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저희 같이 살아요,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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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저희 같이 살아요2020.08.27.
[손유현 씨는 오늘 날짜로 퇴사 처리될 예정입니다.]
“…….”
걸음만 멈췄을 뿐, 유현의 표정은 전화를 받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도 아니었기에 크게 당혹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듣고 계십니까?]
“네, 듣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지금 올라오실 수 있겠습니까?]
양쪽 집안 모두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걸 의아해하면서도 유현이 조용히 기다렸던 건 주 회장이 먼저 보자는 말을 하기 전에 대뜸 찾아가면 노여움을 살까 봐서였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서 어제 하경에게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 뵐까 한다는 말을 꺼낸 것이었다. 기다리던 순간이 온 이상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가겠습니다.”
유현은 회의실을 나가서 곧장 회장실로 올라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비서실장이 말없이 회장실 문을 열어주었다. 주 회장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문이 열린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주 회장에게 다가간 유현이 허리를 굽혀 깍듯하게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주 회장은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앉아라.”
유현은 소파 상석을 향해 살짝 몸을 틀고 앉았다. 위엄 있는 분위기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지만, 주 회장의 낯빛은 좋지 않았다. 피부가 푸석하고 눈자위가 충혈되어 있었다.
“퇴사 얘기 들었을 테니 할 말 있으면 해라.”
“없습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 주 회장을 의아하게 했다. 유현이 혹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나 싶어서 다시 한번 확실히 말해 주기로 했다.
“해고가 아니라 네가 사직 의사를 밝힌 것으로 처리하겠다는 뜻이다.”
타의를 자의로 왜곡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알아들었습니다.”
주 회장은 수다스러운 아들 덕분에 유현의 성격을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의아했다. 순순히 수긍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기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었다.
“법적 대응을 할 셈이냐.”
“아니요. 그럴 생각 없습니다.”
“왜지?”
“회장님께 밉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유현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없었다. 누가 자신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전혀 개의치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주서호 회장에게는 잘 보이고 싶었다. 주하경의 아버지라서. 그가 지금 부당한 대우를 참고 있는 이유였다.
“하경 씨와 헤어지라는 것만 아니면 뭐든 회장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유현은 주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린 이유가 제 입에서 나온 ‘하경 씨’라는 말 때문임을 눈치챘다. 그렇지만 아무리 주 회장이 언짢아한다고 해도 이제 그녀를 누나라고 부를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매일 얼굴을 보다 보니 정이 든 모양인데, 네가 회사를 떠나면 금세 희미해질 감정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회장님.”
“난 널 하경이 짝으로 인정할 생각이 없다. 한결이 친구만 해라, 유현아.”
“회사는 조용히 나가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건 따를 수 없습니다.”
말투는 차분했으나 두 남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섰다.
“널 회사에서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네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생각도 나와 같더구나. 양쪽 집안에서 다 반대한다면 너희가 틀렸다는 생각을 해 봐야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겁니다. 부모님 말씀이 다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득도, 질책도, 유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유현의 결연한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주 회장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그는 유현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무겁게 말문을 뗐다.
“그만 나가 봐라.”
유현은 허락해 달라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리 사정한다 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두 남자는 서로를, 그리고 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가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회장실을 나가자, 주 회장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 하경이 유현의 퇴사 소식을 들은 건 그로부터 30분쯤 지나서였다. 다낭 호텔 개관식 일정을 보고하기 위해 회장실에 왔다가 주 회장의 입으로 직접 들은 것이었다.
“퇴사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유현이를 회사에서 내보내기로 했다는 말이다. 유현이도 동의했고.”
평정심을 되찾은 하경이 싸늘하게 실소했다.
“동의요? 강요겠죠.”
불과 어제 법무팀으로의 이동을 먼저 언급했던 유현이 자신과 상의도 없이 퇴사하기로 했다면 그건 동의가 아닌 강요일 게 분명했다.
“동의든 강요든, 이제 유현이는 더 이상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니다.”
주 회장의 담담한 표정이 그녀를 욱하게 했다.
“이렇게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분이신 줄 몰랐네요.”
“그럼 넌 공과 사를 구별하는 거고? 같은 팀에서 희희낙락, 연애라도 할 참이었냐.”
“누가 들으면 제가 유현이랑 연애하려고 회사에 끌어들인 줄 알겠어요. 유현이를 기획팀에 넣으신 건 아버지예요.”
“내가 넣었으니 내가 빼겠다는 거다.”
하경은 두 주먹을 꽉 쥐고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될 거다.”
주 회장은 하경이 반박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넌 아닐 거라고 하지 마라. 이 나이까지 살아 보니 그 말이 맞더라.”
“부인할 생각 없어요. 저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거 인정해요. 근데 아버지가 모르시는 게 있어요.”
“내가 모르는 거라니?”
“유현이가 제 눈에서 멀어질 일은 없다는 거요.”
내심 긴장하고 있다가 안도한 주 회장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퇴근 후에 만나면 된다는 거겠지.”
설마 그걸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퇴근 후에 만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겠지만, 회사에서만이라도 마주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경이 얼마만큼 바쁜지 알기에 퇴근 후에 만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만큼 둘 사이를 반대한다는 상징적 의미이기도 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죠.”
“부족해서 뭘 어쩌겠다고.”
하경은 가소롭다는 듯 웃고 있는 주 회장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저희 같이 살아요.”
“…….”
주 회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를 의심해야 했다.
“제가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하경이 거짓말을 한 건 아버지가 유현을 비난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동거를…… 하고 있다는 말이냐.”
“네.”
주 회장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그에게 딸이 남자와 동거한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너한테 정말 실망이다.”
순종적이지는 않아도, 크게 반항해 본 적 없는 딸이었기에 더 실망스러웠다.
“공평하네요. 저도 아버지한테 실망했으니까요.”
하경은 시간이 조금 걸릴지언정 아버지가 제 선택을 존중해 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아무런 예고도, 경고도 없이 하루아침에 유현을 자른 걸 알게 되니 반발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다고 하셨죠?”
“그래. 싫다.”
“그런데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됐어요. 이제 유현이랑 헤어진다고 해도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반대하지 말아 주세요.”
“돌이킬 수 없게 됐으니 반대하지 마라?”
헛웃음을 친 주 회장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난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하경은 제발 허락해 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버지의 허락 없이도 뭐든 할 수 있는 나이예요.”
“그래서 내 허락 없이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못 할 것도 없죠.”
딱 잘라 말한 그녀는 다리 위에 올려 두고 있던 파일을 집어서 테이블 위로 옮겨놓았다.
“개관식 일정이에요. 검토해 주세요.”
어차피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며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할퀴고 상처 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제 할 말만 하고 회장실을 나온 하경에게 오랫동안 아버지의 수족으로 일해 온 비서실장이 다가왔다.
“손유현 씨의 퇴사 절차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굳이 인사팀에 확인해 보실 필요 없습니다.”
괜히 시끄럽게 굴지 말라는 뜻이었다.
“굳이 확인해 볼 뻔했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경은 차가운 미소로 응수하고 곧장 이사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호흡을 해 보았으나 어수선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나한테는 언제 말할 셈이야…….”
유현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신경이 쓰였다. 그는 분명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웃고 넘기겠지만, 제 아버지가 벌인 일이기에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하경은 유현의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도로 앉았다. 불현듯, 홍 대리가 뭔가 눈치챈 것 같다던 승조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오늘 같은 날 구태여 안 하던 짓을 해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볼까, 메시지를 보내 볼까, 이런저런 고민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가만히 있자는 것이었다. 일단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 승조는 오전부터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기획팀 분위기가 어딘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홍 대리를 불러 슬쩍 떠본 끝에 어젯밤에 그가 하경과 유현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미 기획팀 팀원 모두에게 떠벌렸다는 것도. 그런데 하경은 소문이 나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예상했던 반응이기는 해도 속이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유현의 퇴사 소식을 들은 건 하경이 회장실에 다녀온 직후, 인사팀장을 통해서였다. 인사팀장과 짧은 통화를 마치고 기획팀으로 가 보니, 유현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손유현 씨, 나 잠깐 봅시다.”
승조는 먼저 회의실로 들어가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뒤따라온 유현이 회의실 문을 닫는 것을 보면서 물었다.
“회사를 그만뒀다는 거, 사실입니까?”
유현은 그와 한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사실입니다. 소식이 빠르시네요.”
“인사팀장에게 들었습니다.”
“이사님도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일단 난 말하지 않았습니다.”
유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승조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왜 그만두는 겁니까?”
“개인 사정입니다.”
그의 태연한 대답에 승조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이런 식으로 그만두는 거 무책임하다고 생각 안 합니까?”
그는 생각과 감정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감정 기복을 통제하기가 힘들었다.
“아예 들어오질 말든가, 이렇게 나갈 거면 행동거지라도 조심하든가.”
승조의 눈에는 유현을 향한 적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반면에 유현은 극히 단조로운 표정과 말투로 일관했다.
“제가 조심했어야 할 행동거지가 뭡니까?”
“이사님이랑 손유현 씨 사이, 직원들이 눈치챘습니다.”
유현의 얼굴에 비로소 감정이 실렸다. 기쁨 혹은 즐거움.
“잘됐네요.”
“잘됐다?”
“제가 회사를 계속 다니는 상황에서 그 사실이 알려졌다면 조금 불편하고 난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니 잘된 거죠.”
유현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한마디 보탰다.
“이참에 주하경 이사님이 임자 있는 몸이라는 거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알게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승조의 미간은 점점 더 좁아져서 눈썹이 거의 붙을 지경에 이르렀다.
“손유현 씨 때문에 이사님이 곤란해지셔도 상관없다는 겁니까?”
“제가 유부남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닌데 그리 큰 곤란은 없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현은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근데 왜 제 눈에는 팀장님께서 곤란한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
정곡을 찔린 승조의 말문이 막히자, 유현이 냉기가 감도는 얼굴로 경고했다.
“제 여자 곁에는 남자가 아닌 부하 직원만 있었으면 합니다. 임승조 팀장님께서도 명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승조는 베일 듯 날카로운 그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카리스마에 눌렸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강하게 맞받아쳤다.
“남자로 있겠다면 어쩔 겁니까?”
유현이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치워 버리고 싶어지겠죠.”
“…….”
“되도록 멀리.”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승조는 하경과 함께해 온 세월을 믿었다. 그러나 유현이 믿는 건 주하경 그 자체였다.
“네.”
유현은 자신이 진심으로 부탁하면 그녀가 승조를 곁에 두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렇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 하경이, 여태 하셨던 것처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신과 하경의 관계, 그리고 승조와 하경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뒤돌아선 유현의 얼굴에는 승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