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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19화 (19/79)

19화. 뜨겁거나 차갑거나,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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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뜨겁거나 차갑거나2020.06.04.

[상견례를 일주일 미루자는구나.]

하경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젯밤 유현이 했던 말은 강요나 당부가 아닌 ‘확신’이었음을. 그는 오늘 자신이 푹 쉴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는 뜻이었다. 정확히는, 푹 쉬라고 이런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딴생각에 빠져들었던 그녀는 멍한 정신을 가다듬고 태연한 척 물었다.

“이유는요?”

이유 자체가 궁금한 건 아니었다. 어떤 이유든 별 상관없었다. 유현이 어떻게 상견례를 미뤘는지가 궁금할 뿐. 하경은 배후가 그라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민건이가 몸이 좀 안 좋다는구나.]

“어디가 아프대요?”

[흠…… 감기몸살에 과로가 겹쳤다는데…….]

“입원이라도 한 거예요?”

[그건 아닌 것 같다.]

하경은 아버지가 지금 이 상황을 매우 언짢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상견례를 연기하는 데 병원에 입원할 정도도 아닌 감기몸살과 과로라는 핑계를 대다니. 누가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일단 결혼식 날짜는 변동 없이, 약혼식만 생략하기로 했다. 넌 어차피 처음부터 약혼식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 별 상관없겠지.]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이만 끊는다.]

“들어가세요.”

하경은 휴대 전화를 귀에서 떼면서 긴 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온전히 내려놓은 건 아니지만, 일단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어쨌든 제 입을 더럽히지 않고 시간을 번 셈이니. 아이러니한 건, 이 모든 일의 발단이나 다름없는 장본인 덕분이라는 사실이었다.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을 이럴 때 써야 할까. 그런데 원망스럽기는커녕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손유현과 엮인 모든 일은 이성으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은 순간이었다.

*** 하경은 유현 덕분에 주말 동안 아주 푹 쉴 수 있었다. 집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다행히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휴대 전화는 주말 내내 단 한 번도 울리지 않고 조용했다. 그러나 몸만 쉬었을 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느라 머리는 쉬지 못했다. 하경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조금 여유를 갖자는 것이었다. 쫓기는 기분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형제 사이를 저울질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는 않았지만, 죄책감은 잠시 묻어두기로 했다. 한결에게도 당분간은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복잡한 건 다 추후로 미루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는 데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선택을 내리든, 살면서 이번만큼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할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아마도 평생에 다시 없을 선택이 될 거였다. 월요일 아침. 하경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출근했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지나치면서 흘긋 들여다본 기획팀 사무실 안에 누군가 있었다.

‘벌써 출근했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는 사람은, 유현이었다. 금요일에 마지막으로 봤으니 만 사흘도 지나지 않은 셈인데도 굉장히 오랜만에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껄끄럽거나 피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혼자라는 사실이 기쁘기까지 했다. 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과 구두 굽이 맞닿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리자, 유현이 고개를 돌렸다. 일순간 멈칫하는가 싶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리고 청량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하경은 유현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맑은 하늘과 참 잘 어울리는 미소라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이사님이야말로 일찍 나오셨네요.”

유현은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눈이 떠졌어.”

마주 보고 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한 걸음. 마음의 거리와 비슷했다. 가까운 듯하면서도 언제든 뒤로 물러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둔 상태.

“주말 동안 푹 쉬었어요?”

“덕분에.”

유현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을 돌렸다.

“커피 마실래요?”

하경의 시선이 그의 시선을 좇았다. 책상 위에는 프랜차이즈 카페 로고가 박힌 테이크아웃 잔이 놓여 있었다.

“마시던 거 아니에요. 사 오긴 했는데 마시고 싶지가 않아서 그냥 뒀던 거니까 커피 필요하면 가져가요.”

“식은 커피 안 좋아해. 뜨겁거나 차갑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해.”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사람도 마찬가지고.”

유현을 보면서 말했지만,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결단성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신이 한심하고 못마땅해서.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건만, 지금 주하경은 우유부단의 극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취향 같은 거 또 찾았다.”

“…….”

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웃는 유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도 미지근한 거 안 좋아해요. 커피든, 사람이든.”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안 좋아하는 거 하려니까 힘드네.”

하경의 눈에는 그가 마치 달려 나갈 준비를 마치고 허락을 기다리는 맹수처럼 보였다. 온순한 척하고 있을 뿐, 거친 습성을 버리지 못한.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줄은 알지만, 지금은 해 줄 수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화제를 바꾸는 것뿐이었다.

“민건 오빠는 몸이 안 좋다면서?”

“그렇대요? 따로 사니까 알 수가 없네.”

유현은 별 관심 없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상견례가 미뤄졌다는 소식을 들은 건 어제 오전, 한결을 통해서였다.

“민건이 형, 많이 아프냐? 대체 어디가 얼마나 아프길래 상견례를 미루재?”

이렇게 될 거라 예상했기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전화 통화를 할 때는 욱하는 마음에 큰소리를 쳤겠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불안감이 커졌으리라는 건 보지 않고도 짐작이 갔다. 본인이 수습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테고. 형이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차피 결과는 같았겠지만.

“민건 오빠한테 대체 뭐라고 했길래 아프다고 하면서까지 상견례를 연기했는지 궁금하네.”

그냥 떠본 것뿐,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하경은 민건이 유현의 말을 따라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게 뭔지 유현에게 물어볼 마음은 없었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진즉에 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자발적으로 알려줄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도 않았다. 뒤로 조용히 알아볼 생각이었다.

“왜 배후가 나라고 생각해요?”

“너니까.”

“…….”

유현은 시치미를 떼는 대신,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는 하경을 마주 보면서 빙긋 웃었다. 밑도 끝도 없는 제 행동에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울 텐데도 늘 침착한 그녀가 신기했다. 닦달하거나 다그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려줘서 고마웠다.

“어쨌든, 고마워.”

“뭐가요?”

“내가 나서지 않게 해 줘서.”

“상견례 취소할 생각이었어요?”

“아니, 연기할 생각이었어.”

유현은 형이 어떻게 나올지는 예상했지만, 하경이 어떻게 나올지는 반신반의 상태였다. 제 말을 들을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상견례를 진행할 것 같기도 해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취소까지는 아니었다고 해도 연기는 하려고 했다는 말을 들으니 내심 흐뭇했다.

“곧 연기가 아니라 취소하고 싶어질 거예요.”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두고 봐요. 내 말이 맞을 테니까.”

“수고해.”

하경은 새침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는 그녀의 얼굴에도 어느새 엷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 5시에 시작된 기획팀 회의는 7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퇴근을 앞둔 팀원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했다.

‘저리도 좋을까.’

하경은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원들이 편하게 사담을 나눌 수 있도록 빨리 자리를 피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유현이 들어오기 전까지 막내였던 홍 대리가 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이사님!”

하경의 의문 어린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저희 오늘 회식 있는데 같이 안 가실래요?”

그녀는 종종 회식비를 쾌척하곤 했으나 회식에 직접 참석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기도 했고, 팀원들이 불편해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팀장인 승조도 어쩌다 한 번씩 참석하는 정도였다.

“손유현 씨 입사 환영 회식이에요. 이사님도 같이 가요.”

홍 대리는 원래 사람을 어려워하지 않는 성격인 데다가 막내를 벗어났다는 사실에 잔뜩 신이 나 있었다. 하경의 눈이 반사적으로 유현에게 향했다. 평소였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제안을 고민한 건 오로지 손유현 때문이었다. 잠깐의 고민은 굳이 안 하던 짓을 하지는 말자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안 주임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님도 같이 가실 거면 회식 장소를 바꿔야 하는데…….”

하경은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졌다. 모든 팀원의 생각인지 안 주임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이 회식에 참석하는 걸 못마땅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꼭 참석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도로 자리에 앉아서 안 주임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갈 거였는데요?”

“삼겹살에 소주 마시기로 했습니다.”

하경과 동갑내기인 안 주임은 마치 업무 보고를 하는 사람처럼 딱딱하게 대답했다.

“바꿀 필요 없겠네요. 나도 소주 좋아해요.”

소주만 언급한 이유는 삼겹살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경이 삼겹살을 처음 먹어 본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사방으로 튀던 기름이 손등에까지 튀어 버린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삼겹살집에는 가지 않았다.

“이사님께서 소주를 좋아하신다고요?”

안 주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현과 승조를 제외한 모두의 눈이 그녀와 비슷했다. 주하경을 아는 사람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금수저를 쥐고 태어난 그녀와 서민들의 술이나 다름없는 소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마무리하고 출발하죠.”

하경은 회식 참석을 확정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으로 참석하기로 한 회식이 유현의 입사 환영 회식이 될 줄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 회식 장소는 호텔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한 위치였다. 하경은 팀원들을 먼저 보내고 10분쯤 지난 뒤에 승조와 함께 고깃집으로 출발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왜요?”

“삼겹살 못 드시면서.”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거예요. 오늘은 먹을 거고.”

“비싼 옷에 기름 튈 겁니다.”

“상관없어요.”

안 주임의 도발이 계기가 되긴 했지만, 하경이 회식에 참석하기로 마음을 굳힌 건 유현 때문이었다. 그녀는 직원들과 자신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 선을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 문득 유현이 있는 곳이 선 너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거기에 있다면 한번 넘어가 보고 싶어졌다. 그게 지금 하경이 고집을 부리는 이유였다.

“그럼 조금만 앉아 있다가 나오시죠.”

“그럴 생각이었어요.”

두 사람이 고깃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고기가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하경과 승조는 유현의 옆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하경은 떠들썩한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팀원들과 어울리려 애썼다. 처음에는 신기해하던 이들도 술이 한두 잔 들어가면서 무뎌졌고, 서서히 그녀를 의식하지 않고 회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신규 호텔 허가 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김 과장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사라지고서야 그녀는 제 옆자리가 비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고기 냄새를 너무 많이 맡은 데다가 소주를 한 병 가까이 마셨더니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하경은 가방을 챙겨서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바람을 쐬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눈을 감은 그녀의 귀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괜찮아요?”

눈을 뜬 하경은 제 앞에 다가와 선 유현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울렁거려.”

“택시 잡을 테니까 여기 잠깐만 있어요.”

유현이 몸을 돌리려고 하자, 그녀는 얼른 그의 옷을 붙잡았다.

“나 지금 차 못 타겠어.”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 집, 이 근처예요. 조금만 걸으면 되는데 우리 집으로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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