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여보, 집에 가자,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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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관장님께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승조를 바라보는 하경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래요?”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JCN과 손을 잡으신 것 같습니다.”
JCN은 주원 호텔의 3대 주주로 일본계 사모펀드였다. 기업 사냥꾼이라고 불렸다.
“곧 임시 주주 총회 소집을 요구하실 겁니다.”
하경이 승조의 말을 받았다.
“안건은, 주하경 사내 이사의 해임이겠죠.”
야심 크고 욕심 많은 새어머니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보였다. 그래도 숨 돌릴 여유는 주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지 고작 일주일 만에 야욕을 드러내다니 못내 서글펐다.
“누구부터 만나보시겠습니까.”
“글쎄요…….”
승조는 하경의 뜨뜻미지근한 대답이 당혹스러웠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사님. 우호 지분을 최대한 확보하셔야 합니다.”
그가 아는 걸 하경이 모를 리 없었다. 알지만,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냥 어머니 뜻대로 하시라고 하면 안 되나…….”
승조는 그녀가 지금 무기력감에 빠져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해는 가지만,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안 됩니다.”
그의 어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왜 안 돼요?”
“주원 호텔이 투기 세력에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주원 호텔은 승조에게도 의미가 남달랐다. 첫 직장이라서 특별하기도 했고, 마지막 직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지고 있었다.
“아직은 모든 걸 내려놓으실 때가 아닙니다.”
“…….”
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 하경의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홍 관장의 1차 목표는 하경을 회사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야 제 아들을 언젠가 회장 자리에 앉힐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이렇게 빨리 움직이게 될 줄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적어도 5년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이르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남편이 갑자기 죽어 버렸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 손 놓고 있으면 몇 년 후에는 하경의 힘이 더 커질 테고, 그때는 끌어내리기가 더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홍 관장은 한결을 집으로 불러들여 계획을 말해 주었다.
“임시 주총을 소집해서 하경이를 사내 이사에서 해임할 거야.”
예전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타박했을 한결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명분이 없잖아.”
그는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동조의 뜻을 드러냈다.
“없으면 만들면 돼. 명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분이 중요하니까.”
“누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하경이 쪽에 설 주주들보다 우리 쪽이 더 많아. 임시 주총 때까지 긴장 늦추지 않고 계속 끌어모아야지.”
“누나 해임하고 누굴 밀 생각인데? 난 아닐 거 아냐.”
한결은 누나가 회사 내에서 신망이 두텁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반면에 제 평판은 아주 좋지 않다는 것도. 억울하지는 않았다. 회사 일에 열의를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일단 전문 경영인 체제로 가는 걸로 하고, 점차 회사 내 네 입지를 넓혀야지.”
“주하경 이사가 전문 경영인보다 못한 게 뭐가 있냐는 반론이 나올 것 같은데.”
“나오든 말든.”
홍 관장이 코웃음을 쳤다.
“네 아버지 없으면 하경인 끈 떨어진 연이야. 능력만 있으면 뭐 해. 뒷배가 없는데.”
반면, 한결은 온 힘을 다해서 밀어줄 친모와 외가가 버티고 있었다.
“도움은커녕 손이나 안 벌리면 다행인 엄마나 잘 만나고 다니라고 해.”
한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나, 친엄마 찾았어?”
“오래됐나 보더라.”
“누나가 그래?”
“그 앙큼한 게 퍽이나. 그 여자 뭐 하고 사는지 궁금해서 뒷조사하다가 알게 됐지.”
“…….”
한결은 하경이 친모와 왕래하는 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누나가 더 멀게 느껴졌다. 누나와의 연결고리였던 아버지가 세상에 없으니 남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경이가 제 엄마를 만나고 다니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말고, 넌 네 할 일이나 똑바로 해. 뭐라도 내세울 게 있어야 널 사내 이사 후보로 올릴 거 아니야.”
“알았어.”
하경에 대한 한결의 적대감은 점점 더 커져 갔다. *** 하경은 하루 종일 머리가 무거웠다. 생각할 거리는 많은데 사고 회로가 멈춘 것처럼 멍하기만 했다. 결국 해가 질 때까지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밀린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음에도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던 그녀의 귀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승조라고 예상했건만, 이사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유현이었다. 그는 문을 닫고 하경이 앉아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퇴근 안 하십니까, 이사님.”
하경은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태연하게 받아쳤다.
“남편이 데리러 올 거라서요.”
책상 옆을 돌아 그녀 곁에서 멈춰 선 유현이 의자를 제 쪽으로 돌리며 빙긋 웃었다.
“여보, 집에 가자.”
그는 태세 전환이 아주 빠른 남자였다. 하경은 유현을 올려다보면서 픽 웃음을 터트렸다.
“여보는 뭐야.”
“왜. 여보 맞잖아.”
“응, 여보 맞아.”
의자에서 등을 뗀 그녀가 그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혼인 신고를 하기 전에는 그런 요식 행위가 뭐가 중요한가 싶었다. 그런데 막상 하고 나니 아주 만족스러웠다. 남편, 여보, 그 어떤 호칭을 써도 별로 어색하거나 민망하지 않은 건 혼인 신고 덕분이리라.
“남편이 데리러 왔으니까 그만 퇴근하자.”
유현이 제 뒷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내려 주자, 하경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잠이 올 만큼 몸이 노곤해졌다.
“나 졸려.”
“자. 난 얼마든지 이렇게 있을 수 있어.”
그녀는 얼마든지 서 있어 줄 테니 자라는 그의 말에 코끝이 찡해졌다. 진심이라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유현의 배에 뺨을 대고 마음을 가라앉힌 하경은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집에 가서 잘래.”
“그래. 그럼 정리하고 천천히 내려와. 차에 있을게.”
“응.”
두 사람은 웬만해서는 회사에서 같이 다니지 않았다. 최대한 뒷말이 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만 먹으면 얼굴을 볼 수 있고, 함께 출퇴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 두 사람은 저녁을 먹고 밤 산책에 나섰다. 하경의 제안이었다. 그녀는 유현의 팔짱을 끼고 아파트 근처 산책로를 걸으면서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하기가 싫지? 피곤해. 그냥 어머니 마음대로 하시라고 하고 싶어.”
“회사 일에서 손 떼라고 하실 게 분명한데도?”
하경은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나니 모든 게 허무해져 버렸다. 병이 아니더라도 오늘 당장 교통사고로도 죽을 수도 있는 게 인생인데 아등바등 살아서 뭐 하나, 회의가 들었다.
“너랑 여행이나 다니면서 유유자적 살지, 뭐.”
“상상만 해도 좋네.”
유현은 돈이나 명예에 연연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되면서 그 마음이 더 커졌다. 하경이 시골로 내려가 농사나 지으면서 살자고 해도 선뜻 그러겠노라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런 식은 더더욱.
“근데 하경아.”
“응?”
“아버님은 네가 주원 호텔을 이끌어 가길 바라셨잖아. 홍 관장님께서는 지금 아버님 뜻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계신 거고.”
“…….”
“지금 포기해 버리면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아. 후회한다고 해도 되돌릴 수 없게 돼. 그래도 괜찮겠어?”
하경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숨 섞인 말을 내놓았다.
“아니…….”
유현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여행은 조금만 미루자.”
“그래야겠다.”
그를 돌아보는 하경의 얼굴에는 홀가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유현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늘 이렇게 답이 나왔다.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그가 늘 제 옆에 있어 주리라는 것. 세상 모두가 제게 등을 돌릴지라도 그는 제 편이 되어 주리라는 것. 그걸로 충분했다. *** 이튿날 저녁. 유현보다 먼저 퇴근해서 집으로 가던 하경은 차를 돌려 본가로 향했다. 본격적인 대응에 앞서 홍 관장의 얼굴을 봐야 할 것 같아서였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진흙탕 싸움이 되기 전에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다. 본가에 들어선 하경은 서글픈 감회에 젖어 들었다. 이제 이 집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릿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니.”
홍 관장의 날 선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끌어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거 실례야. 앞으로는 연락하고 와.”
“네.”
“와서 앉아.”
두 여자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소파에 마주 앉았다.
“용건이 뭐니?”
“그만 멈추세요.”
“네 말 한마디에 멈출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지.”
홍 관장은 하경을 조롱하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에요. 전 어머니께서 조용히 사셨으면 좋겠어요.”
홍 관장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욕심? 애 딸린 남자한테 시집와서 30년을 살았어. 내가 낳은 내 새끼가 제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았으면 하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이니?”
“한결이는 아직 감이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
정곡을 찔린 홍 관장의 말문이 막힌 사이, 하경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봉사하셨어요? 애 딸린 남자한테 시집올 만하니까 오셨겠죠. 누가 협박이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지 마세요.”
하경이 조곤조곤 따지자, 홍 관장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소리쳤다.
“네 아버지, 네 엄마를 못 잊어서 날 소 닭 보듯 했어!”
“그래도 아빠는 끝까지 어머니께 예의를 지키셨어요. 재혼한 후에 엄마랑 만난 적도 없고, 전화 통화도 한 번 안 하셨다고요. 근데 어머니는…….”
하경은 튀어 나갈 뻔한 말을 꾹 참고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예의? 정신적 불륜도 불륜이야!”
“…….”
하경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홍 관장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불결하고 추잡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딱 그 짝이야. 난 널 정말 내 배 아파 낳은 딸처럼 키웠어.”
하경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둘이 있을 때까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새어머니가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 그러셨어요? 그런데 어쩌죠? 한결이는 제 동생이지만, 어머니는 지금 당장이라도 홍수혜 씨라고 불러도 되는 분, 저한테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데.”
하경이 일부러 더 독한 말을 내뱉은 그때, 등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너무한다, 누나.”
허탈감까지 배어나는 목소리는, 한결의 것이었다. 하경은 홍 관장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한결이 냉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웃어서 탈이었건만, 이제 동생의 웃는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와 있는 줄 몰랐네.”
“왜? 내가 있는 줄 모르고 우리 엄마한테 막말해서 찔려?”
하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마주 보고 섰다.
“아니, 더한 말도 할 수 있는데 참은 거야.”
한결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내가 우리 엄마한테 못되게 굴지 말라고 했지. 내 말이 우스워?”
“주한결.”
“한 번만 더 우리 엄마한테 막말하면 나도 가만히 안 있어. 누나가 우리 엄마를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도 더는 누나를 누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명심해.”
“…….”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가. 하경의 눈에 씁쓸한 감정이 짙게 배어났다.
“그만 가.”
“한결아.”
“가라고!”
한결의 입에서 벽력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