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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55화 (55/79)

55화. 제 마음에 대한 시험,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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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제 마음에 대한 시험2020.10.08.

“갈게.”

하경은 돌아서려는 유현의 옷자락을 덥석 움켜잡았다. 단지 본인의 집에 가겠다는 것뿐인데, 왜 지금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내일 가면 안 돼?”

유현이 빙긋 웃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일 가나 오늘 가나 뭐가 달라. 이미 짐도 차에 실어 놨고.”

“벌써 짐까지 다 싼 거야?”

“가기로 마음먹었는데 미적거릴 거 뭐 있어.”

하경은 그의 재빠른 행동이 내심 서운했다.

“올 때도 마음대로, 갈 때도 마음대로…….”

“그러네…….”

유현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다 사실이었기에 그녀의 볼멘소리가 조금도 억울하지 않았다.

“정말 지금 갈 거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도 서두르는 걸까.

“어.”

“…….”

하경은 그를 잡지 않기로 했다.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갈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 더 잡지 못했다. 유현은 침묵하는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작별 인사를 고했다.

“간다.”

하경의 애틋한 눈빛에 흔들렸지만, 그는 힘겹게 발걸음을 돌려 집을 나왔다. 그가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건 주 회장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이기도 했다. 주하경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살 수 있는지. 제 마음에 대한 시험인 셈이었다.

*** 하경은 오늘만큼 집이 크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 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딱히 크다는 생각 없이 몇 년을 살아온 집이 고작 한 사람이 사라진 것만으로 이렇게 휑할 줄이야…….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이던 그녀는 헛된 시도를 포기하고 부엌으로 나갔다. 와인이라도 한 잔 마시면 잠을 잘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와인 셀러를 열어 손에 잡히는 와인을 하나 꺼내어 든 순간, 유현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잠 안 올 때 술 마시지 말고 우유를 마셔. 따끈하게 데워서.”

하경은 와인을 도로 제자리에 두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눈에 보여야 먹는다고 유현이 꾸역꾸역 카트에 담았던 우유가 눈에 들어왔다.

“우유 싫어한다니까…….”

입은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우유로 향했다. 냉장고 안에는 우유뿐만 아니라 각종 채소와 고기, 과일 등이 들어 있었다. 본가에서 독립해 나온 이후 냉장고가 이렇게 꽉 찬 적은 처음이었다.

“이걸 다 어쩌라고.”

이렇게 갑자기 가버릴 거면 헛된 약속을 하지나 말지.

“집밥 해 준다고 약속했으면서…….”

냉장고 안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그녀는 우유를 꺼내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우유 반 컵을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침실로 가지고 가는 길이 쓸쓸하고 허전했다. 한편으로는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무 연락도 없는 유현이 야속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휙 가 버린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고 있는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가 알아준다고…….”

하경은 유현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 이튿날 오후. 노크를 하고 이사실로 들어온 승조가 하경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손종일 의원님께서 이사님을 뵙겠다고 찾아오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의 말 속에는 만나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알아서 돌려보내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하경은 손 의원의 기습이 매우 언짢았다. 그러나 유현의 아버지를 처음부터 대뜸 문전박대할 수는 없어서 만나보기로 했다.

“안으로 모셔요.”

문이 벌컥 열린 건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선 순간이었다. 당황한 하경과 깜짝 놀라 뒤돌아선 승조의 시선이 이사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는 손 의원에게 모였다. 입사한 지 석 달도 채 되지 않은 비서실 막내가 이러시면 안 된다고 동동거리면서 그를 따라 들어왔다.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

하경은 침착하게 책상을 벗어나 손 의원에게 다가갔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손 의원은 그녀가 가리킨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차, 드시겠어요?”

“필요 없다.”

하경이 승조를 돌아보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가 있으라는 뜻이었다. 승조가 막내 비서를 데리고 이사실을 나가자, 하경은 손 의원의 맞은편 소파에 살짝 걸터앉았다.

“갑자기 오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손 의원도 처음에는 유현의 예상처럼 하경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하고 밖에서 만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약속을 하고 만나게 되면 유현이 따라 나올 수도 있겠다 싶어서 불시에 찾아오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덕분에 하경은 유현에게 전화할 여유가 없었다. 주 회장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의 손 의원은 서론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유현이랑 헤어져라.”

하경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손 의원이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다른 말을 했다면 그게 더 당황스러웠을 거였다.

“헤어질 생각, 전혀 없습니다.”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는 그녀의 대답에 격노한 손 의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에 지금 우리 집안이 풍비박산 날 참이다! 어디서 배운 데 없이 형이랑 아우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들어!”

하경은 서릿발 같은 호통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전적으로 제 잘못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첫째 아드님께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니 좀 당혹스럽네요.”

손 의원은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못 들은 척, 뻔뻔하게 화제를 바꿨다.

“네 호텔 지분을 몽땅 내게 넘긴다고 해도 나는 널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가 가정의 탈을 쓴 흑심을 드러내자, 하경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어디서 언감생심,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지.

“처음부터 절 반대 없이 받아들이셨다고 해도, 제 지분을 몽땅 의원님께 넘길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런 꿈을 꾸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불쾌했다.

“참 맹랑하고 당돌하구나.”

손 의원도 하경이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마치 유현을 보는 것 같았다.

“유현이와 전 서로 싫어져서 헤어질 수는 있어도 부모님들의 반대로 헤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말은 자신만만하게 했지만, 사실 하경은 자신이 없었다. 어젯밤 유현의 태도를 보고 자신이 없어졌다. 만약 그와 헤어지게 된다면 그 이유가 적어도 외부적인 요인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싫어져서 헤어져야 잊기라도 하지, 좋아하는 마음을 남겨둔 채 헤어지게 되면 평생 잊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헛수고하지 마라?”

“네.”

“내가 끝까지 반대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개의치 않겠다는 의미였다. 붉으락푸르락, 노기등등한 얼굴로 하경을 노려보던 손 의원이 씹어뱉듯 읊조렸다.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더는 참지 않겠다. 내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마.”

그는 자신에게 맞서는 상대를 용서해 본 적이 없었다. 꿈틀거리지도 못할 만큼 밟아 놔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렇게 처리한 정적만 여럿이었고, 정치 인생뿐만 아니라 가정까지 망가진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번에는 그 화살이 자신에게 향할 거라는 경고를 듣고서도, 하경은 차분했다.

“죄송합니다. 제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사실 조금도 죄송하지 않았다. 자신이 유현과 헤어지지 않는 게 죄송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아버지이고 어른이라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것이었다. 물론 손 의원의 분노는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 버리는 바람에 일어날 새가 없었던 하경은 짙은 한숨을 내쉬면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10분쯤 지났을까. 눈을 감고 있던 그녀의 귀로 이사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승조가 언짢아서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는데 뜻밖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버지 오셨다 가셨다면서.”

승조가 아닌, 유현이었다. 손 의원보다 유현의 등장이 그녀를 더 놀라게 했다.

“어떻게 알고 왔어?”

하경은 놀란 눈으로 허리를 세워 앉았다.

“임승조 팀장님 전화 받고.”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선 그녀가 멈칫했다.

“임 팀장이 너한테 전화해서 너희 아버지 오셨다고 말했어?”

“어, 바로 달려온 건데 한발 늦었네.”

오피스텔에 있었기에 그나마 빨리 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유현은 승조가 자신에게 전화해 줘서 고마웠다. 그러나 고마운 마음과는 별개로 그가 순수한 의도로 알려준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소파로 걸어간 유현은 굳은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는 하경의 어깨를 살짝 눌러 도로 자리에 앉혔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

“나한테 하실 말씀이 뭐가 있겠어. 헤어지라고 하셨지.”

하경이 얼른 한마디 보탰다.

“난 그럴 생각 전혀 없다고 말씀드렸어.”

그러니 너도 이상한 생각 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다른 일은 없었고?”

하경은 그가 말하는 ‘다른 일’이 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욕도 안 하시고, 때리려고도 안 하시던데?”

“…….”

그녀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음에도 유현의 안색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자신과 엮이지 않았다면 주하경의 입에서 평생 나올 일 없었던 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녀와 달리, 자신은 아무것도 잃은 게 없어서 더 미안했다.

“맹랑하고 당돌하다는 말이 가장 수위가 높은 편이었어. 별일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하경은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한 말이었지만, 유현에게는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게 별일이 아니면 대체 뭐가 별일이야.”

쌍욕은 아니라고 해도, 누가 들어도 기분 나쁜 말인 건 틀림없었다.

“가만히 있다가 그런 말 들었으면 억울했을 텐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맹랑하고 당돌하게 굴긴 했어. 그래서 하나도 안 억울해.”

“…….”

하경이 아무렇지 않은 척할수록 유현은 더 괴로울 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쌍욕을 했다면 그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제 아버지가 그녀를 막 대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하경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나 걱정돼서 달려온 거야?”

아버지가 그녀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 미친 듯이 달려온 건 맞지만, 유현은 그렇다는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이렇게 회사로 막 찾아오면 안 되는 건데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실수 아니잖아. 나 걱정돼서 달려온 게 어떻게 실수야.”

“…….”

그가 하경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못하는 건 필사적으로 찾는 게 있어서였다. 자신이 그녀의 곁에 있어도 되는 명분. 소소한 행복 외에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 그것만 찾는다면, 그래서 스스로 납득한다면, 하경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미안함이나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제 진실된 마음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찾지 못했기에 비겁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갈게.”

하경은 유현에게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따지지 않았다.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도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차라리 아무것도 짐작 가는 바가 없다면 하루아침에 돌변한 그에게 마음껏 화를 내고 원망이라도 할 텐데 그럴 수 없어서 더 힘들었다. 유현이 괴로워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서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하경은 이사실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눈에 새길 듯 바라보았다. *** 주차장으로 내려온 유현은 차에 타자마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가더니 실소가 섞인 냉랭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전화 올 줄 알았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저한테 하시고, 하경이는 내버려 두세요.”

하경이 그새 고자질했냐는 뉘앙스라는 걸 눈치챘지만, 그는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의 연락을 받았는지는 아버지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네놈이랑 말이 통해야 말을 하지. 주 회장 딸도 별반 다르진 않더라만.]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하경이, 다시는 찾아가지 마세요.”

[둘이 헤어지면 찾아가라고 해도 안 찾아간다.]

“기다리세요.”

[뭘 기다리라는 거냐.]

“하경이를 포기하는 중이니까 기다리시라고요.”

정확히는 포기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시고도 아버지가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되실 수도 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유현은 어제보다 오늘 더 체념했다. 아버지가 하경을 찾아갔다는 걸 알고 나니 조금 더 체념하게 됐다. 내일은 더 내려놓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다음 날에는 더 많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지금 스스로를 세뇌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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