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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75화 (75/79)

75화. 손유현 변호사,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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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손유현 변호사2020.12.17.

“이혼 소송, 제가 맡기로 했습니다.”

유현은 이혼 전문 변호사를 선임하려고 했다. 어젯밤, 하경이 변호사를 추천하겠다면서 제 이름을 말하기 전까지는.

“손유현 변호사 어때?”

“이혼 소송, 내 전문 분야 아니야.”

“그래도 너만큼 최선을 다할 변호사 찾기 힘들걸?”

듣고 보니 수긍이 갔다. 그래서 직접 나서기로 했다. 전문 분야가 아닐 뿐이지 하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물론 제 결심이 아버지를 더 분노하게 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의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제 엄마가 헛소리를 하고 있는데 정신 차리라고는 못 할망정 뭘 해? 이혼 소송을 맡아?”

아버지가 노발대발하거나 말거나 유현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저만큼 열과 성을 다할 변호사는 없을 테니까요.”

“세상천지에 어떤 자식이 제 부모 이혼시키는 데 열과 성을 다해!”

“찾아보시면 꽤 많을 텐데요.”

“…….”

목덜미가 뻣뻣해진 손 의원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현을 상대할 때면 늘 이렇게 혼자 흥분해서 날뛰다가 혼자 지쳐버리곤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산 분할, 염두에 두고 계셔야 할 겁니다.”

“집에서 애 키우고 살림이나 한 여자한테 재산 분할은 무슨.”

실소를 흘린 손 의원이 심 여사를 향해 버럭 역정을 냈다.

“당신한테 줄 돈 같은 거 없어! 정 이혼하고 싶으면 맨몸으로 나가!”

유현은 흠칫 몸을 떠는 어머니를 제 뒤에 서게 했다.

“변호사에게 물어보시죠. 재산 분할이라는 게 아버지가 주기 싫다고 해서 안 줄 수 있는 건지.”

날이 갈수록 막무가내가 되어가는 아버지 때문에 속이 답답했다. 마치 벽을 보고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전 어머니께서 헌신해 오신 삶을 돈으로라도 보상받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남들도 다 그러고 살아. 누가 들으면 무슨 대단한 일 한 줄 알겠네.”

“그건 아버지가 판단하실 문제가 아니고요.”

“그래.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 봐라. 난 뭐 손 놓고 있을까 봐?”

“저도 이번에는 아버지를 따라 해 볼 생각입니다.”

“날 따라 한다고? 뭘?”

“아버지가 잘하시는, 언론플레이.”

손 의원은 눈엣가시 같은 사람이 있으면 친한 기자들에게 악의적인 기사를 사주했다. 설사 잘못한 게 없어도, 교묘하게 왜곡된 기사 몇 개만으로도 한 사람을 매장하는 게 가능했다. 지금 유현이 그것을 하겠노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주 나랑 끝장을 보자는 거구나.”

손 의원은 이제 언론에 노출되는 게 지긋지긋했다. 보도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아무 상관 없었다. 그냥 다 싫었다. 검찰 조사, 기소, 재판, 이런 문구들로 도배된 뉴스나 기사를 보고 싶지 않아서 요즘은 TV도 잘 켜지 않고 신문도 잘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이혼 기사까지 나올 거라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말년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요즘 문득문득 유현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곤 했다. 적당한 선에서 끝냈다면 지금 이런 고초를 겪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제 성질에 못 이겨서 인생 최악의 선택을 한 셈이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후회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최악이 있다고 해도 제 잘못을 인정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합의하신다면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어림없는 소리. 합의 같은 거 절대 안 한다.”

“그럼 소송으로 가는 수밖에 없겠네요. 변호사가 알려드리겠지만, 소송 제기 전에 아버지 명의 재산에 가압류와 가처분 신청부터 할 겁니다.”

“…….”

손 의원은 뒷골이 당겨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문득 유현이 처음 사법시험을 보겠다고 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아들 중 하나가 법조인이면 여러모로 좋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법조인 아들과 대립하게 되면 얼마나 골치 아파질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저희는 소송으로 가도 아무 상관 없지만, 혹시라도 합의할 마음이 생기시면 연락 주세요.”

할 말을 마친 유현은 심 여사를 돌아보았다.

“짐 챙겨 나오세요, 어머니.”

“그래.”

손 의원은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아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참한 아내와 잘난 아들들은 제 위신을 세워주는 존재였다. 유현으로 인해 한 부분이 무너져 내렸건만 이제 아내가 다른 쪽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벌써 허탈하고 허무했다.

“너 정말 나랑 인연을 끊기라도 할 셈이냐.”

“이미 끊어졌다는 걸 모르셨나 보네요.”

유현은 천륜을 절대 끊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친부라고 해도 안 보고 살 수 있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던 게 어머니였는데 이제 그것도 벗어버릴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손 의원보다 그가 더 독하고 매정했다. *** 그날 저녁, 유현은 민건의 전화를 받았다.

[하다 하다 이제 어머니한테 아버지랑 이혼하시라고 부추겨?]

집을 나온 어머니에게 전화 한 통 없었던 형과는 말 자체를 섞고 싶지 않았다.

“형이랑 할 얘기 없어. 끊어.”

그는 전화를 뚝 끊어 버리고 거실로 나갔다. 아내와 어머니가 소파에 마주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만큼 보기 좋았다. 뭐가 저리도 재미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유현이 걸음을 멈춘 순간, 하경이 깜짝 놀란 얼굴로 목청을 높였다.

“정말요?”

심 여사가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던 비밀을 수줍게 털어놓았다.

“집에 유명선 작가님이 내신 수필집 전부 다 있어.”

“저희 엄마인 거 알고 계셨어요?”

“알고 있었지. 유현이 아버지랑 돌아가신 사돈어른이랑 너 태어나기 전부터 알던 사이였거든. 그래서 넷이 같이 식사한 적이 한 번 있었어. 너희 어머니가 글 쓰신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됐고.”

“아…….”

하경은 그렇게 오래된 인연을 무참히 끊어 버린 손 의원이 새삼 섬뜩하게 느껴졌다.

“한 10년쯤 지났을 때였나.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수필집을 내신 걸 보게 됐어. 그때부터 나 혼자 짝사랑해 왔지 뭐야.”

하경의 눈에 비친 심 여사는 마치 소녀 같았다.

“사실, 엄마한테 어머니 얘기 들은 적 있어요.”

“내 얘기 뭐?”

“엄마도 똑같은 얘기 하시던데요? 어머니랑 같이 식사한 적 있다고. 어머니께서는 기억 못 하실 거라고 하셨는데 기억하시네요.”

1시간 남짓 만났을 뿐인데도 따뜻한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시어머니에 대한 이미지가 더 좋았는지도 몰랐다.

“언제 한번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

심 여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경이 휴대 전화를 손에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머니, 잠시만요.”

하경은 의문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소파를 벗어났다. 소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유현을 발견하고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어디 가?”

대답 대신 빙긋 웃어 보인 하경은 그의 곁을 휙 지나쳐갔다. 몇 분 뒤 침실에서 나온 그녀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머니, 지금 속초 가실래요?”

마주 앉아 있던 모자가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다.

“속초?”

“속초?”

하경은 사뿐사뿐 소파로 걸어가서 유현의 옆에 걸터앉았다.

“엄마도 어머니 뵙고 싶대요. 바다도 보고 맛있는 것도 드시면서 며칠 쉬다 가시라는데 어떠세요?”

심 여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되물었다.

“네가 강요했지?”

“아니에요. 엄마도 어머니 꼭 뵙고 싶다고 하길래 말 나온 김에 빨리 만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밖에 없어요.”

하경이 뻔뻔하게 부인하자, 심 여사는 유현에게 공을 넘겼다.

“엄마는 제안을 빙자한 강요라고 보는데 네 생각은 어때?”

“누가 봐도 강요네요.”

하경은 제게 모인 두 사람의 시선을 모른 척 외면했다.

유현은 하경에게서 시선을 떼고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근데요, 어머니.”

“응?”

“어머니가 놓치신 게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뭘 놓쳤는데?”

“조금 전에 하경이가 ‘지금 속초 가실래요?’라고 했어요.”

그는 가장 중요한 두 글자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지금.”

심 여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하경이 나서서 제 계획을 신나게 풀어놓았다.

“지금 출발하면 10시 좀 넘어서 엄마 집에 도착할 거예요. 저희는 어머니랑 같이 엄마 집에서 하루 자고, 아침 일찍 올라와서 출근하면 될 것 같아요. 어머니는 가 보고 괜찮다 싶으시면 속초에 며칠 더 계시고, 불편하시면 내일 저희랑 같이 올라오시면 되지 않을까요?”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난감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면서도, 심 여사의 마음은 벌써 속초로 달려가고 있었다. 30년 전에 고작 밥 한 번 먹은 게 다인 사돈의 집에 간다는 게 왜 불편하고 꺼려지지 않는지 신기했다.

“며칠 놀다 가시라는 말은 엄마가 먼저 한 거예요.”

심 여사가 벌떡 일어섰다.

“서둘러야겠다. 옷 갈아입고 나올게.”

손님방으로 향하는 심 여사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즉흥적으로 어딘가로 떠난다는 게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는 일일 줄이야.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 세 사람이 속초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민건은 단골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김해림…….”

씹어뱉듯 읊조린 이름에 담긴 감정은 원망이었다. 주원 호텔 사위 자리가 날아가고, 아버지가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한 것으로도 모자라 부모님은 황혼 이혼까지 하게 될 상황이었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은 해림이었다. 그녀로 인해 제 인생이, 제 집안이 망가졌다는 생각뿐이었다. 가슴 속에 꽉 찬 분노를 어딘가에 쏟아내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신경질적으로 술잔을 내려놓은 민건은 휴대 전화를 집어 들어 해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안 받아?”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집요하게 매달린 끝에 해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통화 버튼을 아홉 번째 눌렀을 때였다.

[나한테 할 얘기가 남았어?]

해림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김해림,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얼마나 꼬였는지 알긴 하냐?”

[…….]

“내 말 듣고 있냐? 어?”

뚝.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여보세요? 야!”

민건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게 진짜…….”

술과 분노로 이성이 마비된 그는 해림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게 날 왜 건드려.”

민건은 해림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부모님에게 임신과 유산 사실을 들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상대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부분을 공략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그는 휴대 전화 주소록을 뒤져서 해림의 아버지 번호를 찾았다. 제 아버지의 보좌관이었던 시기에 저장해 둔 번호였다. 번호가 바뀌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전화를 걸었더니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건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맺혔다.

“민건이에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 드렸어요.”

그는 해림의 아버지에게 해림과 제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말해 주었다. 제게 향하는 비난을 줄이기 위해 합의되지 않은 임신이었음을 강조했다. 해림과 결혼할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는 말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해림의 아버지를 충격에 빠뜨리고 전화를 끊은 민건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면서 클럽 밖으로 나간 그에게 직원이 따라붙었다.

“대리 불러드리겠습니다.”

“됐어. 나 하나도 안 취했어.”

“의원님.”

“안 취했다고!”

민건은 운전석 문 앞을 가로막는 직원을 옆으로 휙 밀어버렸다. 직원도 더는 그를 말리지 못했다. 운전석에 오른 그는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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