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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37화 (37/79)

37화. 나랑만 해요, 뭐든,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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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나랑만 해요, 뭐든2020.08.06.

“하경아.”

하경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처음으로 유현이 제 이름을 부른 순간. ‘주하경’이라고 지칭한 적은 있어도 ‘하경아’라고 부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하루에 한 번만 불렸어도 최소 만 번은 불렸을 제 이름이 유현의 입을 통해 나오니 굉장히 색다르게 느껴졌다.

“이제 누나라고 안 부를 거야. 안 부른 지 꽤 되기도 했고.”

하경은 그제야 요즘 유현이 누나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았을 만큼 그가 이제 조금도 동생 친구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랑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요.”

유현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을 간질였다. 제 등과 완전히 맞닿은 그의 넓은 가슴이, 제 몸을 빈틈없이 감싼 그의 단단한 팔이 좋았다.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나른한 음성도.

“나랑만 해요, 뭐든.”

구속하려 드는 것조차 싫지 않으면 어쩌란 말인가. 콩깍지가 씐 건지, 손유현이라는 남자의 모든 것이 다 좋았다. 누군가를 이렇게 맹목적으로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하경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자, 잠시 꺼졌던 센서 등이 그녀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커졌다. 그녀는 그의 팔을 지그시 잡고 입술을 달싹였다.

“뭐든…… 너랑만 할게.”

수줍게 꺼낸 말이 공기 중에 다 흩어지기도 전에 몸을 부드럽게 조이고 있던 힘이 사라졌다. 그리고 뒤로 돌려세워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경은 유현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등 뒤에 있었을 때와는 달리, 막상 얼굴을 보고 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 좀 봐요. 거짓말한 사람처럼 왜 눈을 피해.”

유현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제 눈을 보게 했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하경이 체념하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거짓말 아니야.”

그제야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약속했어요.”

“응…….”

입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유현의 눈은 뭔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럼 일단 나랑 해야 할 거.”

“…….”

하경은 점차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내 입술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들어가게 해 달라고 조르는 침입자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여 주니 따뜻한 숨결이 밀려들었다. 숨결과 숨결이 하나로 얽혔다. 이질적이면서도 싫지는 않은 묘한 기분과 더불어 아찔하고 야릇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키스가 깊어질수록 하경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오직 유현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소파에 등을 대고 누워 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언제 구두를 벗고 어떻게 거실까지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코로 힘겹게 숨을 쉬고 있는데 유현의 손이 상의를 들치고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는 뜨거웠다. 밀착된 입술도, 내뱉는 숨도, 은근히 움직이는 손도. 하경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손가락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입술과 입술이 밀착돼 있어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돌연 유현의 움직임이 멎었다. 뒤로 물러나는 그의 얼굴에는 정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미안.”

하경은 그의 흐트러진 눈빛을 처음 보았다. 잔뜩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금세 평상심을 되찾은 유현은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 하경을 일으켜 소파에 등을 기대게 했다. 그러고는 옆에 앉아서 그녀의 옷매무시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하경은 그의 다정한 손길에 몸을 내맡겼다. 몸이 노곤해져서 잠시 눈을 감았더니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화 풀어요. 내가 잘못했어.”

유현이 제 침묵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눈을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화가 났어야 풀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 김칫국 마신다고 화난 줄 알았어요.”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좀 나른해서.”

오히려 유현에게 고마웠다. 실망하지 않게 해 줘서. 하경은 성급한 사람도, 본능에 지배당하는 사람도, 자제력 없는 사람도 싫어했다. 만약 그가 스스로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그 세 가지에 모두 해당할 뻔한 상황이었다. 유현은 그녀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나 그만 갈 테니까 쉬어요.”

“응…….”

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사실 그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게 좋았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유현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만 보내주려는 것이었다. 지금 그의 몸은 부자연스럽게 굳어 있고, 뜨거웠다. 눈빛에도 여전히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성으로 본능을 억제하고 있는 사람을 더는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하경이 먼저 일어선 유현을 따라서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휴대 전화 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경의 가방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동시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갖다 줄게요.”

유현은 현관으로 가서 가방을 가지고 돌아왔다. 건네받은 가방에서 휴대 전화를 꺼낸 하경이 발신자를 확인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회장님?”

“응.”

오늘 안에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올 거라 예상했다.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 중 몇 명만 부모님께 얘기해도 금세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경은 차분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조용히 휴대 전화를 귀에 대고 있던 그녀가 알았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유현은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짐작이 갔다.

“집으로 오라고 하셨나 보네.”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인 하경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나 가고 푹 쉬었으면 했는데…….”

유현의 얼굴에 안쓰러운 감정이 묻어나자, 그녀는 일부러 더 밝은 척했다.

“나 체력 좋아. 다년간에 걸친 살인적인 업무가 가져온 긍정적인 효과라고나 할까?”

“그럼 폐활량만 안 좋은가?”

“무슨 소리야. 내가 수영을 몇 년을 했는데.”

하경은 지는 걸 못 참는 성격이었다.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술을 잘 못 마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발끈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가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파악할 새도 없이 반박부터 한 것이었다.

“아까 굉장히 숨차 하던데?”

“그거야 네가 너무…….”

반사적으로 항변하던 하경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제야 유현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걸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너무 뭐?”

“…….”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네가 너무 거칠게 밀어붙여서 그런 것 아니냐고 받아칠 수는 없었다. 유현이 삐죽거리는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순간, 이번에는 그의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의 전화인지 예감한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으니 아버지의 싸늘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지금 당장 집으로 와라.]

유현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휴대 전화를 귀에서 떼는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오히려 그를 지켜보고 있던 하경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두 분이 짠 것처럼 전화를 하시네.”

유현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하경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도 아버지 뵈러 가야 해요. 같이 나가요.”

“그래.”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 *** 유현은 높디높은 회색 담벼락 밑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그가 먼저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리자, 하경도 마지못해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에서 내렸다. 그녀는 제 곁으로 다가온 유현이 내민 차 키를 받지 않았다. 그는 뚱하게 서 있는 하경의 손에 차 키를 꼭 쥐여 주고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왜 삐쳤어.”

“혼자 오겠다니까…….”

하경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그녀의 불만은 유현이 큰길까지 걸어 나가서 택시를 타야 한다는 것이었다. 직접 운전을 하고 와도 되는데 굳이 여기까지 데려다주고 갈 일이 뭐란 말인가.

“단속하려고 따라온 건데?”

“단속?”

“회장님 뵈면 마음 바뀔까 봐 내 얼굴 끝까지 각인시켜 놓는 거예요. 흔들릴 때 날 생각해 달라고.”

장난기 가득했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진지해져 있었다. 유현은 주 회장이 하경과 제 사이를 흔쾌히 허락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그녀가 흔들리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흔들릴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어.”

“근데 왜 난 점점 더 불안해지지?”

하경을 향한 마음이 커질수록 불안감도 커지고 있었다.

“내가 훨씬 더 많이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하경은 그가 불안해하는 게 좋았다. 자신으로 인해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유현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던 그녀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도 좋아해.”

유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하경은 발꿈치를 살짝 들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발꿈치가 바닥에 닿은 것과 동시에 유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키스면 더 좋을 뻔했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오늘은 봐 줄게요.”

유현은 장밋빛으로 물든 하경의 얼굴을 흐뭇하게 보고 있다가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요. 회장님 기다리시겠다.”

혼자 들여보내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 들어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건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였다.

“전화할게.”

하경은 유현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대문 앞으로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 10년 넘게 살았던 곳인데도 독립한 이후 1년에 서너 번쯤 오게 된 뒤로는 남의 집에 온 것처럼 불편했다. 대문이 열리자, 그녀는 넓디넓은 마당을 걸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왔니?”

하경을 맞은 건 홍 관장이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아버지가 불러서 온 거 알아. 내일 얘기하라고 해도 기어코 너한테 전화를 하더라. 하여간 주씨 집안 고집은…….”

하경은 홍 관장의 말투가 뾰족하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표정에도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서재에. 근데 엄마랑 먼저 얘기 좀 해.”

홍 관장은 하경의 팔을 덥석 잡고 소파로 데려가 앉힌 다음 그 옆에 따라 앉았다.

“너 유현이랑 사귀는 거 아니지?”

하경은 홍 관장이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맞아요.”

늘 웃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던 홍 관장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맞다고?”

나긋나긋한 말투도 사라졌다.

“세상에 널린 게 남잔데 왜 하필이면 유현이야. 한결이 보기 민망하지도 않아?”

“안 민망해요.”

하경이 딱 잘라 말하자, 홍 관장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형이랑 헤어지고 동생을 만나는 게 말이 되니?”

“형이랑 사귄 게 아니잖아요.”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문제지. 아버지랑 내 체면은 안중에도 없어?”

홍 관장은 사실 하경과 민건의 결혼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하경이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시댁을 갖는 게 탐탁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두 사람의 결혼이 깨진 게 내심 흐뭇했다. 호랑이 등에 날개가 달리는 꼴을 보고 있기가 못마땅했는데 알아서 없던 일이 되어 버려서 속이 시원했다. 하경이 더 좋은 집안의 남자를 만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눈앞에 닥친 결혼이 깨진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유현과 사귄다니 어이가 없었다. 신랑감만 바뀌고 시댁은 그대로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두 분께는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홍 관장은 하경을 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들어가 봐.”

하경은 담담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서재 안으로 들어선 그녀의 눈에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앉아라.”

주 회장은 하경이 맞은편 소파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유현이랑 무슨 사이냐.”

조금 전 윤정의 생일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그에게 말해 준 사람은 홍 관장이었다. 파티에 참석했던 홍 관장의 친구 딸을 통해 듣게 된 것이었다.

“좋아해요, 남자로.”

딸의 대답이 너무나 단호해서 주 회장은 일순간 당황했다. 이 정도 확신이 없었다면 보란 듯 유현의 팔짱을 끼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난 반대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고 근엄했다. 카리스마에 기가 눌릴 법도 하건만, 하경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반대하시는 이유는요?”

“난 네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다.”

“막말로 결혼했다가 이혼하고서 시동생이었던 남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결혼 얘기 오가다가 끝났을 뿐이에요. 사람들이 떠들어 봐야 잠깐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하경아.”

“처음으로 설레는 남자를 만났어요. 아버지가 반대하셔도 포기하지 않아요.”

“…….”

주 회장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경은 나가라는 의미임을 눈치채고 몸을 일으켰다.

“갈게요. 쉬세요.”

하경이 서재를 나가자마자, 주 회장은 다급하게 책상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약통에서 작은 알약 하나를 꺼내어 입에 넣었다.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묻는 그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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