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네가 필요해,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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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네가 필요해2020.07.30.
유현이 하경의 전화를 받은 건 오피스텔로 가는 차 안에서였다. 도보로 출퇴근 가능한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차를 끌고 다니는 이유는 퇴근 후에 곧장 집으로 가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한테 와 줄 수 있어?]
오늘처럼.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것 같은데 벌써 나오게? 혹시 어디 아파요?”
[안 아파.]
“거기가 어디예요? 금방 데리러 갈게.”
아픈 건 아닐지라도 무슨 일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판단한 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데리러 오라는 거 아니야.]
“데리러 오라는 게 아니면?”
[안으로 들어오라고.]
“……?”
[네가 필요해.]
그는 자신이 사람이 북적대는 걸 싫어하고 파티는 더 불편하다고까지 말했음에도 하경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가면 알게 될 거라 물어보지 않으려 했는데 그녀가 먼저 이유를 말해 주었다.
[지금 여기 네 형 있어.]
유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나 도착할 때까지 형이랑 부딪치지 말아요.”
[…….]
그는 이미 두 사람이 대화까지 나눈 줄도 모르고 단지 그녀가 형을 봤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왜 대답 안 해.”
[알았어.]
“최대한 빨리 갈게요.”
[여기 초대장 없으면 못 들어오는 데야. 입구에 네 이름 말해 놓을게.]
하경이 위치를 알려 주고 전화를 끊자, 그는 차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 하경이 민건과 마주친 곳은 갤러리 주차장이었다. 윤정은 매년 다른 장소, 다른 콘셉트로 생일 파티를 하곤 했는데 올해는 그녀의 이모가 운영하는 갤러리가 선택되었다. 어두침침한 클럽이었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밝고 산뜻한 공간이었다. 최근 몇 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라고 생각하면서 차에서 내린 하경은 민건을 만나 기분을 확 잡쳐 버렸다.
“내가 올 줄 알았을 텐데 여긴 대체 왜 온 거야.”
유현과 통화를 마치고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 보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생일 파티 주인공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뒤편에서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찾냐.”
뒤돌아선 그녀의 눈에 화이트 맥시 원피스를 입고 있는 윤정이 들어왔다. 가죽 소재의 블랙 핫팬츠를 입었던 작년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콘셉트는 여신인 듯했다.
“생일 축하해, 언니.”
윤정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손부터 내밀었다.
“선물.”
하경은 윤정의 손에 제 손을 살포시 얹으면서 미소 지었다.
“지겹지도 않아? 어떻게 매년, 한 번도 안 빼놓고 물어.”
윤정은 제 손 위에 놓인 하경의 손을 휙 치워 버리고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네가 선물 줄 때까지 물어볼 건데?”
“그럼 내년에 또 들어야겠네.”
두 사람은 늘 이렇게 티격태격하면서 지냈다. 그만큼 친한 사이였다. 윤정은 하경이 먼저 연락하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다.
“세희는?”
“같이 오려고 했는데 가게에 갑자기 중요한 손님이 왔대. 이따 따로 온다고 했어.”
고개를 끄덕인 윤정이 누군가를 찾듯 사방으로 눈을 돌렸다.
“민건 오빠, 와 있는 거 알지? 방금 전까지 이 근처에 있었는데…….”
윤정은 아무나 생일 파티에 초대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아는 사이이긴 해도, 민건은 그녀의 초대 기준에 못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처음으로 그를 초대한 건 하경의 결혼 상대이기 때문이었다.
“알아. 주차장에서 만났어.”
“근데 왜 같이 안 들어오고?”
하경의 얼굴에 찬바람이 스쳐 가자, 윤정이 선수를 쳤다.
“싸웠어? 곧 결혼할 사람들 분위기가 왜 이래?”
“나 결혼 안 해.”
“뭐라고? 결혼을 안 한다고?”
“안 한다고.”
어리둥절해하던 것도 잠시, 윤정은 탐색하듯 하경의 얼굴을 살폈다.
“홧김에 하는 말인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네…….”
“진심이야. 없던 일로 하기로 했어.”
그제야 윤정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회장님도 아시고?”
“당연히 아시지.”
“왜? 이유가 뭔데?”
“이따가 얘기해 줄게.”
하경은 윤정이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곧장 말을 이었다.
“언니, 나 누굴 좀 불렀어.”
“누구?”
“도착하면 인사시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 사람이 오면 민건 오빠랑 결혼 안 하기로 한 이유까지 알 수 있다는 거지?”
“맞아.”
“딱 30분만 기다려준다.”
가장 중요한 말만 남겨 둔 하경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언니한테 허락받을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나 오늘 언니보다 주목받아도 돼?”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윤정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 생일에 네가 주목을 받겠다고? 미쳤냐?”
“미쳤으면 그냥 저질렀지 허락을 구하겠어?”
“인사시키겠다는 사람이랑 관련 있는 거야?”
“응.”
윤정은 오늘 여러모로 얼떨떨했다. 하경이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구는 건 처음이라 당혹스러웠지만, 하경의 성격을 알기에 헛소리로 치부해 버릴 수 없었다. 인사시키겠다는 사람이 누군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모든 의문을 풀어줄 사람을 빨리 보고 싶었다.
“좋아. 허락한다.”
그제야 하경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 그 시각, 손 의원은 해림의 아파트로 가는 중이었다. 당연히 가겠다는 연락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는 대동하고 간 비서관을 차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에 혼자서 6층으로 올라갔다. 오래된 아파트라 1층 공동 현관문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었다. 복도 쪽으로 나 있는 창문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601호 초인종을 눌렀지만, 해림은 나오지 않았다. 손 의원은 미리 알아 둔 해림의 번호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문 열어라. 네 아버지에게 네가 애 가졌다는 말을 하기 전에.>
아이를 지우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고작 스물셋 먹은 대학생이 임신 사실을 부모에게 선뜻 털어놓았을 리 없다는 걸 염두에 둔 협박이었다. 그의 짐작대로 1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현관문이 살며시 열렸다.
“안녕하셨어요…….”
꾸벅 인사를 하는 해림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
손 의원은 해림이 옆으로 비켜서길 기다렸다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제집인 것처럼 당당하고 자연스러웠다. 아파트 외관만 보고도 알 수 있었듯, 집 안도 낡고 허름했다. 깔끔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놓긴 했어도 초라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눈길이 닿는 곳을 쓱 훑어본 그는 2인용 소파에 앉았다.
“앉아라.”
해림은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닥에 앉았다. 양반다리를 할 수는 없어서 무릎을 꿇고. 소파에 앉은 손 의원을 보려면 당연히 고개도 뒤로 젖혀야 했다. 한 번도 편한 적 없던 분을 무릎 꿇고 올려다보려니 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손 의원이 식탁에 앉지 않고 소파에 앉은 건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목적을 달성한 그는 해림을 고압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면서 말문을 뗐다.
“얘기 들었다.”
해림은 손 의원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날부터 각오해 온 순간인데도 막상 현실이 되고 나니 떨리고 겁이 났다.
“너야말로 마음고생이 많았겠지.”
“…….”
잔뜩 위축돼 있던 해림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어려서부터 손 의원을 봐 왔지만 이렇게 인자한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갑자기 한 줄기 기대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몸은 괜찮으냐.”
해림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괜찮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손 의원의 말이 이어졌다.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하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다.”
잠시나마 헛된 기대를 품었던 해림의 눈에 허탈감이 배어났다. 기대할 게 없어서인지 오히려 용기가 생겼다. 그녀는 두 주먹을 꼭 쥐고 당차게 받아쳤다.
“의원님, 낙태는 불법이에요.”
“그건 걱정할 거 없다. 이미 수술할 병원은 마련해 놨고, 오늘이라도 수술이 가능하니까.”
“저 수술 안 해요.”
“안 하면?”
“낳을 거예요.”
성질을 죽이고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쓰던 손 의원의 눈에 서서히 노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낳아서?”
“저 혼자서라도 키울 거예요.”
“내 아들 앞길에 똥을 뿌려도 유분수지. 혼외 자식은 절대 안 된다.”
다급해진 해림은 무릎걸음으로 손 의원에게 다가가 애원했다.
“낳게 해 주세요. 민건 오빠한테 피해 가지 않도록 제 아이로 키울게요. 양육비 달라고도 안 할 거고요.”
“어림없는 소리.”
손 의원은 딱 잘라 말했다. 지금은 그 마음이 진심이라고 해도 언제 마음이 바뀌어 딴소리를 할지도 모르니 싹을 잘라 버려야 했다.
“강제로 끌려가고 난 뒤에 후회하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들어라.”
해림은 덜컥 겁이 났다. 지금 이대로 끌려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본능이 더는 손 의원의 화를 돋우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민건 오빠랑 얘기할게요. 그러니까…….”
“민건이가 모든 걸 나한테 일임했다. 넌 나하고 얘기하면 된다.”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겨 있던 해림이 고개를 들어 손 의원을 바라보았다.
“의원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투는 제법 차분했다.
“그럼 내 말대로 하겠다는 거냐.”
“네, 그런데 병원은 내일 가고 싶어요.”
손 의원은 큰소리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설득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내일 오전에 사람을 보내마.”
그는 슈트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어 해림의 앞에 툭 던졌다.
“수술비는 신경 쓸 거 없고, 수술 끝나면 그걸로 몸에 좋은 거라도 사 먹어라.”
자리를 털고 일어난 손 의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가버렸다. 견딜 수 없는 모멸감에 사로잡힌 해림의 두 눈에서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유현은 전화를 끊은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갤러리에 도착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건장한 체격의 남자에게 이름을 말했더니 곧장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오늘 하루 파티장으로 탈바꿈한 갤러리 안은 입구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다. 얼핏 보아도 50명은 충분히 넘을 법한 사람들 대부분이 한 손에 술잔을 들고 있었다.
‘어디 있지?’
그는 금세 하경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어도 한눈에 보였다. 그녀에게만 핀 조명을 쏜 듯 단연 눈에 띄었다. 하경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유현의 미간이 갑자기 좁아졌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하경을 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상당히 거슬렸다. 유현은 딱히 좋아하는 사람도, 딱히 싫어하는 사람도 없이 살아왔다. 우유부단하거나 줏대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하경을 여자로 보게 된 뒤로, 그녀 주위의 모든 남자가 다 싫었다. 가끔은 한결도 못마땅할 때가 있으니 다른 남자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하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린 것과 동시에 유현이 걸음을 멈췄다. 웃음기 없이 담담했던 하경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왔어?”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 얼굴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그는 하마터면 그녀의 얼굴을 만질 뻔했다.
하경은 대화를 나누던 남자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유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생일 파티 주인공 소개시켜 줄게.”
그를 데리고 윤정을 찾아 나서려 했건만 그럴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나 여기 있어.”
갤러리에 들어선 유현을 보자마자 하경이 부른 사람이라는 걸 눈치챈 그녀가 제 발로 나타나 준 덕분이었다.
“인사해. 이쪽은 윤정 언니.”
“처음 뵙겠습니다. 손유현입니다.”
“안녕하세요. 백윤정이에요.”
맞인사를 한 윤정은 하경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너 혹시 연애하니?”
아직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도, 하경이 민건과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짐작이 갔다.
“그런 것 같아.”
순순히 인정한 하경의 얼굴에는 수줍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윤정에게는 그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주하경이 연애하는 걸 다 보는구나. 결혼한다고 했을 때는 하나도 안 놀라웠는데 연애는 좀 놀랍다.”
하경은 윤정이 놀랄 만한 사실을 하나 더 알려주었다.
“손민건 씨 친동생이야.”
“……?”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윤정의 두 눈이 갑자기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녀는 하경과 유현을 번갈아 쳐다보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리고 무슨 상황인지 파악을 마쳤다. 하경이 제게 허락을 구했던 것의 의미까지도.
“나보다 주목받아도 되냐고 물었던 게…….”
하경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주위를 쭉 훑어보았다.
“여기서 제일 목소리 큰 사람이 누굴까?”
두 사람은 평소에도 쿵짝이 아주 잘 맞았다.
“어디 보자…….”
신중하게 대상을 물색하던 윤정이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찬식이 어때?”
목청 크고 수다스럽고. 하경이 원하는 조건을 다 갖춘 적임자였다.
“딱이네.”
윤정은 씩 웃으면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찬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