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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57화 (57/79)

57화. 미치게 유혹적인,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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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미치게 유혹적인2020.10.15.

유현은 엘리베이터 근처에 주차한 차에 앉아서 하경을 기다렸다. 도착하자마자 초인종을 눌러 보았기에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서 기다리지 않는 건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독단적이었던 제 행동을 사과하고 용서를 받는 게 먼저였다. 전화를 걸어서 언제 오느냐고 묻는 것조차 뻔뻔하게 느껴져서 그냥 묵묵히 기다렸다. 누군가를 이렇게 오래 기다려 본 건 처음이었다. 몇 시간, 아니, 며칠이라도 기다리겠다는 각오를 하게 한 사람도 오직 주하경뿐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한 지 3시간쯤 지났을까.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췄다. 기다리던 하얀색 세단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잠시 휴대 전화로 시선을 돌렸다가 들어보니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운전석에 내린 승조가 달려가 하경을 끌어안는 걸 본 순간, 유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곧바로 차에서 내린 그는 쾅 하고 차 문을 닫아버렸다. 분노 어린 소리가 지하 주차장을 울렸다. 유현은 하경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돌아서는 승조에게 눈을 떼지 않으면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에서까지 그의 심경이 묻어났다. 유현의 시선이 승조를 떠나 하경에게 옮겨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담담한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걸음을 멈춘 그가 하경에게 손을 뻗었다. 유현의 손가락이 하경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어갔고, 이내 두 손이 단단하게 얽혔다. 하경을 부드럽게 당겨 제 곁에 세운 유현은 순순히 끌려와 준 그녀의 손을 지그시 잡는 걸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승조를 돌아보며 말문을 뗐다.

“임승조 씨.”

이제 더는 그를 팀장님이라고 부를 생각이 없었다. 제 여자를 탐내는 남자에게 ‘씨’ 자를 붙여주는 것도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한 결과였다.

“난 누가 내 여자 몸에 손대는 거 아주 싫어합니다.”

“…….”

승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당하게 ‘내 여자’라고 말할 수 있는 그가 부러울 뿐이었다. 그때, 두 사람을 가만히 보고 있던 하경이 입을 열었다.

“그만 가세요.”

많은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승조가 묵묵히 뒤돌아 차로 걸어갔다. 말없이 그를 눈으로 좇던 하경과 유현은 그가 탄 차가 시야에서 벗어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은 하경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마음 정했어?”

“어.”

“헤어져 줄까?”

덤덤한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아니.”

“그럼?”

“평생 옆에 있게 해 줘.”

“…….”

하경의 눈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동시에 콧날이 시큰해지면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유현은 눈가가 빨개진 그녀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눈물이 터져버린 하경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옷을 적셨다. 유현은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하경이 우는 걸 보니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실감이 났다.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서야 가까스로 진정된 하경의 입술 사이로 투정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넌 진짜 나쁜 놈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그의 가슴에 더욱 깊이 얼굴을 묻었다.

“알아. 그래도 용서해 주라.”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하면.”

“약속할게.”

차단기가 열릴 때 나는 소리가 들려오자, 유현은 하경을 조심스럽게 품에서 떼어냈다.

“차 들어온다. 일단 올라가자.”

두 사람은 공동 현관문을 지나쳐 엘리베이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하경은 3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것을 확인하고 유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근데 언제 왔어?”

유현은 그녀의 젖은 뺨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면서 대답했다.

“3시간쯤 전에.”

울려서 마음이 아픈 와중에 눈물이 다 마르지 않은 얼굴은 왜 이리도 예쁜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올라가서 기다리지.”

“나 그렇게까지 양심 없는 놈은 아니야.”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구나…….”

그는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녀를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태우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받아쳤다.

“사실 양심은 좀 없는 편이긴 해. 대신 진심은 있지.”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유현이 진지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주하경을 향한 연심도.”

하경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연심까지 나와서 화도 못 내겠네.”

지난 이틀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희미해졌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 온 기분이었다.

“화내도 돼.”

“반성하는 사람한테 화내서 뭐 해.”

하경은 까칠한 그의 얼굴을 안타까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늘 윤기 나던 얼굴이 오늘은 푸석하고 떼꾼했다.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 것 같아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1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하경을 집 안으로 먼저 들여보내고 뒤따라 들어간 유현은 그저께 저녁 이 집을 나오던 순간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어쩌면 다시는 올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공간에 다시 발을 들이니 기분이 묘했다.

“나 왜 이렇게 이 집이 익숙하고 편하지?”

20년 가까이 살았던 본가보다 더. 오피스텔은 비교 대상도 될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본 하경이 그걸 여태 몰랐냐는 듯한 표정으로 정답을 알려주었다.

“내가 있으니까.”

유현은 그 말에 전적으로 수긍했다. 앞으로도 그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신에게 가장 편한 곳이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경을 소파에 앉히고 옆에 따라 앉은 그는 자신과 마주 보게끔 그녀의 몸을 제 쪽으로 돌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만약 내가 헤어지자고 했다면 바로 그러자고 했을 거야?”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솔직한 제 심정을 털어놓았다.

“아니, 구질구질하게 매달렸을 것 같아.”

그에게는 허세도, 오기도 부리고 싶지 않았다. 감정적 을임을 자처해도 전혀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나 싫다는 사람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질 마음은 없지만, 넌 날 싫어하는 게 아니니까.”

“안 싫어.”

딱 잘라 말한 유현은 화답하듯 제 마음도 숨김없이 드러냈다.

“좋아서 미치겠어. 이제 주하경 없는 내 삶이 상상이 안 갈 만큼.”

사실 이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 줄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몰랐기에 감히 헤어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했던 것이었다. 이제는 그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오히려 두 번 다시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이기적이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못 보내주겠어. 그냥 이기적으로 살래.”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하경이 콧등을 찡그렸다.

“그게 왜 이기적인 건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아버지가 그러셨어? 네가 내 곁에 있는 게 이기적인 거라고?”

유현은 주 회장이 하경에게 무슨 말을 어디까지 했는지 알지 못해서 조심스러웠다.

“그런 말씀, 하신 적 없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기적이라는 말을 직접 듣지는 않았으니.

“그럼 뭐라고 하셨는데? 아버지가 너 부르신 거 알고 있으니까 솔직히 말해.”

그는 그녀가 아직 주 회장의 병세를 모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별말씀 안 하셨어.”

“아버지랑 짠 것처럼 똑같은 말을 하네.”

“…….”

유현은 말없이 하경의 시선을 피했다. 하경이 이해해 주기는 했어도, 처음에 형과 해림의 이야기를 솔직히 하지 못했던 게 여전히 미안함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보다 더 중대한 사안을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데 죄책감이 들어서였다. 그렇지만 이런 일을 제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하경은 제 눈을 보지 못하는 그에게 대답을 채근하지 않았다. 헤어지라고 했을 게 분명한데 굳이 꼬치꼬치 캐물어서 뭐 하나 싶어서였다.

“유현아.”

그가 내리깔았던 속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나 피곤해.”

유현은 하경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지친 기색이 완연한 얼굴에 눈동자까지 빨갛게 충혈되어 더 피곤해 보였다.

“그래. 얼른 씻고 자.”

물어볼 게 남아 있지만, 그건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나 혼자 자기 싫어. 나랑 같이 자.”

사실 그는 하경의 제안이 반갑지 않았다. 처음에는 살을 맞대고 자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제 그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갈증이 점점 더 커져서 괴로웠다. 도 닦는 심정으로 밤을 지새워야 할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태연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같이 자자.”

“나 씻고 나올게.”

유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룸으로 가는 그녀를 눈으로 좇았다. 그러고는 드레스 룸에서 옷을 챙겨나온 하경이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거실 쪽 욕실에서 씻고 나온 그는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바지만 챙겨 입고 침실로 향했다. 침실은 어두웠다. 유현은 불을 켤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대로 침대로 걸어가 헤드 보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침실과 연결된 욕실 쪽에서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려왔다. 샤워를 하는 사람이 하경이 아니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소리가 지금 그의 귀에는 상당히 유혹적으로 들렸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써도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행히 물소리가 끝나고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이어졌다. 평정심을 되찾은 유현은 욕실에서 나오는 그녀를 보면서 팔을 옆으로 쭉 뻗었다.

“이리 와.”

사뿐사뿐 걸어온 하경이 입고 있던 샤워 가운을 벗자, 그의 얼굴과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평소와 달리 실크 슬립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현은 침대로 올라와 제 옆에 앉는 하경을 팔로 감싸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녹아내릴 듯 매끄러운 살결이 손바닥에 착 감겼고,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아찔한 향기가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매혹적인 여체에 심취해 있던 그의 귀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눕고 싶어.”

유현은 천장을 보고 똑바로, 하경은 그가 내준 팔을 베고 모로 누웠다. 그녀가 장난치듯 제 배에 작은 원을 그리자, 유현이 선수를 쳤다.

“옷보다 몸이 더 깨끗할 것 같아서 벗은 거지, 다른 뜻은 없어.”

하경은 미소 띤 얼굴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녀가 곧바로 잘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챈 유현은 조금 전 하지 못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임승조 마음, 알고 있었어?”

“응, 나 그렇게 둔하지 않아.”

승조가 한결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던 날, 그게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옆에서 듣고 있기가 굉장히 불편하고 민망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연기한 것뿐이었다.

“알면서 왜 가까이 뒀어?”

처음부터 승조가 자신을 여자로 본다는 걸 알았다면 그를 최측근으로 삼지는 않았을 거였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너무나 많은 걸 함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모른 척했다.

“내색하지 않을 줄 알았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선배를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자기 마음을 드러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유현이 나타난 이후 달라진 것뿐, 그전까지 그녀가 아는 임승조는 그렇게 생각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용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줄 알았다.

“하경아.”

“응?”

“나 아까 미치는 줄 알았어.”

딴 남자에게 안겨 있는 제 여자를 보는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더러웠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다.

“무슨 상황이지? 왜 가만히 있는 거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서.”

“확실히 알려주고 싶었어. 선배한테 안겨 있어도 전혀 떨리지 않는다는 걸.”

무슨 의도였는지 이해는 가지만, 그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했다. 그 와중에 하경이 뜻밖의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는데.”

“뭔데?”

“사실 나 네가 보고 있는 거 알고 더 가만히 있었어.”

유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알았어?”

“차에서 내리기 전에 네 차 봤어.”

“나 질투에 돌아버리라고 일부러 그런 거라고?”

“헤어지자고 하러 온 거라면 내가 다른 남자에게 가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확인하라는 의미였어.”

“덕분에 제대로 확인했어. 딴 놈에게 안겨 있는 널 보는 게 얼마나 미칠 것 같은지.”

그는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하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네 몸에 손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하경은 그의 맨 가슴에 손을 대고 입술을 달싹였다.

“얼마든지.”

유현은 비로소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녀의 옷차림, 몸짓, 눈빛이 뭘 말하는지.

“이러면 나 오해하는데.”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 어설프지만 미치게 유혹적인 그녀의 모습을 더 보고 싶어서였다.

“오해 아닐걸?”

“…….”

열기를 품은 유현의 눈빛이 짙어졌다.

“손만 잡고 자자는 말 아니었어.”

“그럼?”

곱게 눈을 흘긴 하경은 말 대신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아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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