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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24화 (24/79)

24화. 여자로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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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여자로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2020.06.21.

유현이 해림을 처음 본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해림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다. 손종일 의원이 아끼던 보좌관의 외동딸. 언제나 칭얼거리지 않고 조용히 책만 읽던 아이. 해림의 어머니가 유방암 수술을 받게 됐을 때 한 달쯤 같이 산 적도 있었다. 해림을 맡길 데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심 여사가 선뜻 맡아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손 씨 형제는 해림을 친동생처럼 생각했고, 세 사람은 오랜 세월 제법 가깝게 지내왔다. 그 인연이 이제 누군가에게는 악연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지금 어딘데.”

[집이야. 오빠는 지금 어디 있어? 내가 그쪽으로 갈게.]

유현은 해림에게 주원 호텔에 입사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물론 하경과 결혼할 생각이라는 것도.

“근처 가서 전화할 테니까 집에 있어. 넉넉잡고 앞으로 2시간 후.”

[그럼 우리 집으로 올래?]

“아니, 지난번에 만났던 카페에서 봐.”

부모님이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해림은 혼자 살게 되었다. 유현은 이삿날 빼고는 그녀의 집에 가본 적이 없었다. 만나야 할 일이 있어도 늘 근처에서 만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서. 아무리 친동생처럼 생각해도 친동생은 아니니까. 그런데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해림의 집에 가지 않았던 건 딱히 가고 싶은 마음도, 갈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하경의 집 현관 앞에서 담백하게 돌아서긴 했지만, 솔직한 심정은 그녀의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주하경이라는 여자의 사적인 공간에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상대가 여자로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알았어, 오빠. 이따 봐.]

계단 난간에 살짝 기대어 통화를 하던 유현이 휴대 전화를 귀에서 떼던 그때, 여자 구두 소리가 비상구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하경이 우아하게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겨 계단 끝에 섰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를 기다렸다. 맞닿은 시선이 조금씩 가까워졌고, 마침내 하경이 유현이 서 있는 곳에 발을 디뎠다.

먼저 입술을 연 건 하경이었다.

“무슨 일 있어?”

“없어요.”

“표정이 안 좋던데?”

통화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그의 표정은 똑똑히 보았다.

“아는 동생한테 요새 힘든 일이 좀 있어서요.”

하경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병원에 입원했었던 그 동생?”

“그 동생 맞아요.”

유현은 그녀가 해림의 존재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어려서부터 알던 동생이에요. 지금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고, 다음에 말해 줄게요.”

“…….”

하경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자발적으로 말해 주겠다고 하니 언짢았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질투가 많은 줄 몰랐었기에 당혹스럽기도 했다.

“회장님 뵙고 오는 길이에요?”

“어.”

하경이 멈췄던 발걸음을 떼자 유현은 한 발짝 더 앞서나가 비상구 문을 열었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가 열어 준 문을 통해 20층 복도로 나갔다. 두 사람은 한적한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덕분에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데 제약이 없었다.

“퇴근하고 조금 전 통화했던 동생 잠깐 만나기로 했어요. 혹시 어제처럼 운전해 줄 사람 필요하면 전화해요. 데리러 올 테니까.”

하경이 콧등을 찡그리면서 유현을 돌아보았다.

“나 어제 운전해 줄 사람 필요하지 않았는데? 내가 불러서 온 것처럼 말한다?”

“아, 어제처럼이란 말은 빼야겠다. 어제는 내가 조수석에 태울 사람이 필요했던 걸로 할게요.”

하경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현 때문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어찌나 능청스러운지 기가 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그로 인해 부쩍 웃음이 늘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늦게 회사라는 사실을 상기한 그녀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서 웃음기도 지웠다.

“오늘은 조수석에 태울 사람 찾아 헤매지 말고 일찍 들어가서 쉬어.”

표정과 달리 목소리는 꽤나 나긋나긋했다.

“데리러 오라고 안 할 거라는 말이죠?”

“맞아. 그 말이야.”

두 사람은 어느새 기획팀 앞에 다다랐다. 하경은 유현을 지나쳐 이사실로 향했고,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유현도 기획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을 따라온 승조가 기획팀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하경과 유현이 함께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유현을 돌아보며 웃는 하경의 얼굴도. 하경이 손유현을 조금도 경계하지 않는다는 게 느껴졌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 유현은 해림의 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나오라는 전화를 한 지 15분쯤 지났을 무렵 해림이 도착했다.

“뭐 따뜻한 거 마실래?”

“별생각 없는데…….”

“적당한 걸로 사 올게.”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간 유현은 카모마일차를 2잔 가지고 돌아왔다. 임신부가 마셔도 될 법한 차를 먼저 고른 뒤에 메뉴를 통일한 것이었다. 해림은 그가 건네준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 따뜻하다…….”

유현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말문을 뗐다.

“몸은 괜찮은 거야? 안색이 안 좋네.”

해림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밥은 잘 챙겨 먹……을 리가 없지.”

유현은 피죽도 못 먹은 듯한 얼굴을 보고 밥은 잘 챙겨 먹냐고 물을 뻔한 제 무심함을 반성하면서 말을 돌렸다.

“부모님께 가 있는 건 어때?”

“안 돼.”

“왜 안 되는데.”

휴학 중이라 반드시 서울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한 말이었다.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밥이라도 먹으면서 지내면 볼 때마다 부쩍부쩍 마르지는 않을 것 같아서.

“나 요새 입덧해.”

해림이 왜 제 제안을 단칼에 잘랐는지 알게 된 유현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어서 보자고 한 거야?”

시선을 내리깔고 찻잔을 내려다보던 해림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야 말문을 뗐다.

“어젯밤에 민건 오빠가 왔었어.”

“와서 뭐래?”

“유학 가래. 비용은 걱정하지 말고 가고 싶은 나라 어디든 말하래.”

유현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형이 사흘의 시간을 달라고 한 이유가 반성이나 수습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받아준 건 발버둥 칠 만큼 쳐보라는 의미였다. 그러고 나서 본인이 얼마나 헛된 일에 사력을 다했는지 알게 되길 바랐다. 사흘이 지나면 직접 아버지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필요하다면 주 회장에게도.

“민건 오빠랑 결혼할 여자, 주원 호텔 이사라며? 회장 딸이고…….”

굉장한 집안 여자일 거라는 예상은 했으나, 막상 누군지 알고 나니 맥이 쭉 빠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진 기분이었다.

“그 결혼 못 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던 해림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유현을 응시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유현은 해림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줄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사뭇 건조하게, 조금은 차갑게 말했다.

“형이랑 네 사이를 내가 어떻게 해 줄 수는 없어. 그건 두 사람이 결정해야 할 문제니까. 근데 형이 그 결혼을 하게 될 일은 없을 거야.”

“무슨 일인지 자세히 좀 말해 주면 안 돼?”

어느새 해림은 두 팔을 테이블에 올리고 유현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고 있었다.

“며칠만 기다려. 지금은 결혼이 취소될 거라는 말밖에 해 줄 수 없어.”

“정말 그게 가능……해?”

“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형이 아니라 내가 될 거야.”

놀란 해림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가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오빠가…… 그 여자랑 결혼을…… 한다고?”

“그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될 거 없어.”

“오빠.”

“그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

해림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유현이 이 정도로 단호하게 말할 때는 아무리 졸라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더 할 얘기 없으면 일어나자.”

유현은 해림에게 그동안의 일을 시시콜콜 떠들고 싶지 않았다. 하경이 없는 곳에서 그녀를 화두에 올리는 게 싫었다.

“응…….”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와 말없이 걸었다. 해림이 여러 번 그를 돌아보며 입술을 달싹이긴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앞만 보며 걷는 유현에게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그는 그녀가 사는 동 앞에 도착해서야 입을 열었다.

“들어가.”

해림을 돌아보니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 있었다.

“오빠…….”

“왜 울어.”

유현은 가뜩이나 힘든 해림에게 너무 매정하게 굴었나 싶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안해, 오빠. 고맙고…….”

눈물이 터져 버린 해림은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의 가슴에 기대어 울었다. 유현은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네가 나한테 미안해해야 할 이유는 없어. 고마워할 필요도 없고.”

그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 유현이 해림과 함께 있던 그 시각, 승조는 기다리던 연락을 받았다.

“일단 휴대폰으로 보내주십시오.”

그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상기되었다.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3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사진을 확인한 승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사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하경이 놀라지 않도록 적당히 힘을 주어 노크한 다음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었다.

“지시하신 일 관련해서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성큼성큼 걸어간 그는 책상 앞에서 멈춰 섰다. 승조가 손에 들고 있던 휴대 전화를 하경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어젯밤 11시 15분쯤 집을 나온 손민건 의원님께서 성북구에 있는 한 아파트로 들어가셨고, 약 1시간 후 그 집을 나오셨다고 합니다.”

하경은 휴대 전화를 받아서 사진을 살펴보았다. 민건의 얼굴이 아주 잘 찍혀 있었다. 2장의 사진을 확인한 그녀가 시선을 들며 물었다.

“누구네 집이에요?”

“전세 임차인 명의는 김해림. 스물셋이고, 현재 휴학 중입니다. 넘겨 보시면 사진이 있습니다.”

하경은 다시 시선을 내리고 마지막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긴 생머리에,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눈망울이 더해져 청순미를 물씬 풍기는 여자였다.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민건이 타이밍을 딱 맞춰 움직여 준 덕분에 이 정도까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비싼 팀을 고용한 덕분이기도 했다. 무슨 관계인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지만, 승조는 제 의견을 덧붙이지 않았다. 판단은 하경의 몫으로 남겼다.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즉각 보고 드리겠습니다.”

하경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요. 나가 보세요.”

승조가 방을 나가자, 평온했던 그녀의 얼굴에 노기가 드리워졌다. 여자 문제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실체에 성큼 다가서고 나니 능멸당한 기분이었다.

“여자가 있으면서 나랑 결혼을 하겠다고?”

하경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집안끼리의 오랜 친분만 믿고 뒷조사를 하지 않은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셈이었다. 안일했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별개로, 유현에게는 고마웠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미 상견례를 끝마치고 약혼식을 앞두고 있었을 테니까. 아마도 결혼까지 이어졌을 테고. 민건에게 여자가 있다고 사실대로 말해 주지 않은 유현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농락당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처음부터 그가 입에 발린 말이나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서였다. 뻔뻔하고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는 나름대로 솔직했다. 그리고 지금은 유현이 진심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경은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아버지에게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을 수 있을 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며칠 미룬다고 큰일 날 건 없을 테니까. 그녀에게 지금 가장 시급한 건 두통약이었다. *** 다음 날 오후. 하경은 이사실에 들어선 승조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김해림 씨가 이사님을 뵙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하경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김해림?”

어제 처음으로 알게 된 이름.

“만나 보시겠습니까?”

하경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손민건의 여자가 무슨 말을 하러 온 건지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해도, 듣고 나면 기분 좋을 리 없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알면서도 만나보고 싶어졌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고 싶었다.

“들여보내세요.”

해림을 만나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는 후회를 하게 될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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