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사내 연애,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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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은 현관 밖에서 유현을 기다렸다. 그런데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서 그가 따라 나왔다. 유현은 하경이 묻기도 전에 몇 초 동안 해림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었다.
“신용 카드 쓰라고 줬더니 싫다네.”
“예상했어.”
“가요.”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김해림 씨 말인데…….”
“응, 말해요.”
“회사로 찾아왔던 날하고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 그날은 차분하고 얌전하게만 봤는데 오늘은 조금 다르네.”
“원래 차분하고 얌전한 성격 맞아요.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까 조금 예민해졌나 봐.”
유현도 해림의 변화가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이해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는 정이 많거나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나마 해림이라서 참아주고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 같았다면 진즉에 무시해 버렸을 거였다. 그러나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해도 계속해서 이유 없는 짜증을 받아줄 만큼 관대하지는 않았다. 부디 제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해림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기분 상한 거 풀어요.”
“너도.”
“티 나?”
“응, 많이 나.”
하경과 유현은 서로를 보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임신부가 먹을 거라서 좋은 것, 예쁜 것을 열심히 골랐건만 그 정성이 쓰레기통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돈 쓰고, 시간 쓰고, 밥도 못 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다.
“밥 먹으러 가요.”
“응, 배고파.”
“뭐 먹을까?”
“스테이크. 해림 씨 줄 거 사는데 나도 먹고 싶었어.”
“스테이크 잘하는 집 알아요.”
두 사람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공감해 줄 상대가 있어서 그나마 위로가 됐다. 유현은 주차해 둔 차로 걸어가면서 하경에게 차 키를 내밀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차 키를 받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왜 날 줘?”
“운전해요.”
“운전하기 싫어?”
“아니, 내가 옆에 있을 때 SUV에 적응하라고.”
“왜 내가 SUV에 적응해야 하는데?”
“내일 내 차로 출근해야지.”
하경은 그제야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게 뭐야. 내가 네 차 타고 출근하는 거나 같이 출근하는 거나 뭐가 달라.”
“내가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편이라 내 차가 뭔지 아는 사람 거의 없을걸?”
“됐어. 그냥 네 차로 같이 출근하고 만약 들키면 인정하자.”
유현은 그동안 고민해 왔던 계획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때라고 판단했다.
“나 법무팀으로 옮기면 어떨까 하는데.”
“나도 그 생각, 안 해 본 건 아닌데…….”
그와 제 사이가 공개되고 나면 가장 불편해할 사람은 기획팀 팀원들일 테니 유현이 법무팀으로 옮기는 게 최선이긴 했다. 선뜻 그러는 게 좋겠다고 하지 못하는 건 그가 기획팀 업무에 제법 재미를 붙였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기획팀 일도 흥미롭긴 한데 어차피 내 전공은 법이니까 법무팀으로 가는 게 더 맞는 것 같아요. 애초에 기획팀에 들어간 목적이 주하경 꼬시기였는데 이제 목적을 이루기도 했고.”
하경의 마음을 간파하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설득한 유현이 또 다른 계획을 털어놓았다.
“나 회장님 한번 만나 뵐까 하는데. 우리 사이 허락도 받고, 법무팀으로 옮기는 문제도 상의드리고.”
“내일 다낭 호텔 개관식 관련해서 보고드릴 게 있어서 회장실 갈 거야. 내가 분위기 보고 얘기 꺼내 볼게.”
“그래요.”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나니 딱 차 앞이었다. 왼팔로 헬멧을 끌어안은 하경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차 키를 들어 올려 가볍게 흔들었다.
“근데 다른 사람한테 운전대 안 넘겨준다면서 나는 괜찮은 거야?”
한결의 말대로 유현은 절대 제 차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괜찮다 뿐인가. 다른 것도 다 줄 수 있는데.”
“나중에 딴말하면 안 돼.”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뭐든지 달라고 해요.”
하경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에게 차 키를 내밀었다.
“운전하기 싫어. 네가 해.”
유현이 순순히 차 키를 받아든 순간, 그의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낸 그가 하경에게 누구의 전화인지 알려 주었다.
“한결이.”
그리고 전화를 받았다. *** 세희의 와인 바에 들어선 하경의 귀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고개를 돌려 보니, 한결이 바 자리가 아닌 테이블 자리에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경은 한결의 자리로 걸어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유현이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연수원 선배한테 전화가 왔어. 조용한 데서 통화하고 들어온대.”
두 사람이 스테이크를 포기하고 이곳에 온 이유는 한결이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해서였다. 그래서 계획했던 스테이크를 나중으로 미루고 안주로 파는 찹스테이크로 저녁을 대신하기로 했다.
“세희는?”
하경의 눈이 붉은색 단발머리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태 나랑 놀아주다가 직원 면접 본다고 잠깐 갔어.”
하경이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앉자, 한결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윤정 누나 생일 파티에서 대형 사고 쳐 놓고 태연한 거 봐라.”
“예상치 못하게 일어나는 게 사고지. 난 내가 의도한 거니까 계획이라고 해 줄래?”
“그럼 대형 사건이라고 치자.”
“그러든지.”
두 사람은 쉽게 합의점에 도달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연락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사람들까지 진짜냐고 연락 오고 난리 났다, 아주.”
하경이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지인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 마당발인 데다가 만만한 한결에게 연락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잘됐네.”
“뭐가 잘돼?”
“난리 나라고 거기서 터트린 건데 난리 안 나면 섭섭하지.”
하경은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유명 인사였다. 예쁘고, 똑똑하고, 돈도 많은데, 굳이 안 해도 되는 노력까지 하는 특이 케이스로. 그러니 이런 대형 사건이 그냥 묻힐 리 없었다.
“어떤 반응들인지는 알아?”
“친형제를 저울질했냐고 욕하는 사람, 남들 사고 칠 때 조용히 살더니 역시 한 방이 있었다고 수긍하는 사람, 결혼까지 갈지 안 갈지 내기하는 사람, 다양하던데?”
윤정과 세희를 통해서 알게 된 것들이었다. 두 사람은 하경에게 어떤 말들이 도는지 가감 없이 전해 주었다. 한결이 한마디 보탰다.
“손민건 정말 더럽게 별로였나 보다, 그런 반응도 많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추가.
“아, 유현이 옴므 파탈이냐는 말도 들었다.”
“어떻게 알았지?”
하경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한결은 같이 웃을 수 없었다.
“손민건이 숨겨둔 여자랑 아이 존재가 밝혀져야 누나 욕하는 인간들이 입을 다물 텐데.”
“뒤에서 욕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 어차피 내 앞에서는 하지도 못해.”
“뒤에서든, 앞에서든, 난 누나 욕먹는 거 싫다고.”
입을 댓 발 내밀고 투덜거리던 그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유현이 왔다.”
하경은 제 어깨 너머에 가 있는 한결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나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성큼 다가온 유현이 그녀의 머리를 정면으로 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뒤를 돌아보려면 몸까지 같이 돌려야지 왜 자꾸만 목만 돌려. 목 부러지겠네.”
그는 하경의 옆에 앉자마자 그녀의 목 뒤를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이제 마음대로 하경에게 손을 댈 수 있다는 게 새삼 흐뭇했다.
두 사람의 스스럼없는 모습을 떨떠름하게 지켜보고 있던 한결이 퉁명스러운 말을 툭 던졌다.
“나 여기 있는데?”
유현의 시선이 한결에게 향했다.
“근데?”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다고.”
“시뻘겋게 뜨고 보든지.”
하경은 유치한 대화에 할 말을 잃었다. 유현과 한결이 오랜 친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은 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두 눈을 시뻘겋게 뜰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포기한 한결은 제 패배를 감추기 위해 급히 화제를 바꿨다.
“둘이 나란히 앉아도 돼?”
“안 될 건 뭐야.”
하경이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누가 보면 어쩌냐고.”
“상관없어. 사내 연애가 불법은 아니잖아?”
“뭐? 사내 연애?”
한결이 눈을 부릅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내 연애가 별건가, 뭐. 같은 회사 다니면 사내 연애지. 아직 공개 전이긴 하지만.”
유현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한마디 거들었다.
“내가 회사 그만두면 사외 연애고.”
“그렇지.”
한결은 눈을 맞추며 웃는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불과 며칠이긴 했어도, 둘 사이를 반대했던 게 미안해질 만큼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눈이 접히도록 웃는 누나를 처음 봐서 신기하기까지 했다. 누나가 행복해 보여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갑자기 왜 보자고 했어?”
딴생각에 빠져 히죽거리고 있던 한결은 유현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 할 말이 있어서.”
“그게 뭐냐고.”
한결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앉음새까지 고친 다음 본론을 꺼냈다.
“둘 사이, 인정해 줄게.”
“뜬금없이 뭐야.”
하경은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헛웃음을 쳤다. 그런데 문득 유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근데 결국은 받아들일 거예요.”
그 말이 적중했으니 그날 그가 했던 다른 말도 적중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내 의지로 누군가를 선택한다면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할 거라는 거.”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앉은 유현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그가 ‘왜?’라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유현의 입술을 보니 첫 키스가 기억났다. 물고 빨고 한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라는 걸 몸소 경험한 날이었다. 하경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미소 지었다. 한결에게 뜬금없다고 타박한 사람이 더 뜬금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또 투명 인간이 되어 버린 한결이 눈썹을 모으고 미간을 좁혔다. 그는 반응이 왜 이렇게 시들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 인정해 주겠다고.”
유현은 마지못해 한결을 돌아보았다.
“이미 한 줄 알았는데?”
“내 입으로 인정한다고 말한 적 없잖아.”
오늘 한결이 정식으로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하겠다고 밝힌 건 엄마 때문이었다. 퇴근 후에 본가에 들르라는 연락을 받고 갔다가 언짢은 말을 들은 게 계기가 되었다.
“유현이한테 진지하게 말 좀 해 봐. 하경이랑 헤어지라고. 그래도 네 말은 들을지도 몰라.”
“그 자식이 내 말을 듣는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래도 말이나 해 보란 말이야. 둘이 결혼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어쩌긴 뭘 어째. 축하해 줘야지.”
“누굴 닮아서 이렇게 물러 터졌는지 모르겠네. 둘이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호텔에서 네 입지가 얼마나 줄어들지 생각 안 해 봤어? 민건이랑은 또 다르다는 걸 왜 몰라.”
“뭐가 다른데?”
“민건이는 정치하느라 호텔에 깊숙이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고 쳐도 유현이는 입사까지 했어. 그럼 하경이가 유현이를 더 챙기겠니, 널 더 챙기겠니? 네 아버지 일선에서 물러나면 넌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거야.”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 게 아니라 희한하게 반발심이 들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누나와 친구를 자꾸만 이해관계로 엮는 엄마가 못마땅해서 본가를 나오자마자 유현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결과 홍 관장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 리 없는 하경으로서는 그의 뜬금없는 선언이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뭐? 고맙다고 해 줘?”
“해 줘.”
“고맙다, 주한결.”
엎드려 절 받기였지만, 한결은 개의치 않았다. 흡족한 미소를 띤 그가 유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넌 왜 가만히 있어?”
유현은 먹고 떨어지라는 듯 무심하게 한결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어, 나도.”
목적을 달성한 한결은 와인 병을 집어 들어 하경을 향해 내밀었다.
“자, 누나.”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던 유현은 와인 병 주둥이가 제 쪽으로 오자 딱 잘라 말했다.
“난 안 마셔.”
“왜?”
“차 가져 왔어.”
“놓고 가. 나도 놓고 갈 거야.”
“싫어.”
한결은 구시렁거리면서도 더 권하지 않았다. 주하경 전용 운전기사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 다음 날 오후, 하경과 승조는 기획팀 회의를 마치고 가장 먼저 회의실을 나왔다. 두 사람은 여전히 데면데면했다. 승조가 하경에게 손유현은 안 된다고 한 날부터 어색해진 사이는 다낭에 다녀온 뒤로 더 어색해졌다. 업무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이사님.”
“네.”
하경은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으며 짧게 대답했다.
“어제저녁 늦게 이사님과 손유현 씨가 한 차에서 내리는 걸 홍 대리가 본 모양입니다. 굉장히 친근해 보였다고 하는 걸 보니 뭔가 눈치챈 것 같습니다.”
“곧 소문나겠네요.”
이미 소문이 났을지도 모르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회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던 것 같기도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터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유현의 팀 이동을 빨리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서는 유현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네.”
[회장실입니다.]
사무적인 목소리가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손유현 씨는 오늘 날짜로 퇴사 처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