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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59화 (59/79)

59화. 뜻밖의 허락,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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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뜻밖의 허락2020.10.22.

임원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하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목 인사를 하는 승조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의 태도만 보아서는 어제 일이 꿈이었나 싶기도 했다.

“나 좀 봐요.”

출근하자마자 연이어 회의에 참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뿐, 어제 일을 흐지부지 넘길 생각은 없었다. 그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단계는 지난 셈이었다. 그녀는 먼저 이사실로 들어가 책상에 살짝 기대어 섰다. 뒤따라 들어온 승조가 문을 닫고 하경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제 비서실장 업무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까 해요.”

베트남 출장을 다녀온 이후부터 고민을 시작해서 오늘 결심을 굳혔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그럴듯하게 그와 거리를 두는 방안이었다.

“경질입니까?”

승조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하경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저 담담했다. 사실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을 남자로 봐 주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 왜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 자책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수년을 잘 참아오다가 왜 어제 그 순간 갑자기 제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만 했을 일이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앞으로 기획팀 일에만 전념하라는 뜻이에요.”

하경은 승조가 주원 호텔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해 왔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다만 그를 사적인 영역에 들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헛된 희망을 품지 않도록 선을 그어 주는 게 그에게도 나은 일이라고 믿었다.

“거부해도 됩니까?”

“아니, 안 돼요.”

“알겠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없어요. 나가 보세요.”

하경은 묵례를 하고 뒤돌아 이사실을 나가는 승조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책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유현에게 전화를 걸면서 의자에 가서 앉았다. 신호가 몇 번 가고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

점심시간에 한 마지막 통화보다 말투가 딱딱해졌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유현이 갑자기 돌변한 적이 있으니 하경이 불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뭐 해?”

[나 지금 회장실이야.]

“하…….”

그녀의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또 부르셨어?”

휴대 전화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으나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금 잠깐 올라올 수 있어?]

“바로 갈게.”

전화를 끊고 벌떡 일어난 하경은 2분도 채 걸리지 않아서 회장실에 도착했다. 비서실장이 열어주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회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그녀가 멈칫했다. 문득 유현의 이력서를 건네받았던 날이 떠올라서였다. 그날과 거의 흡사한 광경이었으나 결정적으로 다른 건 그날은 아버지가 유현에게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계속 거기 서 있을 거냐.”

근엄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하경은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유현이 괜찮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어도 그녀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주 회장을 향한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헤어지라고 강요하셔도 저희 안 헤어져요. 유현이가 헤어지자고 해도 제가 못 헤어져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포기하세요.”

하경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펑펑 울었던 것이 새삼 후회스러웠다. 허락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새 또 유현을 부른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헤어지라고 하지 않았다.”

“아직 안 하셨으면 이제 하시겠네요.”

주 회장은 적의로 가득 찬 딸의 눈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

하경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건 유현도 마찬가지였다. 회사로 오라고 해서 왔을 뿐, 아직 아무 말도 들은 게 없었다. 공교롭게도 자리에 앉자마자 하경이 전화를 걸어왔고, 주 회장이 옆에서 그녀를 부르라고 하기에 그 말에 따른 게 다였다. 주 회장은 두 사람의 의아한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 통화가 연결되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한참 만에 신호음이 끊기고 냉랭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날세.”

그는 이런저런 상황 설명 없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난 내 딸과 자네 아들 사이를 허락하기로 했네.”

놀란 하경과 유현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지금 주 회장과 통화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고민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둘이 좋다는데 어쩌겠나. 그러지 말고 자네도 생각을 바꾸…….”

주 회장이 하던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손 의원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는 걸 눈치챈 하경과 유현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덤덤하게 휴대 전화를 내려놓은 주 회장의 시선이 유현에게 향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긴 하다만,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반대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부터 민건이가 아니라 너였다면 좋았을걸…….”

잔뜩 꼬여버린 상황이 안타깝고, 손 의원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불안했다. 그렇지만 더는 반대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30여 년 전, 부모님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여자를 택했듯 제 딸도 같은 선택을 하리라는 걸 알면서 무의미한 반대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던 걸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으니까. 다만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내준 건 가끔 후회했다. 그래서 딸을 더 말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평생 후회하면서 살까 봐.

“회장님 마음, 알고 있습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 회장이 유현의 강건한 눈을 보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하경의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죄송해요, 아버지.”

주 회장과 유현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무슨 말씀 하시려는 건지도 모르면서 화부터 낸 거 잘못했어요.”

하경을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하던 것도 잠시, 주 회장이 허허 웃었다.

“난 내 딸이 사랑 타령 하면서 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도 몰랐어요.”

하경은 절망적이었던 그날을 떠올리며 순순히 수긍했다. 물론 지금은 아주 민망했다. 주 회장은 멋쩍어하는 딸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화제를 돌렸다.

“너희가 알고 있어야 할 게 있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뭔데요?”

“손 의원에 관한 일이다.”

주 회장이 다시 유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네 아버지가 내게 한 말이 있다.”

유현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만약 너희 둘 사이를 허락한다면 주원 호텔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죄송합니다, 회장님.”

담담한 표정과 달리, 꽉 말아쥔 유현의 주먹에는 푸른 힘줄이 불거져 있었다.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난 너와 네 아버지를 별개로 생각하기로 했다.”

주 회장은 눈빛으로 그를 다독인 다음, 말을 이었다.

“경찰, 검찰, 국세청, 언론까지 네 아버지 인맥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 거다.”

하경과 민건을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가 이제 가장 큰 위협이 된 셈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내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는 말고. 너희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것뿐이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 회장은 조용한 하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하경이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뗐다.

“앞으로도 이렇게 다 말씀해 주세요. 아버지 말씀대로 저희도 알고 있어야죠.”

“그럴 생각이다.”

주 회장의 시선이 벽시계로 갔다가 하경에게 돌아왔다.

“퇴근 시간 다 되어 가는데 오늘은 일찍 퇴근해라. 나도 그만 들어가야겠다.”

“사무실에 들러야 해요. 급하게 올라오느라 컴퓨터도 켜놨어요.”

“그럼 같이 내려가자.”

주 회장이 먼저 몸을 일으켰고, 두 사람이 따라 일어났다. 앞장서서 회장실을 나간 주 회장은 비서실장에게 차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한 뒤 비상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같이 내려가자는 의미가 뭔지 알게 된 하경이 얼른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제 방까지 같이 가시게요?”

21층에서 1층까지 계단으로 내려갈 리는 없을 테니까.

“그래. 컴퓨터 끄고 가방 가지고 나와라.”

“먼저 가세요. 어차피 같이 움직일 것도 아닌데.”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주 회장이 미간을 좁혔다.

“배웅하라는 뜻이다.”

“아, 배웅…….”

하경은 그제야 아버지가 직원들에게 유현의 존재를 알리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단순히 허락만 하는 게 아니라 유현과 제 사이를 공식화하겠다는 의도라는 걸 알고 나니 하늘로 향하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귀찮으면 관두고.”

“그럴 리가요.”

주 회장이 멈췄던 걸음을 떼자, 유현은 조용히 앞으로 치고 나가서 비상구 문을 열었다. 제게는 익숙한 광경이 유현에게는 생소할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친 하경은 그가 열어준 문을 통해 비상구로 들어서면서 속삭였다.

“한두 층 정도는 계단으로 다니는 거 아버지한테 배운 거야.”

그녀는 유현에게 빙긋 웃어 보이고 걸음을 재촉해서 주 회장의 뒤를 따랐다.

“세희네 아버지는 무릎 안 좋으시다던데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괜찮다.”

“아버지가 건강은 타고나셨죠.”

“…….”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간 주 회장은 하경과 유현을 뒤에 세우고 20층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세 사람은 많은 직원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이사실 앞에 도착했다.

“들어갔다가 나와라.”

“네.”

하경이 이사실로 들어가자, 주 회장은 유현을 돌아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고맙다, 하경이에게 내가 병원으로 부른 거 말 안 해 줘서.”

“회장님.”

유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주 회장이 선수를 쳤다.

“하루 이틀 내로 말할 생각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다오.”

“알겠습니다.”

하경은 금세 가방을 들고 나왔고, 세 사람은 다른 직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주서호 회장은 여느 그룹 총수들과는 달리 꽤나 소탈한 편이었다. 그가 직원들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기에 별다른 동요는 없었다. 주 회장을 중심으로 하경과 유현이 좌우에 각각 섰다. 하경은 자리를 잡자마자 쓱 팔짱을 꼈다. 회장님이자 아버지 옆에서 하기엔 불손한 행동이었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 팔짱을 풀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그녀가 오늘 아침에 했던 약속을 충실히 이행 중임을 알고 있었다. 주 회장은 1층 본관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오르기 전, 유현과 하경을 돌아보았다.

“조만간 자리 마련할 테니 밥 한번 먹자.”

“저희는 언제든지 좋아요.”

하경이 제 마음이 바뀔까 봐 얼른 대답했다는 걸 눈치챈 주 회장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을 괜히 마음고생을 시켰다는 후회 때문이었다.

“데이트 잘 하고.”

주 회장의 입에서 데이트라는 말이 나오자, 하경과 유현은 그제야 허락을 받았다는 게 실감이 났다.

“들어가세요.”

“들어가십시오.”

두 사람은 주 회장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서야 발길을 돌려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유현이 가늘어진 눈초리로 하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일부러 그런 거지?”

“뭘?”

“팔짱 낀 거.”

“사람 많은 엘리베이터에 타면 팔짱 끼고 있으라며.”

“회장님께 한소리 들을까 봐 조마조마했잖아.”

“그냥 네 팔짱을 낄 걸 그랬나?”

하경은 말간 얼굴로 유현의 팔에 덥석 팔짱을 꼈다.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그는 그녀를 떼어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남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걸었다.

“너 회사 그만두니까 좋다.”

“왜?”

“더 이상 상하 관계가 아니니까.”

“그래도 갑을 관계는 여전한데?”

하경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갑이야?”

“당연한 걸 왜 물어.”

자신이 갑이라는 데에 백 프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부인도 하지 않았다.

“갑이 을 집에 놀러 가고 싶다고 하면 데려가 주나?”

“오피스텔에 가자고?”

“응, 일단 밥부터 먹고.”

“오피스텔엔 가서 뭐 하게.”

“그냥 오랜만에 가 보고 싶어서.”

“그러든지.”

유현은 하경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진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 손 의원은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감히 내 말을 무시해?”

노골적인 협박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났다. 주 회장과의 통화를 곱씹을수록 점점 더 자존심이 상했다. 분노의 화살은 금세 유현에게 옮겨갔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던 유현의 말을 떠올리니 농락당한 기분까지 들었다.

“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어?”

손 의원은 누구보다 호승심이 강했다. 상대가 자식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는 게 아니라, 부모 이기는 자식이 없다는 걸 반드시 증명해 보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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