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말고,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novel.naver.com
18화.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말고2020.05.31.
[상견례, 취소해요.]
“…….”
하경은 유현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 담담한 그 말이 심장을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마음에 강렬한 파동이 일었다.
[아니, 누나가 나설 필요 없어요. 우리 형이랑 결혼하지 않겠다고만 말해요. 그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못 이기는 척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르고 싶었지만, 하경의 입에서는 마음과 다른 말이 튀어 나갔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지금은 유현이 눈앞에 없어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일 수 있었다. 민건과의 결혼을 깨고, 유현을 선택한다는 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 알기에 최대한 그를 거부하고 밀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어쩔 수 없었다고 위안 삼을 수 있을 테니까. 난 할 만큼 했다고 합리화할 수 있을 테니까.
[난 아무래도 괜찮은데 누나는 덜 힘들었으면 해서.]
“…….”
하경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나한테 올 게 아니라면 차라리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요.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말고.]
손민건과 결혼할 게 아니라면 하루라도 빨리, 아무것도 하지 말고 멈추는 게 최선이었다. 상견례를 해 버리면 그만큼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 나, 그냥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요. 근데 왜 안 그러는지 알아요?]
“…….”
하경은 모른다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럼 누나가 싫어할 거 같아서. 내가 미친놈처럼 굴면 누나까지 싸잡혀서 욕먹을까 봐.]
문득, 몇 시간 전 이사실에서 보았던 유현의 싸늘한 얼굴이 떠올랐다.
“손유현.”
[듣고 있어요.]
“난 네 진짜 모습이 뭔지 궁금해.”
[내 진짜 모습?]
“어떤 때는 상대가 무안할 만큼 냉랭하고, 또 어떤 때는 세상 다정하고…… 그래서 헷갈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율리를 대하던 모습과 지금 자신을 배려하는 모습이 너무나 달라서 어느 쪽이 그의 본 모습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누나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나? 냉랭하게 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다정하게 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거지.]
“…….”
[누나는 나한테 후자고.]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자신이 그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
[난 나한테 기대하는 게 있는 상대에게 여지를 남기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내가 그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없다면.]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내 생각을 말한 거예요.]
“…….”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저도 모르게 발끈했던 하경은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자신에게 기대하는 게 있는 그에게 여지를 남기고 있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기대를 충족시켜줄지 말지 결정도 못 했으면서. 하루하루 확신이 커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그를 선택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단조로운 일상에 어느 날 갑자기 뛰어든 그의 존재가 신기해서, 감히 생각해 본 적 없던 일탈에 취해서, 그를 향한 마음을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이 감정이 어느 날 갑자기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유현이 나타나기 전의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어이없는 건, 자신이 아무리 굳건히 버텨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양가적인 마음이 든다는 것이었다. 이기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머리도 가슴도 다 제 것인데 손유현에 관해서 만큼은 통제가 되지 않았다.
[난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 못 돼요. 그래도 노력은 해 볼게요, 누나가 원한다면.]
그런 말을 원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말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럴 거 없어.”
하경은 사탕 열 개를 열 명에게 나눠주는 사람보다 자신에게 열 개를 다 몰아주는 사람이 더 좋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인 예의만 지키고 자신만을 특별히 대해 주는 사람을 원했다. 오로지 내게만 모든 걸 쏟아부어 줄 수 있는 사람. 그녀가 꿈꿔온 이상형이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느새 이상형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해져 버렸지만, 분명 그런 남자를 만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유현은 하경에게 그녀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들을 하나둘 일깨워주고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본 감정들까지도.
[출장 다녀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주말 내내 푹 쉬어요.]
“일요일은 푹 쉴 거야.”
그냥 알았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왜 자꾸만 뻗대고 싶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일도.]
“…….”
하경은 묘한 뉘앙스를 감지했다. 조금 전 그로부터 상견례를 취소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강요나 당부가 아닌 건 확실한데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만 끊을게요.]
유현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휴대 전화를 내려놓은 하경이 어둠 속에서 그의 말을 곱씹고 있던 그때, 한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 왜.”
[누나, 미안해.]
“뭐가?”
[채율리 때문에 기분 나빴지? 생각하면 할수록 나도 이렇게 기분이 나쁜데 누나는 더 하겠지 싶어서 전화해봤어. 내가 하필이면 그 시간에 걔랑 거기 있어서…….]
“……됐어.”
하경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한결에게 미안하다는 말까지 들으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유현이가 사과는 했어?]
“했어.”
[그 자식이 원래 그렇게 생각 없는 놈이 아닌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한번 실수했다 생각하고 봐줘.]
“알았으니까 그만 끊어. 잘 거야.”
[그래. 얼른 자, 누나. 내일 봐.]
“…….”
하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야 했다. 한결과 통화를 하고 나니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그런데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세 번째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승조였다.
“하아…….”
그녀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건만, 오늘은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하경의 손가락은 어느새 통화 버튼에 닿아 있었다. 급한 일일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네.”
[하경아.]
하경은 제 이름을 듣자마자 회사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 선배.”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어. 잠깐 통화 괜찮아?]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되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런 일이 워낙 드물어서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놓을 수는 없었다.
“괜찮아요.”
[너 요새 무슨 일 있지?]
“…….”
하경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사실, 눈치 빠른 그가 제 복잡한 감정을 알게 되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아도 모른 척해주기를 바랐다. 제 입으로 인생 최대의 혼란기를 맞은 것 같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혹시 결혼 결심을 후회하고 있는 거야?]
핀트가 살짝 어긋나긴 했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경은 제 선택이 후회스러웠다. 매일매일 후회가 더 커졌다.
“맞아요. 후회해요.”
민건과 결혼하겠다는 마음을 먹기 전에 유현을 먼저 만났더라면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거라면 아직 안 늦었어.]
“정말 안 늦었을까…….”
그는 고작해야 메리지 블루 정도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후회의 원인이 뭔지 짐작도 하지 못할 그의 말이 큰 위로가 됐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자기 합리화를 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주하경답지 않게 뭘 망설여. 네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닌 거야.]
그런 확신이 든다면 이렇게 망설이고 있지도 않았을 거였다. 하경은 자신이 이렇게 우유부단한 인간이었나 회의가 들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일시적일지도 모를 감정에 취해서 성급하게 행동할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누굴 원망할 수도 없어서 더 괴로웠다.
“선배, 나 자려던 참이었어요.”
한결 못지않게 승조와의 통화도 불편했다. 두 사람을 기만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어느 날 갑자기 제 입으로 말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은 아니었다.
[그래. 쉬어.]
전화를 끊은 하경은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오늘은 더 이상 누구의 전화도 받고 싶지 않았다.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는 그녀의 얼굴에 피로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참으로 길고 고단한 하루였다. *** 자정을 막 넘긴 시각. 하경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을 무렵, 유현은 민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조로운 통화 연결음이 듣기 싫어질 때쯤 혀 꼬부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휴대 전화 너머로 술 냄새가 풍겨 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형한테 전화가 안 와서 내가 했어.”
[내 전화를 기다렸다고? 왜?]
“내일 몇 시에,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 나한테도 알려줘야 할 거 아냐. 아버지가 그러시던데. 형이 알려줄 거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었다. 자정을 넘기고서야 형이 자신에게 상견례 시간과 장소를 알려줄 생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예상했던 일이었다.
[꿈 깨, 이 새끼야. 너한테 알려줄 생각 없어.]
“눈 가리고 아웅 한다고 뭐가 달라져? 내가 그 자리에만 안 가면 아무 문제 없이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손유현! 제발 좀!]
절규와도 같은 고함이 휴대 전화를 뚫고 나올 듯했다. 유현의 목소리는 반대로 더 낮아졌다.
“상견례, 안 하겠다고 해.”
[닥쳐. 말 같지도 않은 말, 그만해.]
“형이 안 하면 내가 하고.”
하경에게 내일도 푹 쉬라고 한 건 염두에 둔 바가 있어서였다. 통화를 하던 중 문득, 피해자인 그녀에게 총대를 메게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이 수습하는 게 마땅했다.
[아버지한테 일러바치겠다고 협박하는 거냐, 지금?]
“협박이든, 경고든, 알아서 생각해. 부탁이라는 착각만 하지 말고.”
[내 약점 하나 잡고 신났냐?]
유현은 피해자인 척하는 형이 역겨웠다. 이런 걸 두고 적반하장이라고 하는 건가. 애틋한 우애는 없었어도, 나쁜 감정도 없었던 친형의 민낯을 본 게 신난다면 이상한 일일 거였다.
“억울하면 벗어나. 기회를 줄게.”
[기회?]
“형 입으로 다 밝히고 나면 약점이 사라지는 거잖아. 그럼 말 같지도 않은 말, 듣고 있을 필요도 없고.”
유현은 알고 있었다. 형은 아버지에게 해림과의 사이를 털어놓을 용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본인 입으로 모든 것을 밝힐 기회는 지났다는 것도. 할 마음이 있었다면, 하경과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했어야 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벌인 건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하경이랑 결혼해.]
“어떻게든 결혼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이제 그만 정신 차려. 오기도 상황 봐 가면서 부려야지.”
[네가 뭐라고 하든, 난 절대 상견례 취소 안 해.]
유현은 더 이상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맨정신일 때도 말이 통하지 않았는데 술까지 취한 지금 말이 통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 그럼. 말리지 않을게.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해.”
그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대신 이거 하나만 알아둬.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는 거.”
[…….]
유현은 침묵 속에서 전화를 끊었다. 이제 형이 어떻게 나올지 두고 보면 될 일이었다. *** 하경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단 1분도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결심을 굳혔다. 상견례를 미루기로. 아직 민건과의 결혼을 엎을 확신과 용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꺼림칙한 마음으로 상견례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유현을 선택하게 된다면 후회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기로 했다. 상체를 일으켜 앉은 그녀는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이상 조금이라도 빨리 아버지에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어젯밤에 꺼 두었던 휴대 전화의 전원이 켜지는 동안 벽시계를 돌아보니, 시곗바늘이 8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서호 회장님의 기상 시간은 아침 6시. 주말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아는 하경은 망설임 없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 번 가고 곧장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그래.]
“저예요.”
[안 그래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다.]
“왜요?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좀 전에 손 의원한테 전화가 왔었다.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를 했나 했더니…….]
“…….”
하경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직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은 기분.
[상견례를 일주일 미루자는구나.]
그리고 막연한 예감이 현실이 되었다.