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공격이 최고의 방어,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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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공격이 최고의 방어2020.11.01.
주 회장은 서재 소파에 기대어 착잡한 마음을 다스렸다. 암 진단을 받았던 날보다 오늘이 더 심란하고 괴로웠다. 자식이 우는 모습을 보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눈물의 원인이 제 문제일 때는 더더욱. 한숨을 길게 내쉰 그는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한결에게 전화를 걸어서 집으로 오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얼굴을 보고 제 병세를 말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고 해도, 어려서부터 노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사는 골칫거리라고 해도, 한결도 하경과 마찬가지로 제 자식이었다.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통화 버튼에 닿기 직전,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
주 회장이 멈칫한 사이, 홍 관장이 서재 안으로 들어오면서 짜증을 토해냈다.
“대체 언제까지 두고만 볼 거예요?”
“뭘.”
“하경이 말이에요. 설마 못 이기는 척 허락해 주려는 건 아니죠?”
홍 관장이 처음에 하경과 유현 사이를 반대했던 건 하경의 뒷배가 되어 줄 시댁이 생기는 게 못마땅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하경이 하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주하경의 엄마로 살았는데도 하경에게는 조금도 정이 가지 않았다. 제 속으로 낳은 자식이 없었다면 모를까, 잘난 누나와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살아온 한결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하경이 한결보다 수십 배는 노력하면서 살아왔다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허락했어.”
“뭐라고요?”
주 회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는 홍 관장에게 담담한 어조로 다시 말해 주었다.
“허락했다고.”
“여보!”
홍 관장의 날카로운 음성이 서재를 울렸다.
“앉아 봐.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
“할 말? 나한테 말은 해서 뭐 해? 어차피 다 자기 마음대로 할 거면서.”
하경과 유현 사이를 절대 허락하지 말라고 누차 말했건만 철저하게 무시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뜩이나 정 안 가는 남편이 더 꼴 보기 싫어졌다.
“중요한 얘기야.”
“…….”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홍 관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주 회장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나 암이래.”
흠칫 놀란 홍 관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암?”
주 회장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털어놓았다. 얄미울 만큼 건강했던 남편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홍 관장은 얼떨떨했다. 그러나 슬프지는 않았다. 멍한 정신을 추스르고 나니 스멀스멀 화가 치밀어올랐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묻어나던 딸 걱정이 그녀를 짜증스럽게 했다. 문득 조금 전 하경의 텅 빈 눈동자가 떠오른 홍 관장이 말문을 열었다.
“혹시 하경이가 왔다 간 게…….”
“조금 전에 장 교수한테 얘기 듣고, 놀라서 달려온 거야.”
“…….”
홍 관장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남자 때문에 눈물 바람을 하느니 어쩌느니 하는 제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하경이 괘씸해서였다. 번번이 속을 뒤집어 놓는 건 부녀가 똑같았다.
“왜 그래?”
주 회장은 홍 관장과 하경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모르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홍 관장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래서 당신, 죽는대요?”
매정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주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두 사람이 부부라는 걸 모르고 들은 사람은 원수지간이라고 오해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아마도.”
주 회장의 표정과 말투도 사뭇 건조했다. 마치 남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언제쯤?”
“글쎄. 어쩌면 아주 빠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는 빨리 말해 줬어야 했다는 생각, 안 해요?”
“미안하게 생각해.”
엎드려 절을 받은 홍 관장이 코웃음을 치면서 화제를 바꿨다.
“당신 아프다는 거 알려지면 회사가 뒤숭숭해질 텐데 골치 아프네.”
“최대한 늦게 알려지게 해야지.”
“한결이한테는 말했어요?”
홍 관장은 질문을 던지고 주 회장의 표정을 매의 눈으로 살폈다. 혹시라도 한결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전화하려는데 당신이 들어왔어.”
대답을 하는 주 회장의 눈빛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데다가 서재 문을 열었을 때 그가 휴대 전화를 들고 있던 것을 봤기에, 홍 관장은 둘러대는 말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알았어요. 쉬어요.”
끝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일어난 홍 관장이 서재를 나가자, 주 회장은 다시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결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집에 좀 들르라고 말한 다음 장 교수의 번호를 뒤졌다. 조금 전 하경에게 사실대로 말했다고 이실직고하던 장 교수에게 화를 내긴 했지만,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해서 곤란한 상황을 만든 게 못마땅하기는 해도 더는 뭐라고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주 회장은 통화가 연결되기 무섭게 앞뒤 다 자르고 용건부터 꺼냈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려 줘.”
치료를 받겠다고 약속한 이상 대충대충 하는 시늉만 할 생각은 없었다. 결과와 상관없이, 주치의가 하라는 건 다 해 볼 작정이었다. 어쩌면 기적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 유현은 하경을 차에 태우고 그녀의 아파트로 출발했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하경이 애처로웠지만, 무슨 말로 위로를 해 줘야 할지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운전만 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배고프겠다.”
그제야 하경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는 운전석을 돌아보면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맞다. 나 배고팠지…….”
지금은 조금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 갈 뿐이었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머리에 주입하고 있어 봐. 그럼 배고파질지도 모르니까. 빨리 집에 가서 밥 먹자.”
하경은 자신이 먹어야 그도 먹을 것 같아서 밥 생각이 없다는 말 대신 미소로 화답했다. 유현은 오른손을 뻗어서 그녀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음이 아팠다.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채 운전석을 보고 있던 하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유현아.”
“어.”
“아버지 상태, 엄마한테 알려야 할까?”
한참의 고민 끝에 그가 말문을 뗐다.
“나라면, 할 거야.”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회장님께서 하지 말라고 안 하셨다면.”
“그런 말씀은 안 하셨어. 그럴 정신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하경의 뇌리에 언젠가 엄마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버지 재혼하시기 전에 만난 게 마지막이었어?”
“응, 그 이후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어. 전화 통화도 해 본 적 없고.”
“30년 동안 한 번도 번호를 안 바꿨던 거야?”
“한 2번쯤 바꿨을걸?”
“근데 아버지가 엄마 번호를 어떻게 알고 계셨지? 내가 엄마 연락처 알려달라고 하니까 그 자리에서 바로 알려주셨는데?”
“네 아버지랑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혹시라도 번호를 바꾸게 되면 비서한테 바뀐 번호 말해 두겠다고 했었거든. 정말로 바뀔 때마다 연락했고.”
“왜?”
“언젠가 네가 날 찾는 날이 오면 알려주라고. 엄마 번호 몰라서 연락하고 싶은데 못 할까 봐.”
“내가 엄마를 찾을 줄 알았어?”
“찾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아버지도 번호를 바꿀 때마다 비서를 통해서 엄마에게 바뀐 번호를 알려주었다고 했다. 서로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여전히 신기했다. 엄마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 하경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엄마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해야겠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녀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유현은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하경을 다짜고짜 침실로 데려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좀 자고 있어. 밥 다 되면 깨울게.”
“나 괜찮아. 옆에 있을래.”
“지난번처럼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을 거잖아. 부담스러워.”
그건 핑계일 뿐, 그녀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려는 목적이었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 하경이 괜찮은 척하려 애쓴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그럼 자지는 않고 누워만 있을 테니까 나 필요하면 불러.”
사실 기운이 없어서 간절히 눕고 싶었던 하경은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알았으니까 들어가세요.”
유현은 얼른 침실 문을 닫아 버리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가 침실 문을 연 건 그로부터 1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침대에 누워 있던 하경이 몸을 일으켜 앉으며 물었다.
“나 나가?”
“어, 나와. 다 됐어.”
그녀는 유현과 함께 부엌으로 걸어가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무슨 냄새지? 뭐 만들었어?”
뭔지는 몰라도 좋은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가 보면 알아.”
부엌에 도착한 하경은 그가 빼준 의자에 앉으면서 제 앞에 놓인 그릇 속 내용물에 초점을 모았다.
“죽이야?”
“어, 소고기 죽.”
“그새 어떻게 죽을 끓였어?”
“밥 먹으면 체할까 봐. 쌀을 오래 못 불린 게 좀 아쉽긴 한데 먹을 만은 해.”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녀는 눈물을 보이는 대신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와, 고기 크기 좀 봐! 원래 이런 데는 간 고기를 넣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가장 작은 고기의 크기가 손가락 한 마디는 족히 됐다.
“간 고기가 없어서 구이용 넣었어. 근데 냉동이 아니라서 그런지 잘 안 썰리더라고.”
“손유현이 못 하는 거 찾았다.”
하경은 시선을 들며 빙긋 웃었다.
“칼질.”
고기는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채소의 상태도 엉망진창이었다. 죽인지, 카레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달걀 볶음밥은 칼질할 게 없었기에 그가 칼질을 못 한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뭐가 이렇게 다 커. 안 큰 게 하나도 없네.”
“그만 구경하고 얼른 먹어.”
“응.”
하경은 순순히 숟가락을 들어 죽을 맛보았다. 외형은 별로였지만, 맛은 그럴싸했다.
“맛있다.”
“많이 먹어. 아니다. 억지로 먹지 말고 들어가는 만큼만 먹어.”
유현은 본격적으로 죽을 먹기 시작한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하경은 그릇을 반쯤 비우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지난번처럼 감으로 만든 거야?”
“아니, 오늘은 인터넷에서 레시피 몇 개 찾아봤어.”
달걀 볶음밥은 밥과 달걀만 넣고 간을 맞춘 게 다라서 찾아보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었지만, 죽은 엄두가 나지 않아서 요리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근데 나 더 못 먹겠는데…….”
“어, 그만 먹어.”
유현은 하경이 남긴 죽을 마저 먹어 주고 일어났다. 유현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하경은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만히 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별 일 없이 잔잔한 오후 시간을 보낸 뒤, 유현은 저녁으로 카레를 만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까지 끝낸 시각은 밤 9시.
“자. 난 그만 갈게.”
“…….”
유현은 그녀의 아련한 눈빛이 뭘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하지 말고 같이 있어 주면 되잖아.”
“어제도 그제도 같이 있었는데 오늘까지 자고 가면 회장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 같아서.”
하경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나가라고 하셨었구나…….”
“아니,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남자와 동거하는 여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고 차분하게 말씀하신 게 다야. 그 말씀에 수긍해서 내 의지로 나간 거고.”
끝까지 하지 않으려 했던 말을 하는 건, 타당한 이유를 대지 않고 오피스텔로 돌아가면 하경이 오해하고 불안해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럼 네 생각만 바꾸면 되는 거잖아.”
“회장님께서 염려하시는 일은 안 하고 싶어.”
하경은 그의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서 더 붙잡을 수 없었다.
“알았어. 내일 봐.”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잠을 이루기 힘들 듯했다. *** 유현은 자정이 다 되어서 태주의 전화를 받았다.
[야, 인마. 부재중 봤으면 전화는 해 줘야지.]
술을 마셨는지 살짝 혀 꼬부라진 목소리였다.
“나중에 해야지, 하다가 잊어버렸어요.”
[우리 회사 올 거야, 말 거야.]
“말려고요.”
[난 널 포기하지 않아.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물어볼 거니까 각오해라.]
유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세요.”
[그나저나, 알고 있냐? 중앙지검에서 주원 호텔 내사 시작했다는 거.]
미간이 살짝 좁아졌을 뿐, 유현의 표정은 사뭇 담담했다.
“몰랐어요.”
[몰랐지만 예상은 했던 것 같은데?]
“네.”
[나 지금 중앙지검 형사부에 있는 동기 만나고 들어가는 길인데, 미친 듯이 바빠질 거라고 죽는소리를 하더라고. 네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다.]
“고마워요, 선배.”
[왠지 너, 뭔가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해야죠.”
유현은 손 놓고 구경만 할 생각은 없었다. 이 모든 시발점이 자신이라는 것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