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부창부수,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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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부창부수2020.12.10.
하경도 놀란 얼굴로 유현을 따라 일어섰다. 초조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그가 통화를 마치기 무섭게 말문을 뗐다.
“왜? 무슨 일 있으시대?”
“자세한 말씀은 안 하시는데 집을 나오신 것 같아. 데리러 와 달라고 하셨어.”
“…….”
하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심 여사와 손 의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유현은 그 말만 남기고 곧장 현관으로 걸어갔다. 차 키만 챙겨 나갈 생각이었다. 하경이 얼른 그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내가 따라가면 어머니께서 불편해하실 수도 있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은 몰라도 안 좋은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이럴 때 며느리 얼굴을 보는 게 편치만은 않을 것 같았다. 일단은 아들과 단둘이 이야기 나눌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걸음을 멈춘 유현이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하경은 침착하고 신속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안 따라갈게. 대신, 계실 곳 필요하면 여기로 모셔와.”
“그런 상황이면 호텔이나 오피스텔로 가면 돼.”
“어머니 혼자 계시게 하지 말고.”
“…….”
“내 말 들어.”
유현은 더 고집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알았어.”
원하는 대답을 들은 하경이 그를 돌려세웠다.
“빨리 가. 어머니 기다리시겠다.”
멈췄던 발걸음을 뗀 유현은 신발에 발을 꿰면서 현관 옆 선반 위에 놓인 차 키를 집어 들었다.
“다녀올게.”
급하게 집을 나온 그가 간 곳은 본가 근처 작은 공원이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공원 안으로 들어서니, 입구 근처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중년의 여자가 보였다. 집에서 즐겨 입는 고무줄 치마에, 손에는 휴대 전화만 들려 있었다.
“어머니!”
유현은 한달음에 벤치로 달려갔다. 고개를 돌린 심 여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저었다.
“뛰지 마. 넘어져.”
그는 콧날이 시큰해졌다. 내가 넘어질까 봐 걱정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 어머니 말고 또 누가 있을까. 하경도 이런 걱정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자식의 나이가 몇이든, 어머니 눈에는 한평생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심 여사 옆에서 멈춰 선 유현의 얼굴이 돌연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피딱지가 엉겨 붙은 어머니의 입술을 보면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굳이 아버지의 짓이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눈을 내리깐 심 여사의 입에서 나직한 말이 흘러나왔다.
“네 아버지, 요새 속이 많이 시끄러운 모양이야. 오늘 유독 술을 많이 마시길래 말리다가…….”
차마 따귀를 맞았다는 말까지 할 수가 없어서 뒷말을 흐렸다. 유현은 숨을 고르고 조용히 벤치에 앉았다.
“얼떨결에 핸드폰은 집어 들고 나왔는데 지갑까지 챙길 정신이 없었어. 그래서 너한테 전화한 거야.”
수중에 신용카드라도 한 장 있었다면 유현을 부르지 않았을 거였다. 아들 볼 낯이 없었다.
“잘하셨어요.”
유현에게는 어머니가 지갑을 챙길 정신이 없었던 게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두 손으로 꼭 쥔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고 있던 심 여사가 슬쩍 유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엄마, 네 오피스텔에 좀 가 있으면 안 될까?”
“안 돼요.”
그는 고민해 볼 여지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랐다.
“혹시 정리했어?”
“아직이요.”
“그럼 왜…….”
“하경이가 집으로 모셔오라고 했어요.”
심 여사가 커진 눈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이 꼴로 하경이 얼굴을 어떻게 봐.”
“저 집에 돌아가면 하경이한테 솔직히 다 말할 거예요. 어차피 하경이도 알게 될 일이니까 편하게 생각하세요.”
“…….”
사실 심 여사는 지금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오늘만이라도 아들 곁에 있고 싶었다. 심적으로 많이 놀라고 지친 탓인지 심장이 연신 펄떡거렸다. 불안하고 무서웠다. 그러나 차마 며느리 집에 가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일어나세요. 가요.”
어머니가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챈 유현이 먼저 일어섰다.
“유현아, 잠깐만. 엄마가 해야 할 말이 있는데…….”
그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하세요.”
심 여사는 심호흡을 하고서 제 결심을 차분하게 털어놓았다.
“네 아버지랑 그만 살고 싶어.”
심 여사의 표정과 어조는 사뭇 단호했다. 그녀는 결코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결심이 확고해지지 않으면 섣불리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입에 올렸다는 건 마음이 변치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이혼하고 싶다는 말씀이세요?”
“응, 이혼하려고.”
오늘 일만으로 마음을 굳힌 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해 온 생각이었다. 남편의 무시와 폭언이 시작된 결혼 초반부터. 세월이 흐르면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살았다. 헛된 기대라는 걸 깨닫고 난 후에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애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나면, 애들 결혼만 시키고 나면…….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유현의 말대로 폭력의 강도는 더 세지면 세졌지 약해지지 않았다. 이제 더는 참고 살 마음이 없었다.
“그러세요.”
유현은 흔쾌히 어머니의 뜻에 동조했다.
“미안하다. 부모가 돼서 좋은 모습은 못 보여주고…….”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강요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그는 어머니 스스로 결심하기를 기다렸다.
“어머니가 참고 사시는 모습이 더 보기 안 좋아요. 잘 생각하셨어요.”
아들의 투박한 위로가 심 여사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잘 생각했다는 말을 듣고 나니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홀가분한 마음도 잠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니 다시 심란해졌다.
“네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할 거야.”
“그러시겠죠.”
앞으로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소송으로 가야 할 거예요. 각오하신 거죠?”
“그럼.”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면서 그런 각오도 없이 이혼을 결심할 만큼 미련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추천해 줄 만한 변호사 있을까?”
“음…….”
유현이 생각에 잠긴 사이, 심 여사는 괜한 말을 꺼냈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니다, 유현아. 그냥 너랑 아무 상관 없는 변호사를 찾는 게 나을 것 같아. 네가 망신스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어.”
“조금도 망신스럽지 않아요.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유현은 원래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하물며 어머니의 남은 인생과 행복이 걸려 있는 일이었다. 그럴 이유도 없지만, 만약 세상 모두의 지탄을 받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변호사는 제가 알아볼게요. 저한테 맡기시고 어머니는 마음 편히 계세요.”
“바쁠 텐데 엄마가 알아서 할게.”
“어머니한테 알아서 하시라고 할 만큼 바쁘지 않아요. 제가 해요.”
딱 잘라 말한 그가 당부의 말을 건넸다.
“아버지 절대 혼자 만나지 마시고요.”
“알았어.”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그만 가요.”
“그래.”
두 사람은 벤치에서 일어나 나란히 걸었다. 차를 주차해 둔 곳에 도착한 유현은 한 걸음 앞서가서 뒷좌석 문을 열었다.
“타세요.”
심 여사가 순순히 차에 타자, 유현은 문을 닫아 주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운전석에 오른 그가 뒤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병원에 좀 들렀으면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심 여사가 당황한 눈으로 유현을 바라보았다. 따귀 한 대 맞은 것으로 무슨 병원이란 말인가.
“병원을 왜 가. 엄마 멀쩡해.”
“진단서 떼러요.”
“아, 진단서…….”
소송 때문이라는 건 짐작이 갔지만, 굳이 진단서까지 떼야 하는 건가 망설여졌다. 의사 앞에서 남편에게 맞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수치스러웠다.
“내키지 않으시면 안 가도 돼요. 있으면 도움은 되겠지만 없다고 큰일 나진 않아요.”
심 여사의 머릿속에 문득 15년 전쯤 이혼한 친구가 떠올랐다. 이혼 소송을 옆에서 지켜보니,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이었다. 친구는 상대의 밑바닥을 보는 기분이라고 했다. 인간에 대한 환멸까지 느껴진다던 말도 기억났다. 호락호락 이혼해 주지 않을 남편을 상대로 이혼을 결심해 놓고 이것저것 따지고 꺼린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고민을 끝낸 심 여사가 입을 열었다.
“병원에 들르자.”
진창에 구를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 하경은 이제나저제나 유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전화라도 해 볼까…….”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유현의 차가 지하 주차장 차단기를 통과했다는 알림이 들려왔다. 소파에 올라앉아 있던 그녀는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하경의 두 다리는 현관에서 멈추지 않았다. 슬리퍼를 챙겨 신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갔다. 엘리베이터 표시등을 들여다본 지 몇 분 지나고 나서야 1호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1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건 심 여사의 얼굴이었다. 유현은 조금 뒤에 서 있었다.
“어머니, 오셨어요.”
심 여사가 놀란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머, 왜 나와 있어.”
하경은 심 여사의 입술을 보자마자 무슨 상황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마중 나왔어요.”
“이렇게 불쑥 와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당연히 되죠. 제가 유현이한테 어머니 꼭 모셔오라고 협박했는걸요.”
하경은 심 여사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유현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잘했다는 칭찬의 의미였다.
“들어가요, 어머니.”
세 사람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하경은 시어머니에게 소파를 권하고 그 옆에 다소곳이 섰다.
“차 준비할게요. 따뜻한 게 좋으세요, 차가운 게 좋으세요?”
“차는 됐고, 좀 앉아 볼래? 할 얘기가 있어.”
“네.”
심 여사는 하경과 유현이 제 맞은편에 나란히 앉자마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경아, 나 이혼할 생각이야.”
“네, 어머니.”
하경의 즉각적이고 태연한 반응에 심 여사가 오히려 당황했다. 유현이 미리 말해줬을 리는 없었다. 같이 있는 동안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기사가 뜨면 네 이름까지 언급될지도 몰라.”
“괜찮아요, 어머니. 제 이름 백 번쯤 언급돼도 상관없으니까 어머니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심 여사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부창부수라는 말을 이럴 때 써야 하나? 어쩜 둘 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란 말조차 안 하네.”
하경이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셨을 텐데 굳이 왜요.”
유현은 아내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하고 있다는 뜻으로 등도 두드려 주었다. 심 여사는 흐뭇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혼을 결심한 날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아들과 며느리 덕분이었다.
*** 화기애애한 세 사람과 달리, 손 의원과 민건의 분위기는 팍팍했다.
“아버지, 어머니께 전화 한번 해 보세요.”
민건은 집에 있었으면서도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밤새 술을 마시고 아침에 들어와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도 1시간쯤 지나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내가 전화를 왜 해.”
손 의원은 아내가 괘씸했다. 감히 마시던 술병을 뺏은 것도, 따귀 한 대 맞았다고 뽀르르 집을 나간 것도.
“그러지 마시고…….”
“제 발로 나갔으니 제 발로 기어들어 오겠지. 시끄럽게 굴지 말고 나가.”
“…….”
민건은 책상 위에 쌓인 술병을 흘긋 보고 서재를 나갔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 같은 건 없었다. 숨 막히는 이 집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