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이리 와요, 나랑 해요
해림을 이사실로 데리고 들어온 승조는 말없이 목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안녕하세요, 김해림이라고 합니다.”
해림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하경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경은 사진보다 성숙하고 차분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을 벗어난 그녀가 담담한 표정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요.”
해림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무작정 찾아오면서도, 주하경 이사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별로 없었다. 이 정도 규모의 회사 임원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로비에서 막힐 줄 알았다. 그런데 직원이 이름을 확인하고 어딘가로 연락을 하더니 20층으로 올라가게 해 주었고, 비서로 보이는 남자도 별말 없이 이 방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제 이름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들어왔는데 눈앞의 여자 또한 자신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혹시……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
하경은 소파에 먼저 앉으면서 차분하게 대답했다.
“알아요.”
해림이 뒤따라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
본인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것일 수도, 본인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묻는 것일 수도 있는 모호한 질문. 둘 중 어느 쪽이든 간에 대답하기 곤란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경은 해림을 민건의 여자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아직 증거가 없었다. 민건이 밤에 그녀의 집에 다녀갔다는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증명할 만큼 확실한 증거는 아니었다. 손민건의 뒷조사를 하다가 김해림이라는 이름을 알게 됐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도 없어서 말을 돌려야 했다.
“일단 용건부터 들을까요?”
허벅지 위에 얌전히 놓인 해림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밤새 고민하고 왔음에도 긴장되고 떨렸다. 도도하고 고혹적인 자태와 서늘한 분위기가 어우러져 독보적인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는 여자로 인해 위축된 건지도 몰랐다. 민건이 단지 그녀의 배경만 본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착잡했다. 해림은 마음을 다잡고 말문을 뗐다.
“민건 오빠랑 만난 지 2년 다 돼 가요.”
사귀자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서 자신을 사귀는 사이라든지, 여자 친구, 애인 등으로 지칭할 수 없었다. 임신했다는 말을 하기도 민망했다.
“아, 네.”
“…….”
신비로운 갈색 눈동자에 일말의 당혹감도 배어나지 않자, 오히려 당황한 건 해림이었다. 아무리 제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태연할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그거 알려주러 온 건가요?”
“아니요…….”
하경은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서 민건과의 결혼을 무산시키는 게 해림이 여기까지 온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가능성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럼요?”
“유현 오빠 때문에 왔어요.”
“…….”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나오자, 하경의 얼굴에 일순간 동요의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손유현의 아는 동생. 눈앞의 여자가 자신이 여러 번 질투했던 당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오빠가 이상한 소리를 하던데…….”
“이상한 소리?”
하경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주하경 이사님하고 결혼할 거라고…….”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하러 온 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
하경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해림을 빤히 바라보았다. 듣기 싫은 말이 나오리라는 걸 예감해서였을까.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유현 오빠가 절 위해서 희생하는 게 마음 아파서…….”
“희생?”
하경의 미간이 좁아졌다. 숭고하고 고귀한 단어가 이토록 짜증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오빠가 갑자기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할 리 없으니까요.”
“…….”
하경이 지금 어떤 심정인 줄도 모르고, 해림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유현 오빠는 한번 마음먹으면 끝을 보는 사람이에요.”
“그래서요?”
“이사님께서 말려 주세요.”
말려 달라니. 하경은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김해림 씨한테는 내가 손민건이랑 결혼하는 것보다 손유현이랑 결혼하는 게 더 나은 거 아닌가요?”
“그건 맞지만, 유현 오빠 인생을 저 때문에…….”
해림이 흐린 뒷말은 쉽게 예상이 가능했다. 망치게 할 수는 없어요. 하경은 자신과 결혼하는 게 유현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상대와 더는 마주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김해림 씨가 여기 온 거 유현이가 알아요?”
“알면 못 오게 했을 거예요.”
“그럼 오지 말았어야죠.”
“……네?”
“앞으로는 나서도 될 때, 안 될 때를 구별해서 행동해요.”
하경은 놀라서 굳어 버린 해림을 무심한 눈으로 보면서 일어섰다.
“그만 나가 봐요.”
이렇게 불쾌한 만남은 처음이었다.
*** 하경은 어젯밤 집에 돌아가 유현이 자신과 결혼하겠다고 한 진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형에 대한 실망감 혹은 정의감.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만나는 여자가 있는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는 친구 누나를 구제해 주고 싶은 마음도 아주 조금은 있었을지도 모르고. 보통 사람이라면 모든 사실을 폭로하고 말지, 형 대신 본인과 결혼하자고 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손유현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신을 좋아해서 벌인 일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기에 실망스러울 건 없었다. 그렇지만 해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마음이 상했다. 적어도 지금은 그가 김해림이라는 여자를 위해 희생하는 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작은 그런 의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는 게 문제였다. 자신이 참견할 영역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언짢고 불쾌했다. 그런데 이사실로 들어온 승조가 더 불쾌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방금 전달받은 사진입니다. 어제저녁 김해림 씨 아파트 단지에서 찍은 건데 남자의 신원을 파악하느라 보고가 조금 늦어졌다고 합니다.”
하경은 그에게 휴대 전화를 건네받았다. 화면에 떠 있는 사진을 보자마자 그녀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유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해림의 사진이었다. 그의 오른손은 그녀의 등에, 왼손은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것도 아닌데 심기가 불편했다.
“몇 가지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다.”
휴대 전화에서 시선을 뗀 하경이 승조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제윤, 10년 가까이 손종일 의원님의 보좌관을 지냈던 분입니다. 김해림 씨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김해림 씨가 아주 어려서부터 손민건, 손유현 형제를 알고 지내 온 이유로 추정됩니다.”
그녀는 그제야 해림과 두 남자의 연결 고리를 알게 되었다.
“김제윤 씨는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서울을 떠났고, 대학생 딸만 서울에 남았습니다. 이웃들도 김해림 씨 집에 젊은 남자가 수시로 드나든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 젊은 남자는 손민건이겠고…….”
“그렇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하경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이제 됐어요. 그만 철수시키세요.”
당사자에게 직접 민건과의 관계를 들은 이상, 더 확인해 볼 건 없었다.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승조가 이사실을 나가고 혼자가 된 하경은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관자놀이를 누가 망치로 두드리는 것처럼 지끈거리는 와중에 유현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리가 더 먼저 만났네요.”
그게 중요하냐고 물었던 자신을 반성하기로 했다. 얼마나 오래전부터 알아 왔는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중요해져 버렸다. *** 그날 저녁, 하경은 호텔 지하의 와인 바로 내려갔다. 그리고 늘 앉는 바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그녀를 빤히 보고 있던 세희가 무심한 말을 툭 던졌다.
“왜 죽상을 하고 다녀. 보는 사람 거북하게.”
비록 말투는 시비조이긴 해도 걱정돼서 한 말인 것만은 확실했다.
“이 집에서 제일 독한 술이 뭐야?”
하경이 평소처럼 맞받아치지 않자, 세희는 금세 분위기를 파악했다.
“기다려.”
잠시 후, 하경의 눈앞에 술병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우리 집에서 제일 독한 보드카.”
하경에게 먼저 술잔을 건네주고 술병을 연 세희는 하경이 들어 올린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워 주었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술 중에 가장 독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하경이 즐겨 마시는 위스키와 도수는 비슷했다. 세희는 술장사를 하면서도 심란한 일이 있을 때 술로 도피해 봐야 남는 건 숙취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술은 즐겁게 마시는 것. 그녀의 지론이었다.
“회사에 무슨 일 있어? 아니면 손유현 일이야?”
하경은 세희에게 지금 자신이 스물셋 먹은 대학생을 질투하고 있다는 말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말 안 할 거야. 묻지 마.”
“손유현 일이네.”
세희가 알 만하다는 듯 심드렁하게 받아치자, 하경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결론이 그렇게 나는데?”
“왜긴 왜야. 회사 일이었다면 ‘넌 들어도 몰라’라고 했겠지 말 안 할 거라고 했을 리가 없잖아.”
“…….”
정곡을 찔린 하경은 슬며시 시선을 내리고 잔을 비웠다. 유현을 다시 만난 이후로 왠지 모르게 맹해진 기분이었다. 다른 데 정신을 쏟기 때문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가방 안에 든 휴대 전화에서 메시지 도착음이 들려왔다. 옆자리에 놔두었던 가방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어 보니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유현이었다.
<걱정되니까 연락 좀 줘요.>
하경은 휴대 전화를 도로 가방에 넣어버렸다. 이것으로 3번째. 그가 보내온 메시지에 답하지 않은 횟수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자신이 오늘 누굴 만났는지 모르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해림을 위해서 희생하려고 했던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게 그를 비난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짜증이 났다. 그래서 그를 걱정시키는 것으로 화풀이를 하는 중이었다. 한껏 유치하고 한심해지는 중이기도 했다. *** 유현이 하경에게 처음 메시지를 보낸 건 해가 질 무렵이었다.
<일기 예보 찾아보니까 오늘 따뜻하던데 누나 헬멧 개시해 볼래요?>
그런데 아무런 답이 없었다. 바쁜가 보다 하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2시간 후에 보낸 메시지에도 회신은 없었다. 그로부터 1시간 뒤, 하경이 퇴근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걱정된다는 메시지를 보내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어제까지와는 너무나 다른 반응. 유현은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했다. 그녀에게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밤 11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온 그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받아 보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강세희예요.]
유현은 그녀가 왜 전화를 했는지 대번에 눈치챘다.
“주하경 이사님, 지금 거기 계십니까?”
[취해서 자요.]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식탁 위에 올려 두었던 차 키와 지갑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을 때, 세희의 말이 이어졌다.
[나랑 사귀지도 않겠다, 결혼도 싫다, 딱 자른 사람 부탁 같은 거 안 들어줘도 그만인데 내가 마음이 좀 넓어요. 그래서 전화했어요. 데리러 올래요, 내가 집에 데려다줄까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유현은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오피스텔에서 와인 바까지 10분 정도 걸렸을 뿐인데 하경을 먼저 데려간 사람이 있었다.
“전화 끊고 잠깐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하경이가 없어졌어요. 임승조 팀장이 데려가는 걸 직원들이 봤다고 하네요. 본의 아니게 헛소리한 게 돼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따라가려는 거예요?”
“네.”
하경이 집에 무사히 들어가는지 제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였다. 출발한 지 10분이 안 됐으니 서두르면 따라잡을 수 있었다. 와인 바를 나온 유현은 곧장 하경의 아파트로 향했다. 그가 보안 요원의 제지를 받지 않고 지하 주차장을 통과할 수 있었던 건 한결에게 빌렸던 차량 출입 카드를 아직 돌려주지 않은 덕분이었다. 한결이 돌려 달라고 하지 않아서 그냥 가지고 있었던 것이 오늘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차단기를 지나 엘리베이터 근처에 다다른 유현의 눈에 두 남녀가 들어왔다. 비틀거리며 걷는 여자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남자. 하경과 승조였다. 승조에게 몸을 기대고 있는 하경을 본 순간, 유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두 사람 가까이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는 유현과 뒤를 돌아보는 승조의 눈이 마주쳤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
아무런 대답 없이 하경에게 시선을 옮긴 유현은 천천히 뒤돌아서는 그녀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누나 몸에 다른 남자가 손대는 거 싫은데.”
그는 눈빛과 표정 그리고 목소리로 독점욕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억지로 두 사람을 떼어 내거나 하경을 데려오지 않았다. 제자리에 서서 그저 담담하게 손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이리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