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내가 할게요,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novel.naver.com
29화. 내가 할게요2020.07.09.
유현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혼자 남아 하경의 전화를 기다렸다. 언제라도 부르면 달려갈 수 있도록. 그런데 기다리던 전화 대신 반갑지 않은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형’이었다.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인 그는 굳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야.”
[웬일은. 오늘 사흘째 되는 날인 거 잊었어?]
유현은 형이 왜 이렇게 의기양양한지 의아했다. 현시점에서 형의 목소리가 밝아야 할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으나 그건 결코 실현 불가능했다. 하경이 형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리는 없을 테니. 그러나 그의 확신은 금세 무색해지고 말았다.
[나 방금 하경이 만났는데 알고 있냐?]
“알아.”
[하경이가 해림이 일, 묻어주기로 했어. 그러니까 너도 입 다물겠다는 약속 지켜.]
“헛소리하지 마.”
태연한 척 받아치면서도 유현의 안색은 어두웠다. 형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지금 당장 전화 한 통이면 확인해 볼 수 있는 사실을 두고 없는 말을 지어내야 할 실익이 없었다.
[못 믿겠으면 하경이한테 직접 물어보든가.]
유현은 머리가 띵해졌다. 하경은 형을 만나기로 했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형을 왜 만나는지, 만나서 무슨 말을 할 건지 알고 있었기에 더 얼떨떨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가다듬은 그는 하경에게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뭐로 협박했어.”
휴대 전화 너머로 실소가 들려왔다.
[협박이라니. 난 제안을 했을 뿐이야.]
“무슨 제안?”
[신규 호텔 건축 심의 통과시켜 주겠다고 했더니 덥석 물던데?]
“…….”
유현도 하경이 그 일에 얼마나 공을 들여왔는지 알고 있었다.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라는 것도 인정했다.
[정략결혼까지 마다하지 않던 주하경이 이런 제안을 놓칠 리가 없잖아. 한마디로 넌 닭 쫓던 개가 된 거야. 알겠냐?]
유현은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거슬려서 휴대 전화를 잠깐 귀에서 뗐다.
[네 입으로 분명 질척거릴 생각 없다고 했어. 약속 지켜라.]
“물론.”
하경이 싫다고 하는데도 질척거릴 일은 절대 없을 거였다. 그건 형에게 한 약속이기 이전에 제 철칙이기도 했다. 싫다는 사람에게 끈질기게 구애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녀를 향한 마음이 너무나 커져 버렸지만, 그건 스스로 감내해야 할 몫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너도 내일 상견례 꼭 참석하고. 예비 형수랑 정식으로 인사해야지. 내일 오후 1시야. 장소는 전화 끊고 문자로 알려줄게.]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유현은 곧장 하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건지 아닌지 확인이 필요했다. *** 하경은 민건을 뒤로하고 카페를 나오자마자 세희의 전화를 받았다.
[어제 손유현 씨 만났어?]
하경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어떻게 알아?”
[내가 말해 줬으니까 알지.]
“뭘 말해 줘?”
[어젯밤에 내가 손유현 씨한테 전화해 줬어. 너 우리 가게에서 엎어져 자고 있다고 하니까 바로 오겠다더라고.]
“…….”
‘엎어져 자고’에 꽂힌 하경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근데 손유현 씨 도착하기 전에 임 팀장이 어떻게 알고 먼저 왔나 보더라? 직원들이 너랑 임 팀장이 같이 나가는 거 봤다길래 손유현 씨한테 그대로 말해 줬더니 따라가겠다면서 달려 나가던데?]
하경은 그제야 유현이 어제 왜 주차장에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 잘했지?]
“뭘?”
[손유현 씨한테 전화한 거.]
제멋대로 그를 부른 세희에게 한소리 할 참이었던 하경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생색내려고 전화한 거야?”
[아니, 한 번만 더 계산 안 하고 튀면 경찰에 신고할 거라는 경고하러 전화한 거야.]
“야, 안 떼어먹어.”
[말은 누가 못 해. 사기꾼들이 나 사기 쳐요, 하고 치는 거 봤어?]
졸지에 사기꾼이 되어 버린 하경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알았다. 지금 간다, 가.”
[그래. 기왕이면 와서 매상도 좀 올려주고 가라.]
“…….”
호객 행위에 낚인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전화를 끊은 하경은 엘리베이터에 타서 유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계속 통화 중이던데.]
“아, 세희한테 전화가 와서.”
[지금 어디예요?]
“엘리베이터 탔어. 세희 좀 보러 가게.”
[형한테 전화 왔었어요.]
민건이 유현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직감한 하경의 미간이 좁아졌다.
“뭐래?”
[내일 상견례 참석하라던데. 둘이 합의된 얘기 맞아요?]
“맞아.”
[형 제안 받아들인 것도 맞고?]
“네 형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
흐뭇하게 웃던 민건의 얼굴을 떠올리니 짜증이 치밀었다. 염치도 없고, 눈치도 없고, 아무튼 최악이었다. 유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 건 짧은 침묵이 지난 뒤였다.
[나 오늘 아버지한테 전부 다 말씀드릴 생각이었는데 하면 안 될 것 같네.]
“응, 안 돼.”
[내일 나도 참석할 거예요. 괜찮죠?]
“마음대로 해.”
[깽판 치러 간다는 건데?]
하경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깽판은 치지 말고.”
[그건 고민을 좀 해 봐야겠네.]
“피곤할 텐데 쓸데없는 고민하지 말고 쉬어. 내일 봐.”
[바에 도착했나? 끊자는 거죠?]
아무튼 눈치 빠른 거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맞아. 다 왔어.”
[술 많이 안 마신다고 약속하면 끊고.]
“많이가 아니라 한 잔도 안 마실 거야. 그냥 얘기만 하다 갈게.”
[알았어요. 그럼 오늘은 친구분께 양보할게요.]
시시콜콜 말하지 않아도 제 마음, 제 의도를 알아주는 사람. 시시콜콜 간섭하는데도 귀찮지 않은 사람. 하경에게 유현은 그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 한 번 연기되었던 상견례 날이 밝았다. 느지막이 일어난 하경은 씻고 나와서 짐부터 꾸렸다. 캐리어에 2박 3일 동안 입을 옷과 이런저런 물건들을 챙겨 넣고 난 뒤, 화장을 시작했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나서 시계를 보니 시곗바늘이 정오를 막 지나고 있었다. 3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커피나 한잔해야겠다.”
드레스룸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하던 그녀의 귀로 휴대 전화 벨소리가 들려왔다. 소파 위에 놓인 휴대 전화를 집어 들어서 발신자를 확인하니 한결이었다.
“어, 왜.”
[누나, 어디야?]
“집.”
[우리 출발했어.]
“벌써?”
본가에서 상견례 장소까지 30분이면 충분했다.
[아버지가 늦는 것보다 일찍 도착하는 게 낫다고 자꾸만 재촉하시잖아.]
하경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주서호 회장이 약속 시각에 늦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시간관념을 본받으려 노력해 왔지만, 오늘만큼은 불만스러웠다. 굳이 이렇게까지 일찍 가서 기다릴 일이 뭐란 말인가.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 손민건이라서 못마땅했다.
“알았어. 나도 지금 바로 출발할게.”
커피를 포기한 그녀는 가방과 캐리어를 챙겨서 곧장 집을 나섰다. *** 하경이 도착한 곳은 정·재계 인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고급 퓨전 레스토랑이었다. 점심과 저녁 각각 2팀씩만 예약제로 받는 곳인데 오늘 점심은 주 회장과 손 의원 가족 외에 다른 손님은 받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고 들어간 방에는 주 회장과 홍 관장, 한결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누나.”
하경은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 옆자리로 옮겨 앉는 한결을 보고서야 그가 예전의 주한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 유현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을 모르기에 혼자 꽁해 있다가 혼자 풀었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하경은 방금 전까지 한결이 앉아 있던 홍 관장의 옆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5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미모의 여자가 환한 미소로 하경을 반겼다.
“하경아, 요새 왜 이렇게 집에 안 와.”
“좀 바빴어요.”
“아무리 바빠도 자주 좀 와. 우리 딸, 얼굴 잊어버리겠다.”
“네, 어머니.”
한결이 두 여자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엄마, 나도 오늘 오랜만에 본 건데? 왜 나한텐 집에 자주 오라고 안 해?”
“시끄러워. 넌 연애하느라 바쁜 거고, 네 누나는 일하느라 바쁜 거잖아.”
주 회장의 두 번째 아내, 홍수혜. 그녀는 하경의 계모이자, 한결의 친모였다. 현재 주원 미술관 관장이기도 했다. 가난한 집 딸이었던 하경의 친모는 재벌가 안주인이라는 부담감을 견디지 못하고 하경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유를 찾아 떠났다. 사랑해서 결혼했던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한 주 회장은 재벌가 딸과 재혼했다. 그리고 한결을 낳았다. 하경은 한 번도 홍 관장에게 모성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구박을 받은 적도 없고, 사랑을 받은 적도 없었다. 친절한 미소와 다정한 말투, 그게 다였다. 새어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때도 있었지만, 혼자서 노력해 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씁쓸하게 마음을 접었다. 그 이후로 아버지의 부인, 동생의 어머니로만 깍듯하게 대하고 있었다.
“하경아, 다음 주는 시간 좀 내야 해.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드레스랑 예물은 네가 직접 보고 골라야지.”
하경은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잠시 자리를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급하게 전화해야 할 데가 생각났어요.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시간을 좀 때우다가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한결이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넌 왜 나와.”
“진짜 통화하는지 확인하러.”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챘다는 듯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하경에게 다가간 그는 부모님이 계신 방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리고 참았던 질문을 토해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거야? 왜 상견례 취소 안 했어? 어제 유현이가 아버지랑 엄마한테 말씀드리지 말라고 해서 일단 모른 척하고는 있는데 뭐가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설마 손민건 같은 쓰레기랑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지? 유현이랑 잘 돼 가는 거 아니었어? 혹시 유현이 버린 거야?”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하경이 입을 열었다.
“이제 대답해도 되니?”
한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취소 안 한 이유는 곧 알게 될 거고, 손민건 같은 쓰레기랑 결혼할 일은 절대 없고, 유현이랑 잘 돼 가는 거 맞고, 유현이 안 버렸어. 됐어?”
귀를 쫑긋 세우고 누나의 대답을 경청하던 그가 힘차게 대답했다.
“됐어.”
이번에는 하경이 물었다.
“유현이한테 얘기 다 들었어?”
한결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어, 내가 손민건 그 자식 찾아가서 반쯤 죽여 놓으려다가 참았는데 아무래도 괜히 참은 것 같아.”
그는 어려서부터 비실거리고 싸움을 지지리도 못했다. 친구들과 싸우면 한 대도 때리지 못하고 매번 맞고만 들어왔다. 태권도를 시켜 보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하경은 민건을 반쯤 죽여 놓으려고 했다는 그의 진심만은 믿었다.
“잘 참았어.”
두 사람 사이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든 건 그 순간이었다.
“둘이 여기서 뭐 해?”
동시에 뒤를 돌아본 하경과 한결의 눈에 비친 건 유현이었다. 두 사람에게로 한 발짝 더 다가선 유현이 하경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일찍 왔네요? 부모님은?”
“방에. 너희 부모님은?”
“형이 모시고 올 거예요.”
유현의 시선이 한결에게 향했다.
“자리 좀 비켜 줘. 둘이 할 얘기가 있어.”
한결은 별말 없이 순순히 사라져 주었다. 복도에 둘만 남게 되자, 유현이 다시 말문을 뗐다.
“고마워요.”
“뭐가?”
“우리 잘 돼 간다고 인정해 줘서.”
그는 발그레해진 하경의 얼굴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 안 버려 준 것도. 어제, 버림받은 줄 알고 슬펐어요.”
하경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형이랑 통화하면서 잠깐은 진짜 슬펐는데.”
유현은 말이 나온 김에 어제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어제 형 만난 거, 해림이 일 알고 있다고 얘기하면서 결혼 깨려던 거 맞죠?”
“맞아.”
“근데 왜 굳이 상견례를 강행하기로 한 거예요?”
이유가 짐작은 가지만, 제 짐작이 맞는지 본인 입으로 듣고 싶었다.
“손민건, 더 망신스러우라고.”
“건축 심의 통과시켜 주겠다는 제안 때문에 화났나?”
“어, 대체 날 뭐로 보고 그딴 딜을 해.”
하경의 분노가 극대화된 지점이었다. 여자가 있으면서 결혼을 하겠다고 나선 것보다도 그 사실을 덮어 달라면서 뒷거래를 제안한 것에 더 분노했다. 자신이 얼마나 속물처럼 보였으면 그런 제안을 했을까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민건의 만행을 까발리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손민건이 잘못했네.”
유현은 그녀를 두고 덥석 물었다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던 형이 한심했다.
“네 형은 결혼을 깰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아서 내가 직접 하려고.”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무는 하경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그리고 나직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할게요.”
오늘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