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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41화 (41/79)

41화. 삼촌과 작은엄마,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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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삼촌과 작은엄마2020.08.20.

하경은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유현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없죠?]

무슨 뜻인지 눈치챈 그녀가 픽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있다고 하면 안 될 분위긴데?”

[맞아요. 없다고 해요.]

“없어.”

기다렸다는 듯 유현이 본론을 꺼냈다.

[퇴근하자.]

하경은 같이 저녁을 먹자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백화점 좀 같이 가요.]

“백화점? 뭐 살 거 있어?”

[좀 전에 해림이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 어제부터 굶었다고 먹을 것 좀 사다 달라고 하네.]

“…….”

기분이 상한 것도 잠시, 하경은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숨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해림은 직접 먹을거리를 사러 나가기가 뭐해서 유현에게 부탁했을 테고, 그는 자신이 신경 쓸까 봐 백화점에 같이 가자는 걸 테니, 두 사람 다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같이 안 가 줄 거야?]

“같이 가.”

[먹을 거 사서 갖다 주고 저녁 먹으러 가요.]

“그래.”

[백화점에서 만나요. 난 택시 타고 갈게.]

“같이 출발해.”

하경은 그가 백화점에서 만나자고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주차장 붐빌 시간이라 누가 볼지도 모르는데?]

그동안은 대체로 늦은 시각이었기에 인적이 드물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한 차에 타는 걸 누가 볼 수도 있었다.

“보든지 말든지. 그렇게까지 몸 사리고 싶지 않아.”

[그럼 내 차로 같이 가요.]

“응, 나 하던 일 마무리하고 내려갈 테니까 먼저 내려가 있어.”

[C구역.]

“알았어.”

하경이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건 전화를 끊은 지 10분쯤 지나서였다. C구역으로 가 보니 유현의 차가 바로 보였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곧장 그의 차로 걸어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사방을 매의 눈으로 살피고 있던 유현이 조수석에 탄 하경을 안심시켰다.

“다행히 본 사람은 없는 것 같네.”

“누가 봐도 상관없다니까. 다른 직원들이 볼까 봐 무서웠으면 같이 출발하자고도 안 했어.”

“…….”

하경은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유현의 얼굴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옆에서 얼쩡거리겠다는 목적으로 우리 회사에 들어온 사람이 왜 이렇게 소심해졌어.”

“난 잃을 게 없지만, 우리 주하경 이사님은 잃을 게 많으니까.”

기획팀 신입사원과 사귄다는 게 알려져서 그녀가 얻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말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일 거였다. 하경을 진심으로 좋아하기 전에는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제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행동했을 뿐. 매일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주원 호텔에 괜히 입사했다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반성하고 있어요.”

“반성 그만하시고 운전이나 하세요.”

하경은 그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토닥여 주고 안전벨트를 맸다. 그제야 심각했던 유현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그는 제 여자의 말을 아주 잘 듣는 남자였다. *** 두 사람은 백화점 식품관에 들어섰다.

“와, 사람 왜 이렇게 많아.”

하경은 유현에게 가까이 다가서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보니, 유현이 미간을 살짝 모으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싫어?”

“싫을 리가. 너무 좋아서 확 뽀뽀해 버릴까 고민 중인데.”

“안 돼.”

깜짝 놀란 그녀는 일단 그를 저지하고 난 뒤에 말을 덧붙였다.

“난 사람 많은 데서 거침없이 애정 행각을 벌일 만큼 과감한 사람이 아니야.”

“오케이. 취향 존중.”

유현은 하경의 팔과 엮여 있는 제 팔을 안쪽으로 바짝 당기고서 걸음을 옮겼다.

“뭐 살 거야?”

“뭐 사지?”

하경은 반문하는 그를 돌아보며 콧등을 찌푸렸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막연하게 먹을 걸 사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왔는데 먹을 게 너무 많네.”

그의 말대로 먹을거리가 많긴 했다. 선택의 폭이 너무 넓어서 선택하기가 더 힘들었다. 즉석에 만들어지는 음식들은 모두 군침이 돌 만큼 맛있어 보였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일단 뭐가 있는지 한 바퀴 돌아보자.”

“그래요.”

유현은 사람이 유독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하경을 제 앞에 세우고 걸었다. 다른 사람과 부딪힐 것 같을 때는 팔로 막아주거나 살짝 뒤로 끌어당겨 안으며 전진했다.

대강 한 바퀴 돌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유현이 가장 만만한 음식을 첫 번째 후보로 올렸다.

“초밥 살까?”

“임신했을 때 날생선 먹어도 되나 모르겠네. 얼핏 안 된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런가?”

“찾아봐야겠다.”

휴대 전화를 꺼낸 하경은 유현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으면서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검색은 금세 끝났다.

“신선한 건 괜찮대. 수은 함량 높은 참치 같은 건 많이 먹으면 안 되고.”

“그럼 사도 되겠네.”

“난 안 사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굳이 찜찜한 걸 살 필요가 있나 싶어.”

“그럼 안 사는 걸로.”

유현은 군소리 없이 재깍 그녀의 의견에 따랐다.

“이 근처 어디에서 스테이크 봤는데 스테이크 사자. 단백질을 먹어 줘야 해.”

“그 집은 여기서 오른쪽.”

어디에서 뭘 파는지 위치를 대강 파악해 두고 있던 그가 곧바로 방향을 잡았다. 두 사람은 스테이크를 시작으로 철판 볶음밥, 김밥, 만두 등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을 만한 음식들을 1인분씩 주문했다. 단 게 먹고 싶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여러 종류의 조각 케이크와 마카롱도 샀다. 이 중에 네가 좋아하는 게 하나쯤은 있겠지, 콘셉트였다.

“이 정도면 됐겠지?”

“충분해요. 일단 오늘은 이것까지만 사다 주고, 오피스텔에 배달이 되는지를 알아봐야겠어. 내가 매일 사다 줄 수도 없고 그때그때 먹고 싶은 걸로 시켜 먹는 게 낫겠지.”

“그래. 그게 좋겠다.”

“주차장으로 가요.”

유현은 하경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려세우다가 멈칫했다.

“아, 맞다.”

“왜?”

“해림이가 딸기 먹고 싶다고 했는데.”

하경은 그의 말에 별안간 심기가 불편해졌다. 유현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느라 바쁜 사이, 그녀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과일은 저쪽에서 파네.”

하경에게 고개를 돌린 그의 눈앞에 5만 원권 지폐가 불쑥 나타났다. 1장이 아닌 여러 장이었다.

“내가 계산할래.”

유현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뭘?”

“지금까지 네 카드로 계산한 거 내가 산 걸로 하겠다고. 딸기도 내가 살 거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눈치 빠른 그도 뭐가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임신한 와이프가 남편한테 딸기 먹고 싶으니까 사 오라고 하는 것 같아서 거슬려.”

하경이 받아들이기에, 집에 먹을 게 없으니 먹을 것 좀 사다 달라고 한 것과 딸기가 먹고 싶으니 딸기를 사 오라고 한 것은 엄연히 달랐다. 예민하게 군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현은 그녀를 조금도 예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 내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네.”

하경의 손에 들린 5만 원권 4장을 덥석 가져온 그는 음식 봉지들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럼 이거 전부 작은엄마가 사주는 걸로 해요.”

“작은엄마?”

난생처음 들어본 호칭에 당황한 그녀가 큰 눈을 끔뻑거렸다.

“해림이 배 속 아이가 내 조카니까, 난 삼촌.”

유현은 자신을 가리키고 있던 손가락을 반대로 돌려 하경을 향하게 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작은엄마.”

작은엄마라는 호칭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하경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졌다. 신기하게도, 배 속 아이를 생각하니 김해림이라는 존재가 희미해졌기 때문이었다. 딸기든 뭐든 어차피 해림의 입에 들어가겠지만, 해림이 아닌 유현의 조카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자, 딸기 사러 가자.”

유현은 얼른 지폐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하경의 뒤를 따랐다. *** 백화점을 나와서 오피스텔에 도착한 두 사람은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제 헬멧이 불현듯 떠오른 하경이 유현을 돌아보며 눈을 빛냈다.

“내 헬멧 잘 있지?”

“당연히 잘 있지.”

“바이크는 언제 또 태워 줄 거야?”

“헬멧 개시해 보겠냐고 물었는데 아무 대답 안 했잖아. 타기 싫다는 건 줄 알았는데?”

그가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거리자, 그녀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헬멧 개시해 보겠냐고 물었다고? 나한테?”

“그럼 누구한테 물어.”

“난 들은 기억이 없는데?”

“잘 생각해 봐요.”

“음…….”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던 하경의 미간이 엘리베이터가 19층에 도착한 것과 동시에 확 펴졌다.

“아!”

해림이 찾아왔던 날, 유현이 보내 왔던 메시지에 분명 그런 내용이 있었다. 답장을 보낼 기분이 아니라 확인만 하고 무시했던 게 이제야 기억났다.

“거봐. 난 분명히 물었는데 대답이 없었어.”

“지금 대답할게.”

유현은 하경을 슬쩍 밀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게 하고 뒤따라 내렸다.

“누구 맘대로. 이미 시효는 끝났어요.”

한 번 와 봤다고 그녀는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고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

“그럼 지금 다시 물어봐.”

“싫은데?”

“왜 싫어. 물어봐.”

유현이 걸음을 멈추자, 하경도 반사적으로 따라 멈췄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따가.”

“…….”

유현은 하경의 입을 막고 초인종을 눌렀다. 몇 초 지나지 않아서 해림이 활짝 웃으면서 문을 열어 주었다.

“오빠, 왔…….”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 건 유현의 곁에 선 하경을 본 순간이었다.

“배고팠지?”

“…….”

심사가 뒤틀린 해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휙 뒤돌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경은 티 나게 달라진 해림의 태도가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너무 노골적이라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이사실을 찾아왔던 날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유현은 현관문을 잡고 서서 하경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이것만 놓고 바로 나올 테니까 여기 있을래요?”

“아니, 같이 들어가.”

더 기분이 나빠질지 몰라도 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요, 그럼.”

그는 옆으로 비켜서서 그녀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소파에 앉아 있는 해림을 보고 하경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멈춰 섰고, 유현은 소파로 다가가 소파 테이블 위에 백화점에서 사 온 것들을 올려놓았다.

“이것저것 조금씩 샀어. 먹고 싶은 걸로 골라 먹어.”

하경이 산 거라는 말을 하지 않은 건 고마워하기는커녕 싫어할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는 해림이 하경에게 왜 이렇게 적대적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읍!”

테이블로 상체를 기울이던 해림이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면서 몸을 뒤로 젖혔다.

“오빠, 저쪽으로 좀 치워줘. 토할 것 같아.”

“속이 비어서 그런 거 아니야? 뭐라도 좀 먹…….”

“치우라고!”

해림이 질색하며 목청을 높이자, 유현은 소파 테이블 위에 있던 것들을 싹 들어서 식탁 위로 옮겨 놓았다.

“그냥 가져가. 나 못 먹을 것 같아.”

“속 가라앉으면 먹어.”

하경은 왜 임신한 유세를 내 남자에게 하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해림 씨 컨디션 안 좋은 것 같은데 그만 가자. 우리가 가야 편하게 쉬지.”

유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온 김에 내 헬멧 가져가야겠다.”

헬멧이 필요할 때 또 오고 싶지 않아서 온 김에 가져가려는 것이었건만, 의도치 않게 해림을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해림은 선반 위에 놓인 헬멧을 집어 드는 하경을 보면서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분홍색 헬멧이 누구의 것인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당사자에게 확인받고 나니 짜증이 치밀었다.

‘한 번만 태워달라고 그렇게 졸라도 안 태워 주더니…….’

해림이 자신에게는 단호하게 거절만 했던 유현을 원망하고 있는 사이, 그는 헬멧을 품에 안고 돌아선 하경에게 눈짓했다.

“나 잠깐만.”

하경은 그가 해림과 따로 할 얘기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림 씨, 몸 잘 챙겨요.”

하경이 형식적인 인사를 남기고 나가 버리자, 유현은 지갑에서 신용 카드를 꺼내어 해림에게 내밀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이걸로 사.”

해림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어쩌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숨어다녀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만약 그가 다른 날 신용 카드를 주었다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을 거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여자를 대면하고 난 직후라서인지 그의 배려가 싸구려 동정처럼 느껴졌다.

“나 돈 있어.”

“있어도 이거 써.”

“됐다고! 내가 거지야?”

해림이 소리를 빽 지르자, 유현은 굳은 표정으로 신용 카드를 도로 지갑에 넣었다.

“간다.”

“…….”

해림은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를 보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꼬여 버린 인생만큼이나 그녀의 심사도 잔뜩 뒤틀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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