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최후통첩,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63화. 최후통첩2020.11.05.
일요일 오전. 유현은 주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하경이랑 셋이 점심 같이 하자.]
“알겠습니다.”
약속 시각과 장소를 듣고 통화를 마친 그는 곧바로 하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짧게 통화를 했으니 이번이 두 번째였다. 신호음이 끊긴 뒤, 나른한 목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다.
[왜 안 와…….]
“출발하려는데 회장님께 전화 왔어. 같이 점심 먹자고 하시네.”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나도 갈래.]
“당연히 같이 가야지. 셋이 보자고 하셨어.”
[아, 난 또. 나 없는 데서 안 좋은 말씀 하시려는 줄 알고…….]
“이미 우리 사이 허락하셨잖아.”
[아직 마음이 안 놓이나 봐.]
“이제 그만 놔.”
[응, 내가 예민하게 굴었어.]
뻗대지 않고 깔끔하게 인정한 그녀의 목소리에 돌연 의문이 어렸다.
[근데 왜 나한테 전화 안 하시고 너한테 하신 거지?]
“우리 사이를 허락하셨다는 걸 보여주시려는 게 아닐까 싶네.”
내가 없어도 내 딸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유현은 차마 그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아무튼, 나 지금 출발해. 나갈 준비 하고 있어.”
[알았어.]
유현은 통화를 마치자마자 바로 오피스텔을 나섰다. 하경을 만나러 가는 게 좋으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뭔가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묵직했다. 주하경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가 올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 먼저 한식당에 도착한 주 회장은 창가 자리에 앉아서 유현과 하경을 기다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앞마당의 푸르름이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시간에 쫓겨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뒤늦게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앞만 보며 열심히 달려온 게 이제 와 후회스러운,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었던 그의 귀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주 회장이 문가로 고개를 돌린 것과 동시에 문이 열리더니 하경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그 뒤를 유현이 따랐다.
“저희가 먼저 와 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주 회장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다음, 맞은편 자리를 눈으로 가리켰다.
“와서 앉아라.”
제 앞에 나란히 앉는 두 사람을 보니 새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이런 사이가 됐다는 게 아직도 조금 얼떨떨했다.
“언제 또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몰라서 오늘 보자고 했다.”
“…….”
하경의 동공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주 회장이 얼른 말을 이었다.
“오늘 입원하기로 했다. 여기서 바로 병원으로 갈 생각이다.”
“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하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저희 집에서요.”
유현이 끼어들어 그녀가 생략한 말을 덧붙였다.
“회장님 전화를 받았을 때 전 제 오피스텔에 있었고, 하경 씨는 하경 씨 아파트에 있었습니다. 제가 데리러 가서 같이 온 겁니다.”
주 회장이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구차해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구구절절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내 뜻에 따라 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좀 이른 감은 있다만,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지 궁금하구나. 하경이는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하경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떤 확신이 없었다면 동거까지 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제가 먼저 했고, 청혼도 이미 여러 번 했습니다.”
주 회장의 시선이 하경에게 향했다.
“대답은 했고?”
“네, 결혼하겠다고 했어요.”
“그런 마음이라면 같이 지내도 좋다.”
동거를 허락하겠다는 의미였다. 제 말을 거둬 주어야 두 사람이 편하게 지낼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서두르라고 재촉하지 못하는 건 제 상황에 두 사람의 인생을 끼워 맞추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경은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세 눈치챘다.
“저희 결혼은 아버지 치료 마치시면 그때 할게요.”
주 회장의 안색이 별안간 어두워졌다.
‘항암 치료 시작하면 머리카락도 빠질 텐데…….’
딸의 결혼식에 초췌한 몰골로 참석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상상해 버린 미래의 제 모습을 지우려 애쓰면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유현이는 금시초문인 것 같은데.”
주 회장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걸 눈치챈 유현이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금시초문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결혼을 하는 게 아버지를 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하경은 내색하지 않고 장단을 맞췄다.
“금시초문일 수밖에요. 저도 방금 결정했거든요.”
하경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주 회장과 유현이 동시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세 사람은 힘든 시간을 덜 힘들게 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식당 주차장으로 나왔다.
“병원까지 같이 갈게요.”
하경을 돌아보는 주 회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내가 병원에 간다고 하고 안 갈까 봐 감시하려는 거냐.”
“아니에요. 그냥 할 일도 없고…….”
“할 일 없으면 데이트라도 해라.”
주 회장은 단호한 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하경과 유현은 주 회장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차에 탔다.
“네 오피스텔에 들러서 짐 가지고 우리 집으로 가는 게 낫겠지?”
유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안전벨트를 매던 하경이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왜 침묵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가 같이 지내도 된다고 허락하셨잖아.”
“허락을 받긴 했어도 마음이 편치가 않네.”
기다렸다는 듯 짐을 싸서 하경의 집으로 들어가는 게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불편한 마음, 날 위해서 견뎌주면 안 될까?”
하경은 촉촉해진 눈으로 유현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 사실 어제 한숨도 못 잤어. 자꾸 최악의 상황만 머릿속에 맴돌아서.”
“푹 잤다고 하는 사람 얼굴이 어쩐지 떼꾼하더라.”
그는 그녀의 창백한 뺨을 제 손으로 감쌌다.
“네가 옆에 있어 주면 덜 힘들 것 같은데…… 안 돼?”
유현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무언가 망설여질 때는 하경이 원하는 걸 선택하면 된다는 것.
“돼.”
그의 얼굴에 홀가분한 미소가 걸렸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유현은 시동을 걸고 오피스텔로 출발했다. *** 손종일 국회의원 사무실. 오 지검장과 통화를 끝내고 흡족해하던 손 의원에게 박 보좌관이 다가와 뜻밖의 소식을 알렸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았습니다.”
좋았던 기분이 단숨에 바닥에 처박혀 버린 손 의원이 얼굴을 확 구겼다.
“너? 나?”
“접니다.”
“아, 그래?”
박 보좌관은 안도감이 노골적으로 묻어나는 손 의원의 표정을 씁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손 의원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던 것도 아닌데 새삼 입이 썼다. 문득 유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손종일 의원님은 박종수 보좌관님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항상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경제적 보상이 확실해서 수년째 온갖 일을 도맡아 해 왔지만, 이제 슬슬 발을 뺄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손 의원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사는 인생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왜 오라는데.”
“특경가법상 알선수재 혐의라고 합니다.”
“알선수재?”
“대출 알선 건이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몇 달 전, 제1금융권 대출 부적격자에게 대출 알선을 해 주고 거액의 소개비를 받은 일이 있었다. 박 보좌관이 나서서 처리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손 의원의 작품이었다. 소개비도 거의 손 의원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담당 수사관 이름 가져와. 알아볼 테니까.”
“네. 그리고 말씀드릴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또 뭔데.”
“간담회 일로 외부에 나가 있는 서 비서관이 저한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의원님께서 통화 중이시라고.”
“뭐라는데.”
“서 비서관에게도 경찰 소환 통보가 왔답니다. 저와 거의 동시에 받은 것 같습니다.”
손 의원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혐의는?”
“부패방지법 위반입니다.”
“포천 땅 말하는 거야?”
손 의원은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서 도시 재생 사업 구역의 부동산을 사들일 때 서 비서관의 명의를 이용한 게 문제가 되었음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맞습니다.”
박 보좌관의 일만 들었을 때는 귀찮은 문제가 하나 생긴 줄 알았는데 서 비서관의 일까지 듣고 나니 최종 타깃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찌푸린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던 손 의원이 입을 열었다.
“일단 알았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볼 테니까 기다려.”
그는 손을 휘휘 저어 박 보좌관을 보내고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 손 의원과 민건은 모임에 참석했다가 함께 귀가했다. 두 사람을 맞은 건 심 여사가 아닌 유현이었다.
“이제 오세요?”
손 의원은 소파에서 일어나는 유현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다짜고짜 물었다.
“네 짓이냐?”
유현이 순순히 인정했다.
“하경이 건드리지 마시라는 경고예요.”
박 보좌관과 서 비서관의 일은 그가 계획한 것이었다. 경찰 대학 동기와 선배에게 부탁해서 은밀하게 일을 진행했다. 그는 사회성이 좋지도 않고 사교적이지도 않지만, 희한하게도 주위에 사람이 제법 많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라서 긴가민가했다.”
“소스는 거의 다 제가 줬으니 빠를 수밖에요.”
유현은 태연하게 받아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원 호텔에 대한 검찰의 내사 착수, 아버지와 오기용 지검장의 합작인 거 알아요.”
“모르면 어쩌나 했는데 안다니 다행이다.”
손 의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뭘 하셔도 상관없는데 하경이는 끌어들이지 마세요.”
“죄가 있다면 벌을 받아야지. 죄가 없다면 걱정할 거 없겠고.”
손 의원은 없는 죄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원론적인 말을 늘어놓았다.
“설사 죄가 있다고 해도 하경이 건드리시면 가만히 안 있어요.”
“네가 그래도 생각은 똑바로 박인 놈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구나.”
“얼마든지 실망하시고, 하경이는 내버려 두세요.”
유현에게 정의와 공정은 사랑보다 우선시되는 가치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킬 수만 있다면 세상 모두가 욕하고 손가락질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면?”
손 의원이 본색을 드러내자, 유현도 더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럼 아버지 손발 다 잘리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박 보좌관이 손 의원의 오른팔이라면 서 비서관은 왼팔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오른팔과 왼팔 모두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되었는데 잘린다는 말까지 듣게 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네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냉정을 잃은 손 의원이 언성을 높이는데도, 유현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미쳤다면 경고 없이 바로 잘라드렸어요.”
“네가 그러고도 내 자식이냐!”
“제가 원해서 아버지 아들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뭐라고?”
손 의원은 유현의 눈에서 자신을 향한 혐오를 보았다.
“아버지의 수많은 비리, 다 덮어드릴 테니까 이제라도 멈추세요.”
“멈추지 않겠다면?”
유현은 아버지가 애걸복걸한들 들어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애걸복걸할 마음도 없었고.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
“저도 끝까지 가야겠죠.”
결심을 굳힌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손발 다 자르고 나면 다음은 몸통이라는 거, 명심하세요.”
그 순간, 부자간의 살벌한 대치를 멍하니 보고 있던 민건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끼어들었다.
“손유현! 너 진짜 돌았구나?”
유현은 그제야 형을 존재를 알게 되었다.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한 공간에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담담한 얼굴로 민건에게 다가간 그가 나직하게 한마디 건넸다.
“형은 손발부터 안 잘라. 바로 목부터 따 버리지.”
“…….”
민건은 소름 끼칠 만큼 싸늘한 어조와 살기 어린 눈빛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러니까 죽은 듯이 있어.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고.”
아버지와 형에게 최후통첩을 날린 유현은 그대로 집을 빠져나왔다. *** 유현의 경고는 손 의원에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물러날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지게 했을 뿐이었다. 반드시 무릎 꿇고 빌게 해 줄 생각이었다. 일단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하기로 한 그는 박 보좌관과 서 비서관을 불러서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변호사 붙여 줄 테니까 경찰서 다녀와. 변호사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려줄 거야.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가면 오 지검장이 알아서 처리해 주기로 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박 보좌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기용 지검장을 믿으십니까?”
그가 서울중앙지검으로 오게 된 데에 손 의원의 도움이 있었다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 안위가 걸린 일이니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기용이를 믿는 게 아니라 날 믿는 거지. 그쪽은 내가 꼭 필요하거든.”
손 의원의 미소에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