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천생연분,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novel.naver.com
77화. 천생연분2020.12.24.
유현은 오랜만에 주원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하경이 내려오면 어머니들과 만나기로 한 식당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차 밖에 나가서 기다리는데 아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유현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승조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냥 지나가 줘도 섭섭하지 않은데 굳이 알은체를 하는 그가 영 못마땅했다.
“손유현 변호사님, 오랜만에 뵙네요.”
승조는 비상대책팀이 해체되기 일주일 전쯤 비서실장직을 내려놓고 기획팀 팀장 업무만 맡게 되었다. 누구도 하경과 승조의 불편한 관계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이사님 모시러 오셨습니까?”
“네.”
“이사님 아파트 주차장에서 마주쳤던 날, 기억하십니까?”
유현은 승조가 왜 이제 와서 그날 일을 들먹이는지 불쾌했다.
“물론 기억합니다.”
그가 하경을 끌어안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 날, 이사님께서 비서실장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기획팀 업무에만 전념하라는 뜻이라고 하셨지만, 제가 곁에 있는 게 불편해서 내리신 결정이었습니다.”
유현은 하경이 승조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원래도 승조가 탐탁지 않았으나, 그날 이후 제 여자 곁에 있는 그의 존재가 더 거슬렸다. 그런데도 그의 거취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건 하경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비서실장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된 후에 회사를 떠나게 되어 내심 안심했는데 이런 내막이 있었을 줄이야.
“후임을 물색하는 와중에 회사가 어수선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사님께 부탁드렸습니다. 회사가 안정화될 때까지만 남아 있게 해 달라고.”
승조는 그동안 기회가 없어서 하지 못했던 말을 담담하게 꺼내놓았다.
“늦었지만, 그날 일은 사과드립니다.”
“…….”
유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과를 받아야 할 일인지도 잘 모르겠고,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지도 않아서 말을 아낀 것이었다.
“이사님에 대한 마음은 깨끗이 접었습니다. 부부가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승조를 포함한 직원들 모두 하경과 유현이 혼인 신고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승조는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유현은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껄끄러웠던 두 남자 사이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먼저 중식당에 도착해 있던 심 여사와 명선은 방으로 들어서는 하경과 유현을 보면서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하경아.”
“유현아.”
시모는 며느리부터, 장모는 사위부터 챙겼다. 두 사람은 며느리와 사위를 이름으로 불렀다. 예법에는 어긋날지 몰라도, 그게 더 친근하게 느껴져서였다. 하경과 유현이 원한 것이기도 했다. 네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주문한 식사를 기다리면서 명선이 운을 뗐다.
“유현아, TV 고마워. 크고 좋더라.”
하경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TV?”
“유현이가 엄마네 집 TV 바꿔 준 거 말 안 했나 보네.”
하경의 가늘어진 눈초리가 유현에게 향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당신은 왜 어머니한테 백화점 상품권 드린 얘기 안 했어?”
유현은 어머니들 앞에서는 하경을 ‘당신’이라고 불렀다. 가끔 이름을 부르기는 해도, ‘너’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뭐 대단한 거라고…….”
“나도 같은 이유.”
“…….”
하경이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별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해서였다. 유현과 하경은 서로의 어머니를 잘 챙기면서도 굳이 생색은 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성향을 알기에 두 어머니가 대신 나서서 생색을 내기 바빴다. 심 여사가 웃으면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나저나, 너희 결혼식은 언제 할 참이야?”
“안 하기로 했어요.”
유현의 대답에 하경이 한마디 보탰다.
“웨딩 촬영만 하려고요, 어머니.”
“결혼식을 안 하면 아쉽지 않을까?”
“저희 둘 다 결혼식에 대한 로망은 없거든요. 근데 웨딩드레스는 안 입어 보면 서운할 것 같아서 웨딩 촬영만 하자고 했어요, 제가.”
결혼식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복잡한 양가 가족 관계 때문이었다. 하경은 홍 관장을 혼주 자리에 앉힐 마음이 없었고, 유현은 부모님의 이혼과 별개로 아버지와 형을 결혼식에 부를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아예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다음 달쯤 할 생각이에요. 두 분도 같이 사진 찍으셔야 하니까 대강 날짜 정해지면 다시 의논드릴게요.”
심 여사와 명선은 하경이 왜 다음 달을 말하는지 곧바로 눈치챘다. 다음 달은 주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만 1년이 되는 달이었다. 심 여사는 하경에게서 시선을 떼고 유현을 돌아보았다.
“신혼집은 따로 마련 안 해? 지금처럼 계속 하경이 아파트에서 지낼 거야?”
“그러려고요.”
“…….”
시어머니의 표정이 밝지 않은 이유를 짐작한 하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 유현이가 저희 집에 얹혀사는 것 같아서 마음 불편하세요?”
“솔직히 조금 그러네.”
심 여사는 아들이 며느리 집에 몸만 들어가서 산다는 사실이 예전부터 신경 쓰였다.
“유현이가 저한테 아주 큰 결혼 선물을 해 줬거든요. 그래서 지금 돈이 없어요.”
“결혼 선물?”
심 여사의 눈에 의문이 들어찼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급하게 처분할 수 있는 거 다 처분하고, 있는 돈 싹싹 다 긁어모아서 주원 호텔 주식 샀어요.”
심 여사도 하경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고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혼집을 마련하는 것보다 더 나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하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심 여사의 얼굴에 돌연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 아들, 엄마가 용돈 좀 줄까?”
“주시면 감사히 받을게요.”
유현이 능청스럽게 받아치자, 명선도 질세라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사위, 나도 용돈 좀 줘야겠다.”
“많이 주세요.”
하경이 난감한 표정으로 유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우리 남편 거지 만든 분위긴데?”
“어, 남편 거지 됐어.”
“남편, 미안. 내가 평생 책임질게.”
“꼭 약속 지켜.”
“응.”
하경은 그의 새끼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쓱 걸면서 웃었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지키고 싶은 약속은 처음이었다. *** 그날 밤, 하경은 유현을 소파에 앉히고 그 옆에 따라 앉았다.
“나 너한테 중요하게 할 말 있어.”
그녀의 표정은 아주 비장했다.
“해.”
“혼인 신고 하기 전에 의논하고 합의했었어야 했는데…….”
하경이 면목 없다는 듯 말끝을 늘였다.
“혹시 혼전 계약서, 뭐 이런 거야? 재산 문제 신경 쓰여?”
“그런 거 아니야.”
그녀 주위에는 재산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혼전 계약서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하경은 유현이 제 재산을 탐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정도 믿음과 확신 없이 덜컥 혼인 신고를 할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다.
“속았다고, 결혼 무르자고 할지도 몰라.”
유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뭔데 그래. 나 사기 결혼 당한 거야?”
하경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어쩌면.”
유현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무슨 얘긴지 듣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할게.”
그의 말투는 방금 전과 달리 아주 진지했다.
“주하경에게 어떤 결격 사유가 있었다고 해도,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야. 사기 결혼이라도 기꺼이 했을 테니까 편하게 말해.”
하경은 그의 격려에 힘입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놓았다.
“나 아이 낳고 싶지 않아.”
유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은 적은 없어도 어느 정도 예상했었기에 그저 담담했다.
“딩크로 살고 싶어?”
“응, 남들은 남편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던데 난 아니야. 그냥 남편만 있으면 돼.”
하경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매일 일에 치여 사는 처지라 아이를 갖고, 낳고, 키울 여력도 없었다. 낳기만 하면 돈으로 키울 수야 있겠지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할 바에야 낳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며, 아주 오래된 결심이기도 했다.
“너무 늦게 말해서 미안해. 혼인 신고를 갑자기 하게 되는 바람에 의논할 여유가 없었어. 날 잡아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벌써 1년이 다 돼 가네.”
사실 아이 문제는 결혼 전에 이야기를 끝냈어야 했다. 왜 이제 와서 말하는 거냐고 유현이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말고도 중차대한 일들이 줄줄이 일어났기에 아이 문제까지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제 네 생각을 말해 봐. 혹시 아이 좋아해?”
유현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
“만약 내가 아이를 좋아하고, 우리 사이에도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면 어쩔 거야? 이혼하자고 할 건가?”
“그건 안 되지!”
하경이 대뜸 언성을 높이자, 유현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었다.
“안 되지?”
“응.”
이혼은 그녀의 선택지에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있었다. 물론 유현의 생각도 같았다.
“된다고 하면 화내려고 했어.”
“아이 문제는 부부가 서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네 생각이 나랑 다르다면 내 의견만 고집하지는 않을 거야.”
세태가 달라지고 있긴 해도, 아직은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하경은 유현이 그 대다수에 속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에게 제 결정에 따르라고 강요할 생각도 없었다. 일단 그의 생각을 들어보고 난 뒤에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볼 작정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
하경을 바라보는 유현의 눈빛은 차분하고 온화했다.
“나도 아이 안 좋아해. 주하경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내 사랑과 관심을 나눠주고 싶지도 않고.”
아내를 향한 사랑과 자식을 향한 사랑이 다른 종류의 것임을 모르지는 않았다. ‘제로섬’ 관계가 아니라는 것도. 자식에게 사랑을 준다고 해서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줄어드는 건 아니겠지만, 마음이 아닌 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시간은 한정적이고 눈은 두 개뿐이니 자식을 보느라 아내를 덜 볼 수밖에 없었다. 귀도 두 개뿐이라 자식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면 아내의 말은 조금 덜 들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손도 두 개뿐이라 자식을 쓰다듬어 주려면 아내는 그만큼 덜 쓰다듬어 줄 수밖에 없을 테고. 사랑을 속삭이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아이가 생기면 하경에게 지금만큼 집중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난 지금 생활에 아주 만족해.”
하경은 원하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기쁘지가 않았다.
“내 마음 편하게 해 주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고?”
유현은 그녀의 좁아진 미간을 손끝으로 살살 문지르며 되물었다.
“솔직히 말하라고 해서 솔직히 말한 것뿐인데 이 의심의 미간은 뭐지?”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지. 이렇게 나랑 성향이 딱 맞기가 어디 쉬운가?”
“그럼 천생연분이구나, 좋아해야지 왜 의심부터 해.”
듣고 보니 그랬다.
“어머, 우리 천생연분이구나.”
하경의 얼굴에 그제야 흡족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제 알았어?”
“알고 있었는데 새삼 또 알게 됐어.”
배시시 웃던 그녀가 갑자기 멈칫했다.
“근데 만약에 내가 아이를 낳고 싶어 했다면?”
유현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낳자고 했겠지.”
하경의 미간이 좁아질 기미를 보이자, 그가 얼른 말을 이었다.
“임신과 출산에는 여자의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네가 아이를 낳고 싶어 했다면 난 당연히 네 뜻에 따랐을 거라는 뜻이야. 아이를 안 좋아한다는 거지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하경은 빙긋 웃으면서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어쩜 이렇게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지.”
“그럼 예뻐해 주든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유현을 슬쩍 밀어 소파에 눕힌 그녀의 입술 사이로 고혹적인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밤새도록.”
그가 만족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