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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79화 (완결) (79/79)

79화.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해,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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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해2020.12.31.

유현의 차가 헤어숍 건물 앞에서 멈췄다.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 문을 열려던 하경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흰색 세단 한 대가 유현의 차 옆에 와서 섰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홍 관장의 차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마주치다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하던 하경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홍 관장이 운전석 문을 열고 땅바닥에 발을 디딘 것과 거의 동시였다.

“안녕하셨어요. 숍 옮기셨나 봐요.”

예상치 못한 만남에 당황한 것도 잠시, 홍 관장은 태연하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래. 오전에 친구 딸 결혼식이 있어서 들렀어. 너도 여기 다니니?”

“세희 소개로 오늘 처음 왔어요.”

하경은 홍 관장의 단골 헤어숍을 알고 있었다. 만약 홍 관장이 이곳으로 옮긴 줄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거였다. 혼자 있을 때 마주치는 건 별 상관이 없지만, 오늘은 엄마와 함께라서 더 껄끄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 관장이 먼저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차에서 내린 건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를 죄지은 사람처럼 숨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인사시켜 드릴 분이 있어요.”

하경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간 순간, 명선이 반쯤 열려 있던 뒷자리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렸다.

“유명선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잘 정돈된 홍 관장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우리가 인사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실례했습니다.”

“…….”

홍 관장은 모전여전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담담한 태도로 제 속을 긁는 건 엄마나 딸이나 아주 똑같았다. 죽은 남편의 전처를 독기 서린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던 홍 관장의 귀로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오랜만이에요, 홍 관장님.”

운전석 뒷자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심 여사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그제야 유현의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아침부터 넷이 무슨 일이야. 홍 관장은 궁금한 마음을 꾹 참고 얄밉게 화답했다.

“네.”

하경은 최소한의 예의도 갖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 홍 관장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유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 분 모시고 먼저 들어가 있어.”

유현은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어머니들이 지켜보고 있으면 하경이 하고 싶은 말을 편히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이 헤어숍 안으로 들어가자, 하경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저 오늘 웨딩 촬영 해요. 결혼식은 안 하기로 했고요.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그녀는 한결을 통해서 알리려고 했었다는 변명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연락했어도 안 갔어.”

홍 관장이 크게 코웃음을 쳤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분한 표정과 어조가 홍 관장을 욱하게 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누나인 척하더니 그러면 그렇지. 임시 주총 끝나고 나니까 한결이한테는 관심도 없지?”

“한결이는 촬영장으로 바로 오겠대요.”

“…….”

홍 관장의 말문이 막혔다. 제 아들은 쏙 빼놓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한결이랑 웨딩 촬영 일정을 의논하려고 만났는데 옷 한 벌 사달라고 조르더라고요. 그래서 카드를 줬더니 아주 신나게 쓰고 다니네요. 어제저녁에 주유비를 긁었다고 문자가 온 걸 보면 돌려주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서 쓰려나 봐요.”

생색을 내려는 목적도, 한결을 비난하려는 목적도 아니었다. 단지 홍 관장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남매는 더 돈독하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제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경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헤어숍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부터 기분을 잡친 홍 관장은 이를 바득 갈면서 도로 차에 탔다. 이 숍은 두 번 다시 쳐다도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 네 사람이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한결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심 여사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명선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주한결이라고 합니다.”

한결이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누나를 낳아준 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친근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한결을 보는 명선의 눈빛에도 호의가 담겼다.

“하경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누나가 저에 대해서 뭐라고 했어요?”

하경이 불쑥 끼어들었다.

“기대하는 표정은 뭐야. 당연히 욕이지.”

“왜 욕을 하고 다녀. 나처럼 착한 동생이 어디 있다고.”

한결이 구시렁거리자, 명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괜히 저러는 거예요. 욕한 적 한 번도 없으면서.”

한결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린 순간, 유현이 무심한 말을 한마디 툭 던졌다.

“근데 네가 웬일로 안 늦었냐.”

치부를 공격당하고 당황한 한결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맨날 늦는 거 같잖아.”

“맨날 늦었지.”

“…….”

한결의 눈망울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사이, 이번에는 하경이 나섰다.

“문자가 어찌나 많이 오던지, 카드 정지시킬 뻔했어. 내 카드 내놔.”

“네…….”

하경은 바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는 한결을 슬쩍 옆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좀 전에 숍 갔다가 어머니 뵀어.”

한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엄마? 홍수혜?”

“버르장머리는 집에 두고 온 거야?”

타박을 받은 그가 멋쩍게 목을 긁었다.

“……엄마가 뭐래?”

“별말씀은 없으셨지만, 분위기는 안 좋았지 뭐. 아무튼, 오늘 웨딩 촬영 한다는 건 말씀드렸어. 너 온다는 것도.”

“…….”

한결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하경이 선수를 쳤다.

“어머니한테 너무 못되게 굴지 말고.”

그녀는 자신으로 인해 모자지간이 껄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다.

“나 찔리라고 하는 말이지?”

한결은 제 입으로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을 떠올리면 아직도 누나에게 미안했다.

“내가 그렇게 치졸한 줄 알아?”

“치졸하지. 동생이 카드 좀 썼다고 도끼눈을 뜨고 말이야.”

“야, 주한결.”

“어머니, 누나가 무섭게 굴어요. 혼내주세요.”

하경은 능청스럽게 제 엄마 곁으로 달려가는 한결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스튜디오를 하루 통째로 빌린 덕분에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고요한 스튜디오는 카메라 셔터 소리로 가득 찼다. 거기에 한결의 우렁찬 목소리까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야릇하게! 그렇지!”

“내외해? 좀 더 붙어 봐.”

“아, 답답해 죽겠네. 좀 더 농밀하고 끈적하게 안 되나?”

그는 포토그래퍼보다 훨씬 더 말을 많이 했다. ‘포즈 지적꾼’으로 맹활약한 한결 덕분에 야릇하고, 농밀하고, 끈적한 사진들이 많이 나왔다.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잔뜩 생긴 날이었다.

*** 유현과 하경은 뒤늦은 신혼여행을 떠났다. 시기와 순서 모두 일반적인 결혼과는 사뭇 달랐지만, 두 사람에게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지금까지의 과정이 가장 최선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베트남 다낭의 풀빌라 리조트였다. 주원 호텔이 아닌 근처 리조트에 묵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결에게 경쟁 업체를 이용한다고 어찌나 잔소리를 들었는지 아직도 귀가 얼얼했다. 주 회장도, 하경도, 검찰 조사로 정신이 없어서 개관식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주원 호텔은 개관식 후 정상 영업 중이었다. 호텔로 가지 않은 이유는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푹 쉬기 위해서였다. 관광, 쇼핑, 수상 레포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리조트 내에서 먹고, 자고, 쉬기만 할 참이었다. 하경이 가장 먼저 둘러본 건 빌라에 딸린 수영장이었다.

“프라이빗 풀이 꽤 넓네. 메인 풀도 기대되는데?”

“기대하지 마. 메인 풀에서 수영할 일 없으니까.”

그녀는 제 옆에 선 유현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수영복이 너무 야해.”

“야하긴 뭐가 야해. 평범한 비키니 가져왔는데.”

“아무튼, 야해.”

두 사람에게 ‘야함’의 기준은 매우 달랐다. 유현은 다른 남자들이 제 여자의 몸매를 흘긋거릴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 좋아. 야하다고 쳐. 그럼 왜 짐 쌀 때 가만히 있었어? 그때 말했으면 원피스 수영복 챙겼을 거 아냐.”

“원피스 수영복은 불편할 것 같아서.”

하경의 고개가 다시 한번 갸우뚱 기울었다.

“뭐가?”

“벗기기가.”

그는 제 흑심을 당당하게 밝혔다. 물속에서 뭘 할 계획인지 예고의 의미이기도 했다. 유현의 뻔뻔한 대답에 하경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아, 처음부터 메인 풀에는 못 가게 하려는 꿍꿍이였다?”

“어, 3박 4일 동안 나만 보려고.”

“보기만 할 거지?”

“그게 가능할 리가.”

“우리 쉬러 온 건데요.”

“나한테는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휴식이야.”

다른 때 들었다면 감동이었을 말이 조금도 감동적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뭘 함께하자는 건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걸어서 나갈 수 있게는 해 주는 거지?”

“내가 업고 나갈게.”

“…….”

유현은 걸어서 나갈 수 있게 해 준다는 확답을 해 주지 않았다. 작정하고 온 듯한 그를 보는 하경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일단 짐부터 풀고 산책이나 하러 갈까?”

“산책은 하게 해 주는 거야?”

“이번 여행의 처음이자 마지막 산책이 될 테니까 천천히 걷다 오자.”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 사이로 청량한 미소가 빛났다. 체념하듯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던 하경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그래. 나가자.”

짐을 대충 풀고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미케 비치 해변으로 나갔다. 그리고 손깍지를 끼고서 천천히 걸었다. 하경은 처음이 아닌데 처음인 것 같은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밤에 이 길을 걸으면서 네가 낮에 오자고 말했었는데…… 정말 왔네.”

“내가 사적으로 올 기회를 만들겠다고 했잖아.”

“너무나 사적이라 신기해서.”

“나한테는 인생 첫 번째 여행을 신혼여행으로 오신 분이 더 신기한데요.”

유현은 불과 얼마 전에야 하경이 출장이 아닌 개인적인 여행을 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이 더욱 특별했다. 그녀의 첫 번째 여행 동반자이면서 인생의 동반자가 됐으니.

“인생 첫 번째 여행이 신혼여행이라서 좋고, 내 남편이 너라서 좋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다 해 줬네.”

유현은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하경의 뺨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난 요새도 문득문득 네가 나한테 처음으로 결혼하자고 했던 때가 떠올라.”

기억을 더듬듯 하경의 눈에 초점이 흐려졌다.

“그 결혼, 나랑 해요.”

아직도 그 말을 하던 유현의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귓가에 휘감기던 나직한 목소리도. 동생의 친구였고, 예비 시동생이었던 그가 이제 남편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 사박사박 모래 위를 걷던 하경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유현도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으로 ‘왜?’라고 묻는 그를 마주 보고 섰다.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해.”

유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협박이야, 청혼이야?”

“청혼이야. 이번 생은 네가 했으니까 다음 생은 내가 먼저 하려고.”

“…….”

그가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하경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뭐 해. 빨리 안 받아 주고.”

벅찬 감동에 젖어 있던 유현이 입을 열었다.

“그 청혼, 감사히 받겠습니다.”

“약속한 거야.”

“약속했어.”

배시시 눈웃음을 친 그녀는 발꿈치를 들고 그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다시 태어나도 이 남자를 만날 수 있기를. 다시 만나서 사랑하게 되기를.

“오늘의 약속을 잊지 말라는 의미.”

두 사람은 맞닿은 입술에, 시선에, 마음에 약속을 새겼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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