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야릇하고 은밀한 시간,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71화. 야릇하고 은밀한 시간2020.12.03.
귀가 먹먹해졌다. 외도. 외도. 외도. 사고 회로가 정지한 듯, 한결의 머릿속에는 그 두 글자만 둥둥 떠다녔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제 현실을 맞닥뜨릴 시간.
“외도…… 상대가 누군지 알아?”
“홍 관장님 수행 비서.”
“…….”
한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길 바랐건만 10년을 보아 온 사람이 엄마의 내연남이라니. 아홉 살이나 어린 남자와 오래전부터 부적절한 사이였다니.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지방이든, 해외든, 일이라는 핑계만 대면 어디를 함께 다녀도 이상할 게 없었기에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님은 홍 관장님께서 어떻게 나오실지 짐작하고 계셨어. 그래서 돌아가시기 불과 며칠 전에 나랑 하경이한테 그 사실을 알려 주셨던 거야. 하지만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 때가 아니면 끝까지 묻어두길 바라셨어. 너 때문에.”
“…….”
한결의 동공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홍 관장님의 외도 사실을 공론화했다면 이 싸움이 훨씬 더 쉬웠으리라는 거 너도 알 거야. 근데 하경이도 네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힘들어할 거라고 많이 걱정했어. 그래서 심지어 홍 관장님께도 아는 척하지 않았던 거고. 입에 올리는 순간 더는 비밀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
한결은 그런 아버지와 누나에게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버지와 엮여서 검찰 조사를 받게 될까 봐 두려워 몸을 사렸고, 자신보다 유현을 더 신뢰하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누나에게 고약하게 굴던 제 모습도 생생히 떠올랐다.
“네 누나는 무기를 가지고도 끝까지 맨몸으로 싸웠어. 오로지 널 위해서였다는 거 잊지 마.”
유현은 한결이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을 보탰다.
“내가 오늘 너한테 진실을 얘기해 주는 건 임시 주총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
“누나가 이길 거라고 확신해?”
“어, 비겁하다는 말 듣기 싫어서 네 지분 없이도 이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던 거야.”
“그게 오늘이고…….”
한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테이블 위 어딘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허탈감이 짙게 배어나고 있었다. 제 술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단번에 들이켠 유현이 나직하게 말했다.
“난 내 아버지도 버렸어. 내 여자를 힘들게 한다면 누구라도 버릴 수 있어.”
“…….”
한결이 내리깔고 있던 눈을 천천히 들었다. 유현은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단호한 말을 덧붙였다.
“물론 너도.”
그 누구도 주하경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었다.
“내 와이프,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마라.”
이번에는 경고가 아닌 부탁이었다. 유현은 주하경, 주한결 남매가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하경은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일을 마무리 지었다. 신규 호텔 설립 허가가 난 덕분에 처리해야 할 일이 갑자기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더 바빠지겠지만 조금도 싫지 않았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호텔을 짓겠다는 아버지의 꿈에 한 걸음 다가섰으니까. 그 꿈을 이룰 때까지 쉬지 않고 달릴 생각이었다.
“아, 피곤하다.”
두 팔을 위로 쭉 들어 올리며 굳은 몸을 풀고 있던 그녀의 귀로 이사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하경이 그대로 굳었다.
‘누구지?’
모두를 반강제로 퇴근시켰기에 지금 문밖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보안 요원인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자정을 넘겨서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었던 적도 많았지만, 이제껏 보안 요원이 이사실 문을 두드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겁을 먹은 하경이 전화기로 손을 뻗은 순간, 문이 스르르 열렸다.
“……!”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던 그녀의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바로, 유현이었다.
“왜 들어오라고 안 해.”
하경은 그에게 곱게 눈을 흘기면서 투덜거렸다.
“들어오라고도 안 했는데 왜 들어와.”
“우리 마누라 혹시 일하다가 잠들었나 해서. 누가 업어 가면 큰일 나니까 내가 업어 가려고.”
유현은 빙긋 웃으면서 책상으로 다가갔다.
“놀랐단 말이야. 올 사람이 없는데 누가 문을 두드려서.”
유현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건, 그가 일이 거의 끝나갈 때쯤 전화하라는 말을 남기고 9시쯤 퇴근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아무도 없던데?”
“다들 요새 계속 늦게 퇴근해서 오늘은 억지로 보냈어.”
“주하경 이사님, 제법 괜찮은 상사란 말이야.”
하경은 제 옆에 와서 선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럼 계속 내 밑에 있을래?”
“아니, 난 위가 좋아. 누워 있는 우리 마누라 위에서 내려다보면 미치게 야하거든.”
“…….”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자, 하경의 얼굴에 장밋빛 홍조가 물들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유현의 얼굴도 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도 모르게 음란한 생각에 빠져들었던 그녀는 별생각 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일으켜 세워 주겠다는 의미인 줄 알았다. 일으켜 세워 준 것까지는 맞았다. 도로 앉힐 줄 몰랐을 뿐. 유현은 하경을 의자에서 일어나게 한 다음, 제가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제 다리 위에 앉혔다.
“아직 할 일 많아?”
하경은 제 목에 코를 비비적거리는 그의 뒷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아니, 집에 가려던 참이었어.”
“전화하라고 했잖아. 데리러 온다고.”
“가끔은 혼자 가도 돼. 귀찮게 뭘 매번 데리러 와.”
아무리 집과 회사가 가깝다고 해도 퇴근한 그를 다시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연락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갈 생각이었다.
“하나도 안 귀찮아. 그리고 오늘은 근처에 있었어.”
당연히 집에 있다가 데리러 오겠다는 뜻인 줄 알았던 하경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근처? 어디?”
“한결이랑 술 한잔했어.”
그녀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였다.
“혹시…….”
“어, 한결이한테 홍 관장님 외도 사실 말해 줬어.”
“왜 그랬어…….”
유현을 책망하는 게 아니라 한결이 얼마나 힘들까 걱정하는 어조였다.
“한결이, 애 아니야. 알 건 알아야지.”
“많이 놀랐지?”
“한결이가 감당해야 할 몫이야.”
“…….”
유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하경의 손을 지그시 잡고 눈을 맞췄다.
“내 멋대로 행동해서 미안해.”
하경에게 미안한 것과는 별개로,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근데 나, 후회 안 해. 앞으로도 이런 역할 내가 할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닌 가장 친한 친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주는 건 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경이 망설이니 대신 총대를 멘 것뿐이었다. 앞으로도 그녀를 위해서라면 악역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네가 하게 해서 미안해.”
하경은 유현이 오로지 자신을 위한 마음뿐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마워.”
한결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스러웠던 게 가장 크긴 했지만, 한결이 진실을 알려 준 자신을 원망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그 못지않았다. 그래서 제 심정을 간파하고 대신 나서준 유현에게 더욱 고마웠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홀가분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혼날 거 각오하고 왔는데 안 혼났네.”
유현은 하경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기자, 갑자기 하경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술 얼마나 마셨어?”
“소주 반병쯤.”
“그럼 데리러 온 게 아닌데?”
유현은 조금 취한 한결을 택시에 태워 보낸 뒤 호텔까지 걸어 왔다. 집까지는 하경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사실 우리 마누라 퇴근하는 길에 차 좀 얻어 타 볼까 해서 왔어.”
짐짓 정색하고 있던 하경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갑자기 마누라에 꽂혔어. 난 서방님이라고 불러야 할 거 같잖아.”
키득거리는 그녀를 보는 유현의 눈이 빛났다.
“불러 봐.”
“…….”
그는 못 들은 척 시선을 피하는 하경의 얼굴을 제 두 손에 가뒀다.
“먼저 말 꺼내놓고 이러기야? 딱 한 번만 불러 주라.”
“…….”
“한 번만.”
간절한 눈빛에 마음이 약해진 하경이 어렵사리 입술을 달싹였다.
“서방님…….”
난이도 최상의 호칭이었다. 손발이 오그라들고 몸이 배배 꼬였다. 그것도 잠시, 유현의 미소를 보니 덩달아 흐뭇해졌다. 그런데 배시시 웃고 있던 하경의 눈이 갑자기 동그랗게 커졌다.
“……!”
무릎 뒤로 손이 쑥 들어오는가 싶더니 몸이 번쩍 들렸기 때문이었다.
“꺅!”
작게 비명을 지른 그녀가 반사적으로 유현의 목에 팔을 둘렀다. 유현은 태연한 얼굴로 일어나 하경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하경은 그가 뭘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그래도 혹시 몰라 일단 물어보기로 했다.
“뭐 하세요?”
“그동안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거 지금 하려고.”
유현은 책상 위에 앉은 하경의 다리를 살짝 벌리고 다리 사이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은근하게 속삭였다.
“엘리베이터, 계단, 이사실에서의 키스.”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중에 제일 해 보고 싶었던 데가 여기야. 주하경 이사실.”
“왜 여기서 제일 해 보고 싶었는데?”
“가장 공적인 공간에서 가장 사적인 행위를 하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해서.”
유현의 입꼬리가 나른하게 말려 올라갔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
하경의 머릿속에 그가 했던 말이 스쳐 갔다.
“이사실에 들어서면서 책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저기 주하경을 앉혀 보고 싶다, 앉혀 놓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디까지 가려는 건지 살짝 불안했지만, 그녀는 이미 그의 유혹에 넘어간 뒤였다. 스릴이 느껴지면서 묘하게 흥분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경은 제 허락을 기다리는 유현에게 수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의 얼굴에 아찔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시작된 야릇하고 은밀한 시간. 싸늘했던 공기가 금세 달아올랐다. 하경의 입술 사이로 미처 참지 못한 신음이 간간이 흘러나왔다. 유현은 하경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한 가지 바람을 이루었다. 조금의 모자람도 없이 아주 충만하게.
*** 한결은 유현과 헤어져 본가로 갔다. 홍 관장은 가운 차림으로 수행 비서와 함께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한결이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직접 카드키로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옷을 제대로 챙겨 입을 새가 없었다. 한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를 흘긋 보고 홍 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즐거운 시간 방해했어?”
홍 관장은 한결이 뭔가를 알고 왔다는 걸 눈치챘다.
“엄마가 설명할게. 앉아 봐.”
한결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씹어뱉듯 읊조렸다.
“추잡하고 더러워…….”
홍 관장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해도 이런 식의 막말은 참아줄 수 없었다.
“주한결, 말 함부로 하지 마. 엄마 인생이야. 너한테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할 이유 없어.”
“왜 없어! 엄마가 아버지를 배신했잖아!”
한결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 아버지랑 나, 허울뿐인 부부였다는 거 몰라?”
“그럼 이혼을 했어야지!”
“…….”
홍 관장이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인다고 해도 엄마는 그냥 불륜녀일 뿐이야. 엄마는 엄마 인생 살아. 난 평생 엄마를 부끄러워하면서 살 테니까.”
“한결아…….”
한결은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두 볼을 적시고 있었다. *** 임시 주주 총회 당일 아침. 유현은 호텔로 출발하기 전 한결의 전화를 받았다. 하경은 출근 준비를 하느라 드레스 룸에 있을 때였다. 통화를 마치고 거실로 나가 보니, 하경이 소파에 앉아서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현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든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문을 뗐다.
“한결이 전화 왔어.”
“뭐라는데?”
“자기 의결권, 주하경 이사한테 위임하겠대.”
한결은 결국 엄마 대신 누나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