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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36화 (36/79)

36화. 백문이 불여일견,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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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백문이 불여일견2020.08.02.

파티 참석자들은 하경과 유현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노골적인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 두 사람을 흘긋거릴 뿐. 둘 중 그들이 더 관심을 두는 쪽은 유현이었다. 눈만 돌려도 죄다 아는 얼굴뿐인 곳에서 그는 아주 신선하고 흥미로운 존재였다. 일단 외모로 눈길을 끄는 데다가 하경의 일행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그랬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굴까?’

‘주하경이 남자를 보면서 저렇게도 웃네?’

‘둘이 무슨 사이지?’

‘결혼할 사람이랑은 눈도 안 마주치더니 저 남자는 뭐야?’

저마다 의문을 가득 품고 유현의 정체가 밝혀지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모든 것이 하경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유현을 이 자리에 부른 것이니까.

“상의 안 해서 미안.”

하경이 복화술처럼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소곤거리자, 유현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상의했어도 마음대로 하라고 했을 텐데, 뭐.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하경의 눈꼬리와 입꼬리가 동시에 휘었다.

“협조해 줘서 고마워.”

남들의 시선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도 오늘은 꽤 즐거웠다. 재미로 시작한 건 아니지만, 은근히 재미도 있었다.

“그런 의도 아닌데? 내 여자 향기, 조금 더 가까이 맡고 싶어서.”

그녀는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유현의 말을 다시 곱씹어 봐야 했다.

‘내 여자……?’

분명 그렇게 말했다. 처음 들어본 말이라 어색하고 민망하긴 해도 싫지 않았다. 만약 민건에게 같은 말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니, 그에게 여자가 있다는 걸 몰랐다고 해도 듣기 거북했을 것 같았다.

‘내가 물건이야? 얻다 대고 내 여자래?’

그런 마음이 들었을 거라 확신하기에 자신이 유현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새삼 와닿았다. 딴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윤정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온 찬식의 얼굴을 보고서였다.

“누나, 생일 축하해요.”

윤정이 새초롬한 얼굴로 그를 나무랐다.

“왔으면 누나한테 제일 먼저 인사하러 와야지 뭐 하는 거야.”

“바쁘신 것 같아서 이따 인사드리려고 했죠.”

찬식이 목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하경이한테도 인사해야지.”

호들갑 좀 떨어주라, 찬식아. 할 일을 마친 윤정은 관객 모드에 돌입했다. 찬식은 하경과 유현을 번갈아 보고서 하경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하경 누나,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네.”

너스레가 주특기인 그도 하경은 어려웠다. 도도하고 깐깐한 이미지라 말 한마디 걸기가 쉽지 않았다. 인사 외에는 해 본 적이 없건만 오늘은 용기를 한번 내 보기로 했다.

“근데 누나, 민건이 형이랑 결혼하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누구한테 들었어?”

“민건이 형한테요.”

하경이 그를 향해 예쁘게 웃어 보였다.

“다시 물어봐.”

“네?”

“아니라고 할 거야.”

찬식은 놀란 마음을 성량으로 표현했다.

“민건이 형이랑 결혼 안 하시는 거예요?”

우렁찬 목소리가 주위 이목을 모조리 끌어와 주었다.

‘그래. 이거지.’

웅얼거리기만 해서 답답했는데 이제야 속이 시원해졌다. 그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배려해주기로 마음먹은 하경은 유현의 팔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면서 빙긋 웃었다.

“응, 안 해.”

그녀의 목적은 ‘백문이 불여일견’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 민건은 파티장에 들어와 윤정에게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보좌관의 전화를 받았다. 테라스에서 긴 통화를 한 뒤 안으로 들어와 보니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다들 일제히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뭐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곳으로 걸어갔다. 국회의원이긴 해도, 민건은 하경만큼 유명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열에 아홉이 주하경을 안다면, 손민건을 아는 사람은 열에 서넛 정도였다. 그래서 하경과의 결혼을 통해 재력과 인맥을 얻으려 했던 것이었다. 대여섯 걸음쯤 걸었을 때,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형.”

1년에 한두 번 보는, 아는 동생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왜? 무슨 일 있어?”

민건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되물었다.

“하경 누나랑 결혼한다며.”

“아, 그거.”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이곳에 온 가장 큰 목적은 하경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걸 밝히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조만간 모두가 알게 될 텐데 차라리 제 입으로, 하경이 있는 자리에서 밝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온 것이었다. 쿨한 척해야 그나마 체면이 설 것 같아서. 뻔뻔하게 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자신이 없는 곳에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하경이 해림의 일을 언급한다면 별것 아닌 걸로 유난을 떤다는 식으로 몰아갈 계획까지 세웠다. 남자들은 대부분 이해해 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그런데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지고 말았다.

“왜 하경 누나가 딴 남자 팔짱을 끼고 있어?”

“뭐?”

‘딴 남자’가 누군지 직감한 민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 5분쯤 됐나, 처음 본 남자 하나가 들어오길래 누군가 했더니 하경 누나한테 가더라고. 귓속말하는 거 보고 뭐지, 했는데 팔짱까지 끼던데? 분위기가 완전 연인이야.”

“…….”

민건은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자신이 주차장에서 하경을 도발한 이후 그녀가 유현을 뒤늦게 부른 모양이었다. 오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너무 나쁜 놈으로 몰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이기도 했건만 괜한 짓을 한 셈이었다. 자존심이 구겨지다 못해 갈기갈기 찢긴 기분이었다. 유현이 누군지는 금방 알려질 테고, 그럼 자신은 친동생에게 결혼할 여자를 뺏긴 바보, 병신, 머저리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쩌면 측은하게 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차라리 해림의 일이 터져서 나쁜 놈이 되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형, 내 말 듣고 있어?”

그제야 정신이 든 민건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핥고서 말문을 뗐다.

“나, 주하경이랑 결혼 안 해. 안 하기로 했어.”

“안 해? 왜?”

“…….”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뒤돌아 갤러리 입구로 향했다. 여기 더 있어 봐야 망신살이 뻗칠 일밖에 없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 유현은 제 팔에 팔짱을 낀 하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주위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런 당당한 면모 뒤에 수줍음 많은 여자의 모습이 있다는 걸 알기에, 그런 모습은 자신만 볼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더 뿌듯했다. 그는 하경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불안감 때문인 줄 알았다. 위협적인 행동을 한 적이 있는 형과 한 공간에 있는 게 불안해서라고 생각해서 미친 듯이 달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주하경이라는 여자가 얼마나 당차고 용감한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그의 눈에는 단 한 사람만 보였다. 이 많은 사람 중 오직 주하경만. 누군가를 보면서 가슴이 뻐근해진 건 처음이었다.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선 무언가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지만, 남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 아무래도 사랑이 시작된 듯했다. *** 자신과 유현의 다정한 모습을 거의 모두가 보았다고 판단한 하경은 윤정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파티장을 나왔다. 이미 목적 달성을 했음에도 팔짱은 풀지 않았다. 이 만족스러운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유현이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물었다.

“차 어딨어요?”

“저기.”

그는 하경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방향을 틀면서 자유로운 쪽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차 키 줘요. 내가 운전할게.”

하경이 그를 돌아보면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택시 타고 왔어?”

“아니, 내 차는 저쪽.”

그녀는 유현이 턱짓하는 쪽을 흘긋 보고 다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차로 가면 네 차는 어떡하려고. 그냥 각자 타고 가.”

“내 차는 내일 와서 가져가면 돼요.”

“굳이 왜.”

여기까지 내일 또 오는 건 시간 낭비였다.

“굳이, 같이 가고 싶어서.”

“나도 같이 가고 싶어. 근데…….”

“나 못 미더워서 차 키 안 주려는 건 아니죠?”

하경이 뒷말을 이을 여유를 주지 않고 끼어든 유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하경은 더 우기지 않고 순순히 가방에서 차 키를 꺼내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유현은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를 먼저 태우고 차 앞을 돌아 운전석에 탔다. 그리고 하경이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출발했다. 그녀는 운전석으로 몸을 살짝 틀고 앉았다.

“혹시 안에서 네 형, 봤어?”

“못 봤어요.”

“우리는 못 봤어도 그쪽은 우리를 봤어야 하는데.”

“봤을 거예요. 만약 못 봤다고 해도 누가 말해 줄 거고.”

“그렇겠지?”

하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근데 괜히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왜 그랬어요.”

유현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기분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그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어차피 오늘 나랑 네 형이 말 한마디 안 하는 거 본 사람들은 다들 뭔가 있다는 거 눈치챘을 텐데, 뭐. 내일이면 소문 쫙 돌 거고 너랑 내 사이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젠데 차라리 정면 돌파가 낫지. 뒤에서 이상한 소문 도는 것보다.”

“어차피 뒤에서 쑥덕거릴 사람은 다 쑥덕거릴 텐데?”

“그래도 내가 우리 사이 숨기고 싶어 한다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건 다들 확실히 알았을 테니까 그거면 됐어. 난 너랑 떳떳하고 당당하게 만날 거거든.”

하경은 죄지은 사람처럼 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당당했던 그녀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나저나, 미안해…….”

갑자기 하경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유현이 의아한 눈으로 조수석을 돌아보았다.

“뭐가?”

“불편한 자리에 불러서. 전화 끊고 난 다음에 네 말이 생각났어.”

“만약 전화 걸기 전에 생각났으면 안 불렀을 건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그녀가 돌연 배시시 웃었다.

“아니, 그래도 불렀을 거야. 난 오늘 네가 꼭 필요했거든.”

유현은 칭찬하듯 하경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근데 정작 미안해야 할 건 따로 있는데.”

하경은 자신이 뭘 또 잘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상의 없이 일을 벌인 건 아까 파티장에서 사과했고, 불편한 자리에 부른 것도 사과했는데 뭐가 또 남았을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뭔지 모르겠어.”

유현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연애하냐는 질문에 ‘그런 거 같아’가 뭐야. ‘그렇다’라고 대답해야지. 앞으로는 누가 물어보면 대답 똑바로 해요.”

웃음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이는 하경의 귀로 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아니다. 그냥 결혼할 사이라고 해요.”

하경은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너 왜 이렇게 결혼에 집착해?”

그에게 결혼하자는 말은 들어봤어도 사귀자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결혼을 전제로 해서인지 연애만 하는 게 상상이 안 가서.”

유현은 솔직하게 대답하고 그녀에게 질문을 되돌려 주었다.

“결혼은 싫어요? 나랑은 연애만 하고 싶어?”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뭔데.”

하경은 그녀답지 않게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내가…… 연애 상대로는 별로인가 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내심 긴장하고 있었던 유현이 실소를 터트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아니야?”

“결혼 말고 주하경을 공식적으로 내 거 만들 방법이 있으면 말해 줘요. 그럼 앞으로는 그거에 집착할 테니까.”

“…….”

하경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 손 의원은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민건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집에 가는 중이다. 가서 듣자.”

[저 지금 집 아닌데…….]

“그래서 내가 네 사정에 맞춰야 한다는 거냐.”

그는 지금 민건의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짜증스러웠다. 왜 자신이 이런 뒤치다꺼리를 하고 다녀야 하나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게 아니고……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서요…….]

손 의원은 심호흡으로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말해 봐라.”

*** 유현은 하경의 집 현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선수를 쳤다.

“오늘은 재워달라고 안 할게요.”

“응, 내일 봐.”

“누가 바로 간다고 했나? 자고 가지는 않고 잠깐만 들어갔다가 가겠다는 건데.”

“그래, 그럼.”

그는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여는 하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집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니 현관 센서 등에 불이 들어왔다. 하경의 뒤를 따라 들어간 유현은 구두를 벗으려는 그녀를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하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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