹여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애나는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아카시스 한 명쯤 들어온들, 별일 있겠거니 싶었는데 첫날부터 파장이 일고 있었다. 아리스에게 괜찮다고 말하고는 있으면서도, 애나는 속으로 빌었다.
부디 언제나 그러하듯 폐하의 흔하디흔한 변덕이셨기를. 그래서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여인들처럼 무심하게 잊어버리시기를.
만일 그게 아니라면, 비교적 평온했던 카이로스의 후궁에 어떤 형태로든 피바람이 불지도 모를 일이다.
***
“으음.”
얼핏 들어온 햇빛에 에단은 미간을 찌푸리며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러자 커튼을 조심스럽게 열던 로엘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죄송해요. 저는 조금만 열려고 했는데, 혹시 저 때문에 깨셨나요?”
“……아마.”
아침이라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가 고스란히 보였지만, 그도 그녀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흘러내린 머리를 대충 뒤를 넘기며 물었다.
“내가 잠이 든 건가?”
“아마도요?”
로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에단은 꽤 놀랐다. 잠든지도 모를 정도로 푹 자다니. 근 몇 년 만의 숙면인지 모른다.
아침마다 느꼈던 묵직한 피로감이 없는 그 개운한 느낌에 에단은 제법 기분이 상쾌했다.
“그만 커튼을 쳐도 될까요?”
허락한다는 작은 고갯짓이 있기 무섭게, 그녀는 바로 두꺼운 암막 커튼을 걷어 냈다. 그러자 아침의 환한 햇빛이 잔잔한 바람과 함께 방 안에 들이쳤다.
“오! 오늘 날씨 진짜 좋네요.”
그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녀는 환히 웃었다. 하얀 피부는 투명하리만치 깨끗했으며 새벽의 빛깔이라 불린다는 붉은 머리는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무엇보다도 그런 아침 햇빛보다도 밝게 빛나는 싱그러운 미소.
“좋은 아침이에요, 폐하.”
에단은 하늘이 예쁘다고 말하는 그녀야말로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생각했다.
“……그래.”
그는 침대 헤드에 편히 몸을 기대며 답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아침이 나쁘지 않았다.
에단은 자연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잘 잔 건 비단 그뿐만은 아닌 거 같다.
어젯밤보다도 훨씬 화사하게 핀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앞에 앉았다.
“이제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빨리 가란 소리로 들리는데.”
“아,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제가 그냥 아무것도 몰라서……. 보통 이 아침에 뭘 해야 하나요?”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 순간 미세한 꼬르륵 소리가 그녀의 배로부터 들려왔다.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피식 웃었다. 이건 지나치게 솔직한 반응이었다.
“일단 아침부터 들어야 할 거 같군.”
“……네.”
많이 민망한지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자기는 괜찮다는 그 흔한 내숭조차 하지 않았다.
에단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슬슬 그의 눈치를 피하면서도, 배고파하는 이 솔직함이 좋았다.
그가 살짝 상체를 일으켜 외부로 통하는 종을 울리자 바로 대기 중이었던 최고시녀장 사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르셨나이까, 폐하.”
“아침을 들이라.”
“이곳으로 말씀입니까?”
“그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송구합니다.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르르 여러 사람이 물러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대기 중이었는지, 그 소리가 길기도 했다. 열리지도 않는 문을 빤히 바라보며, 로엘이 중얼거렸다.
“다들 대기하고 있었나 보네요.”
“당연하지.”
같은 침대라 하지만 멀찍이도 떨어져 있는 그녀를 그는 결국 손을 뻗어 가까이 했다. 그녀가 순순히 좀 더 다가오자, 두 사람은 자연히 눈을 맞추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지금 말해.”
“예?”
“분명 교육받았다 하지 않았나? 도대체 시녀장은 뭘 가르친 거야.”
그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무얼 보고 이 여자가 영특하다고 한 건지 에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통적으로 카이로스의 황실은 황제의 승은을 입은 첫날밤 이후 사례가 내려진다. 보통 패물이 내려지나, 가끔 영지나 성 같은 것을 받기도 하지. 물론 그 밤에 얼마나 총애를 받았느냐에 비례하겠지만.”
그는 그녀의 턱을 살짝 잡아 올리며 짓궂게 말했다. 로엘은 그녀를 놀리는 그를 흘겼다.
“그럼 저는 아무것도 받지 말아야겠네요.”
“아니 다행이군.”
“그런데 왜 물으십니까?”
“모르나 본데, 내가 너를 안지 않았다는 건 네 문제 이전에 내 문제야. 심지어 이렇게 하룻밤을 함께 지샜으면 더더욱.”
“흠. 그게 또 그렇게 되는군요. 그런데, 그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 옆의 탁상에 손을 뻗었다. 황제의 검이 놓인 그곳에 그녀의 손이 채 닿기 전에, 그가 먼저 그녀의 손목을 아프게 쥐었다. 조절되지 않는 과한 힘에 로엘은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야야. 아파요.”
“내 앞에서 검이라도 쥐겠다는 건가? 그건 지나치게 만용인데.”
“아니요! 제가 감히 카이로스의 황검에 손이라도 대겠습니까? 저는 단지 그 옆에 있는 촛대를 집으려는 거였어요.”
그녀는 투덜거리면서도 또박또박 잘만 답했다. 금세 붉어진 손목과 고통에 찡그리는 그녀의 표정을 본 에단은 결국 그녀를 놔주었다.
그녀는 놓여난 손목을 잡고 그에게 투덜거리면서, 불이 다 꺼진 촛대를 들었다.
“정말 성정도 급하시지. 제가 검을 먼저 잡아 봤자 폐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벨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걸로 뭘 하게.”
“저는 소박맞지 않는 동시에 폐하의 자존심을 지키려고요.”
“무슨……!‘
그녀는 망설임 없이 촛대의 뾰족한 끝으로 그녀의 왼손 손바닥을 그었다. 그러자 금세 붉은 피가 뚝뚝 흘러 침대의 하얀 시트를 적셨다. 에단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러면 다들 의심을 하지 않겠……. 폐, 폐하.”
그는 거칠게 그녀의 피가 나는 손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곤 손에 잡히는 시트를 찢어 내 상처 부위를 지혈했다.
아플 정도로 세게 누르는 바람에 상처를 낼 때보다 오히려 더 아팠지만, 그녀는 내색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그가 너무 정색하고 있었다.
“폐하. 저는 단지…….”
“내게 팔려 온 이상 넌 내 거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내 것에 손을 댈 수도, 흠집을 낼 수도 없어. 또다시 이런 짓을 한다면 절대 용서치 않겠다.”
엄청 무섭게 화를 내고 있지만, 분명 이건 걱정이었다. 그것도 과도한 걱정.
이깟 상처쯤 금세 아문다는 말을 하려다, 로엘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그의 반응에 로엘은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거 같았다.
소중히 대해지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기분이 멋대로 들었다.
“대답.”
“……네.”
서툰 솜씨로 그는 그녀의 손을 동여매었다. 갑작스런 정색에 놀랐지만, 그래도 어색한 그 모습이 조금은 귀여워 그녀는 웃고 말았다.
“웃어?”
“아. 죄송해요. 그런데 너무 서투셔서……. 그래도 감사합니다. 조금 감동이에요.”
“……반성하고 뉘우치란 의미다. 감사가 아니라.”
“네. 그것도 하고 있어요.”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지난밤 속을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제안을 할 때의 그 여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금의 그녀는 모든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소녀 같았다.
정체를 도통 가늠할 수 없는 로엘을 그는 빤히 보다 이내 피식 웃었다. 애초에 이 여자 정체가 뭐든,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 그에게 솔직하다면 그는 그걸로 족하다.
애석하게도 그 주위 모든 이들이 이 단순한 사실을 깨우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없습니다, 그런 거.”
“지금 지나가면 기회는 없다. 잘 생각하고 말해.”
“정말 없는걸요, 갖고 싶은 건.”
에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지참금은 토르티아의 체면만 겨우 차릴 만큼이었다.
거기다 그녀에겐 이곳에서 개인적으로 쓸 사비가 거의 없다는 소문이 이미 그녀가 카이로스 황궁에 들어오는 순간 후궁 내에 퍼졌을 거다.
그런데도 가지고 싶다는 게 없다니.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재력이 곧 권력임을 어찌 모를까.
이 태평한 여자는 카이로스의 후궁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
“아! 있어요! 있습니다, 원하는 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로엘은 대뜸 에단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대충 알아서 아론에게 준비시키려던 에단은 초롱초롱해진 그녀의 눈동자에 속으로 웃었다.
예측을 할 수 없는 그녀에게서 또 어떤 답이 나올지 내심 궁금했다.
“뭐든 다 들어주실 겁니까?”
“들어 보고.”
“아……. 폐하도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겠네요. 지금 생각해 보니.”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들어 본단 얘기다.”
에단은 순간 발끈했다. 그녀야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겠지만, 그녀는 은근히 자존심을 긁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지난밤부터 매번 그녀의 말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저에게 ‘자유’를 주세요.”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그녀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저는 이곳 카이로스 황실에서의 ‘자유’를 갖고 싶습니다.”
폐하의 사랑만을 바란다는 어쭙잖은 가식 따위가 그녀의 입에서 나올 리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이야.
그녀는 이 황실에서 가장 비싼 걸 요구한 셈이다.
“이곳을 나가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럴 리가요. 저는 황제의 여인인걸요.”
툭 내뱉듯,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짧은 말이 에단을 미소 짓게 했다.
이 여자가 무서운 건 이런 점이다. 전혀 자각을 하지 못한 채 남자를 기쁘게 한다는 점. 여자로서 아주 아주 위험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에단은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안아 당겼다.
“황제의 여인이면서 자유를 바란다? 욕심이 과해.”
“……역시 안 될까요? 전 단지 황실 내에서만큼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어서…….”
실망한 티를 역력히 내며 바로 풀이 죽는 그녀였다. 그 모습마저도 괜한 부성애를 자극했다. 안 될 일도 되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잔뜩 실망한 표정이다.
에단은 팔에 좀 더 힘을 주어, 아래로 떨어진 그녀의 시선을 다시 그에게로 돌렸다.
“정확히 말해. 그런 두루뭉술한 대답 말고. 가고 싶은 곳이 황실 어디야?”
“……서고요.”
“어디?”
“카이로스의 황실 서고에 들어가고 싶어요.”
눈을 빛내며 말하는 그녀의 대답은 갈수록 더 태산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카이로스 황실의 서고라니. 이건 궁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것보다도 더 말도 안 되는 요구다.
“카이로스의 선대 황제들께서는 항상 당대의 서적들을 정리하고 수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카이로스의 황실 서고에는 전 세계의 서적이 모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고 있다지요. 저는 그곳의 출입을 허가받고 싶습니다.”
카이로스의 황실 서고 베리타스(VERITAS).
담당 사서부는 황제 직속으로 아예 품계에서 독립되어 특별 대우를 받으며, 그 소속 사서관 역시 백작 이상의 귀족 중에 특히 유능한 자들만을 별도로 등용하여 교육한다.
그곳 내부에서도 황실 관련 서적은 황족만이 볼 수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는 현 황제만이 열람이 가능하였다.
그 정도로 엄격하고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곳이 카이로스 황실 서고, 베리타스다. 웬만한 고관대작들도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는 그런 곳에 감히 겁도 없이 출입이라니.
에단은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웃었다. 정말 이 황실에서 가장 비싸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윤허한다.”
“정말이십니까?!”
“대신 들어가고 나오는 것은 네 능력껏.”
“네?”
“물론 들키지 않는 것도 네 능력껏.”
에단은 그만 그녀를 놓아주고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무슨 뜻인지 몰라 갸우뚱하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그는 대충 던져두었던 로브를 걸쳤다.
“제 능력껏 하라니. 그건 몰래 들어가란 말씀이시잖아요? 그건 윤허가 아니죠!”
“적어도 내게 걸리면 살려 준단 의미는 되겠지.”
“다른 이에게 걸린다면요?”
“목이 날아갈지도?”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놓고 심통 난 표정에 에단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직접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구겨진 미간을 폈다.
“불만인가 보군.”
“……아니요.”
“불만인 거 같은데?”
“아니거든요……!”
짧게 그의 입술이 또다시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깜짝 놀란 그 토끼 눈에 미소 지으며, 그는 다시 한 번 제대로 그녀의 양 볼을 잡고 키스했다.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숨어 있는 그녀의 혀를 톡톡 건드리며, 깊게 그녀의 향기를 만끽했다.
“……이 또한 변덕이십니까?”
“그럴지도.”
“저는 그게 불만입니다.”
“내 알 바 아니다.”
거칠어진 숨소리와 뜨거워진 숨결. 그녀의 허리를 바짝 당겨 끌어안은 그는 사라가 아침 식사를 가지고 올 때까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갓 배운 어리숙한 키스 따위로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 리 없는데도, 그는 집요하리만치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그녀는 모르겠지. 카이로스의 황제께선 키스를 전혀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어제보단 낫군.”
“그야 폐하께서, 읍!”
그렇게 아침 인사라는 명목하에, 그는 새로 얻은 달콤한 사탕 같은 그녀를 두고두고 실컷 맛보았다. 이 아침이 지나가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그녀와 함께하는 아침이 아주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