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금욕적인 얼굴과 금욕적이지 않은 몸,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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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금욕적인 얼굴과 금욕적이지 않은 몸2020.12.20.
유현과 하경은 계획대로 속초에서 하룻밤 자고 동이 트기 전에 서울로 출발했다. 심 여사는 며칠 더 머물기로 했다. 유현은 운전을 하면서 조수석을 흘긋 돌아보았다. 하경이 반쯤 감긴 눈으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좀 자.”
“싫어. 고통 분담할 거야.”
“그런 거 분담 안 해도 돼. 난 하나도 안 졸리니까 눈 좀 붙여.”
그는 오른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려 버렸다.
“안 잘 거라니까.”
유현의 손을 잡아 내린 하경은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내 주위에서 가장 금욕적인 삶을 사는 분.”
“누구? 나?”
“응, 너.”
“전혀 공감이 안 가는데.”
“잠도 많이 안 자고, 밥도 많이 안 먹잖아.”
새벽 1시가 넘어서 같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왜 그의 얼굴에는 잠기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식욕이나 수면욕만 별로 없을 뿐이지, 다른 욕구는 아주 왕성한데도 금욕적이라고 할 수 있나?”
“아…….”
하경은 그제야 자신이 중요한 욕구를 빼놓고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침대 위에서의 그는 참 모순적이었다. 금욕적인 얼굴과 금욕적이지 않은 몸. 그래서 더 섹시하게 보이는 건지도 몰랐다. 일종의 ‘질량 보존의 법칙’으로 결론 내린 그녀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속초 오자고 하길 잘했지?”
“어, 잘했어.”
“난 두 분이 금방 가까워지실 줄 알았다니까.”
갑작스러운 속초행을 추진했던 당사자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데?”
“너랑 내가 이렇게 잘 맞는데 우리를 낳아주신 엄마들끼리 안 맞을 리가 없잖아?”
“이렇게 비논리적인 말, 오랜만에 듣네.”
“논리 좀 없으면 어때. 두 분이 친해지신 게 중요하지.”
“고마워. 며느리 덕분에 어머니께서 덜 힘드실 거야.”
이혼은 어머니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기를 수월하게 잘 넘기고 있는 건 하경의 노력 덕분이기도 했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대리 효도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해 놓고 은연중에 부담을 준 건 아닌가 싶기도 한데…… 만약 그랬다면 미안해.”
“한 번도 부담 준 적 없거든요? 어머니께서 예뻐해 주시니까 나도 잘하고 싶은 것뿐이야.”
“예쁜데 어떻게 안 예뻐해.”
“자, 그럼 쓰담쓰담.”
하경은 운전석 쪽으로 머리를 슬쩍 들이밀었다. 유현이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내를 향한 애정이 날이 갈수록 커져서 가슴이 뻐근할 정도였다. 멋지고 아름다운 여자인 줄만 알았는데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뭐냐고 누가 묻는다면 이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었다.
“눈에 잠이 가득해. 괜히 버티지 말고 얼른 자.”
“안 잘 거라니까. 잠 다 깼어.”
단호한 말이 무색하게, 하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세상모르고 자던 그녀가 눈을 뜬 건 서울에 도착한 직후였다.
“……뭐야. 나 잔 거야?”
“아주 푹 주무셨어요.”
이미 환해진 바깥을 두리번거리던 하경은 머쓱한 표정으로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집에 가서 씻고 준비하면 시간 딱 맞겠네.”
몇 시인지 확인했으니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사를 훑어보기로 했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까딱거리면서 포털 사이트에 접속한 그녀의 눈에 익숙한 이름이 들어왔다.
“어?”
유현은 조수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네 형, 음주 운전 했대.”
“…….”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깐만. 기사 좀 읽어 보고.”
하경은 「국회의원 손민건, 음주 운전 중 가로등 들이받아」라는 헤드라인을 클릭했다. 기사를 다 읽고 나서야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어젯밤에 불구속 입건됐고, 혈중 알코올 농도는 면허 취소 수준인 0.118,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다고 하네.”
“…….”
유현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목 끝까지 욕이 차올랐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한심하게 살 거냐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머니께서 걱정하시겠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하경은 운전석을 흘끔 돌아보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차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유현은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막 주차를 마쳤을 때, 그의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어머니’였다.
“네, 어머니.”
[유현아, 기사 봤어?]
“봤어요.”
[민건이 어쩌니…….]
유현은 형이 조금도 걱정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걱정 가득한 말에 호응할 수가 없었다.
“인명 피해가 없어서 천만다행이에요.”
[저기 유현아…….]
“말씀하세요.”
[네 형 말이야. 혹시 실형…… 살고 그러는 건 아니지?]
“기사에 나온 내용이 다라면 아마 벌금형으로 끝날 거예요.”
[다행이다…….]
유현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구속이든, 실형이든, 형이 다시는 술 마시고 운전할 생각을 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벌을 받길 바랐다. 음주 운전은 본인의 목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갈 수도 있는 범죄니까. 그렇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자신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제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저 출근해야 해요, 어머니.”
[어머, 내 정신 좀 봐. 그래. 얼른 출근해.]
“들어가세요.”
휴대 전화를 귀에서 뗀 순간, 하경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형 걱정하시는 건 당연해. 싫은 티 내지 마.”
“티 났어?”
“너 싫은 티, 못 숨기잖아.”
“이제 잘 숨겨볼게.”
“나한테는 안 숨겨도 되는 거 알지?”
“알아.”
그는 조금 전 제 침묵이 그녀를 숨 막히게 했으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민건이 음주 운전을 한 다음 날, 또다시 그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했다. 유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 글에는 그가 해림에게 했던 만행들이 낱낱이 쓰여 있었다. 아이를 지우라고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는 녹취록까지 공개되었다. 민건이 평소에 성실하고 진중한 이미지를 내세웠기에 비난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여론이 들끓자, 당 수뇌부는 그에게 자진 탈당을 권유했다. 당내 입지가 좁아진 손 의원도 막아주지 못했다. 민건이 울며 겨자 먹기로 탈당하고 나서야 그와 관련한 기사가 한풀 꺾였다. 그런데 며칠 뒤, 손 의원의 이름이 뉴스 섹션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들의 음주 운전을 조용히 덮어달라고 경찰서장에게 청탁한 정황이 뒤늦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민건의 음주 운전보다 청탁이 훨씬 더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결국 그는 당 대표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부자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듯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다. *** 유현은 아버지와 형이 추락하는 모습을 씁쓸하게 지켜보았다. 인연을 끊었다고는 해도 사람인 이상 마음이 좋지 않은 건 당연했다. 해림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손 의원이 당 대표 자리를 내려놓은 날이었다.
[오빠, 나야. 잘 지내지?]
“어, 넌 어때?”
[손민건이 우리 아빠한테 전화해서 내가 임신했었다고 일러바치기 전까지는 잘 지냈어.]
“그런 일이 있었구나…….”
유현은 다 잊고 살겠다던 해림이 왜 갑자기 형의 만행을 폭로했는지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지렁이가 꿈틀한 정도가 아니라 태풍이 쓸어버린 수준이었다. 형의 정치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버지까지도 그 태풍에 휩쓸려버린 셈이었다.
“부모님께서 많이 놀라셨겠네.”
[두 분 다 식사도 못 하시고 잠도 못 주무시면서 힘들어하셨어. 근데 이제 꽤 담담하셔.]
“너는?”
[나도 이제 괜찮아. 글 올린 것도 후회 없고. 고소당하면 그때는 후회하게 될지 몰라도.]
해림의 웃음에는 체념과 허탈이 짙게 배어 있었다.
“법적으로 대응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내가 도와줄게.”
[솔직히 조금 무서웠는데 오빠가 그렇게 말해 주니까 든든하네.]
“언제든 연락해.”
[고마워, 오빠. 나 다시 잘 지내보려고 해.]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시끄럽게 해서 미안해. 이 말 하려고 전화해 놓고 딴소리만 실컷 했네.]
“내가 필요하면 전화하고, 몸 건강히 잘 지내.”
[응, 오빠도.]
유현은 형에게 고소당했다는 해림의 전화를 받지 않게 되기를 바라면서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 그로부터 일주일 뒤, 유현은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합의해 줄 테니까 소송 접어라.]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부터 갔다.
“재산 분할은요?”
[그건 변호사랑 상의하면 될 일이고, 일단 그 전에 네 엄마를 한번 만나고 싶다.]
유현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것도.
“제가 따라갈 겁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내일 저녁에 어머니 모시고 집으로 가겠습니다.”
뚝. 아무 말 없이 전화가 끊겼다. 이튿날 저녁,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본가로 갔다. 늘 깔끔했던 집이 지저분하고 어수선했다. 식탁 위에는 뚜껑도 덮지 않은 반찬통과 그릇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개수대에는 설거짓거리가 잔뜩 싸여 있었다. 주기적으로 가사 도우미를 부르던 집이라면 모를까, 심 여사 혼자서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해 온 터라 집 상태가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심 여사는 손 의원과 가장 멀리 떨어진 소파에 살짝 걸터앉았다. 유현은 소파 근처에 섰고, 민건은 그를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면서 식탁 의자에 앉았다. 퀭한 눈으로 아내를 보고 있던 손 의원이 말문을 열었다.
“당신, 정말로 이혼할 거야?”
심 여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합의해 준다더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꼭 이혼을 해야겠냐고.”
“할 거예요.”
“지금 나랑 민건이 사정 뻔히 알잖아. 유현이랑 짝짜꿍이 돼서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지금 편 가르기 하고 있는 줄 알아요?”
심 여사는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혼을 결심했는지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한 남편 때문에 맥이 쭉 빠졌다.
“알았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이제 그만 집에 들어와.”
“…….”
“이제 손도 안 올리고, 소리도 안 지를 테니까 들어오라고.”
손 의원은 이혼 문제로 또 한 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가정만큼은 편안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다.
“난…….”
심 여사가 입을 떼기 무섭게 민건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머니, 제발요. 저 요새 너무 힘들어요.”
심 여사는 남편의 말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 속으로 낳은 아들의 애원에는 마음이 흔들렸다. 제 발아래 무릎 꿇고 앉아서 제 손을 부여잡고 있는 민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심 여사가 한참 만에 입술을 열었다.
“민건아, 엄마는 네 아버지랑 헤어지고 싶어.”
이번에 포기하면 다시는 용기 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민건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참 이기적이시네요. 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래. 마음대로 할게.”
심 여사는 민건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현이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 이혼과 재산 분할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심 여사는 꽤 많은 재산을 받았고, 그중 일부로 서울에 아파트를 한 채 마련했다. 하경의 집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그 집에서 지냈고, 속초에 가면 하경의 친모인 명선의 집에서 지냈다. 반대로, 명선이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올라오면 심 여사의 집에 머물렀다. 딸의 집에서 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은 서울과 속초를 오가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친자매가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느지막이 만난 그들은 사돈 관계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자식 덕분에 평생의 인연을 만나게 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