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이별은 혼자 하는 게 아니야,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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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이별은 혼자 하는 게 아니야2020.10.11.
유현이 이사실을 나간 뒤,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던 하경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들어와요.”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곧바로 이사실 문이 열렸다.
“부르셨습니까.”
소파로 걸어온 승조는 평소보다 더욱 깍듯하게 행동했다. 그게 하경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
“임승조 실장님.”
그녀는 그가 지금 비서실장으로 제 앞에 서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에게 본분을 망각하지 말라는 경고를 건넸다.
“주제넘게 굴지 말아요.”
승조는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고, 각오도 하고 있었기에 조금도 당혹스럽지 않았다.
“유현이한테 전화한 이유가 뭐예요.”
“손유현 씨도 자기 아버지의 횡포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경이 원치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 손 의원이 이사실에 쳐들어와 언성을 높이고 있다고 유현에게 말해 준 건 똑똑히 알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이 모든 일은 다 너 때문이라고, 너만 아니었으면 하경이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꼭 말해 주고 싶었다.
“내가 지시하는 일만 해요. 멋대로 나서지 말고.”
“알겠습니다.”
“인사이동을 고려하지 않게 해 줘요.”
“네.”
승조는 하경에게 최후통첩과도 같은 말까지 들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조금 전 보았던 유현의 착잡한 표정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나가 봐요.”
그를 내보낸 하경은 다시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아무래도 두통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 칼퇴근할 필요가 없어진 하경은 느지막이 사무실을 나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혹시 유현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제 모습이 처량해서 웃음이 났다.
“지금 뭐 하니, 주하경…….”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자조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하경은 차에 타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시동을 걸었다. 그녀가 간 곳은 유현의 오피스텔이었다. 주차장 입구에서 1903호를 호출하고 기다리니 차단기가 스르르 올라갔다. 그가 오피스텔에 있다는 확신도 없이 무작정 찾아왔기에 차단기가 올라가는 걸 지켜보는 하경의 얼굴에 안도감이 묻어났다. 주차를 하고 19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1903호 앞에 서서 숨을 크게 한번 고른 뒤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유현이 웃는 얼굴로 맞아주길 바랐건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 집에 없었으면 어쩌려고 연락도 없이 왔어.”
무심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뿐이었다.
“오겠다고 연락하면 오지 말라고 할까 봐.”
“…….”
그의 침묵은 그녀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하고 싶은 말도 있고.”
“들어와.”
“여기서 할게.”
하경은 어젯밤부터 수없이 묻고 싶었던 말을 곧바로 꺼냈다.
“나랑 헤어지는 중이야?”
“…….”
유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녀를 조금은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와의 이별을 조금은 받아들인 줄 알았는데, 헤어지는 중이냐는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걸 보면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싫어졌어?”
“아니.”
차마 그런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지 않았다.
“나한테 질렸어?”
“아니야.”
“그럼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그런 거 없어.”
하경은 차분하게 결론을 내렸다.
“네 대답이 진실이라면 네가 나랑 헤어지려고 하는 건 우리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라는 거네.”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짐작을 확인받은 것뿐이니까.
“나 모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을게. 이럴 거면 왜 날 흔들었냐고 따지지도 않을게.”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고, 이럴 거면 왜 날 흔들었냐고 따지고 싶다는 말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면서도 유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헤어질 결심이 서면 말해 줘.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고 헤어져 줄 테니까.”
“그래…….”
“대신.”
유현이 살짝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하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못 헤어질 것 같으면 빨리 돌아와.”
하경이 유현에게 기회를 주는 건 그를 믿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별을 생각하는 이유가 자신을 위해서라는 걸 알기에 기다려주겠노라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야 다시는 같은 일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버티는 중이었다.
“내 마음에서 널 지워버리기 전에.”
“…….”
유현은 심장이 욱신거렸다. 하경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칼처럼 아팠다. 하경은 그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더 아픈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별은 혼자 하는 게 아니야.”
“…….”
“네가 내 손을 놓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 네가 날 더 사랑하니까?”
“…….”
유현은 제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본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니, 어쩌면 네가 날 사랑하는 마음보다 내가 널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클지도 몰라.”
그는 자신이 먼저 따라다녔고, 먼저 좋아했고, 먼저 사랑했으니 제 마음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하경은 자신과의 이별이 크게 힘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미안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양면적 감정에 사로잡혔다.
“마음 정하면 연락해. 내가 먼저 연락할 일은 없을 거야.”
이를 악물고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뒤돌아 문을 열고 나온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울컥 설움이 복받쳤다.
주차장으로 내려온 하경은 핸들에 기대어 격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뒤에야 시동을 걸고 오피스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집이 아닌 속초였다. 바다를 보고 싶어서. 엄마가 보고 싶어서……. *** 유명선. 제법 유명한 수필가인 그녀가 주원 호텔 주서호 회장의 첫 번째 부인이고, 주하경 이사의 친모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명선은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찾아온 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야, 갑자기.”
“갑자기 엄마랑 술 한잔하고 싶어져서.”
하경은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산 소주 4병을 번쩍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녀가 사진조차 본 적 없던 친모를 만난 건 스무 살 때였다. 스무 살 생일에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선물을 달라고 졸랐다. 선물은 제 ‘생물학적 어머니’의 연락처. 핏덩이를 버리고 나가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보려고 만났을 뿐인데 측은지심이 생겨버렸다.
“네가 먼저 찾아주지 않았다면 엄마는 죽을 때까지 네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거야. 네 평온한 삶을 흔들어 놓고 싶지 않았어.”
딸이 아닌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더 버티지 못했냐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하경은 종종 엄마를 찾곤 했다. 기껏해야 20번도 채 보지 못했는데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출발하면서 전화라도 하지. 놀랐잖아.”
“나 도로 가?”
“가긴 어딜 가. 빨리 들어와.”
모녀의 술자리는 아주 소박했다. 두 사람은 소파 아래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였다. 안주는 생오이와 고추장, 멸치볶음이 전부였다. 명선은 하경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 듣고 난 다음, 무겁게 말문을 뗐다.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고 헤어져 준다는 말은 왜 했어. 너 지금 그 아이가 정말 헤어지자고 할까 봐 무섭잖아.”
“…….”
하경은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후회하지 말고 네 마음 솔직히 말해. 난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엄마는 아버지랑 헤어진 거 후회해?”
“지금은.”
명선이 쓰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당시에는 그게 엄마의 최선이었어. 아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했을 거야…….”
살아야 했으니까. 살고 싶었으니까.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시부모님은 눈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릴 만큼 무서운 분들이었다. 그 앞에만 서면 마치 벌레가 된 것 같았다. 열 달 품어 낳은 딸을 하루에 한 번 보기도 힘들었다. 젖을 물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무릎 꿇고 빌어야 간신히 하경의 얼굴을 잠시나마 볼 수 있었다. 말만 안주인일 뿐, 가사 도우미들에게까지 무시를 당했다. 가장 고통 없이 죽는 방법이 뭘까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생각하던 그녀가 선택한 건 감옥보다 숨 막히는 집을 벗어나는 것. 태어난 지 100일 조금 넘은 아이를 두고 집을 나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일단 살기 위해 그 집을 나왔다.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잃은 대신 자유를 찾았다.
“네 아빠는 날…… 살라고 보내준 거야…….”
“알아.”
하경은 아버지가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끔 제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면서 엄마를 생각한다는 것도.
“사실 이혼하고 몇 달 있다가 네 아빠를 찾아간 적이 있었어. 그런데 결혼 날짜가 잡혔다더라.”
“아버지랑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염치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고 싶었어. 근데 차마 입이 안 떨어졌어.”
그날을 떠올리는 명선의 눈에 초점이 흐려졌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찾아갔으면 어땠을까…… 그날 결혼하지 말라고 매달렸으면 어땠을까…… 지금도 가끔 생각해. 그래서 엄마는 네가 나중에 후회할까 봐 걱정돼. 엄마처럼 평생 후회하면서 살까 봐…….”
“…….”
하경은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제 마음만큼이나 깜깜한 밤이었다. *** 주 회장은 병원에 하룻밤 입원했다가 퇴원했다.
“아무 이상 없죠?”
홍 관장은 남편이 건강 검진을 받고 온 줄 알고 있었다.
“어, 없대.”
“거봐요. 무슨 건강 검진을 반년 만에 또 받아. 나이 먹고 너무 건강 챙기는 것도 보기 안 좋아요.”
비꼬듯,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아무런 대꾸 없이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주 회장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한순간도 홍 관장을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를 낳고 30년 가까이 같이 살았는데도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에게 비즈니스 파트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제 몸 상태를 말하지 않는 데에 죄책감이 들지 않는 건 자신이 죽어도 아내가 슬퍼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주 회장은 샤워를 마친 후 침실로 들어갔다. 홍 관장과는 10년 전부터 방을 따로 써 왔기에 집 안에서 마주치는 시간도, 나누는 대화도 많지 않았다. 그가 침대에 누우려던 그때, 협탁 위에 올려둔 휴대 전화가 진동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휴대 전화를 집어 든 주 회장은 ‘딸’이라는 글자를 보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그래. 나다.”
그의 눈에 불안감이 감도는 이유는 하경이 이렇게 늦은 시각에 전화를 걸어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하경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말해라.”
[유현이 부르셔서 또 무슨 말씀 하셨어요?]
“별말 안 했다.”
[아, 부르신 건 맞구나…….]
“…….”
주 회장은 그제야 하경이 자신을 떠봤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유현이 제 몸 상태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을 만났다는 사실조차 하경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유현이가 집에서 나갔어요. 저랑 헤어지려고 해요.]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실히 이행해주고 있는 유현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근데 전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떨리는 음성에 눈물이 배어났다. 아주 어렸을 때 빼고는 한 번도 우는 걸 본 적 없던 딸이 울고 있었다. 가슴이 미어졌지만, 주 회장은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말했다.
“정략결혼도 대수롭지 않아 하던 네가 대체 왜 이러는지 난 도통 모르겠다.”
[사랑을…… 알아버렸으니까요…….]
“…….”
사랑을 알아버렸다는 딸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마치 젊은 시절의 제 모습을 보는 듯했다. 주 회장은 점점 더 커지는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저녁. 승조는 주 회장 대신 경제인 만찬에 참석한 하경을 수행했다. 그녀가 오후에 출근한 이유도, 부쩍 컨디션이 나빠 보이는 이유도 묻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곁에 있다가 집까지 데려다주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뒷자리에 앉아서 창밖만 내다보는 하경을 몰래 흘끔거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지하 주차장 공동 현관문 앞에서 멈췄다.
“수고했어요. 내일 봐요.”
피곤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차에서 내리는 하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승조의 눈빛이 갑자기 달라졌다. 그는 황급히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하경에게 달려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하경아.”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말이 터져 나왔다.
“처음 본 순간부터 널 좋아했어. 난 죽어도 너한테 남자가 될 수 없는 거야?”
놀란 것도 잠시, 하경은 그의 품에 안긴 채 나직하게 말했다.
“없어요. 나 이렇게 선배한테 안겨 있어도 하나도 안 떨려.”
“…….”
예상했던 대답인데도 참 아팠다. 지하 주차장의 서늘한 공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쾅, 하고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