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간절한 소망,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novel.naver.com
61화. 간절한 소망2020.10.29.
하경은 멍한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디가 얼마나 아프신데요?”
목소리는 짐짓 차분했지만, 빨라진 심장 박동은 제 속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췌장암이다.]
“…….”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그녀의 얼굴에 절망이라는 감정이 짙게 드리워졌다.
[가족들에게 알리고 제대로 치료를 받으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를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너한테 연락했다.]
“수술받으면 나으실 수 있는 거죠?”
[수술이 아니라 항암 치료부터 시작해야 한다.]
질문의 요지를 빗나간 대답이었다.
“수술이든 항암이든, 나을 수 있다고 말씀해 주세요.”
[최선을 다할 거다.]
“…….”
장 교수는 끝까지 하경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의사로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섭섭하고 야속했다. 아버지가 치료를 받지 않는 이유가 희망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낫는다는 확신이 있다면 치료를 받지 않고 버텨야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네가 네 아버지를 설득해 줬으면 좋겠구나.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후회가 안 남지.]
죽음을 전제로 한 말들이 그녀의 마음에 연신 생채기를 냈다.
“……네.”
하경은 있는 힘껏 목소리를 끌어올려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휴대 전화를 든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르고 있을 때, 샤워를 마친 유현이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면서 욕실에서 나왔다.
“씻어.”
“…….”
그를 바라보는 하경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유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누구랑 통화하는 거 같던데. 한결이 전화 왔어?”
유현이 한결의 이름을 콕 찍어 말한 건 어젯밤에 한결에게 전화가 걸려왔었기 때문이었다. 진동이라 전화가 온 줄 모르고 있다가 아침에서야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확인했다.
<뭐 하느라 전화 안 받아. 누나랑 같이 있냐? 나 외근 나왔다가 바로 퇴근하는 바람에 지금 윤 대리한테 들었는데, 아버지가 보란 듯이 누나랑 너랑 나란히 세우고 다니셨다면서? 허락받아서 좋냐?>
한결이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토요일에 일찍 일어날 리 없다는 걸 알기에 오후에 전화를 걸어볼 참이었다.
“아버지 주치의…….”
유현은 그제야 하경이 울먹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주치의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녀가 주 회장의 상태를 알게 되었다는 걸 직감한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경이 처연한 얼굴로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아버지가…… 암이래…….”
“알아.”
“……안다고?”
침대로 걸어가 그녀를 마주 보고 앉은 유현은 그동안의 일들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하경이 초점 잃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날…….”
아버지가 무슨 말로 이별을 종용했기에 유현이 갑자기 제 곁을 떠나려고 했는지 궁금했었다. 물어도 확실한 대답을 해 줄 것 같지 않아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건만 오늘에서야 비로소 모든 의문이 해소된 것이었다. 헤어질 수 없다고 버티지 못한 유현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다른 사람 통해서 듣게 해서 미안해.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겠다고 해서 기다렸어.”
하경이 얼마나 놀라고 충격을 받았을지 알기에 더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침묵해야 했던 시간이 허무하고 허탈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비밀을 지킬 필요도 없었을 텐데……. 얼마나 답답했으면 의사의 의무를 저버리고 전화를 걸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주치의가 원망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오늘내일 중에 말씀하실 것 같았는데 일이 이렇게 됐네.”
“나 지금 아무 생각도 안 나.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을 만큼 심경이 복잡했다.
“일단 회장님을 만나 뵙고, 회장님 말씀을 들어. 그리고 치료받으시라고 설득해.”
하경은 유현의 침착한 태도 덕분에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래. 집에 가 봐야겠다.”
유현은 허둥지둥 침대를 내려가려는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집으로 가겠다고 전화부터 드려.”
“아, 집에 안 계실 수도 있겠구나…….”
“그게 아니라, 무작정 집으로 찾아가면 회장님께서 곤란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휴대 전화를 찾기 위해 침대 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멈칫한 하경이 유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곤란해?”
“주치의 선생님께서 말씀 안 하셨어? 홍 관장님도 회장님 상태 모르신다고.”
“그런 뉘앙스의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유현은 기억을 더듬는 그녀에게 휴대 전화를 건네주었다.
“전화 드려.”
하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간 것 같지도 않은데 통화가 연결되었다.
[그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익숙한 저음을 듣자마자 울컥한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안 그래도 지금 상훈이랑 통화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던데…….]
“집으로 갈까요, 밖에서 뵐까요.”
[집으로 와라.]
“어머니는요?”
[외출했다.]
“지금 갈게요.”
하경은 침통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 유현은 지난번과 같은 자리에 차를 세웠다. 하경의 본가에 처음 왔던 날도 그녀를 혼자 들여보내기가 조마조마했었는데 두 번째인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경을 돌아본 그는 심란한 마음을 숨기고 담담하게 말했다.
“들어가.”
같이 들어가겠다고 하지 않는 건 부녀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경은 고개만 끄덕이고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재 앞에 도착한 그녀는 한참 동안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회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서재 안으로 들어선 하경의 눈에 소파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요즘 아버지의 얼굴이 핼쑥하고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실 유현과의 사이를 반대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서 걱정 같은 건 할 새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더 괴로웠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와서 앉아라.”
정신을 차리고 소파로 걸어가 앉은 하경이 어렵사리 말문을 뗐다.
“이러고 계시면 어떡해요. 당장 병원 가요.”
딸을 바라보는 주 회장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하경아.”
“빨리 치료받으세요. 제발…….”
애절한 목소리가 서재를 울렸고, 이내 하경의 양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은 시간을 병원에서 허비하고 싶지 않다.”
“그걸 왜 허비한다고 생각하세요. 낫기 위한 과정이잖아요.”
“낫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생사를 초탈한 듯 보이지만, 주 회장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상훈이가 말을 아끼길래 다른 의사들 여럿에게 좀 알아봤다. 지금 상태로는 항암 치료를 받으면 1년, 받지 않으면 6개월 정도 산다더구나.”
“1년, 6개월, 그 기간을 누가 정하는 건데요. 예외도 있을 거 아니에요.”
“내가 그 예외가 되리라는 법이 없으니까.”
“아버지…….”
“항암 후유증이 극심하다던데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항암 치료를 받고 싶지 않다.”
“왜 포기부터 하세요. 왜요…….”
울먹이는 하경을 바라보는 주 회장의 얼굴에 애틋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곁에 유현이가 있어서 다행이다. 유현이까지 없었다면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텐데…….”
하경은 지금껏 아버지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었다. 주원 호텔에 입사하기 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도 얼굴을 보기 힘들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탱해주던 지지대가 사라지는 게 이런 기분일까.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전 유현이도 필요하지만, 아버지도 필요해요.”
눈물을 참기 위해 말아쥔 하경의 주먹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내 선택을 존중해 줄 수는 없겠니.”
“만약 제가 똑같은 병에 걸렸다면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을까요? 네 선택이니 존중한다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
“…….”
주 회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약 하경이 자신과 같은 상황이라면 강제로라도 병원에 끌고 갔을 테니까.
“아니잖아요. 아버지도 못 하시면서 왜 저한테는 하라고 하세요.”
하경은 아버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단호한 어조로 쐐기를 박았다.
“저한테 든든한 시댁 같은 거 만들어 줄 생각하지 마시고, 아버지가 든든한 친정이 되어 주세요.”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하고 묵묵히 듣고만 있던 주 회장이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하경의 동공에 작은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치료, 받으시겠다는 거죠?”
“그래.”
그가 고집을 꺾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새삼 삶에 대한 의지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무런 노력도 해 보지 않고 떠나버리면 남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힘들어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주 회장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는 하경을 보면서 허허 웃었다.
“어려서는 생전 안 울던 놈이 다 커서 왜 자꾸 울어.”
하경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다 아버지 때문이잖아요.”
“다 나 때문이지…….”
지난번에도 그리고 지금도. 딸을 울린 아버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훌쩍거리는 하경을 보고 있던 주 회장의 뇌리에 문득 유현의 얼굴이 스쳤다.
“유현이한테는 뭐라고 하지 말고. 내가 비밀 지켜달라고 부탁한 거니까.”
“알아요.”
“그만 가 봐라. 난 한결이한테 전화 좀 해 봐야겠다.”
“네.”
아버지가 왜 한결에게 전화한다는 건지 눈치챈 하경은 순순히 일어나 서재를 나왔다. 그래도 들어가기 전보다는 마음이 훨씬 편했다. 긴 복도를 지나 현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현관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외출했다던 홍 관장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니?”
홍 관장의 말투가 유난히 뾰족한 건 헤어숍에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탓이었다. 부친상을 당해서 출근하지 못했다는 전담 미용사 때문에 심기가 매우 불편한 와중에 하경을 보니 짜증이 확 치솟았다.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유현이 허락해 달라고? 같이 왔나 본데 걘 왜 밖에 있니?”
홍 관장은 아직 주 회장이 두 사람 사이를 허락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제저녁 회사에서 있었던 일도.
“남자 때문에 눈물 바람 하는 거 보기 안 좋아.”
“가 보겠습니다.”
아무런 부인도 하지 않은 하경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홍 관장을 지나쳐 집을 나왔다. 차라리 새어머니가 대놓고 자신을 싫어하는 티를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친절하고 다정한데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 단둘이 있을 때도 가식적이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더욱 가식적으로 변하는 새어머니를 볼 때마다 씁쓸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단둘이 있을 때 노골적으로 짜증을 부리니 묵묵히 참고 견디기가 힘들었다. 오늘처럼 마음이 어수선한 날에는 더더욱.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 대문을 열고 나간 하경은 운전석에서 내려 다가오는 유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니 또 코끝이 찡해졌다.
“회장님이랑 얘기는 잘 나눴고?”
“응…….”
유현은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뒷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됐어. 가자.”
그는 하경을 조수석으로 데려가면서 높은 담벼락에 둘러싸여 있는 저택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간절히 소망했다. 다음에는 부디 좋은 일로 오게 되기를. 사랑하는 이가 아버지를 잃지 않기를.
*** 같은 시각. 손 의원은 유현과 같은 검찰청에 있다가 얼마 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부임한 오기용 지검장과 식사 중이었다. 두 사람은 공생 관계였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사이. 그렇게 수년째 돈독한 친분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손 의원이 용건을 꺼냈다.
“주원 호텔 좀 털어 보지.”
주서호 회장의 딸이 손종일 의원의 장남과의 결혼을 깨고 차남과 교제한다는 사실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알 만한 사람에 속하는 오 지검장은 손 의원이 그 일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건 눈치챘지만, 그의 의중이 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느 정도로…….”
오 지검장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손 의원의 차남이 주원 호텔 사위가 될 수도 있는 마당에 탈탈 털라는 의미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다.
“타격이 크면 클수록 좋을 것 같네만.”
내심 당혹스러웠으나, 오 지검장은 내색하지 않고 순순히 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검토해 보고 진행 상황 공유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자네도 언제든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하게.”
손 의원의 목표는 자신에게 맞선 모두가 뼈저린 후회를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