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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66화 (66/79)

66화. 아빠,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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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은 검찰청을 나온 지 불과 3시간 만에 오 지검장의 전화를 받았다.

“네, 지검장님.”

오 지검장은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네 아버지와 관련된 것들 하나도 빠짐없이 싹 다 넘겨.]

당연히 제 제안을 받아들일 줄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빨리 연락이 올 줄이야. 내일쯤 연락이 오지 않을까 했는데 어지간히도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근데 너나 네 아버지나 참 대단들 하다. 뭐 이렇게 살벌해. 실은 둘이 피 한 방울도 안 섞였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

유현은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친부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게 중요하지.]

오 지검장이 유현의 제안을 냉큼 받은 건, 그가 제 뒤통수를 칠 리 없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만약 손 의원과 유현이 어설프게 서로를 공격했다면 절대 끼어들지 않았을 거였다. 두 사람 사이가 파국을 맞았다고 결론 내린 뒤 움직인 것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자. 내일 시간 되냐?]

“내일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모레 뵙죠.”

사실, 내일 만나려면 충분히 만날 수 있었다. 오 지검장의 성격상 상대가 조급해하는 티를 내면 갑질을 하려들 게 분명하기에 딱히 급할 것 없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목적이었다. 오 지검장은 유현의 노림수에 재깍 걸려들었다.

[너 설마 다른 사람 접촉하려는 거 아니지?]

유현은 일부러 느릿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음, 그럼 됐고.]

오 지검장의 말투에서 찜찜해하는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으나, 유현은 모른 척했다.

“시간과 장소 정해서 내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았다.]

유현이 휴대 전화를 내려놓자, 소파에 앉은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하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주 몸이 달았네, 몸이 달았어…….”

오 지검장의 목청이 워낙 커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심지어 그와 직접 통화를 한 기분이었다. 유현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나 말이야?”

“아니, 오…….”

하경은 별생각 없이 대답하다가 멈칫했다. 그제야 그가 제 말을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 동음이의어로 장난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유현을 올려다보니, 예상대로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었다. 장난에 화답하고 싶어진 그녀는 유현의 티셔츠 안으로 슬며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의 맨살을 느릿하게 쓰다듬으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손유현 씨 몸도 달았나?”

“너랑 같이 있는데 안 달아오르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렇지. 그럼 곤란하지.”

“일어나. 들어가서 자자.”

하경은 일어나기는커녕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유현의 손을 그러쥐며 물었다.

“손만 잡고?”

하경의 다른 한 손은 여전히 그의 옷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손도 안 잡고.”

심히 단호한 어조였다.

“왜?”

“손잡으면 안고 싶고, 안으면 딴 거 하고 싶으니까.”

하경의 입가에 느른한 미소가 번졌다.

“딴 거 하자.”

“안 돼.”

노골적인 유혹을 거절당하고 민망해진 그녀가 아랫입술을 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왜 안 돼?”

짙은 한숨을 토해낸 유현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너 오늘 많이 힘들었잖아. 오늘 같은 날 딴 거 하자고 하면 내가 사람이야?”

물론 하경도 예상했던 이유였다. 요즘 그가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사람 말고 짐승 하면 되겠네.”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그를 위해 피곤하지 않은 척하는 게 아니었다. 집에 막 도착했을 때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피곤했는데 마음이 안정되면서 저절로 몸의 피로도 풀렸는지 이제 그다지 피곤하지 않았다.

“후회 안 하지?”

유현의 손은 어느새 하경의 목을 쓸고 있었다. 소중한 것을 만지듯 손길이 아주 섬세했다. 그를 올려다보는 하경의 얼굴에 고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후회라는 말은 이런 상황에서 쓰는 게 아닐 텐데?”

유현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얼굴을 내렸다. 요즘 그녀가 여러모로 상심이 크다는 걸 알기에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건만, 특히 오늘은 손끝 하나 댈 생각이 없었건만,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서로를 갈망하는 두 입술이 겹쳐졌다. 부드러운 키스로 시작했지만, 그는 금세 거칠어졌다. 하경의 말대로 짐승이 되었다. 혈기 왕성해서 지치지 않는. 그날 밤, 하경은 스스로 자제하고 있는 짐승의 본능을 일깨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 다음 날, 박 보좌관은 유현을 만나서 그동안 자신이 모아놓았던 자료들을 넘겼다. 유현의 약속만 믿고 제 구명줄이 될 수도 있는 것들을 넘긴 건 그가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를 좋아한 적은 없어도, 그가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최대한 낮은 형량을 받으실 수 있게끔 노력하겠습니다.”

손 의원과의 결별을 결심한 와중에 유현이 변호사 수임료까지 받지 않겠다는데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더 나은 변호사를 찾기 힘들다는 걸 모르지 않기에 그의 손을 잡기로 한 것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 보좌관은 유현과 헤어져 손 의원을 찾아갔다.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된 직후 손 의원의 권유로 휴직했고, 벌써 일주일 넘게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버려지는 중이라는 게 너무나 확연히 느껴져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손 의원의 짜증스러운 얼굴을 본 순간, 일말의 죄책감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차라리 고마웠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마지막 인사라니?”

“의원님께서 절 버리시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한 손 의원의 말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버리다니. 내가 널 왜 버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당분간 몸을 사리자는 거지.”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을 하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박 보좌관은 마음을 다스리고 침착하게 받아쳤다.

“버리실 생각이 없으셨다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 의원님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손 의원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의원님 댁에 오기 전에 손유현 변호사님을 만났습니다.”

“너 설마…….”

“그만 가보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 야, 제대로 말 안 해?”

박 보좌관은 그대로 뒤돌아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벽력같은 고함이 뒤통수를 때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심란하면서도 홀가분하기도 한,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 박 보좌관과 오 지검장의 배신으로 손 의원은 막다른 길에 몰렸다. 그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부패방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유현과 하경 그리고 주 회장에게 본때를 보여 주려다가, 제힘을 과시하려다가, 되잡힌 꼴이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 권력에 취해 사느라 판단력이 흐려진 탓이었다. 모두가 제게 굽신거리는 삶을 살다 보니 점점 더 오만해졌다. 자신에게 맞서는 사람은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물론 손 의원도 맥 놓고 앉아서 당할 만큼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죽어도 혼자만 죽지는 않겠다는 각오로 오 지검장의 비리를 언론에 흘리기 시작했다. 폭로전이 계속되면서 두 사람은 함께 만신창이가 되어 갔고, 오 지검장을 총선 전에 끌어내리려고 했던 유현의 계획은 실행에 옮길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 주 회장의 병세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그렇지만 홍 관장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쯤 병원에 들러서 얼굴만 삐죽 비치고 오는 것도 귀찮았다. 제 잘못을 뒤집어써 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도 별로 없었다. 딱히 미안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 다 안고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홍 관장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한결을 후계자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한결에게 아무런 욕심도 없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퍼만 하는 아들이 못마땅해 죽을 지경이었다. 홍 관장은 한결을 집으로 불러서 답답한 속내를 토해냈다.

“넌 하나뿐인 아들 제쳐 놓고 딸한테 회사 물려주려는 네 아버지가 뭐가 그렇게 애틋해!”

“엄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욕먹어. 요새 누가 아들딸 구분해?”

한결은 오늘도 입바른 말을 서슴지 않았다.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 내 앞가림도 힘든데 회사 경영은 무슨.”

홍 관장은 질책에서 회유로 방향을 선회했다.

“마음만 먹으면 네 누나보다 잘할 거야. 엄마는 널 믿어.”

“믿지 마. 난 누나만큼 해낼 자신 없어. 마음먹을 자신은 더 없고.”

“주한결!”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실패한 홍 관장이 빽 소리를 질렀다.

“난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을 거야. 그러니까 헛된 꿈 좀 그만 꾸세요, 제발.”

홍 관장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넌 유현이가 비상대책팀 맡은 거 아무렇지도 않아?”

“왜 아무렇지도 않아. 든든하지.”

“2년 넘게 일한 너보다 높은 직책으로 돌아온 건데도?”

“그야 지금은 법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한시적인 조직인데, 뭐.”

한결은 유현을 질투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정도 수준이 비슷해야 질투든, 뭐든 해 볼 텐데 유현은 어려서부터 워낙 독보적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올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너한테는 고작 주임 자리도 안 준 네 아버지가 유현이한테 팀장 자리를 준 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몰라?”

“무슨 의민데?”

“너보다 유현이를 더 믿는다는 거잖아.”

“…….”

처음으로 한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네. 그렇구나.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 말았던 말들이 조금씩 그의 마음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 자정을 조금 앞둔 시각. 하경은 장 교수의 연락을 받고 유현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왔다.

“오셨습니까.”

주 회장의 비서실장이 두 사람을 맞았다.

“어머니랑 한결이는요?”

“두 분 다 전화를 받지 않으십니다. 일단 메시지는 남겨 놓았고, 계속 전화를 걸어보고 있습니다.”

하경과 유현은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장 교수가 침대 옆에 서서 산소호흡기를 쓴 채 죽은 듯 누워 있는 주 회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주 회장이 고열과 과호흡으로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며 두 번의 심정지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

“어제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셨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이 매일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

장 교수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하경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담담한 척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눈가도 벌겠다.

“네 아버지가 언젠가 술에 취해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너한테 아빠라고 한번 불려보고 싶다고.”

“…….”

뜨거운 눈물이 하경의 두 볼을 적셨다.

“아버지 잘 보내드려라.”

장 교수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침대로 다가간 유현은 주 회장의 한 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그의 귀에 짧은 말을 속삭였다. 그리고 하경의 떨리는 어깨를 지그시 감싸주고 장 교수의 뒤를 따랐다. 온전히 두 사람만의 시간. 하경은 주 회장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써 본 적만 있을 뿐. 반면에 한결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2학년, 5월의 어느 날. 어버이날을 앞두고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숙제가 생겼다. 친구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한결까지 다들 아빠라고 부르는데 왜 자신만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아하고 부러웠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편지 서두를 아빠라는 말로 시작했다. 식사 시간이 되어 밥을 먹고 돌아와 보니 홍 관장이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편지를 읽고 있었다.

“하경아, 아버지라고 써야지. 상스럽게 아빠가 뭐니.”

조곤조곤, 아주 교양 있는 말투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혼나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왜 한결은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거냐고 묻지 못한 이유였다. 상스럽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국어사전을 찾아보고서야 좋지 않은 말이라는 걸 알았고, 그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아빠라고 부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 홍 관장이 아버지와 제 사이가 가까워질까 봐 단속을 시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고 새삼 아빠라고 부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아빠라고 불리길 원했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실컷 불러드렸을 텐데…….

“아……빠…….”

하경은 주 회장의 팔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잠시 후, 장 교수가 사망 선고를 내려주었다. 주 회장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유현의 간절한 소망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 회장은 그렇게 딸의 곁에서 향년 6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와 딸은 가장 가까워졌을 때, 가장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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