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다음에는, 그리고 그다음에는,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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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다음에는, 그리고 그다음에는2020.06.11.
유현은 오늘 한결에게 그동안 침묵했던 이야기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문득 오늘 아침 그녀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고,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어쩌면 하경도 그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완곡하게 돌려 물어도 그녀가 알아들을 거라 믿었기에 제 식대로 허락을 구했고 허락을 받은 것이었다. 그도 하경 못지않게 한결의 반응이 궁금했다. 흔쾌히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당연히 황당해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저 하경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 만큼의 반응만 보여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갑자기 뭔 헛소리야.]
“주하경 이사님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잠깐. 뭐야, 그럼. 율리한테 한 말이 진짜였다는 거야?]
한결이 목청을 높이자, 유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경에게까지 격앙된 목소리가 들릴까 봐서였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 그녀를 더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채율리가 귀찮게 해서 둘러댄 말이 아니고?]
“고작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아.”
유현은 남의 거짓말을 듣는 건 물론이거니와 제 입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어했다. 아무리 율리가 귀찮았다고 해도 만약 그날 하경에게 청혼할 생각이 없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그의 말을 끝으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한결은 정적을 못 참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입을 다물고 있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유현은 한결이 복잡한 머릿속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다시 한결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누나도 알아?]
“어, 결혼하자고 말했어.”
[누나가 그러재? 너랑 결혼하겠대?]
“아니.”
[누나는 생각도 없는데 너 혼자 들이대고 있는 거라고?]
“어, 나 혼자 들이대는 중이야.”
유현은 하경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기막히고 혼란스러우면서도 자신에게 흔들리고 있음을. 만약 그녀가 제 청혼과 제 행동을 불쾌해했다면 한결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지도 않았을 거였다. 그는 자신을 싫어하는 상대에게 막무가내로 치근댈 만큼 무개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 독단적인 행동인 척하는 건 하경을 위해서였다. 모든 비난은 자신에게만 향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야, 이 미친놈아. 지금 어디야. 얼굴 보고 얘기해. 집이면 내가 갈…….]
“넌 어딘데.”
유현은 한결의 말을 끊고 끼어들어 질문을 되돌려 주었다.
[집.]
“내가 갈게.”
그는 하경을 집에 데려다주고 한결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빨리 와.]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유현은 휴대 전화를 식탁 위에 내려놓으면서 하경을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그동안 마음 불편했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더니 지금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홀가분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는 더 불편해질 것 같은데?”
하경의 매끈한 콧등에 주름이 잡혔다. 지금까지는 한결을 속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면 이제부터는 한결과 마주치는 것 자체가 불편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결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유현의 입에서 나온 말과 분위기로 볼 때 호의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래도 유효하냐는 유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제 마음이 그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에. 유현이 누구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지 알면서 그를 막지 않은 건 그녀에게는 큰 용기였고, 힘겨운 한 걸음이었다. 물론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이사님은 무조건 나한테 떠넘기면 돼요. 날 스토커 만들어도 상관없어요.”
하경은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하지만 제 선택에 대한 책임은 제가 질 생각이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야.”
“가만히 있는 손바닥에 다른 손바닥이 가서 부딪쳐도 소리는 나요. 이사님은 가만히 있는 손바닥 해요. 난 다른 손바닥 할 테니까.”
그제야 뭐가 어색한지 알아차린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좀 전부터 계속 이사님이라고 불러?”
유현의 입에서 이사님이라는 호칭이 나온 게 처음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당연히 이사님이라고 불렀고, 둘이 있거나 한결과 함께 있을 때도 가끔은 이사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부를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경 씨라고 불러도 돼요?”
대답 대신 돌아온 반문에 하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하경 씨?”
“하경아, 는?”
그가 한술 더 뜨자 하경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유현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진지했다.
“누나라고 부르면 날 계속 주한결 친구로 볼 것 같아서 싫어요.”
“…….”
“난 한결이 누나한테 결혼하자고 한 게 아니니까. 당분간은 이사님이라고 부를게요.”
유현은 하경이 이제 조금 마음을 열어 준 것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당분간’이라는 조건을 붙인 것이었다. 그녀가 제 마음을, 제 청혼을 받아 주면 그때는 다른 호칭으로 부를 생각이었다.
“그냥 하던 대로 해. 네가 어떻게 불러도 이제 한결이 친구로 안 보여.”
하경은 그에게 꼬박꼬박 이사님이라고 불리고 싶지 않았다. 너무 딱딱하고 건조한 느낌이라서.
“알았어요.”
유현은 그녀의 말이 듣기 좋았다. 손민건 동생과 주한결 친구 중 후자는 벗어 버린 기분. 이제 전자를 벗어 버릴 차례였다.
“그만 가야겠다. 물 잘 마셨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경을 따뜻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다음에는 커피 마셔요.”
“…….”
하경은 말없이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밥 먹어요.”
“우리 같이 밥 먹은 적 있잖아.”
“넷이 먹는 거 말고. 둘이.”
유현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술도 마시고.”
“둘이 술은 마셔봤거든?”
하경이 당당하게 받아친 말에는 새벽까지 둘이, 그것도 제집에서 술을 마셨던 걸 벌써 잊었냐는 질책이 담겨 있었다.
“밖에서.”
“…….”
“나, 누나랑 해 보고 싶은 게 많아요.”
하경도 사실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난생처음으로 소소한 일상을 즐기고 싶어졌다. 자신을 매 순간 혼란스럽게 하는 이 남자와 함께.
“데려다줄게요.”
하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혼자 갈 수 있다고 해도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피우리라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유현이 일어서는 것을 보면서 몸을 돌리던 그녀의 눈에 의외의 물건이 포착된 건 그 순간이었다. 그건 바로, 분홍색 오토바이 헬멧이었다. 소파 위에 놓여 있던 것을 조금 전엔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모양이었다. 헬멧이 검은색이나 흰색이었다면 그것이 이 집에 있는 게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겠지만, 분홍색 헬멧이라 사뭇 의아했다.
“저거, 여자 거 아니야?”
유현의 시선이 하경의 손가락 끝에 다다랐다.
“맞아요. 여자 거.”
그의 눈이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다.
“여자라고 꼭 분홍색 좋아하라는 법은 없지만, 누나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응?”
하경은 유현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분홍색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게 분홍색 헬멧과 무슨 상관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누나 거예요.”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내 거?”
“다음엔 좀 더 오래 태워주겠다고 했잖아요. 갖출 거 다 갖추고 마음 편히 타려고 헬멧 하나 더 샀어요.”
“언제 태워 줄 건데?”
“누나가 원할 땐 언제든.”
하경의 눈이 기대감을 가득 품고 반짝거리자, 유현이 얼른 한마디 보탰다.
“오늘은 안 돼요. 나 술 마셨어요.”
음주 단속에 걸리는 건 차치하고, 그녀를 조금이라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일은 절대 할 생각이 없었다.
“알아. 오늘 태워달라고 안 해.”
피식 웃으면서 소파로 걸어간 하경은 헬멧을 집어 들었다. 고작 오토바이 헬멧 하나가 이렇게 흐뭇할 줄이야.
“나 헬멧 처음 가져 봐.”
“헬멧을 가져 본 사람이 드물죠.”
하경에게 다가간 유현은 그녀의 손에 들린 헬멧을 두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누나 거, 내가 잘 보관하고 있을게요.”
하경이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내 거, 잘 보관해 줘.”
처음으로 유현의 집에 그녀의 물건이 생긴 날이었다.
*** 유현은 택시로 하경을 집까지 데려다주고서 곧장 한결의 집으로 향했다. 1층에서 초인종을 누르니 곧장 공동 현관문이 열렸다. 평소였다면 문을 열어 주면서 뭐라도 한마디 했을 텐데 오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한결과 얼굴을 마주한 순간, 공격적인 질문이 날아왔다.
“우리 누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결혼하자고 했다고?”
그는 기막히고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들어가서 얘기해.”
“…….”
한결은 현관 앞에 서 있는 유현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휙 뒤를 돌았다. 유현은 소파로 걸어가 앉는 그를 조용히 뒤따랐다. 그리고 한결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그의 질문에 답했다.
“주하경이랑 결혼하고 싶고, 결혼하자고 했어.”
유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헛웃음이 날아왔다.
“미쳤냐?”
“네가 보기엔 어때?”
한결은 유현의 진지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런 황당무계한 말을 하려면 평소와 달라야 정상 아닌가. 조금도 미쳐 보이지 않아서 더 미칠 노릇이었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한결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내 누나인 건 그렇다 치자. 근데 네 형이랑 결혼할 여자잖아.”
“결혼할 여자지, 결혼한 여자는 아니잖아.”
한결은 목덜미가 뻣뻣해져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손유현, 너 대체 왜 이래? 이러는 이유가 뭐야?”
아직 한결에게 모든 걸 다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거짓말을 할 생각도 없었다.
“우리 형이랑 결혼하게 놔두고 싶지 않아서.”
그 마음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형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주하경이라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다를 뿐.
“우리 누나를 좋아한다는 뜻이냐?”
“어.”
“…….”
유현의 즉각적인 대답에 당황한 한결의 말문이 막혔다. 유현이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던 그로서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주한결, 너 하경 누나가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했을 땐 이러지 않았잖아. 근데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
“몰라서 묻냐?”
“어, 몰라서 물어.”
유현은 실소를 터트리는 한결에게 다시 물었다.
“형은 괜찮고 난 안 괜찮은 이유가 뭐야.”
“그거야 이미 누나가 민건이 형이랑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그렇지.”
“정말 그게 다야?”
“…….”
한결은 꿰뚫어 보는 듯한 유현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에게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서야 왜 이렇게 심기가 불편한지 깨닫게 되었다. 소외감. 누구보다 가깝다고 여겼던 누나와 친구가 제 눈을 피해 둘이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에 대한 괘씸함과 서운함. 옹졸하고 유치해서 선뜻 드러낼 수 없는 감정들로 인해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잡한 마음을 간신히 추스른 한결이 무겁게 말문을 뗐다.
“그래. 네가 우리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것까지는 이해했어. 근데 너 혼자 들이대는 거라며. 우리 누나는 아니라며.”
“지금은 아니라는 거지, 앞으로도 아니라고는 안 했어.”
한결은 이미 누나와 유현 사이에 뭔가 교감이 있다는 걸 직감했다.
“네가 정말 우리 누나랑 결혼할 마음이 있다면, 너희 형이랑 우리 누나 결혼부터 깽판 치는 게 순서 아니냐? 상견례가 미뤄지긴 했어도 결혼이 아예 취소된 건 아니잖아.”
“며칠 안에 마무리될 거야. 자세한 얘기는 그때 할게.”
유현도 이런 어정쩡한 관계를 더 이상 길게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당장 오늘이라도 뒤집어엎어 버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결자해지를 위해서였다. 형이 직접 모든 걸 밝히고 정리하는 게 가장 깔끔할 테니까. 그래야 하경에게 조금이라도 불똥이 덜 튈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하아…… 난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한결은 유현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꼬치꼬치 캐묻는다 한들 알려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지금 할 수 있는 건 한숨을 쉬는 것뿐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주하경과 손민건이 결혼할 일은 없다는 거.”
유현은 그녀와 결혼하는 건 자신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