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rologue(1권) (1/69)

나의 황제께 붉은 월계수 꽃을 1권

연아 장편소설

목차

Prologue

** 카이로스 제국어는 “ ” 토르티아어는 「 」로 표시합니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으리.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다가도, 순식간에 불이 되어 모든 것을 태워 버리리라.

가는 곳마다 환호와 통곡이 가득할지니.

보라, 만물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되리라.

아, 황제시여. 천하를 누리소서.

***

“토르티아 제1공주 로엘 네아레스. 이로써 대 카이로스 제국 제29대 황제 아폴리우스 폐하의 아카시스(Akasis, 카이로스 제국의 귀비 칭호. 황후는 칼라리엔Karalien, 황자를 낳은 아카시스는 아카로이Akaroi)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렇게 온갖 의식을 다 하더니만, 정작 본식은 허무할 정도로 빨리 끝났다.

9일 동안 그녀는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심지어 물을 마시는 것도 규율에 따라야만 했다.

정해진 곳에서의 목욕재계는 기본이었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통 의례도 하루에 세 번씩 꼬박꼬박 치러야 했다.

게다가 이 과도하게 치렁치렁한 예식 차림은 치장하는 데에만 3, 4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본식은 고작 몇 십 분 남짓.

카이로스의 대신관의 축복 몇 마디가 전부였다.

“이게 끝인가요?”

“네. 이제 신방으로 가셔서 폐하를 기다리시면 됩니다.”

건조한 신관의 대답에 로엘은 헛웃음이 나왔다. 끝끝내 그 위대하신 분은 머리카락 한 올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신랑도 없는 결혼식이라니.

로엘은 새삼 자신이 화친이라는 명분 아래 인질로 끌려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폐하께서는 오후 정무회의를 마치시고 마마 처소로 곧장 가실 겁니다. 마마께서는 그때까지 잠시 휴식을 취하셔도 됩니다.”

‘휴식’이라는 단어에 멍했던 정신이 순간 깼다. 지금 그녀가 가장 간절히 듣고 싶은 두 음절이었다. 그녀는 이미 의미 없는 의례들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지나치게 화려한 드레스와 얼굴을 가린 베일이 살랑거렸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식된 온갖 보석들이 반짝였다.

로엘은 수십 명의 시녀들이 그녀 앞뒤로 둘러싼 채 따르는 것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매일이 이런 식이라면, 정말 숨이 막혀서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았다.

“카이로스 황궁은 크게 본궁, 후궁, 빈궁으로 구성된 세 개의 내궁과 일곱 개의 외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황제께서 머무시는 본궁은 황제 폐하의 침소와 황후, 칼라리엔님의 침소가 있지만, 아직 황후 책봉 전인지라 지금 본궁은 폐하만이 기거 중이십니다.”

이동을 하면서 내궁의 최고시녀장인 사라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그녀가 카이로스에 온 이후, 사라는 매일같이 그녀에게 카이로스에 대한 교육을 전담해 주고 있었다. 입이 무겁고, 감정 변화를 드러내지 않으며, 꼭 필요한 말만 하는 그녀는 로엘 같은 상전에게조차 꼿꼿했다.

깍듯이 예의를 차리면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는 그녀를 보며, 로엘은 그녀가 왜 대 카이로스 내궁의 시녀장인지 알 것 같았다.

“현 폐하의 아카시스는 총 3명. 그외 황제 폐하를 모셨던 분들은 따로 귀인 신분으로 정식 임명 없이 후궁의 내실에 기거하고 계십니다. 황자의 모후가 되신다면 바로 아카로이(Akaroi, 황자를 낳은 아카시스)로 승격되나, 아직까지 아카로이 역시 안 계십니다.”

카이로스 황제 주변에 여인이 끊이지 않는다는 소문에 비해, 의외로 황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워낙 손이 귀하다는 카이로스 황가의 오래된 전통다웠다.

실제로 역대 카이로스 황제들에겐 황자가 많아야 둘, 셋 정도였다.

황자가 태어나도 다섯 살을 넘기기 어려워 카이로스에서는 항상 황자가 태어날 때마다 나라 전체가 축제를 벌였다.

그렇게 귀한 황자 중 가장 강건하고 영특한 황자가 황권를 물려받으니, 카이로스 황제는 대대로 무소불위의 강력한 황권을 지녔다.

그러한 카이로스 황제 중에서도 최고는 당연히 현 카이로스의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폐하 되시겠다.

“로엘 공주님께서는 세 번째 아카시스로서, 제3궁에 배정되셨습니다. 아카시스의 서열은 모두 동일하며, 현재 아카로이가 안 계시는 이상 내궁에서 가장 높은 상전이 되십니다. 작위를 받지 못한 귀인들께서는 로엘 공주님을 아카시스로서 모실 것입니다.”

로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귀가 닳도록 몇 날 며칠간 들었던 이야기들이었다.

신랑 없는 결혼식이 치러진 신전과는 다른, 화려하기 그지없는 내궁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시녀들이 도열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족히 백여 명은 넘을 것 같은 어린 시녀들이 그녀가 가는 길목마다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그녀를 맞이하는 모습에 로엘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참, 지독한 허례허식이다.

“앞으로 이곳이 마마께서 기거하실 궁전, 세룸니르입니다.”

그렇게 수십 개의 의식과 수십 마디의 잔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그녀가 기거할 궁에 다다랐다.

후궁 안은 또다시 여러 개의 궁으로 나뉘는데, 아카시스는 두 번째로 큰 궁을 배정받았으며 아카시스조차 되지 못한 여자들은 그저 방 하나 정도 배정받을 뿐이다.

다행히 그녀는 국가 간의 정식 결혼으로 처음부터 아카시스의 신분이 되었다.

그나마 다른 궁들과 따로 떨어진 궁을 배정받아 로엘은 속으로 안도했다. 치정의 ‘치’ 자에도 관심 없는 그녀에게 이런 분리된 공간만큼 감사할 일이 없다.

“황제 폐하께서 오신다는 연통이 있을 때까지 이곳에서 잠시 한숨 돌리셔도 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편히 쉬소서.”

근 14시간 만에 드디어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새벽부터 시녀들에게 시달렸던지라 로엘은 홀로 남은 신방에서 이제야 처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화려하기도 하네. 눈이 아플 정도로.”

그녀는 걸리적거리는 베일을 대충 머리 뒤로 넘기며, 차마 일어서지는 못한 채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카이로스는 로엘의 조국, 토르티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황금색으로 뒤덮인 방은 휘황찬란했으며, 거기에 신방이란 이유로 한껏 꾸며 놓아 더 정신이 없었다.

냉궁에서 찬밥 신세로 지냈던 그녀에게는 여러모로 많이 과했다.

“이게 카이로스, 아니 황제의 취향인 건가.”

그렇다면 그녀와는 아주 상극이었다.

물론, 황제의 취향이 어떻든 그녀와 전혀 상관없지만.

대 카이로스 제국 제19대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커다란 산맥에 막혀 왕래가 뜸한 북방까지도 그 소문이 자자한, 카이로스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잔혹한 절대 군주. ‘태양의 황제’.

즉위한 이후 단 한 해도 전쟁이 없던 해가 없으며, 그 모든 전쟁에서 단 한 번의 패전도 없었다. 말 그대로 백전백승.

덕분에 27세의 젊은 나이에 즉위하였어도 카이로스의 그 누구 하나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즉위 5년 만에 당당히 중부를 통일한 그는 이미 현 시대 최강국의 황제였다.

그녀는 지금 그런 사내의 비가 되었다.

“……드디어 오늘 밤.”

그녀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다시 베일을 내리고, 황제가 들어올 문을 똑바로 응시했다.

“바로 이곳에서.”

그녀는 새로운 시작을 한다.

그녀의 목숨을 건, 그녀 인생 최대의 도박을.

***

“누구?”

“토르티아 공주 로엘 네아레스요. 도대체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그러니까 쓸데없는 거까지 나한테 말하지 마. 어차피 안 들어오니까.”

“폐하!”

에단의 최측근, 수석보좌관 아론의 잔소리에 에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지 않아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원로원들을 상대하느라 짜증 나 있는데, 아론은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반면 아론은 마치 자신이 잘못했다는 듯 핀잔을 주는 그 때문에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지금 다른 나라의 공주를 데려와 홀로 식을 올리게 만들어 놓고, 심지어 기억조차 못 하시다니요! 이건 화친이 아니라 전쟁을 하자는 겁니다!”

“그럼 더 좋아하실 거 같은데? 오히려 간단하잖아.”

“넌 좀 닥치고 있어.”

언제나처럼 친위대 대장 루카스는 아론의 옆에서 깐족댔다. 둘 다, 아니 에단까지 셋 모두 방금 전 정무회의 때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에단의 시종장 제롬은 천하의 황제 폐하께 이리 격 없이 구는 두 사람을 혹여 누가 볼까 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그 토르티아 공주, 장난 아니라던데요? 호위해 온 우리 애들이 지금까지 봤던 미녀 중 최고라고 했어요. 아주 빛이 난답니다, 빛이.”

“어차피 베일이 싸여서 제대로 볼 수도 없어.”

“멍청아. 그렇다고 그걸 모르냐? 아우라라는 게 있잖아, 아우라. 딱 느낌이 왔다잖아. 그리고 그 공주의 친모가 토르티아 최고 미녀 레아 칼리드라고! 안 그래도 미녀가 즐비하다는 북방에서 인정받은 최고 미녀! 그러니 천하의 제이드 네아레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

‘제이드 네아레스’.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그 이름에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에단도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토르티아 대장군으로서 단 한 번의 패전도 없는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인이자, 가장 뛰어난 전략가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무인이라면 그를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의 허무한 죽음에 애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말 그대로 전무후무한 전설 같은 ‘무신’.

지금 그 사람의 딸이 이곳에 왔다는 소리다.

“그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너 우리 정보통을 못 믿는 거냐?”

“그런 말이 아니잖아. 전혀 중요하지도 않은…….”

“왜 안 중요해! 제일 중요하지!”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라고?”

에단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처음 듣는다는 그 표정에 아론은 한숨을 삼켰다. 예상대로 그는 그가 올린 로엘 공주에 대한 보고서를 읽지 않았나 보다.

하긴. 애초에 그럴 성의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식을 홀로 치르게 하지도 않았겠지.

아론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네.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 로엘 네아레스입니다. 대장군 제이드 네아레스가 독살당하고, 그 친모가 암살당한 이후 홀로 토르티아 성에 감금되어 살았습니다. 현 토르티아의 황제이자 제이드 장군의 이복동생인 조지 네아레스는 백성들이 제이드의 신망을 상기하지 않도록 일부러 그녀를 꼭꼭 숨겨 두었는데, 이번 기회에 자기 딸 대신 로엘 공주를 보낸 겁니다.”

“이야.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못된 새끼네. 제이드 장군도, 그 부인도 그 동생이 죽인 거잖아?”

“물증은 없어도 심증은 그러하지.”

“안됐네, 그 공주님.”

루카스와 아론의 대화를 에단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제이드 네아레스의 이름에 잠시 반응했지만, 남의 나라 집안사 따위는 전혀 관심 없었다. 그저 이번 화친으로 토르티아가 그에게 고개를 숙인 만큼 북방 진출이 한층 수월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한참 아론과 루카스의 수다 아닌 수다를 듣다 보니, 벌써 정무를 보는 외궁을 벗어나 내궁의 후궁에 다다랐다. 그 문 앞에서 아론과 루카스는 그만 발걸음을 멈췄다.

후궁은 황제의 명이 없는 한, 황제와 황자 이외에 그 어떠한 남자도 들어갈 수 없다.

“어쨌거나 오늘이 로엘 공주님, 아니 아카시스님께서는 첫날밤이니 부디 폐하.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주세요.”

“그래요. 폐하. 안됐잖아요? 그래도 공주인데. 이런 식으로 팔려 오는 건.”

에단은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그들을 물렸다. 역시나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그의 반응에 아론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후궁의 굳건히 닫힌 문이 열리자, 최고시녀장 사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리를 깊이 숙여 황제를 맞이하자, 그녀를 따라 수십의 시녀들 역시 똑같은 말과 태도로 그들의 황제를 맞이하였다.

“식은 예정대로 무사히 치러졌습니다. 영특하신 분이라 습득하시는 것이 빨라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지금 신방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라가 이끄는 대로 세룸니르로 안내되었다.

세룸니르는 후궁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작은 궁전이었다. 딱 마당 하나 정도 있는, 궁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그 작은 처소의 분위기는 적막 그 자체였다.

아직 시녀가 제대로 배정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애초에 그녀가 데려온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대개 다른 나라의 공주가 비로 들어올 때 그 가솔들 수십이 딸려 오기 마련인데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그녀 혼자 덜렁 떨어진 것 같아, 조용하다 못해 초라했다.

에단은 문득 방금 아론과 루카스로부터 들은 그녀의 복잡한 가정사가 생각났다. 천덕꾸러기 신세라고 하더니만 그 말이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었나 보다.

“전부 물려.”

“예. 폐하. 부디 축복이 가득한 평안한 밤 되소서.”

후궁에 들어와 처음 한 그의 짧은 말에 시녀들은 순식간에 후궁에서 빠져나갔다. 사라가 마지막으로 나가자 다시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에 휩싸였다.

에단은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 사람 소리 없는, 이 과한 적막이 이상하게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가 있는 신방으로 다가갔다.

“열어라.”

“예. 폐하.”

신방의 문을 열어 줄, 딱 두 명 남은 시녀들이 천천히 신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베일 너머로 신부의 인영이 언뜻 보였다.

그가 짧게 시녀들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 마지막 남은 시녀들 역시 이만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드디어 신방에 에단과 로엘, 두 사람만이 남았다.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구름 한 점, 바람 한 점 없는 만월의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

숨 막히는 정적. 팽팽한 긴장감.

황제의 등장에도 허리 한 번을, 고개 한 번을 숙이지 않은 여자.

에단은 이제껏 자신을 기다리던 여인들과는 사뭇 다른 그녀의 꼿꼿한 모습에 조금 흥미가 생기려 했다.

꽤나 뜸을 들이고 그가 드디어 신방에 들어섰다. 그러자 침대 끝에 앉아 있던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어 그와 마주했다.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는 엷은 베일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진했다.

“태양의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폐하를 뵙습니다.”

이내 그 붉은 눈동자는 아래를 향했다. 그녀의 몸 역시 침대에서 내려와 아래로 내려갔다.

황제의 눈을 몇 십 초나 뚫어져라 쳐다볼 때는 언제고, 그녀는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전혀 일관성 없는 그 태도에 에단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 여자. 시작부터 무언가 다르다.

“토르티아 대장군 제이드 네아레스의 장녀, 토르티아 제1공주 로엘 네아레스. 위대하신 폐하의 아카시스가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그녀가 내려간 자리에 대신 앉아 그의 발밑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에 띄는 붉은색의 기나긴 머리.

붉은 머리의 민족, 토르티아의 색깔보다 확연히 옅은 그 색은 마치 해가 뜨는 여명의 색을 닮았다. 언뜻 ‘여명의 공주’라고 불린다는 아론의 말이 생각나는 것도 같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걸리적거리는 그 베일을 뒤로 넘겼다. 그러자 베일 뒤에 숨겨진 그녀의 또렷한 붉은 눈동자가 그를 직시했다.

“감히 황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는 게냐.”

꽤 긴장할 법한 그의 낮은 목소리에

“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는 그녀는 대답이 이어졌다

여전히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곧은 눈으로 그를 직시한 채로.

에단의 흥미가 점점 더 높아졌다.

이 여자. 제법 ‘그 남자’를 닮았다.

오만한 것도, 건방진 것도. 그러면서도 끝까지 고고한 것도. 전부 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는 눈이로군.”

“예. 폐하.”

이번에도 그녀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카이로스의 황제시여. 저는 당신께 거래를 제안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 뒷말 역시 거침이 없었다.

“하. 거래.”

그는 진심으로 비웃음이 나왔다. 너무 당돌해서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

거래? 감히 카이로스의 황제와?

“정말 목숨이 열 개라도 되나 보군.”

그는 좀 더 세게 그녀의 턱을 잡아 가까이 했다. 서로의 숨결이 닿는 그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금빛 눈동자에 그녀가 고스란히 비쳤다.

“건방짐이 도를 지나친다.”

“어차피 팔려 온 목숨.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후회 없이 하겠습니다.”

얼음같이 차가운 그의 눈에도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벌써 그가 잡은 턱 부위는 붉게 자국이 나기 시작하였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그에게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그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그러니 저의 목숨 건 도박에 응해 주실 의향이 없으시다면 기꺼이 그 대가를 치르겠나이다. 이 자리에서 저를 베어 불손을 벌하소서.”

이건 허언이 아니다. 진심으로 그녀는 이 순간 목숨을 걸었다.

그를 직시하는 그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에단의 손이 그녀의 목을 감쌌다. 그리고 아무 감흥 없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목을 죄었다. 그녀의 목은 그의 한 손만으로도 충분히 잡혔으며, 조금만 힘을 줘도 금세 부러질 듯 가늘었다.

점차 붉은 그녀의 입술이 떨리고 하얀 얼굴이 더욱더 창백해졌지만, 그녀는 신음 소리 한 번 내지를 않았다. 눈물이 눈꼬리에 걸릴 때까지 끝까지 그를 직시하였다.

그녀의 시야가 희미해질 정도가 되어서야 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로엘은 그제야 바닥에 쓰러져 숨을 골랐다. 거친 헛기침이 계속 나왔지만 그녀는 몇 번 숨을 고르지도 않은 채, 입술을 질끈 깨물고 두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바로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 모든 모습을 그는 여전히 감흥 없다는 눈으로 내려 보았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도, 여전히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할 정도로 심장이 뛰면서도 그 붉은 눈동자만큼은 처음 그를 응시하던 그대로 또렷했다. 여전히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 때문일까. 이 여자에게 이상한 호기심이 생긴다.

“이제 제 이야기를 들어 줄 마음이 생기신 건가요.”

“글쎄.”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준비된 포도주를 제 잔에 채우며 그는 그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꼿꼿이 허리를 세우는 그녀를 보았다.

작은 얼굴에 눈망울은 크다 못해 깊었고, 오똑한 콧날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거기에 남자를 자극하는 도톰한 입술과 아기 같은 뽀얀 볼까지. 가히 미인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뿐만이랴. 새하얀 피부와 여리여리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풍만한 가슴에, 탄탄한 엉덩이까지. 그녀는 가만히 있어도 남자를 유혹하는 몸을 지녔다.

북방의 꽃. 토르티아의 절세미녀라 불릴 만하다.

“적어도 네 목숨이 너의 몇 마디에 달렸다는 건 확실하지.”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한 작은 미소를 아주 짧게 지었다. 조금 올라간 그 입꼬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 옅은 미소에 에단이야말로 미소를 지었다.

당장에라도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이 상황에서도 웃는 여자라.

갈수록 흥미가 커져 갔다. 아니. 비뚤어진 욕망이 올라왔다.

절대 꺾이지 않겠다는 이 기고만장한 여자를 그의 밑에 두고 밤새 울리고 싶단 마음이 들었다.

“황제 폐하. 저는 인질로 이곳에 온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제 목숨이 당신의 손에 달린 것도, 하루아침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지요.”

그녀는 찬찬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자세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얼굴을 직시하며, 조금도 떨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제법 좋은 울림을 가진, 그리고 여운을 남길 줄 아는 기분 좋은 목소리다.

“그러함에도 저는 이곳에 왔습니다. 저에겐 거절이란 선택지가 없었지만, 그러함에도 저는 스스로 선택을 하였습니다. 이곳, 황금의 도시 카이로스에 가겠노라고. 오로지 당신을 만나, 이 목숨을 건 거래를 하기 위해.”

갈수록 더 흥미로워졌다.

말을 타고 꼬박 나흘은 쉬지 않고 달려야 도착하는 북방의 경계. 그로부터도 한참을 더 가야 도달하는 곳이 토르티아다. 그 먼 곳의 공주가 무슨 연유로, 생면부지의 그에게 목숨을 건다는 걸까.

“애초에 거래는 대등한 상대와 하는 거다. 내가 왜 그 거래를 해야 하지? 네가 나에게 내밀 수 있는 패가 있기는 한가?”

“있지요. 제가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인 이상.”

그를 멈칫하게 만드는 그 이름이 또 나왔다.

에단은 잠시 그녀를 빤히 보았다.

참. 영악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 그녀는 교묘하게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 갈 수 있게끔 이야기를 주도한다.

웬만한 원로도 그 앞에서 ‘아’ 소리 한 번을 제대로 낼 수 없는데, 이 작은 계집은 겁도 없이 처음부터 그와 눈을 맞추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 만용이 너무 같잖아서 귀여울 지경이다.

사자 앞에서 대드는 작은 토끼라니. 사냥하기보다는 가지고 노는 편이 훨씬 재밌는 법이다. 그래서 또다시 그는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다.

“그래서 네가 나와 무엇을 거래하고 싶은 거냐.”

그녀는 또다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조금도 그에게 굽히지 않으면서 그놈의 무릎은 참 잘도 꿇었다.

“태양의 주군. 신의 선택을 받은 위대한 카이로스의 황제시여.”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자세. 완벽히 카이로스의 예법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고고한 공주님의 모습으로, 그녀는 그녀가 진짜로 하고 싶은 한마디를 꺼냈다.

“제가 당신께 북방의 수호국, 조국 토르티아를 바치겠나이다.”

그것도 그를 조금도 실망시키지 않은 채.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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