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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67화 (67/79)

67화. 편파적이고 절대적인,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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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편파적이고 절대적인2020.11.19.

홍 관장과 한결에게는 아침이 되어서야 연락이 닿았다. 두 사람은 함께 병원에 나타났다. 이미 빈소가 마련된 뒤였다. 홀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 하경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 입술을 달싹거리기도 힘겨울 정도였다. 홍 관장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하경에게 걱정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어머니…… 왜 전화 안 받으셨어요…….”

“내가 뭐 일부러 안 받았겠니?”

홍 관장의 얼굴에 드리워진 감정은 슬픔이 아닌 짜증이었다.

“나 원래 무음으로 해 놓고 자. 자다가 깨면 다시 잠들기 얼마나 힘든데.”

하경은 아무런 대꾸 없이 한결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뭐 했어.”

당당한 홍 관장과 달리, 한결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웅얼거렸다.

“술 마시고 있었어…….”

지금 그의 얼굴이 부어 있는 이유는 하경과 사뭇 달랐다.

“일어나 보니까 전화가 많이 와 있더라고…….”

하경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다시 물었다.

“갑자기 병원에서 연락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했어?”

어쩜 이리도 무심할 수가 있을까. 내 아버지이기만 하냐고, 네 아버지이기도 하다고 쏘아붙여 주고 싶었다. 아버지의 병세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돌아가실 줄 몰랐다는 건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미안해, 누나…….”

한결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다?”

하경과 한결의 시선이 동시에 홍 관장에게 향했다. 하경은 홍 관장의 표독스러운 눈초리를 피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 드리는 말씀이기도 해요.”

홍 관장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얘 좀 봐? 나한테 하는 말이 맞다고?”

“네.”

하경은 두 사람이 야속했다. 실망을 넘어 절망까지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참이었다.

“어머니, 숍 들렀다 오셨어요?”

우아하게 틀어 올린 헤어스타일과 풀 메이크업은 분명 전문가의 솜씨였다.

“아니.”

“그럼 집으로 사람을 부르셨나 보네요.”

“그래. 불렀어. 근데 그게 뭐? 내가 해서는 안 될 짓이라도 한 거니?”

하경은 홍 관장에게 알랑거려 본 적도 없지만, 대들어 본 적도 없었다.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늘 예의를 갖췄다. 그러나 이제 더는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남편이 투병 중이라고 해도 무음으로 해 놓고 자면 안 된다는 법은 없어요. 빈소에 오면서 메이크업에 헤어까지 풀 세팅하고 오지 말라는 법도 없어요. 그래도 아빠 가시는 길인데 조금은 슬퍼하는 시늉이라도 해 주실 수 있는 거잖아요.”

하경의 눈에 비친 홍 관장은 마치 지인의 장례식장에 온 사람 같았다.

“얘가 생사람 잡네? 내가 슬퍼하지 않는다고 누가 그래?”

“어머니 얼굴이 그러네요. 하나도 슬프지 않다고.”

홍 관장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반박은 하지 않았다. 하경이 어떻게 생각하든 별 상관도 없었을뿐더러 아무리 정성껏 변명을 한다고 해도 먹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홍 관장은 하나 마나 한 시도를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

“근데 너, 뜬금없이 아빠가 뭐니?”

처음 들어본 말이라 굉장히 귀에 거슬렸다.

“왜요? 상스럽게 들리세요?”

“상스럽다니?”

“어머니께서 하신 말인데 잊으셨어요? 고작 초등학생인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상스럽다고.”

홍 관장은 기억을 더듬어보고서야 자신이 오래전에 했던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아이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미안하기는커녕 그 말을 기억하고 있는 하경이 못마땅했다.

“너 참 음흉하구나? 그 말을 여태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니?”

“마음에 담아뒀으니까 그 뒤로 어머니께서 싫어하시는 짓을 안 할 수 있었던 거겠죠.”

“…….”

홍 관장이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그때, 한결이 불쑥 끼어들었다.

“누나, 왜 우리 엄마한테 화풀이야.”

우리 엄마. 한결이 제 앞에 선을 그어버린 기분이었다. 하경이 허무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넌 지금 내가 화풀이하는 걸로 보여?”

“누나만 슬픈 거 아니야. 우리도 슬프다고.”

하경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아, 슬퍼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병원에 못 왔구나. 아빠 얼굴 보면 울 것 같아서 차마 병원은 못 오고 술만 퍼마시고 다닌 거지?”

사실 그녀는 이번에 한결에게 더 실망했다. 홍 관장에게는 별다른 기대가 없었기에 실망할 것도 없었지만 한결은 다를 줄 알았다. 그런데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검찰 조사가 시작되고 본인이 엮일까 봐 겁을 먹었다고 이해해보려고 해도 괘씸한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았다.

“아픈 아버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어. 병원 냄새도 싫었고…….”

“건강검진 받을 때는 1박 2일도 잘만 있어 놓고 갑자기?”

“…….”

한결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슬며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딴 어쭙잖은 변명만 할 거면 입 다물고 있어.”

이번에는 홍 관장이 난처한 상황에 처한 아들을 위해 나섰다.

“오늘 같은 날 꼭 이래야겠니? 네 아버지가 퍽이나 좋아하시겠다.”

하경은 되받아치려다가 꾹 참았다.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상복으로 갈아입으세요. 준비해 뒀어요.”

홍 관장은 듣는 둥 마는 둥, 딴말로 화제를 바꿨다.

“들어오다가 봤는데 상주에 유현이 이름이 있더라? 누구 맘대로 넣었니?”

“아빠가 사위로 인정하셨어요.”

“네 아버지가 사위로 인정하면 다야? 내 허락은?”

“어머니가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허락을 구할 수가 없었어요.”

“유현이 이름, 빼.”

“안 뺄 거예요.”

뺄 거였으면 애초에 넣지도 않았을 거였다.

“어머니랑 한결이는 연락이 안 되고, 전 넋 놓고 있는 동안 유현이가 상주 노릇 하고 있었어요. 지금도 상조 회사하고 상의할 게 있어서 잠깐 자리 비운 거고요.”

지금 유현이 하경의 곁에 없는 이유였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상주에 이름 올리는 건 다른 문제지. 너희가 부부니? 유현이는 아직 우리 집안사람 아니야.”

“그래, 누나. 엄마 말이 맞아. 이제 내가 왔으니까 내가 하면 돼.”

하경은 어느 한쪽이 불리할 때마다 튀어나와 거드는 두 모자를 보는 게 익숙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외롭고 쓸쓸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설움이 복받쳐 오른 탓이었다. 하경이 눈물을 참으려 애쓰고 있던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가 부부이기만 하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으실 겁니까?”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하경은 블랙 슈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유현을 보고서야 혼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이상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유현은 성큼성큼 걸어와 하경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홍 관장을 똑바로 보면서 뒷말을 이었다.

“그럼 오늘 혼인 신고 하겠습니다.”

홍 관장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혼인 신고가 무슨 장난이니?”

“장난이라는 생각, 한 번도 해 본 적 없습니다. 어차피 할 거 오늘 하겠다는 겁니다.”

단호하게 잘라 말한 그는 하경의 손에 깍지를 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유현은 그녀를 유족실로 데려가 침대에 앉히고 옆에 따라 앉았다.

“상의도 안 하고 내 마음대로 말해 버려서 미안해.”

그의 손이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니야. 잘했어.”

“혼인 신고, 해도 괜찮겠어?”

“네 말대로 어차피 할 거였는데, 뭐. 하자.”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유현은 하경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런 거 아니야. 아빠 살아계실 때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어서…….”

“그동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잖아.”

검찰 조사다 뭐다, 정신이 없어서 다른 건 전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결혼식부터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혼인 신고를 먼저 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

“후회를 하려면 한도 끝도 없어. 지나간 일을 자꾸 곱씹지 마. 그때는 그게 분명 최선이었을 거야.”

“…….”

하경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임종을 지켰다는 것. 아빠라고 불러드렸다는 것.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따 구청 문 열면 잠깐 다녀올게.”

“난 같이 안 가도 돼?”

“어, 나 혼자 가도 돼. 신분증이랑 필요한 게 몇 가지 있는 걸로 아는데 그건 좀 알아봐야겠다.”

2시간 뒤. 유현은 제 오피스텔과 하경의 아파트에 차례로 들러 도장을 챙긴 다음, 호텔로 향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태주가 유현에게 도장 2개를 넘겨주었다.

“자, 내 도장이랑 문 변 도장.”

두 사람이 혼인 신고의 증인이 되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우린 퇴근하고 갈게.”

“네.”

“하경 씨 혼자 오래 두지 말고, 어서 가 봐.”

“고마워요, 선배.”

유현은 구청으로 가서 혼인 신고를 마치고 장례식장으로 돌아갔다. 한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하경과 홍 관장만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혼인 신고 했습니다.”

홍 관장은 유현이 내민 접수증을 본체만체 일어나 어디론가 휙 가버렸다. 유현은 하경의 옆에 앉아서 그녀에게 접수증을 건네주었다.

“우리 이제 부부야.”

“부부…….”

하경은 아직 어색하고 생소한 단어를 입 속에서 굴려 보았다.

“그래, 부부.”

두 사람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조금 더 가까워졌다. 슬픈 날이면서 동시에 기쁜 날이기도 했다.

*** 한결은 하경과 유현이 고깝게 보이기 시작했다. 제 어머니에게 대드는 누나도, 제 역할을 대신하는 친구도 못마땅했다. 언짢은 마음이 드니 사사건건 다 꼴 보기 싫어졌다. 조문객의 발길이 뜸해진 밤. 한결은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복도에서 하경과 마주쳤다.

“누나.”

땅을 보고 걷다가 멈칫한 하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결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둘만 있게 될지 알 수 없어서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하기로 했다. 누나의 핼쑥한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엄마한테 너무 못되게 굴지 마.”

“…….”

하경은 발끈할 기운이 없었다. 시시비비를 가릴 여력도 없었다. 팔은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그다지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한결의 옆을 지나쳤다. 몇 시간 뒤, 새벽. 홍 관장은 이미 한참 전에 본인의 발로 유족실로 들어갔고, 하경은 조금 전 유현이 강제로 유족실에 밀어 넣었다. 빈소에 남은 건 유현과 한결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정적을 깨뜨린 건 유현이었다.

“주한결, 네 누나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

“내가 뭘?”

“아까 네가 하는 말 들었어.”

유현은 하경과 한결이 마주쳤던 복도 옆 비상구에서 전화 통화를 마치고 나오다가 한결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 못 할 말 한 거 없어.”

“넌 네 어머니가 하경이한테 하는 행동은 안 보여?”

대체 누가 누구에게 못되게 굴지 말라는 건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우리 엄마가 좀 까칠해. 나도 알아. 근데 원래 성격이 그런 걸 어쩌라고.”

“원래 성격이 그렇다면 너한테도 똑같이 하셔야지. 근데 아니잖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나한테도 까칠해.”

“정말로 하경이랑 널 똑같이 대하신다고 생각해?”

“물론 누나는 엄마가 낳지 않았으니까 조금은 다를 수 있겠지.”

“조금?”

“…….”

유현이 반문하자, 한결의 말문이 막혔다.

“너랑 조금 다른 게 아니라 네 어머니는 하경이를 싫어하시는 거야. 알면서 왜 모른 척해. 나도 오래전부터 알았던 걸 네가 몰랐을 수는 없어. 모른 척하고 싶은 거겠지.”

유현은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솔직히 다 꺼내놓았다.

“네 일이 아니니까. 넌 사랑받는 존재니까.”

한결은 그런 그가 너무나 서운했다.

“손유현, 너 너무 하는 거 아니냐? 너랑 나랑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네가 네 어머니 편을 들 수밖에 없듯, 나도 내 여자 편을 들 수밖에 없어.”

하경과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 번만 더 하경이한테 그딴 말 지껄이면 아무리 너라도 가만 안 둬.”

유현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부모 형제도, 친구도 버릴 수 있었다. 그에게 사랑은 편파적이고 절대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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