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감히 얻다 손을 대,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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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과 하경은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하경의 차를 유현이 운전해서 온 이유는 일단 차를 이곳에 두고 라이딩을 즐긴 후에 돌아와 오토바이를 아예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싶을 때마다 오피스텔까지 와야 하는 게 번거로워서였다. 아파트로 돌아갈 때 하경이 차를 몰아야 해서 그녀의 차를 타고 온 것이었다. 하경은 그가 주차를 하는 동안 조수석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유현아.”
“어.”
“저 여자…… 해림 씨 아니야?”
유현의 시선이 그녀의 시선을 좇았다. 해림이 웬 젊은 남자 둘과 마주 보고 있었다.
“맞네.”
“저 남자들은 누구지?”
두 남자 모두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스포츠머리에 키가 작은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껄렁한 느낌을 주었고, 키가 크고 안경을 낀 남자는 화이트칼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한 사람은 모르겠고, 다른 한 사람은 누군지 알아.”
하경이 의아한 얼굴로 유현을 돌아보았다.
“누군데?”
“아버지 보좌관.”
그가 여기 있다는 건 아버지에게 해림의 위치가 발각됐다는 의미였다.
“잠깐 가 보고 올게. 내리지 말고 여기 있어.”
“응.”
차에서 내린 유현은 세 사람에게로 걸어가면서 해림을 불렀다.
“해림아.”
셋 중 둘의 반응이 같았다. 해림과 박 보좌관은 그를 돌아보며 멈칫했고, 키 작은 남자는 그가 누군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
갑작스러운 유현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잠시, 해림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민망해서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유현은 그녀를 잠시 보다가 키 큰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박 보좌관님, 오랜만에 뵙네요.”
“네, 검사님.”
그의 태도는 아주 깍듯했다. 반면, 유현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 밑에서 더러운 일까지 도맡아 하는 그를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만둔 거 아시잖아요.”
“그럼 변호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유현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 여기서 뭐 하십니까?”
“김해림 씨를 모셔 가려고 왔습니다.”
“어디로요?”
대답은 해림의 입에서 나왔다.
“민건 오빠랑 만나기로 했는데 오빠가 바빠서 이분들을 대신 보냈대.”
유현은 불쑥 끼어든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형이 보낸 건 확실해?”
형을 왜 만나려는 거냐고 묻지 않은 건 자신이 참견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확실해. 방금 민건 오빠랑 통화했어.”
“…….”
유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침묵을 견디지 못한 해림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나 보러…… 온 거야……?”
화가 풀린 걸까? 그녀는 그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바이크 가지러.”
“…….”
무안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단호한 대답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를 묵묵히 기다리던 박 보좌관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만 가시죠. 시간이 없습니다.”
해림은 그의 재촉이 고마웠다.
“갈게, 오빠.”
유현은 두 남자를 따라가는 해림을 말없이 보고 있다가 몸을 돌려 차로 돌아왔다.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몰라서 답답해하고 있던 하경이 그가 운전석에 타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형이 보냈대. 해림이 데려오라고.”
“해림 씨 표정 보니까 순순히 따라가는 것 같던데.”
“어, 억지로 끌려가는 거였으면 안 보냈지.”
“근데 이런 일에 무슨 아버지 보좌관을 보내.”
“해림이 일, 아버지가 주도하고 계신 걸 테니까.”
유현은 본인 힘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형이 아버지 뒤에 숨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센 척해도, 형은 유약하고 어리숙한 면이 많았다. 그러나 냉혹하고 악독한 아버지는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하경아.”
“……응?”
갑자기 그가 이름을 부르자, 하경은 심각한 와중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아직도 그에게 이름이 불릴 때면 번번이 심장이 떨렸다.
“우리 헬멧 개시하는 거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될까?”
그녀는 유현이 뭘 하려는 건지 짐작이 갔다.
“해림 씨 따라가려고?”
“어.”
“왜?”
“좀 찜찜해서.”
“그래. 따라가 보자.”
유현은 하경을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함께 가는 걸 너무나 당연하게 말해서 차마 먼저 집에 가 있으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 혼자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그가 거쳐온 직업들은 범죄자 상대가 주 업무였다. 기선 제압과 카리스마가 필요한 분야라 말과 행동이 저절로 강하고 건조해졌다. 상대가 상처받지는 않을까 신경 써 본 적이 없었건만 하경에게는 말 한마디도 조심하게 됐다. 혹시라도 제 사소한 말, 사소한 행동 하나가 그녀에게 상처가 될까 봐 염려스러워서였다.
“혼자 갈 거면 가지 마. 못 가게 할 거야.”
하경은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강경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날 안 데려가겠다는 건 위험하다는 뜻이잖아.”
유현은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알았어. 같이 가자.”
두 사람은 안전벨트를 매고 바로 출발했다. 유현은 들키지 않을 정도로 간격을 유지하면서 해림이 탄 차를 뒤쫓았다. 하경은 앞차를 놓칠세라 긴장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해림이 탄 차는 30분쯤 달려 한 상가 건물 앞에서 멈췄다. 그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갓길에 차를 댄 유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세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사이 하경은 건물 외벽에 붙은 간판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카페도 있고, 식당도 있고…… 어디로 데려오라고 한 걸까?”
“카페도 아니고, 식당도 아닐 거야.”
그녀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그럼 어디일 거 같은데?”
“산부인과.”
“…….”
당연히 카페나 식당 같은 데로 불러서 아이 문제를 설득하려는 걸 거라고 생각했던 하경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해림이 산부인과에 가는 줄 모르고 따라나섰을 것을 알기에 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올라가 봐야겠어. 차 좀.”
“알았어.”
두 사람은 동시에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내렸다. 유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하경은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 두 남자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해림은 유현에게 박 보좌관이라고 불린 남자가 7층 버튼을 누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7층 버튼 옆에는 산부인과와 성형외과, 피부과, 약국 상호가 붙어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는지 직감한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민건의 말을 완전히 믿었던 건 아니었다. 반신반의였다.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할 때만 해도 그가 정말 후회하는 줄 알았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느닷없이 모르는 남자 둘을 보낸 걸 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따라나선 건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하긴 했지만, 막상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리고 나니 너무나 절망적이고 비참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엘리베이터가 7층에 도착했고, 문 앞에 서 있던 남자 둘이 먼저 내렸다.
“내리시죠.”
가장 먼저 타서 가장 안쪽에 서 있던 해림이 그제야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정면 벽에 표지판이 보였다. 왼쪽을 가리키는 화살표 밑에는 산부인과와 약국 이름이, 오른쪽을 가리키는 화살표 밑에는 성형외과와 피부과 이름이 쓰여 있었다. 박 보좌관이 왼쪽으로 팔을 뻗었다.
“이쪽입니다.”
해림은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산부인과 문 앞에 다다라서야 입술을 열었다.
“민건 오빠가 여기서 절 기다리고 있나요?”
“아니요. 손민건 의원님은 지금 댁에 계십니다.”
“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일 뿐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여기 왜 온 건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알아요.”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지 검진을 받아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들어가십시오.”
해림은 정중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제가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억지로 끌고 들어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박 보좌관을 떠나 키 작은 남자에게 향했다. 왜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 남자를 데려온 건지, 자신이 반항하면 누가 나설지 짐작이 갔다. 박 보좌관은 지시를 내릴 뿐 직접 무력을 행사할 것 같지는 않았다.
“민건 오빠랑 잠깐 통화 좀 할게요.”
해림이 가방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자, 박 보좌관이 손을 내밀었다.
“제가 걸어드리겠습니다.”
“민건 오빠한테 전화 거는 척하면서 경찰이라도 부를까 봐 그러세요?”
“…….”
그의 침묵은 긍정의 의미였다.
“그럴 거면 여기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제가 걸어드리겠습니다.”
해림은 한숨을 푹 내쉬고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박 보좌관은 최근 통화 목록으로 들어갔다. 해림이 조금 전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민건과 통화를 했기에 굳이 주소록을 뒤져볼 필요는 없었다. 그는 통화 버튼까지 누르고 나서야 휴대 전화를 넘겨주었다. 해림은 건네받은 휴대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상과 달리 신호가 몇 번 간 뒤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그래, 해림아.]
민건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나긋했다.
“오빠, 나 산부인과 앞이야. 오빠가 보낸 사람들이 날 여기로 데려왔어.”
미련하게도, 혹시 민건은 자신이 중절 수술을 받는다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아버지가 꾸민 일이고 그는 그저 자신을 유인해내는 역할만 한 걸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선생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 주실 거야. 수술 잘 받고 집에 가서 푹 쉬어.]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신이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 네가 고집부리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할 일도 없었잖아.]
“오빠…….”
[응?]
“진심으로 오빠가…….”
목이 멘 해림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민건이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놓은 다음 뒷말을 이었다.
“천벌 받았으면 좋겠어.”
[뭐라고? 야!]
민건의 고함을 들으면서 전화를 끊는 해림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 유현은 고개를 들어 2대의 엘리베이터 위치를 확인했다. 1호기는 5층을 지나 올라가는 중이었고, 2호기는 9층을 지나 내려오는 중이었다. 그는 올라감 버튼을 눌러놓고 1호기 엘리베이터를 주시했다. 1호기는 7층에서 멈췄다. 벽에 붙은 층별 안내도를 살펴보니 예상대로 산부인과가 있는 층이었다. 1층에 도착한 2호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간 그는 망설임 없이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약국을 지나 코너를 도니 성형외과가 보였다. 키 작은 남자 혼자 뒤돌아서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유현은 그를 흘긋 보고서 산부인과 안으로 들어갔다. 간호사로 보이는 여자가 카운터 안쪽에, 해림과 박 보좌관은 카운터 바깥쪽에 나란히 서 있었다.
“박 보좌관님.”
흠칫 놀란 박 보좌관이 휙 뒤를 돌았다. 해림도 커진 눈으로 유현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 다 유현이 따라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해림이를 여기로 데려와서 수술시키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박 보좌관은 순순히 인정했다. 부인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당연히 형도 알고 있겠죠?”
“물론입니다.”
“손종일 의원님은 박종수 보좌관님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항상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잠시 흔들렸지만, 박 보좌관은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염두에 두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돌아가란다고 돌아갈 거였으면 여기까지 따라왔겠습니까?”
유현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그때, 병원 밖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곧바로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하경의 목소리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린 그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키 작은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느리게 열리는 자동문을 기다릴 새가 없어서 반쯤 열린 틈으로 빠져나간 유현의 눈에 하경의 팔을 움켜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이성을 잃은 그는 남자에게 가장 먼저 닿을 수 있는 다리를 뻗었다. 그리고 하경에게 최대한 타격이 덜 가도록 오른쪽 발끝으로 남자의 손목을 차올렸다.
“윽!”
강렬한 고통을 느낀 남자가 하경의 손을 놓자 유현의 발이 곧장 남자의 배에 꽂혔다.
“큽!”
유현은 그걸로도 모자라 팔꿈치로 남자의 관자놀이를 찍어 버렸다.
“크악!”
방어 태세를 갖출 새도 없이 밀려든 3연속 공격에 녹다운된 남자는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제압한 유현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감히 얻다 손을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