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모멸감과 모욕감,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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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모멸감과 모욕감2020.11.08.
공식적으로 주서호 회장에 대한 국세청 세무 조사와 검찰 조사가 시작되었다. 비자금 조성과 횡령·배임 혐의였다. 그동안 모범적인 오너 경영인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파장이 더욱 컸다. 언론이 합세하여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내면서 판을 키웠고, 주원 호텔의 주가는 급락했다. 주 회장의 투병 사실이 밝혀진 것도 한몫 거들었다. 주된 표적은 주서호 회장이었으나, 하경의 이름도 계속해서 거론되었다. 공공연한 후계자인 그녀가 아버지의 비리를 몰랐겠냐는 것이었다. 검찰은 주원 호텔 회장실과 주 회장의 자택을 압수 수색한 뒤, 주 회장에게 소환 조사를 통보했다. 변호인단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소환에 불응하자고 주 회장을 설득했으나 그는 정공법을 택했다. 16시간 동안 진행된 첫 검찰 조사는 악몽과도 같았다. 영혼까지 상처 입을 만큼 모욕적인 시간이었다. 욕설 한마디 듣지 않았는데도 자존감이 바닥에 처박혔다. 주 회장은 항암 치료 후유증에 심리적 충격이 더해져 조사 도중 혼절하고 말았다. 그런데 검찰청에서 병원으로 이송된 것을 두고 언론에서는 추가 조사를 피하기 위한 ‘꼼수’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주 회장의 몸과 마음은 하루가 다르게 너덜너덜해져 갔다. *** 검찰 조사 이후,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주 회장은 어제 하경과 병원에 다녀갔던 유현을 다시 불렀다. 유현은 전화를 받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두 남자는 지난번과 같은 병실,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늘은 유현을 향한 주 회장의 눈빛부터가 달랐다. 주 회장은 신뢰가 가득 담긴 눈으로 말문을 열었다.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오라고 했다.”
어제는 얼굴만 잠깐 봤을 뿐 다른 이야기를 할 여유가 없기도 했고, 하경이 있으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따로 부른 것이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유현은 부쩍부쩍 말라가는 주 회장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담담한 척하려 애썼다.
“하경이한테 들었겠지만, 회삿돈으로 자택 공사비를 지급했다는 혐의는 검찰 조사에서 인정했다.”
주 회장의 예상대로 하경을 통해 이미 들은 소식이었다. 주 회장의 변호인단으로부터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 받는 그녀는 유현에게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의논해 나가고 있었다.
“홍 관장님께서 하신 일이고, 회장님께서는 모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몰랐다.”
주 회장은 바싹 말라서 갈라진 입술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몰랐던 것도 잘못이지. 모든 게 한결 엄마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시려는 겁니까?”
“그럴 생각이다.”
아무리 정 없이 살아왔다고 해도, 매정하게 선을 긋고 싶지는 않았다. 아내를 위한 마지막 배려인 셈이었다.
“회장님 뜻이 그러시다면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주면 좋겠다.”
주 회장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서 말을 돌렸다.
“검찰이 멋대로 짜 맞춘 비자금 조성 혐의는 끝까지 부인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협박과 회유를 꿋꿋이 버틴 건 결백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면 하경까지 엮인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주 회장은 유현이 하경을 위해 손 의원과 맞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손 의원이 얼마나 난감해졌는지도. 어지간한 각오가 아니고서야 친부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할 수 없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잘했다고 칭찬할 수는 없어도,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된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모른 척 운을 뗐다.
“힘이 되어줄 방법이 있다.”
“뭐든 말씀만 해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비상대책팀을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대응할 생각이다. 이제 나 한 사람만의 문제를 넘어선 것 같구나.”
주 회장이 유현을 병원으로 부른 이유가 이 말을 하기 위함이었다.
“네가 팀장 자리를 맡아주면 좋겠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회사 소속의 다른 분께 맡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직원들이 불만을 품을까 봐 걱정하는 네 마음은 안다만, 비상 상황이라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다.”
“…….”
“난 지금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모든 걸 일임하고도 안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이 하는 선택이 어떤 것이든 자신과 하경을 위해서라는 확신이 들어야 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그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은 유현뿐이었다. 유현은 주 회장이 어떤 마음인지 알기에 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래서 절충안을 제시했다.
“한시적인 팀이라면 맡겠습니다.”
“알았다. 그렇게 하마.”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얼마든지.”
“외부 인사를 허용해 주십시오.”
다른 팀에서 유능한 인재를 차출한다고 해도 손발을 맞추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으니 일단은 마음 맞는 사람들 위주로 팀을 꾸리는 게 효율적이라는 생각이었다.
“비상대책팀은 내 직속으로 둘 거고, 인사를 포함한 비상대책팀 모든 업무는 온전한 네 몫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 회장은 고개를 돌려 침대 옆 서랍을 눈으로 가리켰다.
“열어 봐라.”
유현은 순순히 서랍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USB 하나가 들어 있었다.
“변호인단에게서 받은 자료다.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검토해 보겠습니다.”
주 회장은 개인적으로 국내 굴지의 법무법인을 선임한 상태였다. 회사와 관련된 건 호텔 법무팀과 회계팀에서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유현은 양쪽의 정보를 모두 취합하게 될 거였다.
“내 몫은 내가 감당할 테니 넌 하경이만 지켜 주면 된다.”
“하경 씨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제 모든 것을 걸고 지킬 겁니다.”
주 회장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드리워졌다. 굳이 당부의 말을 하지 않아도 유현이 어련히 잘하리라 믿고 있었지만, 유현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 나니 더욱 마음이 놓였다.
“유현아.”
“네, 회장님.”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언제까지 회장님이라고 부를 거냐.”
유현은 넉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가 능청스럽게 구는 사람은 하경이 유일했다. 안 그래도 언제부터 장인어른이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 중이었던 그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지금부터 장인어른으로 부르겠습니다.”
“엎드려 절 받았네, 손 서방.”
주 회장은 웃으면서도 마음이 착잡했다. 이 호칭을 얼마나 더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 병실을 나와 주차장으로 내려온 유현은 주차된 차로 걸어가면서 태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웬일이냐.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부탁이 있어요, 선배.”
[부탁? 맨날 내가 너한테 하던 걸 네가 하겠다고?]
“나랑 같이 일 좀 해요.”
[내가 너한테 부탁하던 게 그거잖아. 나랑 같이 일 좀 하자고.]
“주원 호텔에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유현은 그에게 비상대책팀에 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태주도 주원 호텔과 주 회장 부녀가 위기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유현이 원하는 게 뭔지 곧바로 파악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나뿐만 아니라 최 변이랑 문 변까지 비상대책팀에 영입하겠다?]
태주의 입에서 나온 최 변호사와 문 변호사는 유현도 아는 사람들이었다. 둘 다 태주와 마찬가지로 ‘똘기’는 다분하나 실력은 뛰어난 인재였다. 네 사람 모두 결이 같다고 봐도 무방했다.
“네, 선배네 회사 창립 목적과 크게 어긋나는 일은 아닐 테니까 큰 건 하나 수임했다고 생각하세요.”
짧은 침묵이 지난 뒤, 다시 태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건이 있어.]
“뭔데요?”
[비상대책팀 해체하면 그땐 네가 우리 회사로 와. 그럼 아주 성심성의껏 도와줄게. 최 변이랑 문 변도 내가 책임지고 설득한다.]
“…….”
고민하는 유현에게 태주가 대답을 채근했다.
[콜?]
유현은 고민해 봐야 답이 하나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 낭비하지 않고 순순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콜.”
아이러니하게도, 태주의 삼고초려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성공했다. *** 유현은 엘리베이터 근처에 차를 대고 하경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를 출퇴근시키는 건 이제 그의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주 회장의 검찰 조사가 시작된 이후, 단 하루도 빠진 적이 없었다. 몇 분 뒤 모습을 드러낸 하경이 조수석에 오르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하루 두 번 꼬박꼬박 출근 도장 찍는데 월급 줘야겠네.”
유현은 안전벨트를 당겨 매는 그녀의 뒷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안 그래도 이제 곧 받게 될 것 같아.”
“응?”
하경이 의문 어린 표정으로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나 조금 전에 장인어른 뵙고 왔어.”
“장인어른?”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현이 제 아버지를 그렇게 부를 날이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면서 얘기하자.”
유현은 주원 호텔 주차장을 빠져나가면서 하경에게 비상대책팀과 관련한 이야기를 상세히 해 주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하경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와, 나한테는 한마디 상의도 안 하시고…….”
“왜? 섭섭해?”
“섭섭하기만 할까 봐? 소외감까지 드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하경은 내심 흐뭇했다. 아버지와 그가 가깝게 지내는 게 좋았고, 아버지가 그를 신뢰하는 게 기뻤다. 유현도 물론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하경아, 우리 잠깐 드라이브 좀 할까?”
하경은 오늘 그가 평소보다 훨씬 자주 룸미러를 흘긋거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좋지.”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건 데이트 신청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호텔에서부터 따라붙은 차가 있어. 한 바퀴 돌면서 떼어내고 집에 가자.”
이미 사진이 찍혔을 수도 있고 오늘만 넘긴다고 끝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유현은 모른 척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일을 방해하고 싶었다.
“내가 연예인도 아닌데 대체 내 얼굴은 왜 찍어 올리는 거야.”
하경은 사이드미러로 뒤차를 살피면서 구시렁거렸다. 며칠 전,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찍힌 사진과 함께 「주원 호텔 주서호 회장의 딸, 주하경 이사의 출근길」이라는 헤드라인으로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비싼 차, 비싼 옷, 비싼 가방이라는 본문 내용을 보자마자 기사의 의도를 알았다. 기자의 바람대로, 아버지가 조성한 비자금으로 호의호식하며 산다고 배가 터지게 욕을 먹었다.
“연예인보다 예쁘잖아.”
하경이 운전석을 돌아보며 콧등을 찡그렸다.
“위로하는 거야?”
“진심 반, 위로 반.”
“백 퍼센트 위로였으면 화내려고 했는데 진심도 들어갔으니 봐 준다.”
하경은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자리를 고쳐앉았다.
“자, 안전 운전 하시고요.”
“물론이죠.”
유현은 안전하고 능숙하게 차를 몰면서 뒤차를 금세 따돌렸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두 사람은 그 말대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 하경은 며칠 뒤 검찰로부터 참고인 조사 통보를 받았다. 급한 일이 생긴 유현 대신 태주가 조사에 동석하기로 했다. 참고인 조사 당일, 유현은 도착했다는 태주의 전화를 받고 하경을 지하 주차장까지 데려다주면서 다시 한번 사과했다.
“같이 못 가서 미안해.”
“괜찮다니까 그러네. 대체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야.”
하경은 긴장한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태주 선배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알았어.”
태주의 차를 타고 검찰청에 도착한 그녀는 곧장 조사실로 안내받았다. 깔끔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저절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낯선 환경에 적응할 새도 없이 곧바로 조사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경은 아버지가 왜 조사 도중 쓰러졌는지 알 것 같았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자신을 벌레 보듯 하는 담당 검사와 수사관의 눈빛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수시로 튀어나오는 반말도.
“이것 봐요, 주하경 씨.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거야?”
지쳐 버린 하경 대신 태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검사님!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시죠!”
하경에게 불똥이 튈까 봐 최대한 성질을 죽인 것임에도 그의 눈에서는 레이저가 나올 기세였다.
“예의는 무슨. 이런 식으로 나오면 주하경 씨한테 좋을 게 없다는 거 몰라요?”
“왜 몰라요. 누군 검사 안 해 봤나?”
“예예, 검사 해 보셨던 거 잘 알겠고요.”
태주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했다.
“참고인 조사지 피의자 조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피의자로 전환될 겁니다.”
검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사실 문이 열리고 뚱뚱한 남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태주는 물론이거니와 하경도 그가 오기용 지검장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지검장님.”
“나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네.”
동시에 일어섰던 검사와 수사관이 동시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 다시 묻겠습니다.”
검사가 맞은편에 앉은 하경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아버지 주서호 회장의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알고는 있죠?”
“모릅니다.”
정말 몰라서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예쁜 아가씨, 전생에 앵무새였나? 모릅니다, 모릅니다, 뭘 다 모른대.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걸 보면 머리가 텅텅 비었나 보네. 대학 졸업장은 돈 주고 땄나?”
발끈한 태주가 벌떡 일어나서 무슨 말인가를 하는데도, 하경은 귀가 먹먹해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모멸감과 모욕감에 치가 떨릴 뿐이었다. 제 모든 커리어가 부정당한 기분. 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조롱당하셨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하경이 피가 날 때까지 입술을 깨물고 있던 그때, 조사실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그리고 눈물 나게 반가운 유현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