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본능에 충실한 시간,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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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본능에 충실한 시간2020.10.18.
유현은 하경이 당기는 대로 힘없이 끌려갔다. 그러나 입술과 입술이 포개어진 것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가져왔다. 하경은 그에게 몸을 내맡긴 채 가쁜 숨을 내쉬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그를 리드해 보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머릿속에서 금세 사라졌다. 유현의 손과 입술이 지나간 곳마다 열기가 피어올랐다. 거친 숨소리와 뜨거운 숨결이 귓전을 스치자, 그녀의 입술 사이로 가녀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흥…….”
분명 제 입에서 나온 소리가 맞는데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야릇한 감각이 발끝까지 퍼져 나갔다. 유현은 하경의 귓불, 목, 어깨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더 아래로 내려가기 전, 그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하경아.”
무겁고 습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마치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하경은 저도 모르게 침대 시트를 지그시 움켜쥐었다.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도 극도로 예민해진 몸이 잘게 떨렸다.
“긴장하지 마.”
촉촉이 젖은 속눈썹을 들어 올리니, 유현의 얼굴이 보였다. 야한 눈빛과 야한 입술. 그는 너무나 관능적이고 선정적이었다.
“아프게 안 해.”
하경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살갗을 간질이는 것만으로도 솜털이 곤두서고 전율이 일었다. 유현은 희고 여린 살결에 제 흔적을 새겼다. 제 여자를 맛보고, 느끼고, 탐했다. 이성이 아닌 본능에 충실한 시간. 침실을 가득 채운 후끈한 공기는 밤새도록 식을 줄을 몰랐다.
*** 유현은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친 채 곤히 잠들어 있는 하경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많이 고단했는지 숨을 쌕쌕 내쉬며 자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출근해야 하는 사람을 너무 괴롭혔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잠은 좀 재울걸.’
깨워야 할 시각이 다가올수록 미안한 마음이 점점 커졌다. 그는 연신 시계를 흘긋거리다가 조심스럽게 하경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하경아.”
“…….”
미간을 살짝 찡그리기만 할 뿐 하경이 눈을 뜨지 않자, 유현은 그녀의 어깨를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음…….”
하경은 마지못해 무거운 눈꺼풀을 열었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서 눈앞이 흐릿하고 머릿속이 멍했다.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니 비로소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났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목이 빨개졌지?”
“…….”
“얼굴이랑 귀까지 빨개졌다.”
유현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칠 말을 찾지 못한 그녀는 그를 등지고 돌아누우려다가 흠칫했다. 하경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내자, 놀란 유현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배를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르 흘러내려 그의 탄탄한 상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괜찮아?”
어지간하면 괜찮다고 대답해 주고 싶은데 안 괜찮았다.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하경은 움직이는 걸 포기하고 똑바로 누워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지……?”
온몸이 뻐근하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 때리지는 않았는데.”
“그래. 때리지는 않았지…….”
유현은 자신을 바라보면서 말끝을 늘이는 그녀의 눈을 슬쩍 피했다. 때리지는 않았어도 힘들게 한 건 사실이라 마냥 떳떳할 수만은 없었다. 잠시 딴청을 피우던 그는 이불 속으로 두 손을 집어넣어 하경의 다리를 꾹꾹 주물러 주었다.
“시원하지?”
“응.”
하경은 제 말에 고무되어 반대쪽 다리와 양팔까지 정성 들여 안마해 주는 유현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돌아누워 봐. 등도 좀 풀어줄게.”
몸이 나른해지면서 덩달아 머리까지 몽롱해졌던 그녀의 눈이 번쩍 커진 건 그가 이불을 젖히려고 한 순간이었다. 유현은 이불을 두 손으로 꼭 쥐고 필사적으로 버티는 하경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 좀 놓지?”
“안 돼.”
“왜 안 되는데?”
“나 지금 아무것도 안 입고 있거든?”
“알아.”
“…….”
하경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말없이 흘겨보았다.
“볼 거 다 본 사이에 새삼 뭘 민망해하고 그래.”
“지금은 다르지.”
지난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자,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유현이 피식 웃으면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알았어. 그럼 그대로 돌아누워.”
“믿어도 돼?”
“날 안 믿으면 누굴 믿어.”
유현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하경의 허리와 다리 밑으로 손을 쑥 넣고 그녀를 휙 뒤집었다. 얼떨결에 이불을 덮은 채로 엎드리게 된 하경은 체념하듯 몸에 힘을 뺐다. 그는 비집고 올라오는 불순한 마음을 잘 숨기고 그녀의 목부터 허리까지 꼼꼼하게 마사지해 주었다.
“좋아?”
“응, 좋아.”
눈을 감은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몸 쓰는 일은 다 잘한다는 거, 이제 믿어주는 거지?”
하경은 그 말에 내포된 뜻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의 손길이 어느샌가 끈적거려졌다는 사실도.
“의심한 적 없어.”
허리 근처를 지분거리던 유현의 손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자, 그녀는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잽싸게 몸을 일으켜 앉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몸 중에 특히 손을 잘 쓰지.”
유현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을 돌렸다.
“내가 그날 했던 말, 기억해?”
“무슨 말?”
“평생 충성하겠다고 했던 말.”
“기억해. 내 인생을 달라고 했던 말도.”
“줄 거야?”
“줄게.”
하경은 그가 달라고 하는 건 다 줄 수 있었다. 비록 조건이 있긴 해도.
“대신, 네 인생도 나한테 줘.”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평생 충성할게.”
유현은 하경을 끌어당겨 품에 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약속의 의미로, 일단 지금 몸을 한번 바칠까?”
“바치긴 뭘 바쳐.”
하경은 그의 옆구리를 아프게 꼬집고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유현이 옆구리를 문지르며 투덜대는 사이, 얼른 침대 아래 떨어져 있던 샤워 가운을 집어 올려 몸에 걸치고 침대를 내려갔다.
“나 씻고 나올게.”
발걸음을 떼려다가 갑자기 멈칫한 그녀가 그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마사지 고마워. 돈 주고 받는 것보다 훨씬 낫네.”
유현은 욕실로 가려는 하경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평소에 전신 마사지 같은 거 받고 그래?”
하경은 숨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일단 대답부터 했다.
“응, 가끔.”
“남자가 해 줘, 여자가 해 줘?”
그제야 유현이 왜 뜬금없는 질문을 했는지 눈치챈 그녀는 자신을 짓궂게 놀렸던 그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여자한테만 받아봤는데 이제부터 남자한테 받으려고. 너무 시원했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 거 알지? 내가 잘하는 거야. 다른 사람이 나만큼 하란 법 없어.”
“그래도 전문가가 더 잘하지 않을까?”
논리적인 척해 보려던 유현은 하경에게 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안 돼. 나한테 받아. 내가 해 줄게.”
하경은 그의 간절한 눈을 외면할 수 없었다.
“까짓것, 그러지 뭐.”
인심 쓰듯 그의 청을 받아들여 주고 사뿐사뿐 욕실로 걸어가는 그녀의 얼굴은 행복감으로 충만했다. ***
“왜 자꾸 따라다녀.”
화장과 머리 손질을 할 때도 뒤에서 지켜보고 서 있던 것으로도 모자라 드레스 룸까지 따라온 유현에게 하경이 곱게 눈을 흘겼다.
“저녁때까지 못 보니까 실컷 봐 두려고.”
“나 옷 갈아입을 건데.”
그는 드레스 룸 한가운데 우뚝 서서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아입어.”
“나가 주셔야 갈아입죠.”
“다 벗은 것도 봤는데 옷 갈아입는 건 보면 안 되나?”
하경은 유현이 또 막무가내로 우길 심산이라는 걸 간파했다.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뭐가 달라.”
“암튼 다르다고. 나가.”
“치사하게…….”
“…….”
내가 내 옷 갈아입는 걸 보여주지 않겠다는데 치사하다니. 하경은 투덜거리면서 드레스 룸을 나가는 유현을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금세 입꼬리가 하늘로 향했다.
“잘생겨서 봐 준다.”
잘생긴 얼굴은 유현의 매력 중 극히 일부분일 뿐이지만, 일단 지금은 출근 준비가 바쁘니 그렇게 뭉뚱그리기로 했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드레스 룸을 나왔을 때, 유현은 드레스 룸 맞은편 벽에 기대서 있었다. 하경의 눈에는 그가 마치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새삼 행복해진 하경은 유현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드레스 룸에 네 자리 그냥 비워두기 잘했다.”
“원래대로 채워.”
멈칫한 그녀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안 돌아올 거야?”
“어, 자고 가는 날이 아예 없을 거라고 장담은 못 하겠지만.”
“왜 그래야 하는데?”
“동거한다는 소문나서 좋을 거 없잖아. 그동안은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어.”
“남들이 어떻게 보든 무슨 상관이야.”
하경은 제 입에서 나온 말이 스스로도 어색했다. 누구보다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온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난 남들이 주하경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거 싫어.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아.”
“…….”
오롯이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걸 알기에, 하경은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유현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맞추면서 빙긋 웃었다.
“결혼을 빨리하자.”
한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그가 더 간절했다.
“매일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자, 우리.”
“프러포즈야?”
“어.”
“나처럼 프러포즈 많이 받아본 여자가 또 있을까 싶네.”
사귀기 전부터, 아니, 아무런 감정도 없을 때부터 줄기차게 결혼하자는 말을 들은 여자는 아마 없을 거였다. 하경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 것과 반대로, 유현의 미간은 좁아졌다.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똑 부러진 대답을 들은 기억이 없는데?”
“왜 없어. 했는데.”
“언제?”
“뭐든 너랑만 하겠다고 했잖아.”
“그런 대답 말고, 결혼 승낙의 표시를 확실하게 해 줘.”
하경은 망설임 없이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고 싶어.”
“지금 당장 혼인 신고 하러 갈까?”
“지금은 곤란해요. 나 오늘 오전부터 회의 있어.”
유현은 손목시계로 몇 시인지 확인하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로 나가면 돼?”
“응.”
“같이 나가자.”
“오피스텔에 가려고?”
“어.”
“어제 회사 차로 움직여서 내 차는 회사에 있어. 가는 길에 나 떨어뜨려 주고 가.”
“떨어뜨려 주고 가다니. 고이 모셔다드릴 건데.”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왔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제 일을 떠올린 유현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어제 하다 만 얘기, 마저 하자.”
“하다 만 얘기가 있었어?”
“아주 중요한 얘기가 남았지.”
“그럼 해.”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어제 그녀가 유혹하는 바람에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앞으로, 이유를 불문하고 다른 남자한테 안기지 마. 어떤 신체 접촉도 안 돼.”
“사람 많은 엘리베이터에 타면 본의 아니게 손등 같은 데가 닿기도 하는데.”
유현은 하경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았다.
“팔짱 끼고 있어.”
“알았어. 어려울 거 없네.”
하경은 질투하는 그를 보는 게 즐거웠다. 그래서 그가 조금은 무리한 요구를 해도 다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중요한 얘기, 끝난 거지?”
“어.”
합의점에 도달한 두 사람은 산뜻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파트를 출발한 유현의 차는 주원 호텔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멈췄다.
“퇴근할 때 연락해. 바로 데리러 올게.”
유현은 안전벨트를 푸는 하경을 보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나 때문에 칼퇴근하려고 애쓰지 말고. 늦게 봐도 되니까.”
“응.”
운전석 쪽으로 몸을 돌린 하경은 유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상체를 뒤로 물리고 분홍색 립스틱이 찍힌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립스틱 자국이 마치 ‘내 남자’라는 도장처럼 느껴졌다.
“운전 조심해.”
“그래. 올라가.”
유현은 혼자가 되고 나서야 주 회장이 생각났다. 하경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던 탓이었다. 오피스텔로 향하는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 늦은 오후. 유현은 휴대 전화의 최근 기록을 뒤져 번호 하나를 찾아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니 무뚝뚝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어쩐 일이십니까.]
그는 주 회장의 비서실장이 제 번호를 저장해 놨다는 걸 알게 되었다.
“회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지 5분쯤 지나서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주 회장의 휴대 전화 번호라는 것을 직감한 유현은 숨을 한번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손유현입니다.”
[나다.]
그의 짐작대로였다.
“네, 회장님.”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회장님 상태를 하경 씨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께서 하지 않으시면 제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짧은 침묵이 지나간 뒤, 주 회장의 묵직한 목소리가 다시 귓전을 두드렸다.
[지금 회사로 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