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나랑 해요
34화.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2020.07.26.
“하룻밤만 재워 줘요.”
하경의 눈초리가 가늘어지자, 유현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왜 그렇게 봐요? 내가 못 할 말 했나?”
“뭐가 이렇게 당당해.”
하경은 제 말을 곧바로 정정했다.
“아니지, 뻔뻔한 거지.”
“어차피 방도 남겠다, 하루 재워 달라는 게 뭐가 뻔뻔하지?”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자, 하경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럼 어차피 남는 방, 아무나 재워 줘도 되겠네?”
유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안 돼요.”
“왜 안 돼?”
“나 아닌 다른 남자는 집에 안 들이기로 약속해 놓고 이렇게 딴소리하면 실망인데.”
“난 남자라고 안 했는데. 그럼 여자는 괜찮은 거지?”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도 안 돼요.”
“여자는 왜 안 되는데?”
“아무튼, 안 돼.”
유현에게 ‘아무튼’은 논리적이지 못한 사람들이나 쓰는 말이었다. 그는 모호한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렇지만 차마 남자는 물론이거니와 여자에게도 질투가 날 것 같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안 되니까 그런 줄 알아요.”
하경은 팔짱을 끼고 새침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근데 네 집 두고 왜 우리 집에서 재워 달래?”
“우리 집에는 주하경이 없으니까.”
“…….”
이제 적응할 법도 하건만, 그가 불시에 툭툭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온몸의 세포가 반응했다. 가장 빠르게, 가장 격렬하게 반응하는 건 심장. 오늘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의 귀에 들릴까 봐 걱정될 만큼.
“그 표정, 허락이라고 생각해도 되죠?”
하경이 제 표정이 어땠는지 고민하는 사이, 유현은 직접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서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들어 와요.”
그의 행동이 너무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하경은 자신이 그의 집에 왔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술 한잔할래?”
유현은 하경의 뒤를 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
“와인 마셨잖아요. 또 마셔도 되겠어요?”
하경은 식사를 하면서 와인을 곁들였고, 유현은 운전을 해야 해서 입도 대지 못했다.
“겨우 2잔 마셨는데, 뭐.”
기분이 좋아서인지 술이 당기는 날이었다. 만약 유현이 재워 달라고 하지 않았어도 혼자서 조금 더 마시고 잘 참이었기에 그에게도 제안을 해 본 것이었다.
“술 잘 못 마시면서.”
그의 말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거실로 걸어가던 하경이 걸음을 멈추고 유현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썹이 불만을 가득 품고 꿈틀거렸다.
“한결이가 그래? 나, 술 잘 못 마신다고?”
“한결이한테 들은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봤는데.”
하경은 유현이 처음 이 집에 왔던 날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취하지 않으려고 소주 한 잔을 여러 번으로 나눠 마시느라 한 잔 비우는 데 30분씩 걸렸으니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은 컨디션이 안 좋았을 뿐이야. 나 잘 마셔.”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았던 건 맞지만, 최상의 컨디션이었다고 해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을 거였다.
“아닌 것 같던데…….”
술을 잘 못 마신다는 말이 욕도 아닌데 왜 이리도 인정하기 싫은 걸까.
“그러지 말고 나 마시는 거 구경이나 해요.”
하경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불끈 섰다. 구경 같은 소리 하네. 유현의 말이 그녀의 승부욕을 제대로 자극했다.
“내기해.”
“내기?”
“누가 더 오래 버티나 내기하자고.”
호승심이 이성을 압도해 버린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안 걸고 하는 내기는 재미없는데.”
하경은 유현의 심드렁한 반응에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너무 과한 미끼를 던졌다.
“난 뭐든 상관없으니까 네가 정해.”
별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던 유현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스쳐 가자, 하경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설마 양심 없이 그걸 말하진 않겠지. 그러나 그는 곧바로 설마를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소원 들어주기. 어때요?”
유현이 양심 없이 ‘소원 들어주기’를 말할 줄은 몰랐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호기롭게 한 말을 번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좋아.”
먼저 술 한잔하자고 한 것도, 내기를 하자고 한 것도 자신이라 구시렁거릴 수도 없었다.
“일단 씻고 나와서 시작해요.”
“그래.”
“내 칫솔, 안 버렸죠?”
“네 칫솔?”
“지난주에 한 번 쓴 칫솔 두고 갔는데.”
그녀는 그제야 그에게 새 칫솔의 위치를 알려주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날 이후에 그쪽 욕실에 안 들어가 봐서 몰랐어.”
유현이 자고 갔던 게 금요일 아침이고, 토요일에 출장 갔다가 오늘 왔으니 실질적으로 집에 있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침실과 연결된 욕실만 사용했기에 그가 칫솔을 두고 갔다는 걸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나 가고 난 다음에 버리지 말아요. 다음에 오면 또 쓰게.”
“…….”
하경은 다음에 또 자고 가겠다는 예고를 하고 유유히 욕실로 걸어가는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녀가 씻고 나왔을 때, 유현은 재킷과 넥타이 없이 셔츠 차림으로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소주 4병을 본 순간 괜한 짓을 벌였다는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하경은 태연한 척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네가 이 집 주인 같다.”
현관 비밀번호와 술이 있는 위치를 모두 아는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가 유일했다.
“집주인은 됐고, 난 딴 거 하고 싶은데.”
하경은 유현이 하고 싶다는 게 뭔지 짐작이 갔다. 그렇지만 아는 척을 해 버리면 내기하는 내내 얼굴을 붉히게 될 것 같아서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자, 시작해 볼까?”
하경이 제안하고 유현이 받아들인 내기가 시작되었다. 1시간 만에 유현이 다용도실에서 꺼내 온 소주 4병은 깨끗이 사라졌다. 그중 그녀가 마신 건 고작 1병. 나머지를 혼자 다 마시고도 유현은 얼굴색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는 내기에 진 줄도 모르고 식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이러면서 내기는 왜 하자고 했는지…….”
그는 웃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나 하경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하경이 꿈틀거리면서 품으로 파고들자, 유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그녀를 안고 이 집에서 가장 은밀한 공간으로 향했다. 침실 안은 하경에게서 나는 고혹적인 장미 향으로 가득했다. 깜깜했지만, 방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덕분에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충분히 보였다. 유현은 그녀를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눕히고 허리를 폈다. 그 순간, 하경이 잠결에 옆으로 돌아누웠다. 침대 옆에 서서 뭔가를 고민하던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소원, 지금 쓸게요.”
침대 위로 올라가 누운 유현은 눈앞에 있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술에 취해 자는 모습까지 예뻤다. 얼굴이 예뻐서만이 아니라, 주하경이라는 여자 자체가 좋아서 뭘 해도 다 예뻐 보였다.
“립스틱 안 발랐네…….”
하필이면 이럴 때. 립스틱이 지워질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건 그녀가 곤히 잠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제 욕망을 채울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그렇지만 괴로운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눈앞에 두고도 손끝 하나 댈 수 없어서 더 힘들었다. 하룻강아지는 쌕쌕거리며 잘도 자는데 범은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하경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해지고 몽롱했던 정신이 맑아지면서 꿈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유현의 얼굴이 환영이 아닌 실재라는 걸 깨달은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
하경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제 옆에 누워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뭐지?’
어젯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았는지 술이 쭉쭉 잘 들어가던 것까지만 기억이 날 뿐, 침실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완벽히 필름이 끊겨버린 것이었다. 실수한 건 없는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고 있던 그녀의 눈에 유현이 눈을 뜨는 게 보였다. 느리게 열린 그의 입술 사이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잤어요……?”
흐트러진 머리조차 관능적이면 반칙 아닌가. 하경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왜 여기서 잤어?”
“어제 소원 썼어요.”
“……응?”
“내기에서 내가 이겼고, 내 소원은 주하경 옆에서 자는 거였다는 뜻.”
“처음부터 소원이 그거였어?”
“그럴 리가. 나 그렇게 순진하고 순수한 놈 아닌데.”
그는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침대에 눕혀 주고 나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냥 나가기가 싫어져서 소원 썼어요. 쓸까 말까 얼마나 고민했는지.”
“왜?”
“아까워서.”
“아까울 것까지야…….”
“그런 의미에서 내기 한 번 더 해요.”
“한 번 더 하면?”
“내가 또 이길 테니까 다음에는 아주 불순한 소원으로 말하려고.”
하경의 눈초리가 급격히 가늘어졌다. 뒤로 음흉한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불순한 소원을 들어줘야 할지도 모를 당사자 앞에서 이렇게 솔직해도 되는 건가.
“그런 건 혼자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그런가?”
유현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침대를 내려갔다. 그리고 발걸음을 떼기 전 그녀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은 술 내기 같은 거 절대 하면 안 돼요.”
그를 만난 이후 하지 말아야 할 게 너무나 많이 생겨 버린 하경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 그날 오후, 하경은 유현에게 해야 할 말이 생각나 곧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나 오늘 저녁에 세희랑 아는 언니 생일 파티 가기로 했어.>
몇 분 지나지 않아서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출장도 공항 가는 길에 말해 주던 사람이 웬일이지?]
“이따 말해 주면 보고 싶다고 불쑥 찾아올까 봐.”
유현의 맑은 웃음소리가 하경의 귓가를 간질였다.
[불쑥 찾아가면 안 돼요?]
“돼. 어딘지 알려 줘?”
이제 그가 언제 어디서 나타나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사람 북적대는 거 싫어해요. 더군다나 파티는 더 불편하고.]
하경은 유현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모르는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가식적이지 않아서 그에게 끌렸던 것도 컸기에 앞으로도 부디 지금 모습 그대로 남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 언니라는 분, 한결이는 몰라요?]
“아니, 알아.”
[한결이는 같이 안 가나 해서.]
하경과 세희의 고등학교 1년 선배이며 유명 건설 회사 회장의 외동딸인 윤정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는 사람은 정·재계 고위층 인사의 자식들이 대부분이었다. 하경이 매년 초대받는 것과 달리, 한결은 단 한 번도 초대받은 적이 없었다.
“같이 안 가. 아는 사이는 맞는데 언니가 한결이를 안 좋아해.”
[왜?]
“나댄다고.”
[아, 바로 수긍이 가네.]
“나도 언니한테 그 말 듣자마자 바로 수긍했어.”
두 사람은 오늘도 한결을 화두로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게 놀다 와요.]
“응, 전화할게.”
하경은 제 입에서 반사적으로 나온 말에 스스로 놀랐다. 당연한 것처럼 그에게 일정을 알려 주고, 전화를 끊으면서 다음 통화를 기약하는 제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지금 자신이 보통의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손유현이라는 남자와 하는 보통의 연애는 제법 즐겁고, 꽤나 행복했다. *** 하경은 유현의 말대로 재미있게 놀다 가고 싶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마주친 민건으로 인해 그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여기서 볼 줄 몰랐네요.”
민건과 윤정이 친분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지금까지 생일 파티에 참석한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이곳에서 마주칠 거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왜? 너랑 결혼 못 하게 됐다고 좌절하고 있을 줄 알았어?”
하경은 다짜고짜 공격적으로 나오는 그가 마치 센 척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좌절까지는 아니고, 김해림 씨 일 들켜서 마음의 여유가 없을 줄 알았어요.”
민건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맞받아쳤다.
“아버지가 아직 너랑 유현이 사이 모르시는 눈치던데 언제 말씀드리려고?”
“손민건 씨 일이나 신경 쓰세요.”
“비밀 지켜주고 있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난 비밀 지켜달라고 한 적 없어요.”
입장이 뒤바뀌었다는 생각에 한껏 고무된 그는 하경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자신이 하루하루 피가 말랐듯, 두 사람을 그렇게 막다른 길로 몰아줄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가지고 놀 만큼 놀다가 수틀리면 아버지에게 모든 걸 말해버릴 심산이었다. 비밀을 지켜달라고 한 적 없다는 하경의 말이 진심인 줄도 모르고.
“즐거운 시간 보내라.”
민건이 코웃음을 치며 가 버린 뒤, 하경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나한테 와 줄 수 있어?”
그녀가 전화를 건 사람은 유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