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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51화 (51/79)

51화. 관계의 균열,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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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관계의 균열2020.09.24.

해림과 통화하는 유현을 불안한 얼굴로 지켜보던 하경은 그가 전화를 끊자마자 득달같이 물었다.

“왜 그래? 해림 씨한테 무슨 일 있대?”

“어머니가 해림이랑 통화하다가 아버지한테 들킨 모양이야. 집에 좀 다녀올게.”

유현은 벌떡 일어나서 바로 손님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차 키를 가지고 나와서 바로 집을 나섰다. 두 대의 엘리베이터는 각각 1층과 지하 1층에 있었다.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는 시간이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신호음만 이어지니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통화가 연결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어머니의 목소리 대신 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같이 가. 내가 운전할게.”

그가 고개를 돌린 것과 동시에, 집에서 입고 있던 옷에 카디건만 걸친 하경이 그의 곁에서 멈춰 섰다.

“괜찮아. 집에 있어.”

“너 혼자 보내기 불안해서 그래.”

하경은 유현이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그를 밀어 넣고 얼른 따라 탔다.

“어머니한테 전화 걸던 중이었지? 안 받으셔?”

“어.”

“혹시 모르니까 집으로도 해 봐.”

유현은 그녀의 말대로 집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러나 신호만 갈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내 차로 가자.”

하경은 그 말을 남기고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차로 뛰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금세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아서 유현의 본가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 차에 있을게.”

“그래.”

유현은 독립한 이후 본가에 올 때면 꼬박꼬박 초인종을 누르고 누군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이제 제집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초인종을 누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선 그는 거실과 부엌부터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없었다. 안방으로 달려가 보니 아버지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머니는요.”

“…….”

손 의원은 유현을 흘긋 돌아보았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유현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냐고요!”

“해림이한테 갔다.”

손 의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에 쥐고 있던 유현의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미련 없이 뒤돌아 안방을 나오면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한테 전화했었네? 부재중 떠 있는 거 지금 봤어.]

유현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그나마 안도했다.

“지금 어디세요.”

[네 오피스텔에 거의 다 와 가.]

“거긴 왜 가셨어요.”

[해림이가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와 봤어.]

그는 어머니와 해림의 통화 내용을 알지 못했기에 해림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알게 됐어도 당연히 어머니가 더 걱정스러웠다.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엄마가 왜?]

유현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시치미를 뚝 떼는 어머니에게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일단 얼굴을 보고 얘기하기로 했다.

“저도 지금 그쪽으로 갈게요.”

그대로 집을 나온 유현은 하경의 차로 걸어가 조수석에 탔다. 하경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 빨리 나와?”

“어머니, 집에 안 계셔.”

“어디 가셨어?”

“해림이가 몸이 안 좋은가 봐. 걱정돼서 해림이 보러 가셨대.”

“네 오피스텔로 갈까?”

유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경은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오늘은 그녀가 운전기사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 유현은 오피스텔로 가는 길에 심 여사의 전화를 받았다.

[유현아!]

시트에 등을 기대고 있던 그가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허리를 세웠다.

[도착해 보니까 해림이가 심하게 하혈을 하고 있었어. 119 불러서 병원으로 가는 중이야.]

오피스텔 근처 종합 병원으로 바로 오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유현은 하경에게 해림의 일과 병원 위치를 차례로 알려 주었다. 하경은 굳은 표정으로 운전을 하면서 빨리 오늘이 지나서 더는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 해림은 계류 유산 판정 후 소파 수술에 들어갔다. 세 사람은 그제야 수술실 앞 의자에 앉아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나눌 새가 없었던 심 여사가 고개를 쭉 빼고 유현의 옆에 앉은 하경을 바라보았다.

“하경아.”

“네, 어머니.”

가운데 앉아 있다가 졸지에 장애물이 되어 버린 유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하경을 제 자리로 당겨 앉히고 마실 것을 사 오겠다며 사라졌다. 심 여사는 하경의 손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너한테 면목이 없어.”

“어머니께서 왜요.”

“자식을 잘못 키운 죄가 커…….”

“그런 말씀 마세요. 전 결과적으로 유현이를 만나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경은 제 왼손을 그러쥐고 있는 심 여사의 손등을 오른손으로 덮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사이, 반대하지 않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어머니까지 반대하셨으면 더 힘들었을 거예요.”

심 여사는 유현과 하경 사이를 환영할 수 없었다. 겉으로 티를 내지 못했을 뿐, 사실 하경의 존재가 껄끄러웠다. 그런데 막상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그 마음이 희미해지고, 아들이 좋다는 데 뭐가 문제인가 싶었다.

“하경아.”

“네.”

“유현이랑 잘 지내.”

“걱정하시는 일 없도록 잘 지낼게요, 어머니.”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하경의 표정이 돌연 머쓱해졌다.

“유현이한테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런 모습으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민낯으로도 모자라 집에서 입는 옷에 카디건만 걸친 차림으로 장차 시어머니가 될지도 모를 분을 만나게 될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예쁘기만 한데, 뭐.”

“…….”

하경은 수줍은 미소로 화답했다.

“근데 혹시 유현이, 요즘 어디서 지내는지 아니?”

알고 말고요.

“저희 집에 있어요.”

“너희 집?”

심 여사의 눈이 동그래지자, 하경이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고…… 저희 집에 남는 방이 있어서…….”

제 아버지에게는 작정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려 했지만, 그녀는 굳이 유현과 제 사이를 반대하지 않는 분까지 당황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심 여사는 오해했고, 당황했다.

“나이를 먹으니까 시도 때도 없이 번열이 나네…….”

손부채질을 하던 심 여사가 겉옷을 벗고 스카프까지 풀자 하경은 더 난감해졌다. 마침 고맙게도 유현이 생수 두 병을 사서 돌아와 주었다.

“살 만한 게 마땅치 않아서 그냥 물 샀어요.”

서서 생수를 내밀다가 뭔가를 발견한 그가 허리를 굽히고 어머니의 목을 들여다보았다.

“여기 왜 이래요.”

“별거 아니야…….”

심 여사는 허둥지둥 스카프를 다시 목에 걸치려다가 유현에게 제지당했다. 그는 스카프를 뺏어서 손에 쥐고 아예 어머니의 옆자리에 앉았다. 목에 난 붉은 자국은 분명 목 졸린 흔적이었다.

“아버지가 이러셨어요?”

“아니라니까. 간지러워서 긁었더니 빨개진 거야.”

“…….”

너무나 티 나는 거짓말이었지만, 유현은 더 묻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진실이 뭔지 알기에. 어색한 공기가 세 사람을 감싸고 돌기 시작했다. *** 수술을 마친 해림이 일반 병실로 옮겨진 후, 심 여사 혼자 병실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유현아, 해림이가 너랑 얘기 좀 하고 싶다는데.”

심 여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경이 끼어들었다.

“들어가 봐.”

유현이 싫다느니, 같이 들어가자느니,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혼자서 병실로 들어갔다. 초췌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던 해림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 그냥 누워 있을게. 오빠는 거기 앉아.”

유현은 그녀가 눈으로 가리킨 침대 가장자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나 솔직히 지금 홀가분하다?”

웃고는 있었지만, 해림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차마 내 발로 병원을 찾아갈 수는 없었는데…… 이건 내 의지가 아니었으니까…….”

“맞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나 퇴원하면 바로 집으로 내려가려고. 엄마가 해 주는 밥 먹고 싶어.”

“그래. 가서 푹 쉬다 올라와.”

유현은 시든 풀잎 같은 해림이 안쓰러웠다.

“의원님하고 민건 오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오빠가 대신 좀 전해줄 수 있어?”

“얼마든지.”

“우리 부모님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만약 말씀하시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라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거 보여주겠다고도 전해 줘.”

“알았어. 꼭 전할게.”

해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좀 쉬고, 유학 가는 건 어떨지 생각 좀 해 봐. 형이 유학 비용 대 준다고 했다며.”

“지금은 아닐걸?”

아버지에게 들키기 전에 순순히 아이를 떼고 사라져 주는 대가였으니 지금까지 유효할 리가 없었다.

“네가 갈 마음만 있다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사실 나도 좀 억울해서 돈이라도 달라고 할까, 잠깐 고민도 해 봤는데…… 그냥 포기했어.”

“왜?”

“내가 돈을 받으면 민건 오빠는 날 꽃뱀이라고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걸 알았거든.”

“…….”

유현은 부인하지 못했다. 형은 그것보다 더 모욕적인 말이 있다면 서슴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말까지 들으면 나 정말 삶에 회의가 들 것 같아. 그냥 다 잊고 살래.”

“마음 바뀌면 언제든 말해.”

“고마워, 오빠. 그동안 여러모로 미안했어.”

비록 민건과의 마지막은 최악이었지만, 유현과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잘 마무리할 수 있게 되어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주하경 이사님한테도 실례가 많았다고, 죄송했다고 좀 전해줄래?”

“그럴게.”

“그만 가, 오빠. 나 잘래.”

유현은 몸을 일으켜 섰다.

“넌 예전에도 김해림이었고, 앞으로도 김해림이야. 네가, 네 삶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마.”

뒤돌아 문으로 걸어가는 그를 보는 해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세 사람은 해림이 간병인까지 필요한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병원을 나왔다.

“제 오피스텔로 가세요, 어머니.”

“내 집 놔두고 거길 왜 가.”

하경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희 집에 가서 주무시는 건 어떨까요?”

심 여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집으로 갈 거라니까 얘들이 왜 이래. 엄마, 집까지 데려다주고 얼른 가서 자.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심 여사는 유현이 내일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세요.”

“무슨 일이 있을 게 뭐 있어.”

“아무튼요.”

“알았어.”

“전화 좀 잘 받으시고요.”

“무심한 아드님께서 생전 안 하던 잔소리를 다 하네.”

“…….”

말한 사람은 농담이었지만, 듣는 사람은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명확한 사실이기에. 유현은 오늘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그동안 어머니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반성했다. *** 손 의원이 아내를 해림에게 순순히 보내 준 건 꿍꿍이가 있어서였다. 해림이 유산기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동태를 살피기 위한 목적으로 보낸 것이었다. 손 안 대고 코 풀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소파에 앉아 있던 그는 지친 얼굴로 집에 들어선 심 여사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떻게 됐어?”

“뭐가 어떻게 돼요.”

“알면서 두 번 말하게 할 거야? 해림이, 어떻게 됐냐고. 애 떨어졌어?”

“그래요. 이제 속이 시원해요?”

속이 시원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한 방에 내려간 듯한 기분이었다.

“확실하지? 당신이 확인했지?”

“제발 그만 좀 해요! 당신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지 알아요?”

심 여사가 소리를 빽 지르자, 손 의원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민건이가 내 자식이기만 해? 어미가 돼서 어떻게 아들보다 아들 인생 망치려는 것을 편들 수가 있어.”

“우리 아들 귀하듯 남의 딸도 귀한 법이에요.”

“내 아들이 먼저야.”

“아니요. 당신은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요. 지금 민건이 일에 발 벗고 나선 것도 당신한테 오점이 남을까 봐 그러는 거잖아요.”

손 의원은 침착하게 조곤조곤 말하는 아내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몇십 년을 같이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래 보고 싶지는 않았다.

“시끄러워. 잠이나 자.”

“…….”

심 여사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제대로 받은 건 처음이었다. 손종일이라는 남자의 아내로 살아온 세월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관계의 균열이 시작되었다. *** 우여곡절이 많긴 했으나 해림의 일을 잘 마무리한 손 의원은 본격적으로 유현과 하경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유현이 예상한 대로였다. 그는 두 사람을 허락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반드시 갈라놓을 작정이었다. 손 의원은 의원실로 향하는 차 안에서 주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나 좀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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