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해요-68화 (68/79)

68화. 손유현이라는 존재가 주는 위안,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novel.naver.com

68화. 손유현이라는 존재가 주는 위안2020.11.22.

손 의원과 심 여사가 함께 조문을 온 건 장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손 의원은 일생일대의 고초를 겪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짱짱했다. 눈빛은 매서웠고, 위축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헌화와 묵념을 한 두 사람은 상주 자리에 나란히 서 있는 하경과 유현에게 다가갔다. 손 의원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는 하경에게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상심이 크겠구나.”

하경도 형식적인 말로 화답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와야지. 주 회장과 내가 몇 년 지기인데.”

“…….”

하경은 그의 뻔뻔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본인의 뜻을 거슬렀다고 수십 년 지기를 곤경에 빠뜨린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손 의원이 아니었다면 아버지가 조금은 더 사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원망스러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검찰 조사가 시작되고 아버지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꽉 말아쥐고 있던 그녀의 귀로 나긋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많이 힘들지? 얼굴 상한 것 좀 봐.”

하경은 심 여사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고 울컥했다. 진심 어린 눈빛이 지금 제 곁에 있어 주지는 못하지만, 제 걱정을 하고 있을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 유현은 냉혹하고 비정한 손 의원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달랐다. 그 이유가 따스하고 다정한 어머니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흠!”

손 의원은 하경의 손등을 토닥이는 아내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유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아주 이 집 사위가 다 됐구나.”

“이 집 사위, 맞습니다.”

“식장에 들어갈 때까지 모르는 게 남녀 관계다.”

언제 헤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악담이나 다름없었다.

“저희 혼인 신고 했습니다. 전 이 자리에 주서호 회장님의 사위로 서 있는 겁니다.”

“…….”

손 의원의 얼굴에 언짢은 감정이 노골적으로 배어났다.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벌써 혼인 신고를 했을 줄이야. 이제 원수보다 더한 사이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제 아들을 주 씨 집안에 빼앗긴 것 같아서 심기가 불편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하경이 말이 끊긴 틈을 타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어머니.”

손 의원이 못마땅해하는 건 개의치 않아도, 심 여사에게는 죄송했다.

“난 너희가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라고 믿어. 부부가 된 걸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인 심 여사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나저나 어머니는 어디 계셔? 한결이도 안 보이네?”

“잠깐 쉬러 가셨어요. 한결이가 따라갔고요.”

홍 관장은 수시로 유족실에 가서 쉬고 오곤 했다.

“속이 말이 아니시겠지…….”

심 여사는 홍수혜라는 사람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다. 홍 관장과 하경의 관계가 어떤지는 더더욱. 홍 관장이 비록 계모이긴 해도, 하경이 갓난아이일 때부터 엄마 역할을 해 왔으니 사이가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당신 여기 노닥거리러 왔어?”

심 여사에게 대놓고 면박을 준 손 의원은 휙 몸을 돌려 가버렸다. 머쓱해진 심 여사는 유현에게 하경을 잘 챙기라고 신신당부하고서 남편의 뒤를 따랐다. 유현은 미안하다는 말 대신, 하경의 어깨를 말없이 감싸 안았다. 하경도 괜찮다는 말 대신, 그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네가 있어서 버틸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그녀의 미소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주 회장의 장례는 생전에 그가 원했던 대로 수목장으로 마무리되었다. 하경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앓아누웠다. 지난 며칠은 거의 정신력으로 버틴 것이나 다름없었다. 밥을 거의 먹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잠도 거의 자지 못한 탓에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두 눈은 퀭했고, 안색은 창백했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하경은 유현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주일 휴가를 냈다. 아플 만큼 아프고, 쉴 만큼 쉰 다음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출근할 생각이었다. 남들에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주 회장과 관련된 모든 혐의는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었고, 하경을 엮어보려던 시도도 멈췄다. 비상대책팀에도 여유가 찾아온 덕분에 유현은 지친 그녀를 살뜰히 보살필 수 있었다. *** 잠결에 몸을 뒤척이던 유현은 옆이 허전하다는 걸 느끼고 눈을 번쩍 떴다. 제 품에 안겨 잠들었던 하경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가 화장실로 직행했다. 아무도 없었다.

‘어딜 간 거지?’

굳은 얼굴로 침실을 나선 유현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경이 거실 창가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간이 뭔가를 마시면서도 시선은 창밖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경은 집에 돌아온 이후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아버지의 뼛가루를 나무 밑에 묻을 때 운 게 마지막이었다. 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마음 아팠지만, 울지 않는다고 안심이 되는 건 아니었다. 유현은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온통 그녀 걱정뿐이었다. 하경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서 있던 그는 조용히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하경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잠이 안 와?”

놀라서 멈칫한 것도 잠시, 하경은 몸에서 힘을 빼고 그의 가슴에 편안히 기댔다.

“자다가 깼어.”

다시 잠들기 위해 애써 보았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서 나와 있었던 것이었다.

“술인 줄 알고 잔소리 좀 할까 했더니 아니네.”

그녀의 손에 들린 컵 안에는 붉은색이 아닌 흰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네가 잠 안 올 때 술 마시지 말라며. 그 말 들은 이후로 잠 안 올 때 술 대신 우유 마셔. 따뜻하게 데워서.”

“왜 이렇게 예쁜 짓만 하지?”

유현이 목과 귀에 자잘하게 입을 맞추자 하경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몸을 살짝살짝 비틀었다.

“너한테 사랑받으려고.”

그가 낮게 웃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현은 하경을 꽉 끌어안고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주하경 같네…….”

하경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뭐가?”

“야경이.”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야경이 왜 나 같아?”

“화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여.”

“…….”

하경이 그 말을 곱씹는 사이, 유현의 말이 이어졌다.

“분명 부족한 거 하나 없이 다 가진 사람인데 별로 행복해 보이지가 않았어.”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탓이었을까. 아버지와 가까워진 건 얼마 되지 않았고, 친어머니와는 성인이 되어 만났고, 새어머니는 본인이 낳은 아들만 챙겼으니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이나 다름없었다.

“행복했던 적이 딱히 없었던 것 같기는 하네.”

쓴웃음을 지은 것도 잠시, 하경은 유현의 손등을 제 손으로 감쌌다.

“근데 널 만난 후로는 행복한 날이 더 많았어.”

“앞으로는 더 많이 행복하게 해 줄게.”

갑자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유현아.”

“어.”

“내가 치료받으시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면 아빠의 마지막이 더 행복했을까? 내 욕심 때문에 아빠가 더 힘드셨던 건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어.”

“그건 욕심이라고 하는 게 아니야. 아버지가 나으셨으면 좋겠다는, 절실한 바람이었지.”

하경은 유현에게 제 마음을 털어놓는 걸로 치유 받곤 했다. 지금처럼. 그는 항상 담담하게 ‘그건 네 탓이 아니야’라고 결론 내려 주었다. 그가 그렇게 말해 주면 정말 제 탓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유현이라는 존재가 주는 위안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빠 돌아가시던 날 말이야.”

“어.”

“중환자실에서 아빠 귀에 대고 무슨 말 했어?”

“평생토록 나보다 널 더 아끼면서 살 테니 편히 눈 감으시라고.”

“들으셨을까?”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아버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어.”

조금은 마음 편히 가셨겠구나. 하경은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러나 울지 않고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내가 잡고 있을 때는 가만히 계시더니 왜 너한테만 신호를 보내신 건데?”

유현은 볼멘소리를 하는 그녀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왜? 또 소외감 들어?”

“아주 많이 들어.”

하경은 이제 더는 아버지를 눈물로 기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 아프고 눈물이 날 것 같은 존재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유현도 장단을 맞춰주었다.

“소외감 그만 느끼고 소속감을 느껴보는 건 어때?”

“어디에?”

“나한테.”

하경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런 순간에도 웃을 수 있게 해 주는 그에게 새삼 고마웠다. 그로 인해 새삼 행복했다. 감사와 행복, 그리고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 유현은 하경에게 속초에 며칠 가 있으라고 권했다. 하경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홀로 계실 그녀의 어머니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엄마한테 며칠 가 있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내가 데려다줄게. 어머님께 인사도 드릴 겸.”

“나 데려다주고 넌 혼자 올라오겠다는 말이야?”

“어, 이번에는 어머님이랑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

“응, 그래야겠다.”

합의에 도달한 하경과 유현은 바로 짐을 챙겨서 속초로 출발했다. 하경의 전화를 받고서 기다리고 있던 명선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와요.”

장모와 사위의 첫 만남이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어머님.”

유현이 깍듯하게 인사하는 동안, 하경은 엄마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마지막에 다녀갔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게 확연히 보여서 마음이 아팠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고는 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많이 힘들었다는 게 느껴졌다. 자신이 유현에게 위로받는 동안 엄마는 혼자서 슬픔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하경은 심호흡으로 감정을 추스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엄마, 우리 혼인 신고 했어. 이제 내 남편이고, 엄마 사위야.”

“혼인 신고?”

“들어가서 얘기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명선이 유현을 보면서 빙긋 웃었다.

“들어와요.”

현관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던 세 사람은 거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경이 갑작스럽게 혼인 신고를 하게 된 내막을 말해주자, 명선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동거 다음에 혼인 신고, 마지막이 결혼식이야?”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네.”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 하려고?”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어.”

고개를 끄덕인 명선이 유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밥 먹고 가요. 맛은 보장 못 하지만.”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어머님.”

“밥 먹고 가겠다고 하면.”

“주시면 감사히 먹고 가겠습니다.”

“밥 차릴 동안 하경이랑 놀고 있어요. 바다라도 보든가.”

명선이 부엌으로 사라지자, 하경은 러그 위에서 엉덩이를 떼며 유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 봐. 바다 보여 줄게.”

유현은 베란다에 나가서 바다를 구경하고, 장모가 만들어 준 밥을 먹고, 서울로 돌아갔다. 모녀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길 원하는 마음에서였다.

“엄마, 우리 술 한잔하자.”

“좋지.”

두 여자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소파 아래에 나란히 앉았다. 하경은 엄마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엄마가 아빠 아픈 거 알게 되면 한 번쯤은 연락을 해 볼 줄 알았어.”

“사실 네 전화 받고 고민 많이 했어.”

“근데 왜 아빠한테 전화도 한 번 안 했어?”

“네 아빠랑 30년 세월을 함께한 아내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장례식장에 와 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겠네.”

“그래…….”

“편안한 얼굴로 가셨어. 그러니까 엄마도 그만 보내드려.”

“…….”

명선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제 정말 보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가요, 하경 아빠.’

남편과 딸을 두고 집을 나온 뒤로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말.

‘잘 가요, 여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오늘 그녀는 오래전에 이별했던 남편을 다시 한 번 떠나보냈다. *** 하경은 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복귀했다. 승조가 그녀에게 반갑지 않은 소식을 알려주었다.

“홍 관장님께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