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하룻밤만 재워 줘요,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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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하룻밤만 재워 줘요2020.07.23.
오찬 후 실무진 미팅까지 끝난 시각은 오후 6시. 미팅 참석자들과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하경의 공식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익숙지 않은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꽤나 피곤한 일이었다. 2606호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승조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에 고단함이 묻어났다.
“수고했어요. 내일 봐요.”
“…….”
승조가 아무 말 없이 제 방으로 휙 들어가 버리자, 하경은 기분이 확 상했다. 그의 태도가 언짢고 불쾌했다. 오후 내내 찬바람이 쌩쌩 부는 그를 신경 쓰느라 더 빨리 지친 것도 있었다. 찌푸린 얼굴로 닫힌 2607호 문을 보고 있던 그녀가 흠칫한 건 갑자기 오른손이 허전해져서였다. 들고 있던 룸 키를 유현이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이미 그가 2606호의 문을 열고 있었다.
“들어가요.”
묵묵히 방 안으로 들어간 하경은 곧장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유현이 없었다면 침대에 드러누웠겠지만, 지금은 소파에 등을 기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많이 피곤해 보여요.”
“응, 피곤해.”
하경은 그가 맞은편 소파에 앉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나 갈 테니까 빨리 씻고 쉬어요.”
괜히 솔직하게 말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뜬 그녀가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너무 이르잖아.”
“공항에 좀 일찍 가 있으면 돼요.”
“시간 맞춰서 출발해.”
유현은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용히 있을 테니까 좀 자요.”
“나 자면 넌 뭐 하게?”
“자는 주하경 구경하기.”
“얼굴을 내 주고 잠을 얻을 만큼 피곤한 건 아니야.”
그녀가 시큰둥하게 받아치자, 그는 다른 제안을 건넸다.
“어깨라도 주물러 줄까요?”
“…….”
하경은 팔짱을 끼고 눈을 살짝 치떴다.
“그 눈빛은 뭐지? 어깨 주물러주는 척, 사심 채우려는 거 같아서?”
유현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스스로 답했다.
“들켰네.”
하경은 그가 자신을 웃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그 덕분인지 지친 몸에도 어느새 활력이 조금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지고 나서야 유현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선택권을 줄게요. 나 지금 공항으로 출발하게 놔둘래요, 아니면 나랑 같이 나가서 잠깐 걸을래요?”
“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
하경은 그를 지금 보내고 싶지도 않고 밖에 나가기도 귀찮았다.
“꼭.”
“왜?”
“여기 더 있기 힘들어서.”
힘들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자.”
유현은 앉은 채로 하경을 위에서 아래로 쓱 훑었다. 그녀는 지금 치마 정장에 하이힐 차림이었다. 움직이기 힘들 만큼 꽉 끼는 옷은 아니었지만, 그다지 편해 보이지도 않았다.
“30분 정도지만, 그래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게 낫겠네.”
“하이힐 말고 편한 신발은 없나?”
“있어.”
하경이 단화를 챙겨 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유현이 몸을 일으켰다.
“옷 갈아입고 천천히 내려와요. 나 먼저 나가 있을게요.”
유현은 하경과 함께 나가는 모습을 다른 직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녀를 구설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하경은 그의 의도를 대번에 눈치챘다.
“그래. 밖에서 봐.”
두 사람은 척하면 착, 아주 잘 통했다. *** 미케 비치는 유명 관광지답게 밤인데도 사람이 제법 많았다. 유현과 하경은 많은 인파 속에 섞여 여유를 만끽했다. 모래를 밟으며 걷는 건 자못 낭만적인 일이었다.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분위기 때문인지, 하루하루 더 가까워지는 서로의 존재 때문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주 기분 좋은 밤이라는 것이었다. 언제 피곤했냐는 듯, 하경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나오길 잘했다.”
“난 후회하고 있는데.”
하경이 유현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후회해?”
유현은 자신을 돌아보느라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와 부딪힐 뻔한 그녀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대답했다.
“힘들긴 했어도 둘이 있는 게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경은 다시 앞을 보면서 말을 돌렸다.
“호텔에서 내려다보는 거랑은 또 다르네. 낮에 와도 좋을 것 같지?”
그는 아예 하경의 어깨를 감싸고 걸었다. 그래야 그녀를 더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어서였다.
“설마 여기까지 와 본 거 처음이에요?”
“처음이야. 호텔 안에서만 봤어.”
하경은 많은 나라를 다녀봤지만, 여행으로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부 출장이었다. 유명한 관광지를 코앞에 두고도 늘 일만 하다가 가곤 했다. 이번 출장도 유현이 아니었다면 호텔에만 있다가 바로 공항으로 갔을 테고.
“넌 여기 와 본 적 있어?”
“난 베트남 자체가 처음이에요. 근데 여기 굉장히 유명한 데라서 와 본 적은 없어도 이름은 들어봤는데. 혹시 이번에 다낭 처음 왔어요?”
“이번이 4번째.”
“근데 어떻게 여길 처음 와 보지?”
“늘 일하러 왔으니까 일만 하다가 갔지.”
“지금 나랑 있는 건 일 아니죠?”
하경이 어이없다는 듯 콧등을 찡그렸다.
“알면서 뭘 물어.”
“알면서도 묻고 싶네. 왜 자꾸만 확인받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
확인받고 싶어 하는 건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는 유현의 말이 의외였다. 자신만만하고 느긋해서 얄밉기까지 했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흐뭇했다. 자신과는 달리, 솔직한 심정을 말로 다 표현해주는 그에게 고맙기도 했다.
“다음엔 낮에 한번 와 봐요.”
“기회 되면.”
유현은 걸음을 멈추고 하경을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 기회, 내가 만들 테니까 일 말고 사적으로 와요.”
“…….”
하경은 막연하고 모호하게 받아친 말을 구체화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래도 첫 여행의 동반자가 유현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은 이제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 이제 가야 해요.”
유현은 하경의 오른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에 제 입술을 묻었다. 부드럽고, 느릿하게.
하경은 그의 기다란 속눈썹에 시선을 고정하고, 손등에 닿은 그의 입술에 신경을 집중했다.
“우리가 여기 함께 있었다는 걸 잊지 말라는 의미.”
고작 손등에 하는 입맞춤이 입술에 했던 날보다 더 야릇하게 느껴진 건 유현의 눈빛에 담긴 열기와 조금 갈라진 음성 때문인지도 몰랐다. 절대 잊을 수 없을 거라는 말을 속으로 삼킨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내일 봐.”
“내일 봐요.”
어제도 봤고, 내일도 볼 두 사람은 아쉬움 속에 헤어졌다. *** 손 의원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민건이 제 발로 들어오기를. 그러나 민건은 상견례장을 몰래 빠져나간 이후 이틀 밤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월요일 오전에 열린 당직자 회의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책임하고 한심한 대처를 참다못한 손 의원은 사람을 시켜 민건을 찾기 시작했고, 몇 시간 걸리지 않아서 술집을 운영하는 친구 집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보고를 받자마자 곧바로 달려가 보니 민건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아, 아버지…….”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무의식중에 문을 열어주러 나온 민건이 움찔 놀랐다.
“언제까지 여기 숨어서 술만 퍼마시고 있을 참이냐.”
손 의원은 노기 어린 눈으로 민건을 노려보았다. 면도를 하지 않아서 코 밑과 턱에 수염이 꺼뭇꺼뭇 나 있고, 그동안 씻지도 않았는지 머리는 여기저기 눌려 있을 뿐만 아니라 기름까지 줄줄 흘렀다. 몸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갑자기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화가 누그러지면서 측은지심이 생겼다. 지금 가장 괴로운 건 민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한 번도 내색한 적 없어서 아무도 모르지만, 손 의원에게 첫째 아들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디 하나 특출난 데도 없고 강단 있는 성격도 아닌 민건이 유현에게 열등감을 품고 살아온 걸 아는 까닭이었다. 잘난 동생과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자랐던 손 의원은 민건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냉혹하고 몰인정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는 그에게도 일말의 부정은 있었다.
“앉아라.”
손 의원이 먼저 소파에 앉았고, 민건은 아버지와 가장 멀리 떨어진 카우치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디밀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어쩔 셈이냐.”
때리고 다그쳐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손 의원은 수습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유학 가라고 설득 중이기는 한데…….”
“배 속 아이는?”
지금 손 의원이 가장 걱정되는 건 아이였다. 남녀 사이야 금방 불붙었다가도 금방 식을 수 있지만, 아이는 일단 세상에 나오면 되돌릴 수 없으니까. 하경에게 미련이 남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아들의 여자에게서 첫 손주를 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절대 못 지운다고 고집을 부려서…….”
“물러 터진 놈.”
손 의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웅얼거리는 민건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그만 빠져라.”
“어, 어쩌시려고…….”
“유학을 가더라도 혼자 가게 해야지.”
“…….”
강제로라도 아이를 지우게 하겠다는 뜻임을 눈치챈 민건의 동공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사람을 시켜서 해림을 수술대 위에 눕히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생각이었을 뿐, 실행에 옮길 용기는 없었다. 해림이 밉긴 해도, 지난 2년 동안 좋았던 순간도 많았기에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해림이 고집을 꺾고 제 말에 따라주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그 여자, 이름하고 전화번호 대라.”
민건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시간을 조금만 주시면 제가 해결할게요, 아버지.”
“네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미적거려 봐야 하루하루 애만 더 커 갈 뿐이다.”
“…….”
“입 다물고 있어도 소용없다는 걸 알 거다. 사람 시켜서 찾기 전에 네 입으로 말해.”
민건은 아버지가 마음만 먹으면 해림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곳을 찾아낸 것처럼.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해…… 해림이요…….”
“해림이?”
손 의원이 눈을 크게 뜨며 다시 물었다.
“제윤이 딸, 김해림이?”
“…….”
민건은 면목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떨궜다.
“허허…….”
손 의원은 헛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민건의 아이를 가진 여자가 스물세 살이라는 것도 기가 막히는 마당에 어려서부터 봐 온 해림이라니. 복잡한 머릿속을 가다듬고 보니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생판 모르는 여자보다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알았다. 내가 알아서 하마.”
손 의원은 설득이든, 협박이든, 속전속결로 해치워 버릴 작정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 하경은 공항에서 곧장 회사로 출발했다. 승조와 함께 회사에 도착한 건 오후 5시가 넘어서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이사실로 가던 두 사람은 회의를 마치고 회의실에서 나오던 기획팀 팀원들과 마주쳤다. 그들과 짧게 인사를 나눈 그녀는 멈췄던 걸음을 떼면서 유현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숙였다. 이사실에 들어온 지 2시간쯤 지나서 유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건만, 그의 목소리는 사뭇 퉁명스러웠다.
[내일 보자며.]
“응?”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하경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제 분명 내일 보자고 해 놓고.]
“근데?”
[근데 왜 퇴근하고 보자든가, 그런 말 안 하지?]
하경은 입 밖으로 튀어 나갈 뻔한 웃음을 꾹 참고 덤덤하게 받아쳤다.
“난 퇴근하고 보자는 말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회사에서 보자는 말이었어. 그리고 우리 아까 봤잖아.”
[1초?]
“한 3초는 됐을걸?”
휴대 전화 너머로 실소가 들려왔다.
[나 지금 사기당한 기분인데…….]
시무룩하게 뒤끝을 흐리는가 싶던 유현이 본론을 꺼냈다.
[위로 좀 해 줘요.]
“어떻게 위로해 주면 돼?”
[같이 저녁 먹어요.]
“커피부터 마셔야 하는 거 아니고?”
[내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네.]
“내 기억력, 제법 쓸만하거든.”
다음에는 커피를 마시자고 했고, 그다음에는 둘이 밥을 먹자고 했고, 밖에서 술도 마시자고 했다. 하경은 유현이 자신과 해 보고 싶은 게 많다고 말하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순서 좀 바꾼다고 큰일 안 나니까 밥부터 먹어요.]
“그래. 밥 먹자.”
밥뿐 아니라 커피, 술,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이 그녀의 마음에 더 깊이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 하경은 저녁 시간을 오롯이 유현에게 맡겼다. 그의 차로 그가 예약한 프렌치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고,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현관 앞까지. 그러나 그건 그녀의 착각일 뿐이었다. 하경이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말하려는 순간, 유현이 선수를 쳤다.
“하룻밤만 재워 줘요.”
그는 오늘 여기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