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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65화 (65/79)

65화. 브레이크가 고장 나 버린 차를 멈추려는 것뿐,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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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브레이크가 고장 나 버린 차를 멈추려는 것뿐2020.11.12.

조사실 안으로 들어선 유현의 눈은 제일 먼저 하경을 찾았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와 앙다문 입술이 그녀의 고초를 짐작게 했다.

‘늦게 와서 미안.’

따뜻한 눈빛으로 하경을 안심시킨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쪽 벽에 기대 서 있던 오 지검장을 발견했다. 말문을 여는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지검장님께서 고작 참고인 조사를 참관하시는 겁니까?”

하경을 압박하기 위한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하는지 듣고 싶었던 거라면 굳이 이 방에 있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손유현, 너야말로 여긴 어쩐 일이냐?”

오 지검장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두 사람의 만남은 유현이 검사복을 벗은 이후 처음이었다. 물론 서로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고 있었다.

“주하경 씨 담당 변호사입니다. 변호인 선임계 제출하고 왔습니다.”

“그래? 공격만 하던 네가 어떻게 수비를 하는지 한번 봐야겠네.”

“그 전에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지검장은 유현이 하려는 얘기가 뭔지 궁금했다. 잠깐 시간을 내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담당 검사에게 조사를 잠시 멈추라고 지시한 뒤 성큼성큼 문가로 걸어간 그는 유현의 곁을 지나치며 나직하게 말했다.

“따라와.”

유현은 하경과 태주에게 차례로 눈짓을 하고 그를 뒤따랐다. 오 지검장은 유현을 지검장실로 데려갔다. 만약 그가 허튼소리로 제 심기를 거스른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은 유현이 아닌 하경이 될 거였다.

“앉아.”

상석에 앉은 오 지검장은 제 옆자리에 앉은 유현을 보며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유현아, 우리 또 얼굴 붉히지 말자. 내가 너 때문에 탈모까지 왔었다는 거 알지? 응?”

물론 진심 어린 부탁이 아니었다. 조롱 섞인 협박일 뿐.

“네가 나대는 만큼 주하경이한테 그대로 돌아간다는 거 잊지 말고. 이제 넌 검사가 아니에요.”

오 지검장은 아직도 유현만 보면 이가 갈렸다. 유현이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던 검사들이 거의 다 오 지검장의 심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담담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유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손종일 의원님께 공천권 보장받으셨어요?”

“…….”

정곡을 찔린 오 지검장은 말없이 유현의 표정을 살폈다. 진의를 파악하려 애썼으나 그가 무슨 의미로 꺼낸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손 의원님께서 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시게 되면 그 약속 지키기 힘들다는 거 아실 텐데요?”

유현은 오 지검장이 퇴직 후 정치판에 발을 들이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치인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그날을 준비 중이며, 가장 긴밀하게 손잡은 사람이 제 아버지라는 것도.

“손 의원님께서는 절대 연임하실 수 없어요. 무슨 수를 써서든 막을 생각이거든요, 제가.”

오 지검장은 유현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놈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에게 ‘또라이’라는 별명을 붙여 준 장본인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손 의원이 연임하지 못한다는 건 오 지검장에게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가 미끼를 물었다는 걸 눈치챈 유현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 큰 걸 노리세요.”

“더 큰 거라니?”

“냉정하게 말해서, 지검장님께서 국회의원이 되신다 한들 대권 후보까지 올라가실 수 있을까요? 대권 욕심 있으시잖아요.”

오기용을 아는 사람 중 그가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그는 꽤 오래전부터 본인의 야욕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다녔다.

“인지도를 높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죠?”

“네가 아는 걸 나는 모를까. 그래서?”

“대대적으로 이름을 알릴 기회를 잡으시라는 말이에요.”

오 지검장은 말을 빙빙 돌리기만 하는 유현이 짜증스러웠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변죽만 울리던 유현의 입에서 드디어 핵심이 나왔다.

“손종일 의원님을 치세요.”

오 지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유현과 손 의원의 갈등을 알고 있었는데도 놀랍고 당혹스러웠다.

“지검장님께서 손 의원님의 비리를 밝혀내신다면 단숨에 정의로운 검사로 국민의 뇌리에 각인되겠죠. 이렇다 할 대권 주자가 없는 야당에서 러브콜을 보내올 가능성이 매우 크고, 그렇게 되면 단숨에 대권 주자로 떠오르실 텐데.”

“…….”

오 지검장은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호통을 치기는커녕 눈알을 굴리느라 바빴다. 그의 말이 제법 그럴듯해서 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검장님 성향도 야당 쪽에 가까우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결단을 내리신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손 의원님의 비리 자료들 건네 드리죠. 물론 지검장님께서도 개인적으로 많이 알고 계시겠지만요.”

“흠…….”

유현은 그가 이 자리에서 선뜻 제 제안을 받기는 민망하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내일까지 고민할 시간을 드릴게요. 지검장님께서 받지 않으시면 이 딜, 다른 분께 갈 거라는 것만 잊지 마시고 신중하게 생각해보세요.”

“…….”

성질 급한 오 지검장은 지금 당장 대답하고 싶은 걸 꾹 참아야 했다.

“참고인 조사는 그만 끝냈으면 하는데요.”

“그러든가.”

“감사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빨리 하경을 조사실에서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유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지검장실을 나왔다. 다시 조사실로 돌아가 보니, 하경은 조금 전과 다름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었다. 겉으로는 당당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마음 한구석이 아릿했다.

“얘기 끝났습니까?”

저도 모르게 하경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던 유현은 낯선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의 눈에 담당 검사의 불만 가득한 얼굴이 들어왔다.

“끝났습니다.”

태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검사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럼 조사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참고인 조사도 끝났습니다.”

검사의 고개가 다시 유현에게 돌아갔다.

“끝나다니? 누구 마음대로?”

그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오기용 지검장님 마음대로.”

“…….”

욱했던 것도 잠시, 검사의 입이 다물어졌다.

“못 믿으시겠다면 지검장님께 직접 확인해 보시죠.”

이 자리에 유현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검사는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로 벌떡 일어나서 조사실을 나가버렸다. 수사관도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조사실에 세 사람만 남게 되자, 유현은 하경에게 다가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힘들었지?”

하경은 기진맥진한 얼굴로 그의 배에 머리를 기댔다. 뻣뻣하게 굳었던 어깨가 그제야 조금 풀렸다. 덩달아 긴장까지 풀리는 바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참았다.

“고생 많았어. 집에 가자.”

태주가 먼저 조사실을 나갔고, 두 사람이 그를 뒤따랐다. 세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제야 유현의 말문이 열렸다.

“나 차 안 가지고 왔어요. 우리 좀 집까지 데려가 주고 가요, 선배.”

“택시 타고 왔냐?”

“아니, 지하철.”

“왜?”

“차 막힐까 봐.”

당연히 차를 가지고 오는 게 편하지만, 하경이 걱정돼서 최대한 빨리 올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태주와 하경은 그 말에 내포된 의미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하경 씨, 감동하신 것 같은데 뜨겁게 포옹하셔도 됩니다. 뒤돌아 있겠습니다.”

하경은 태주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면서 픽 웃음을 터트렸다.

“뜨거운 포옹은 집에 가서 할게요.”

“그럼 빨리 모셔다드려야겠네요. 타세요.”

태주는 운전석에, 유현과 하경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유현은 검찰청을 빠져나간 태주의 차가 도로에 접어들고서야 조금 전 지검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두 사람에게 말해 주었다.

“근데 이러다가 정말로 오기용이 대통령 되면 어쩌냐. 불안한데…….”

“불안해할 거 없어요. 오기용이 날려 버릴 증거,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태주도 오 지검장이 비리의 집합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증거를 대선 출마할 때 터트리려고?”

“총선 출마할 때요.”

“야, 너 너무 매정한 거 아니냐?”

“썩은 싹은 빨리 뽑아버리는 게 낫죠.”

한껏 꿈에 부풀어 있을 오 지검장의 얼굴을 떠올린 태주가 핸들을 잡고 키득거렸다. 하경은 시트에 몸을 묻은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제 손을 꼭 쥐고 있는 유현이 얼마나 든든한지 몰랐다. 그의 왼쪽 어깨에 머리를 기대니 그의 오른손이 제 뺨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잠깐 눈 좀 붙여.”

하경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그로 인해 마음이 충만해진 날이었다.

*** 유현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하경을 소파에 앉히고 부엌에 가서 물을 한 잔 따라왔다.

“마셔.”

하경은 그가 건네준 물을 단숨에 싹 비웠다. 오늘 집을 나선 이후, 처음 마시는 물이었다. 물을 마시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까 봐 일부러 마시지 않은 것이었다. 화장실에 가게 해 달라고 부탁하기 싫어서 물 뿐만 아니라 밥도 먹지 않았다.

“한 잔 더 갖다 줄까?”

“응.”

유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목마르다고 하는 하경의 혼잣말을 듣고 그녀가 목이 마른 이유를 곧장 알아차렸다. 하경의 성격을 알기에 굳이 시시콜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다시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더 가져온 그는 하경이 두 번째 잔을 말끔히 비우고 나서야 말문을 뗐다.

“이제 검찰 조사 받으러 갈 일 없을 테니까 안심해.”

“오기용이 네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확신해?”

“어.”

오 지검장에게 확답을 받은 건 아니지만, 탐욕으로 번들거리던 그의 눈빛을 보았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정치적 야심이 큰 오 지검장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아까 네가 말한, 그 증거라는 거 어떻게 확보하겠다는 거야?”

“박 보좌관한테.”

“응?”

유현은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자신이 오늘 검찰 조사에 따라가지 못했던 이유를 말해 주었다.

“오늘 박 보좌관 만났어. 꼭 오늘 만나고 싶다고 해서.”

그는 매사에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물론 하경이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 일까지 입 다물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외에는 웬만큼 해결된 다음에 말하곤 했다. 상대에게 헛된 기대를 심어주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기대가 없어야 실망도 없을 테니. 하경도 유현의 성격을 알기에 어지간히 궁금한 게 아니고서야 그가 알려줄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렸다.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를 너무나 잘 알게 되었고, 서로의 성향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꼬리 자르기 하시기 전에 박 보좌관한테 스스로 자르라고 설득했어.”

“그러겠대?”

“어, 그동안 몰래 모아놨던 아버지의 비리 증거들 다 넘겨받기로 했어.”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는 것들까지.

“그 증거들 가운데 오기용과 관련된 증거도 꽤 있을 거야. 아버지가 오기용을 통해서 처리한 일들이 많을 테니까.”

“대가는?”

하경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고작 말로 설득이 됐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직접 변호를 맡아주겠다고 했어. 물론 무보수로.”

“아…….”

“아버지가 본인한테 다 떠넘기고 빠져나가려고 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더라고. 그래서 설득하기가 어렵지 않았어.”

“서 비서관이라는 사람은?”

“그쪽은 박 보좌관이 설득해 보기로 했어. 설득되지 않아도 오 지검장이 알아서 원하는 진술을 확보할 거야.”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는 셈이었다.

“판을 깔았으니 이제 지켜보자. 어떻게 흘러가는지.”

유현을 바라보는 하경의 표정은 어두웠다.

“마음 무겁지?”

“뭐가?”

“아버지한테 맞서는 거.”

사실 그녀의 마음이 더 무거울지도 몰랐다. 자신으로 인해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말했잖아. 아버지 안 좋아한다고.”

“그래도 나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대립하지 않았을 거잖아. 지금까지처럼 쭉 그렇게 살았겠지.”

“사실 마음이 무겁긴 해. 나 때문에 회장님과 네가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고 있어서.”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경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네 형이랑 결혼을 한 뒤에 해림 씨의 존재를 알게 됐다면 난 망설임 없이 이혼했을 거야. 그러면 네 아버지는 지금과 똑같이 하셨을 거라고 생각해.”

유현은 그 말을 부인하지 못했다. 제 아버지가 그렇게 했으리라 확신하는 까닭이었다.

“난 브레이크가 고장 나 버린 차를 멈추려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너도 다른 생각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초에 브레이크가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럴게.”

유현은 예쁘게 웃고 있는 하경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만에 하나, 검찰이 널 무리하게 기소한다면 재판에서 싸우면 돼. 검찰 측 논리, 박살 내줄 테니까 날 믿고 조금만 더 버텨줘.”

“믿어.”

하경은 그를 믿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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