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보고 싶어서, 나랑 해요
32화. 보고 싶어서2020.07.19.
하경은 소파에서 일어나 제게로 걸어오는 유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의 준비 없이 마주친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처음이라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우연일 가능성 제로였다. 당황한 건 승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하경보다 먼저 정신을 차렸다.
“본사 직원입니다.”
유현이 누군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임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1시에 뵙겠습니다.”
승조를 제외한 모두가 제 갈 길을 갔고, 주위는 금세 한산해졌다. 하경은 그제야 제 앞에 와서 선 유현에게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도 얼떨떨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행기 타고.”
유현은 하경의 의문을 조금도 해소해 주지 않고 승조를 돌아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유현이 승조에게 목인사를 하는 사이, 하경은 그가 처음 제집에 왔던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유현을 집에 데리고 왔던 한결에게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가 ‘차 타고 왔지.’라는 대답을 들었던 순간을. 정반대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온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여긴 왜 온 겁니까.”
승조는 말투와 표정으로 언짢은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주하경 씨 만나러 왔습니다.”
유현은 사적인 목적으로 찾아왔다는 걸 강조했다. 주말을 이용해 온 것이니 팀장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조금 전 이름 모를 직원에게 주하경 이사님의 동선을 물으면서 한국 본사 명함을 써먹긴 했지만, 어쨌든 개인적인 일로 온 것이었다. 단호하게 대답한 유현이 다시 하경에게 눈을 돌렸다.
“야외 시설 둘러보러 갔다고 해서 기다렸어요. 다음 일정은 뭐예요?”
“임원들이랑 점심 먹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쉬려던 참이었어.”
그런데 계획이 바뀌었다.
“올라가자.”
하경이 먼저 발걸음을 뗐고, 두 남자가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 엘리베이터를 탄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26층에 도착했다. 2606호 앞에서 멈춰 선 하경의 시선이 승조에게 향했다.
“1시간 후에 봐요.”
유현과 단둘이 있겠다는 뜻이었다.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승조는 술에 취한 하경을 집에 데려다주러 갔다가 지하 주차장에서 유현을 만났던 날, 유현이 그녀의 집 앞까지만 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집 안에도 들어갔을 거라 확신했다. 물론 그 전부터 집에 드나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날은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고 저지할 핑계도 없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지금은 업무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볼 사람도 없겠지만, 본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하경은 그의 질책 어린 말에 마음이 상했다. 26층 객실을 이용하는 사람은 자신과 승조뿐이었고, 아직 오픈 전이라 호텔에 상주하는 직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직원들이 26층에 올라올 일은 거의 없을뿐더러, 객실 복도 CCTV가 아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고려했건만 아무 생각 없는 사람 취급을 받으니 심기가 불편했다. 출장 때마다 제 방에 수시로 드나들던 사람이 한 말이라 더 불쾌했다.
“상관, 있습니다.”
승조가 정색하자, 그녀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이상하게 생각하라고 해요. 애인이라고 생각하려면 하든가.”
하경은 더 이상 그와 호텔 복도에 서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딱 잘라 말하고 룸 키로 문을 열었다.
“들어와.”
유현은 그녀의 뒤를 따라 2606호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비로소 온전히 둘만의 공간,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애인이라고 생각해도 된다는 거죠?”
하경이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으면서 새침하게 받아쳤다.
“너 말고 다른 직원들.”
“또 민다. 당기는 척만이라도 해 달라니까.”
유현이 한숨 쉬는 시늉을 하자,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았어. 마음대로 생각해.”
“마음대로 생각할게요.”
그는 소파를 지나쳐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전면 통유리창으로 걸어갔다. 청명한 하늘과 드넓은 바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야자수가 합세해 한 폭의 그림을 방불케 했다.
“비치 뷰가 좋네요.”
하경은 그제야 제대로 풍광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전 객실을 둘러볼 때 창밖을 잠시 내다보기는 했지만, 일로 본 것이라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유현의 옆에 나란히 섰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탁 트인 경관 덕분에 잔뜩 꼬여 있던 심사가 스르르 풀렸다.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고, 편안해졌다.
“좋네.”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아름다운 경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그녀의 귀로 그윽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사실, 더 보기 좋은 건 따로 있지만.”
하경은 유현이 말하는 게 뭘까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더 보기 좋다는 게 제 얼굴이라는 걸 알게 된 그녀는 얼른 뒤돌아서면서 화제를 돌렸다.
“근데 진짜 왜 온 거야?”
유현은 소파로 향하는 그녀를 천천히 뒤따르며 대답했다.
“보고 싶어서.”
“…….”
여우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다고 했던가. 민망해서 화제를 돌렸다가 더 민망한 말을 듣게 된 셈이었다. 아직 그의 달콤한 말에 적응하지 못한 하경의 얼굴은 수시로 뜨거워지고, 수시로 빨개지느라 바빴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누가 들으면 석 달 열흘 못 본 줄 알겠네. 우리 어제 오후에 봤거든?”
“그러니까. 벌써 못 본 지 만 하루가 다 됐네.”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현을 보면서 피식 웃음을 터트린 것도 잠시, 하경은 맞은편 자리에 가서 앉을 줄 알았던 그가 제 옆에 앉자 흠칫 놀랐다.
“보고 싶어서 온 게 가장 크고, 손목 괜찮은지도 확인해야 해서.”
유현은 그녀의 손을 제 앞으로 끌어와 옷소매를 조심스럽게 젖혔다. 어제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직 군데군데 붉은 기가 엷게 남아 있었다.
“안 아파요?”
“안 아파.”
유현은 그녀의 손목을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어제 같은 일이 또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내가 없을 때 누가 몸에 손을 대거나 위협을 가하면 구두 뒷굽으로 발등을 찍어버려요. 있는 힘껏. 아니면 앞코로 조인트를 까버리든가. 하이힐 뒀다 뭐 해.”
“그런 용도로 쓰려고 신는 거 아닌데.”
“그런 용도로도 써요.”
“그러지, 뭐.”
유현은 확답을 듣고서야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어제 곧바로 따라오고 싶었는데 비행기 표가 없어서 오늘 왔어요.”
“언제 가?”
“오늘 밤 10시 반 비행기. 한국에 새벽 5시쯤 도착하니까 집에 잠깐 들렀다가 출근하려고.”
오라고 한 적은 없지만, 하경은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다. 4시간 반이나 걸려서 베트남까지 와 놓고 당일에 돌아가야 한다니. 그것도 혼자서.
“난 내일 출발해.”
“1박 2일 일정은 아닐 거라고 예상했어요. 같이 갈 생각으로 온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
하경의 안색이 밝아지지 않자 유현이 한마디 보탰다.
“그냥 옆 동네 오듯 가볍게 왔어요. 정말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녀는 그제야 그가 캐리어는커녕 가방 하나 들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맨몸으로 온 거야?”
“당일치긴데 짐 챙겨 오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당일치기로 베트남까지 오는 것만큼 이상한 건 없지.”
언젠가 하경과 나눴던 대화가 기억난 유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직도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제일 이상해요?”
“응, 앞으로도 다른 사람으로 바뀔 일은 없을 것 같아.”
“뭐든 어설픈 것보다는 최고가 낫죠.”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서 하경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난 네가 이렇게 긍정적인 성격인 줄 몰랐어.”
“그것만 몰랐나? 아직 나에 대해 모르는 거 많잖아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첫 만남은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손유현이라는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건 불과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맞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지.”
순순히 수긍한 하경의 눈이 갑자기 동그랗게 커졌다. 그가 상체를 기울이며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근데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이렇게 방에 막 들여도 되나?”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이내 소파 팔걸이에 허리가 닿았다. 더 피할 곳이 없었다. 서로의 코끝이 맞닿기 직전, 유현이 움직임을 멈췄다.
대신 입술을 움직였다.
“이제 내가 남자로 보인다는 거 인정해요?”
뜨거운 눈빛과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인정해.”
긴장한 하경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어떻게 그를 남자로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눈을 맞추고 있는 것만으로도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경솔했다는 것도?”
“…….”
하경은 남자로 보이게 해 주겠다는 그의 말에 까분다고 받아쳤던 순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드리워지나 싶더니 금세 사라졌다. 그는 오히려 투덜거리면서 상체를 바로 세웠다.
“립스틱 안 바르고 다니면 안 되나?”
립스틱을 바르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물러나지 않았을 거라는 의미임을 눈치챈 하경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오늘은 어제처럼 식당 복도가 아니라 호텔 객실이라서 립스틱 좀 지워진다 한들 다시 바르면 그만이지만, 차마 그에게 알려 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태연한 척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하면서 말을 돌렸다.
“어제는 별일 없었어?”
“형이 휴대폰 꺼 놓고 잠적한 모양이에요. 당사자가 없으니 딱히 별일이 있을 게 없죠.”
“그럼 부모님은 그 여자가 김해림 씨라는 거 아직 모르시는 거고?”
“아버지가 어제 나한테 그 여자가 누구냐고 물으시길래 형한테 직접 물어보시라고 했어요.”
“…….”
하경은 진실이 밝혀진 게 속 시원하면서도 조금은 찜찜했다. 이제부터 해림이 손 의원에게 시달릴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 같은 여자로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유현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마음 불편해하지 말아요. 그럴 거 없어.”
부모님들께 언제 우리 사이를 말하면 좋을까 의논해 보려던 그는 조금 뒤로 미루기로 했다. 형의 아이를 가진 여자가 해림이라는 것까지 밝혀지고 두 사람의 문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형이 먼저 터트릴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가 분위기 환기에 나섰다.
“오후 일정은 뭐예요?”
“실무진 미팅.”
개관식과 오픈 프로모션에 관한 보고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너도 참석해.”
“나도?”
“기획팀 직원이잖아.”
“출장에 데려올 필요도 없는 신입이죠.”
“데려올 필요는 없었지만, 기왕 왔으니 참석하라고.”
그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특혜 주는 거예요?”
하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거리고 말을 이었다.
“특혜 하나 더 줄게.”
“뭔데요?”
“점심 먹으러 같이 가.”
“임원 오찬이라며.”
“그러니까 특혜지.”
공식 일정에 동행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왔지만, 막상 그녀의 제안을 받으니 괜히 뿌듯했다.
“이사님이랑 친해지니까 좋네. 특혜도 받고.”
정작 하경은 제 옆에서 얼쩡거리겠다는 목적으로 주원 호텔에 입사해 준 유현에게 고마웠다. 그나마 그가 호텔 직원이기에 이런 특혜를 줄 수 있는 것이니까. 굳이 따지자면 특혜도 아니었다. 유현이 실무진 미팅과 임원 오찬에 참석해서 얻게 될 이득이 없으니 주말 근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뭘?”
“특혜.”
“앞으로도 특혜를 줄 게 있을까?”
“다른 건 필요 없고, 집에 들어오라고 하는 거, 단둘이 밥 먹는 거, 술 마시면 데리러 오라고 부르는 거, 이런 특혜로 부탁해요.”
하경은 당당하게 사적인 특혜를 요구하는 유현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무슨 특혜야.”
“다른 사람한테는 안 하고 나한테만 하면 그게 특혜지.”
그런데 갑자기 그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한참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말 나온 김에 할게요.”
“해.”
“임승조 팀장님, 앞으로는 집에 안 들였으면 좋겠어요.”
“…….”
“소주 떨어지면 내가 사다 주고, 욕실 전등 나가면 내가 갈아 줄게. 그러니까 나 아닌 다른 남자, 집에 들이지 말아요.”
유현이 한마디 덧붙였다.
“회장님이랑 한결이까지는 봐 줄게요.”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하경이 곱게 눈을 흘겼다.
“아주 관대하시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유현은 능청스럽게 받아치고 대답을 채근했다.
“나 대답 기다리는데.”
하경은 뜸을 들이며 그의 애간장을 태우다가 한참 만에 대답을 해 주었다.
“네 말대로 할게.”
그가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마음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 1시간이 10분처럼 흘렀고, 두 사람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먼저 객실을 나선 하경이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승조가 팔짱을 끼고 맞은편 벽에 기대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설마…… 아까부터 여기서 기다린 건 아니죠?”
승조는 부인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가시죠.”
“…….”
하경은 그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