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해요-40화 (40/79)

40화. 손만 잡고 잘게,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novel.naver.com

“일단 짐부터 풀자. 슈트 구겨지기 전에.”

유현은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는 하경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짐부터 풀자면서 부엌으로 가는 이유가 뭔지 알지 못해서였다. 뒤따라가 보니, 그녀는 키친 타월에 물을 묻히고 있었다. 그제야 이곳으로 먼저 온 이유가 짐작이 갔다. 그의 짐작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려는 듯, 하경이 젖은 키친 타월을 불쑥 내밀었다.

“캐리어 바퀴 닦고 드레스 룸으로 가지고 와. 네 옷 걸 자리 만들어 놓을게.”

그녀는 유현이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그의 손에 키친 타월을 쥐여 주고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현관으로 간 유현은 하경의 지시대로 캐리어 바퀴를 깨끗이 닦았다. 먼지가 탔을 것 같아서 몸체도 꼼꼼하게 닦은 다음 드레스 룸으로 캐리어를 가져갔다. 이미 드레스 룸 행거에는 제 옷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일단 여기에 걸어.”

유현은 캐리어에서 옷들을 꺼내어 빈 행거에 차곡차곡 걸었다. 여자 옷뿐이었던 드레스 룸에 남자 옷이 생긴 걸 보니 내심 뿌듯했다. 이 집에 제 영역이 조금씩 넓어지는 게 좋았다. 하경의 마음속 제 자리가 점점 더 커지는 듯해서.

“차 한잔 마실래?”

“좋지.”

두 사람은 드레스 룸을 나가 부엌으로 향했다. 유현은 하경이 차를 준비하는 동안 테이블에 턱을 괴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경을 보고 있노라면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의 움직임만 보이고, 오롯이 그녀에게만 집중하게 됐다. 사락사락. 조용히 다가온 하경이 테이블 위에 차 2잔을 내려놓았다.

“루이보스차야. 숙면에 도움이 된대.”

“불면증 있어요?”

그녀는 유현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대답했다.

“빨리 잠들지 못하기도 하고, 자주 깨.”

“테이블에 엎드려서도 잘 자고, 자주 깨지도 않던데?”

“…….”

하경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유현이 말하는 건 술 내기를 한 날이겠지만, 사실 그날뿐만 아니라 그가 이 집에서 잤던 날 모두 금방 잠들었고 중간에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루이보스차보다 손유현이 숙면에 더 도움이 되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침대에 눕혀 준다는 명목으로 안아도 봤고, 자는 얼굴도 실컷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그를 곱게 흘겨본 하경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화제를 돌렸다.

“김해림 씨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래? 도망 다닌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아직 뭘 어떻게 하겠다, 결정한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무섭고 혼란스러운가 봐요.”

“그렇긴 하겠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뭘까 고민 중이에요.”

하경은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너무 유치해서 차마 하지 못했던 말.

“한 가지 약속해.”

“무슨 약속?”

“앞으로는 김해림 씨 안아 주지 않겠다고.”

유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해림이를 안아 줬다고? 언제?”

하경은 지금 그가 시치미를 떼는 게 아니라 정말 몰라서 묻는다는 걸 눈치챘다.

“네 형 잡으려던 카메라에 두 사람이 잡혔어. 네가 우는 김해림 씨 안아 줬잖아.”

유현은 그제야 그녀가 무슨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알아차렸다. 그가 재깍 알아듣지 못한 건 해림을 안아 줬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안아 준 게 아니라 다독거려 준 거지.”

“뭐가 달라. 둘이 밀착돼 있었으면 다 같은 포옹이야.”

그는 더 이상 항변하지 않기로 했다. 우는 해림을 밀어낼 수 없어서 가볍게 다독거려 준 것뿐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 눈에는 포옹으로 보이고도 남았으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까닭이었다.

“약속할게요.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앞으로도 마음에 걸리는 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하경의 귀로 유현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 사진, 언제 봤어요?”

“김해림 씨가 찾아왔던 날.”

“그날 내 메시지 계속 씹고, 술 많이 마신 게 혹시 그 사진 때문이기도 했나?”

“…….”

하경은 대답 대신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면서 그의 눈을 피했다.

“질투해 줘서 고마워요. 근데 나도 그날 질투 나서 미치는 줄 알았거든.”

유현은 슬쩍 시선을 들어 올리는 그녀에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딴 남자한테 안겨 있지 말아요.”

“내가 언제?”

하경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임승조 팀장님한테 안겨 있었잖아.”

“그건 안겨 있었던 게 아니라 부축…….”

“밀착돼 있었으면 포옹이라며.”

“…….”

하경은 부인하지 못했다. 그날 승조와 제 모습에 유현과 해림을 대입해 보면 답은 나왔다.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자신은 분명 포옹이라고 했을 거였다. 그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었다.

“도긴개긴의 의미로 한 말 아니라는 거 알죠?”

“아니, 모르겠는데.”

그녀가 뚱하게 대답하자 유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갑자기 그날 기억이 나서 생각난 김에 말해 본 건데 우리 하경이 삐쳤네.”

“…….”

그의 애정 어린 말투에 하경의 얼굴에도 스르르 미소가 번졌다.

“약속 좀 해 주지?”

“약속할게.”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식탁 위에 두 팔을 얹으며 물었다.

“다른 건 없어요? 내가 하지 말았으면 하는 거.”

하경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신중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찾아냈다.

“다른 사람한테 친절하지 않기.”

그녀가 뜬금없는 말을 꺼낸 건 언젠가 유현이 했던 말이 생각나서였다.

[난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 못 돼요. 그래도 노력은 해 볼게요, 누나가 원한다면.]

그럴 거 없다고 했던 게 내내 찜찜했던 터라 말이 나온 김에 바로 잡는 것이었다.

“그럼 주하경한테만 친절하면 되나?”

“응, 난 나한테만 친절한 사람이 좋아.”

“쉽네.”

하경은 유현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헷갈리게 하지 않아서 좋았다. 어쭙잖은 자존심을 세우지 않아서 좋았다.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지 않아서 좋았다. 그래서 손유현이 좋았다. 기분도 좋고 따뜻한 것을 마셔서 몸이 노곤해지니 자연스럽게 잠이 왔다. 하경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할 유현이 아니었다.

“졸려요?”

“응, 졸려.”

그는 손목시계로 눈을 돌렸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벌써 1시가 넘었네. 그만 자야겠다.”

유현이 일어나자, 하경도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섰다. 그는 하경이 제 옆으로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의 허리를 한쪽 팔로 휘감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하경도 팔을 뒤로 돌려 그의 탄탄한 허리를 감싸 안았다. 따뜻하고 든든했다.

두 사람은 침실 앞에 도착했다. 하경은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유현의 허리를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어딜 은근슬쩍 들어가려고.”

유현에게서 벗어난 그녀는 얼른 침실 안으로 들어가 그와 마주 보고 섰다.

“같이 자면 안 되나?”

“안 되지.”

“손만 잡고 잘게.”

순진무구한 눈망울이 하경을 유혹했다. 그 눈에 홀려 하마터면 들어오라고 할 뻔한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문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잘 자.”

하경은 빙긋 웃어 보이고 재빨리 문을 닫았다. 문밖의 여우는 참으로 유혹적이었다. 다른 사람과 침대를 같이 쓰기 싫어서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했던 그녀에게 손유현이라면 같은 침대를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 다음 날 아침. 하경은 개운하게 눈을 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침대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잠이 들었고, 중간에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을 맞았다. 유현이 루이보스차보다 훨씬 낫다는 게 다시 한번 증명된 셈이었다. 침대를 내려온 그녀는 거실로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오늘만큼은 부스스한 모습을 보여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경은 발걸음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깨끗이 씻고 나와 파우더 룸 거울 앞에 섰다. 아예 화장을 하고 나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화장은 이따가 하지, 뭐. 어차피 한두 번 보여 준 민낯도 아닌데.’

그녀는 기초화장만 하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있을 거라 예상했던 유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일어났나?’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부엌으로 가 보니 반가운 얼굴이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씻고 나왔는지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일어났어요?”

“응, 잘 잤어?”

하경이 의자를 빼고 앉자, 유현은 오히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마실래요?”

“커피 머신,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알아?”

“지난번에 봐 뒀지.”

“그럼 한 잔 줘.”

하경은 피식 웃으면서 그가 커피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모든 행동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이 집에서 몇 년쯤 산 사람 같았다. 유현은 커피 2잔을 가져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셔 보네.”

그의 말에 맞장구치지는 않았지만, 커피를 홀짝거리는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드리워졌다. 유현이 내려 준 커피라서인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이따 먼저 출근해요. 난 따로 택시 타고 갈게.”

“응.”

하경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건 굳이 다른 사람에게 그와 아침 일찍 같이 출근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같이 퇴근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와의 사이가 들통날까 봐 걱정스러운 건 아니었다.

“아, 맞다. 어제 깜빡 잊고 그냥 넘어간 게 있는데.”

“뭔데?”

“내 차도 아닌데 내 맘대로 해림이 태워서 미안해요.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는 거 태우고 난 다음에 생각났어.”

하경은 사실 어제 유현이 해림을 제 차에 태워 오피스텔로 데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기에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넘어간 것이었다.

“괜찮아. 택시 타고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었잖아.”

유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는 그녀를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날마다 주하경이 점점 더 좋아져서 큰일이었다. *** 해림은 독이 바짝 오른 상태였다. 남들은 다 행복한데 자신만 불행한 것 같아서 서럽고 억울했다. 그 비뚤어진 마음이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주하경, 당신만 없었어도 민건 오빠가 날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 버리지는 않았을 거야.’

이제 자신이 하경의 결혼을 망친 게 아니라 하경이 제 인생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민건에게도 버림받고, 유현에게도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두 형제가 모두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 주하경. 그녀로 인해 세상이 너무나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에 호텔 이사씩이나 하고 있는데 누구는 부모님께 용돈 한번 넉넉히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 불공평해도 너무 불공평했다. 이제 민건에게는 더 실망할 게 남아 있지도 않지만, 유현의 태도는 곱씹을수록 섭섭했다.

“내가 무슨 전염병 환자도 아니고…….”

하루 이틀 알아 온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짐을 싸서 나갈 일인가. 그 이후로 전화 한 통이 없었다. 잠은 잘 잤냐, 밥은 먹었냐, 한마디도 묻지 않는 게 서운했다. 주하경만 없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무심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 배가 고픈 게 더 서러웠다. 요 며칠 입덧이 심해서 새콤한 과일과 담백한 비스킷만 먹을 수 있었던 게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많아졌다. 해림은 조금 전 오피스텔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과자를 내려놓고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유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그가 근무 시간이라는 사실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신호음만 지루하게 이어질 뿐,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왜 안 받아…….”

한 번 더 걸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설마 내 전화를 피하는 건가?”

해림은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로부터 20분 뒤, 유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회의 중이었어.]

그녀는 근무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다짜고짜 용건부터 꺼냈다.

“오빠,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아.]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가 제 존재를 새카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아서.

“나 홑몸 아닌 거 알잖아.”

해림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제 배 속 아이의 삼촌이며, 남도 아닌 삼촌이 조카를 위해 최소한의 도리는 하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은 거야?]

“먹을 게 없다니까.”

과일과 과자는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니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근처에 편의점도 있고, 먹을 만한 데 좀 있는데. 나가서 사 먹고 들어오지 그랬어.]

해림은 그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용건을 꺼냈다.

“나 먹을 것 좀 사다 줘, 오빠.”

[배달 음식 받을 수 있는지 한번 알아볼게.]

“오빠가 사다 달라고.”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다시 유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무거나. 지금 같아서는 뭐든지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퇴근하고나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기다릴게. 되도록 빨리 와.”

[그래.]

휴대 전화를 귀에서 떼려던 그녀가 다급히 그를 불렀다.

“아 참, 오빠.”

[말해.]

“나 딸기 먹고 싶어.”

[사 갈게.]

해림은 점점 뻔뻔해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