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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28화 (28/79)

28화. 그에게 화답할 차례,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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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그에게 화답할 차례2020.07.05.

거실로 돌아온 하경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작정한 사람처럼 밀어붙이는 유현 때문에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간 보듯 미적거리는 것보다 낫긴 해도 아직은 당혹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순간을 떠올리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제 해림이 찾아왔을 때만 해도, 해림과 유현의 사진을 봤을 때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진에 관한 건 묻지 못했지만, 어떤 대답이 나올지 짐작이 가기도 했고 이제 어떤 대답이 나오든 제 결심에 영향을 줄 리도 없기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어젯밤 그가 보여준 단호한 태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그에게 화답할 차례. 하경은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 전화를 집어 들고 주소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찾은 이름은 손민건. 통화 버튼을 누른 지 한참 만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야?]

하경은 그제야 아직 8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임을 알게 되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민건에게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 좀 봐요. 할 말 있어요.”

내일이 상견례이니 적어도 오늘 안에는 모든 걸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어디서 볼까?]

“호텔로 오세요.”

부탁이나 제안이 아닌,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하경은 그를 만나러 어딘가로 이동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래. 내가 갈게.]

통화를 마친 그녀는 승조에게 오후에 출근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 승조는 점심시간을 30여 분 앞두고 하경의 전화를 받았다.

[같이 점심 먹어요. 오랜만에 밖에서.]

아침에 메시지는 받았지만, 목소리는 어제 그렇게 헤어진 뒤 처음 듣는 것이었다.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하게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은 그는 푸석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지금 그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는 이유는 밤새도록 허탈과 분노를 오가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운 탓이었다. 하경의 정략결혼이 결정되었을 때도 이 정도까지 감정 기복이 심하지는 않았다. 힘들고 괴롭긴 했어도 예상했고 각오했던 일이었기에 수긍과 체념도 그만큼 빨랐다. 하경이 손민건을 조금도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게 위안이 됐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손유현에게 안긴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니 다시금 감정이 격해졌다.

“후우…….”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승조는 제 본분을 떠올리며 다시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경이 즐겨 찾는 식당 중 한 곳에 예약 전화를 걸었다. *** 고풍스러운 한식당의 프라이빗 룸. 하경과 승조는 전통 문양이 곱게 새겨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나 해장하라고 여기 예약한 거예요?”

“그래.”

승조는 처음부터 사적인 이야기를 할 거라는 의지를 명확히 나타냈다. 하경도 그럴 작정으로 밖에서 점심을 먹자고 한 것이었기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식사는 조금 미뤄두고 얘기부터 할까요?”

“그게 좋겠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는 어젯밤부터 줄곧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질문을 꺼내 놓았다.

“결혼 결심을 후회한다던 게 손유현 때문이었어?”

“맞아요.”

하경은 부인하지 않았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이상 더는 숨겨야 할 이유가 없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의 목청이 커지자, 하경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안 될 건 뭐예요?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닌 거라고, 선배 입으로 말했던 거 기억 안 나요?”

그날은 손민건을 두고 한 말이었을 뿐이었다. 손유현이라는 존재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아무튼, 손유현은 안 돼.”

승조는 갑자기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온 놈에게 하경을 뺏긴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번도 제 것인 적 없었는데도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현이만 아니면 되는 거예요?”

“…….”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남자도 당연히 싫었다. 그런데 손유현이 특히 더 싫었다.

“유현이가 우리 회사 신입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우습게 보는 건 아닐 거라고 믿어요.”

하경은 승조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실제로 그는 은연중에 유현을 아래로 보고 있었다. 유현의 학벌, 경력, 배경 같은 건 어느새 잊고, 제 부하직원 중 하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감히 넘보지 못한 그녀를 별것도 아닌 놈에게 빼앗긴 것 같아서 더 분노했는지도 몰랐다.

“만약 그런 거라면 아무리 선배라도 용서 안 해요.”

그가 아는 주하경은 결코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손유현의 편을 들고 나서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손유현이랑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못 할 것도 없죠.”

태연한 대답이 승조를 더 욱하게 했다.

“너 지금 뭐에 씐 사람 같은 거 알아?”

하경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내 인생에 간섭할 권리, 선배한테 준 적 없어요.”

“…….”

“선배한테 비난받고 싶은 마음도 없고, 허락받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까 거기까지만 해요.”

“하경아…….”

“식사는 다음에 하죠.”

승조의 말을 자른 하경은 옆자리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어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장 문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얼굴을 붉힌 날이었다. *** 하경이 승조와 함께 있던 시각, 유현은 한결과 함께 별관 옆 산책로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오라고 해서 왔건만 한결은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조용히 기다려 주던 유현이 말문을 열었다.

“할 말 없으면 간다.”

그가 일어서려 하자, 한결이 다급하게 외쳤다.

“나한테 할 말 없냐?”

“네가 불렀잖아.”

“꼭 부른 사람이 말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내가 불렀어도 네가 말하면 되지.”

유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대체 자세한 얘기는 언제 해 줄 건데? 나 답답해 죽는 꼴 보고 싶냐?”

유현은 한결에게도 이제 진실을 말해 주기로 했다. 이제 하경도 알게 되었으니 한결을 더 섭섭하게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형한테 여자가 있어. 배 속에는 아이도 있고.”

한결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뭐라고? 여자? 아이?”

만나본 적만 없을 뿐, 한결도 해림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현은 굳이 그 여자가 해림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네 형, 돌았냐? 임신한 여자 두고 우리 누나랑 결혼을 하겠다고 한 거야? 미친 거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씩씩대던 한결이 분노의 화살을 유현에게 돌렸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나한테는 진작 말해 줬어야지!”

“당사자보다 너한테 먼저 말하기는 좀 그래서.”

“나한테 말했다는 건 누나도 알게 됐다는 뜻이냐?”

“어.”

유현은 한결의 입단속에 나섰다.

“우리가 수습할 때까지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말고.”

“우리?”

한결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이제 너 혼자 들이대는 게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

유현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한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리를 좀 해 보자. 넌 이미 네 형한테 여자랑 아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우리 누나랑 네 형이랑 결혼하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맞아?”

“맞아.”

“그런데 우리 누나가 좋아져 버렸다, 그래서 우리 누나한테 결혼하자고 했다, 이거지?”

“아니, 순서가 틀렸어. 결혼하자고 한 게 먼저고 좋아진 게 그다음.”

한결이 떨떠름한 얼굴로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 뭐가 이렇게 복잡해.”

“복잡할 거 없어. 결론은 지금 내가 주하경을 좋아한다는 거니까. 넌 그것만 알고 있으면 돼.”

“…….”

한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현을 노려보기만 했다.

“나, 네 누나한테 잘할 거야. 그러니까 그만 뻗대고 받아들여. 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겠지만.”

“협박이냐?”

“아니, 부탁인데?”

“누가 부탁을 그딴 식으로 하는데?”

“내가.”

유현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만 들어가자.”

“벌써?”

그는 아무런 대꾸 없이 휙 가버렸다.

“야, 같이 가!”

벌떡 일어선 한결이 황급히 유현을 뒤따랐다. 누나와 친구 사이를 받아들인 그는 어느새 예전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 하경은 승조의 차를 타고 회사로 돌아왔다. 오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현의 전화를 받았다.

[사무실 들어가는 거 봤어요. 얼굴 보고 싶었는데 뒷모습밖에 못 봤네.]

난 네 뒷모습조차 못 봤는데. 하경은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만 달랬다.

[밥은?]

“먹었어.”

차마 식당까지 갔다가 안 먹고 그냥 나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할 말 있었는데.”

[뭔데요?]

“나 오늘 네 형 만나기로 했어.”

[나랑 같이 만나요.]

“호텔 카페로 오라고 했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잠깐의 침묵 뒤 들려 온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요.]

“알았어.”

[꼭.]

“알았다니까.”

귀찮다는 듯 투덜거리면서도 하경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 하경은 약속 시각 5분 전, 민건과 만나기로 한 카페로 올라갔다. 그는 10분 늦게 도착했다.

“미안. 차가 막혀서.”

미운 놈이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더니 딱 그 상황이었다. 서울 시내 교통 체증을 모르는 사람도 아닌데 이런 핑계는 너무 궁색하지 않은가. 그러나 하경은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문을 뗐다.

“앉으세요.”

민건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아니요.”

“카페로 오라길래 먹은 줄 알았네. 나도 안 먹었으니까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자리 옮…….”

싸늘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앉으세요, 손민건 씨.”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민건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하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벌써 호칭 정리 들어가는 거야?”

“호칭 정리?”

“결혼해서도 오빠라고 부르면 어른들한테 혼날까 봐 그래? 난 솔직히 오빠라는 말이 더 듣기 좋은데.”

착각도 유분수지. 하경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빙긋 웃었다.

“나 말고도 오빠라고 불러줄 사람 있잖아요.”

“응? 누구?”

“김해림.”

“…….”

민건은 그대로 얼어 버렸다.

“두 사람 사이, 알아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은 그가 마른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유현이한테 들었어?”

“갑자기 유현이 이름이 왜 나와요?”

하경은 일부러 더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끝까지 형의 치부를 폭로하지 않은 유현이 괜한 오해를 받는 게 싫어서였다. 굳이 이 자리에서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해림에게 들었다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제 앞에서 희생 운운한 해림이 여전히 못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었다는 걸 말하지 않는 건 민건이 그녀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년이나 만나 온 여자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고 했던 남자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였다. 하경은 민건이 해림과 헤어지지 않고 결혼한 뒤에도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는 사실까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해림의 배 속에 지금 손민건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도.

“그럼 누구한테 들었는데?”

“내가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보다 누구한테 들었는지가 더 중요한가 보네.”

민건은 아차 싶어서 얼른 말을 돌렸다.

“네가 뭘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 전에 깨끗하게 정리하려고 했어. 근데 놔주질 않는데 어떡해. 나도 답답하다, 하경아.”

“아, 이게 다 김해림 씨 잘못이다?”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하경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늘이던 그가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이야말로 승부수를 띄울 타이밍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났을지, 나한테 얼마나 실망했을지 알아. 미안하게 생각해. 그래서 하는 말인데…….”

“…….”

“해림이 일 묻어 주면 호텔 설립 허가 건, 내가 책임질게.”

“어떻게 책임질 건데요?”

하경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자, 민건의 안색이 밝아졌다.

“건축 심의만 남았잖아. 그거 통과시켜 주겠다고.”

서울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호텔을 짓는 건 주서호 회장의 꿈이었고, 이제는 하경의 꿈이기도 했다. 그러나 보류와 반려를 거듭하며 도시계획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하는 데만 수년이 걸릴 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까스로 문화재청의 심의와 환경영향평가, 교통영향평가까지 차례로 통과한 뒤 이제 건축 심의를 남겨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묻는 거예요.”

“건축 위원회 쪽에 친분 있는 분들이 좀 있어. 조용히 잘 해결할 테니까 나한테 맡겨.”

하경은 민건이 불가능한 제안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손종일 의원의 힘을 빌리든 어쩌든 간에 그가 힘써 주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도 있을 거였다.

“네 꿈, 내가 이뤄줄게.”

혹할 만한 제안이었다. 정략결혼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가시화된 셈이었으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하경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내일 상견례장에서 봐요.”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던 민건의 얼굴에 그제야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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